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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선물근심걱정이 늘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었다.
로라 오트버그 터너  |  Laura Ortberg Tu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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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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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TATION]
 

의 첫 기억은 두려움의 기억이다. 네댓 살 때였다. 혼자 잠자리에 들면서 뭔가 분명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혔다. 누운 채 엄마가 벽에 그려놓은 핑크색 리본만 쳐다보았다. 배가 뒤틀리는 듯 아팠다. 앞으로 내 삶이 평탄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내 몸으로 드러난 것이다. 내 인생을 참으로 오랫동안 따라다닌 두려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감정은 충직한 종을 만들기도 하지만, 끔찍한 주인을 만들기도 한다.” 달라스 윌라드의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마14:27)는 예수님의 명령과 통하는 면이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훈계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명령이다. 이 말씀은 마치 깔끔한 삼단논법처럼 우리를 곧잘 설득한다: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니 그것은 결론이 난 문제다.

이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범불안장애 덕분에) 두려움이 근심걱정의 형태로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닌다. 미래에 대한 끈덕지고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내가 들은 근심걱정에 대한 최고의 정의인데, 바로 이와 같은 두려움이 날마다 나를 따라다니면서 복통을 일으키거나 목구멍에서 앓는 소리가 올라오게 한다. 이러한 증상을 즉각 없앨 방법이 내겐 없다. 다만 “저와 함께하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은 이미 나와 함께하시고, 함께해달라고 해야 할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렇듯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두려움을 느끼지만, 두려움이야말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두려움 자체는 내가 원하는 선물이 아니다. 두려움은 내 생리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뿐더러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나는 더 많이 당황하고 무기력해지며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크신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손가락 한 번 튕겨서 간단히 없애버릴 수 있는 근심걱정이라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근심걱정이 원치 않은 손님이듯이, 나도 그들처럼 미래를 두려워한다. “일이 다 잘 될까?”와 “안 되면 어떻게 하지?”는 내 머릿속의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거울에 비쳐진 것처럼 드러난 의심들이다. 그 잡다한 생각들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비행기 기체가 흔들리는 것은 단순히 하강기류 때문이 아닐 거야. 대참사의 전조현상일 수도 있어.’ ‘내가 작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운이야. 그런데 막상 내가 별 볼일 없는 작가라는 것이 드러나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

나는 이따금 두려움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너도 그래? 나만 그런 줄 알았지.” 설거지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싱크대 모습을 블로그에 올리기만 해도 연민을 자아내는 시대에는 이 말 하나만으로도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하나님과 관련 있는 자신들의 두려움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분들이 시시때때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두려움을 솔직히 말씀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한 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을 두려워하셨다. 말하자면, 이 세상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고 무신론자들이 하는 말이 모두 옳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또 한 분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두려움이었다. 두 가지 모두 납득이 되었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마치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 교향곡처럼 내게도 여운을 남겼다. 어린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원했던 것은 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고 의심하더라도 안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나와 함께한다는 믿음이었다.

내 두려움은 하나님의 존재나 선하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시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나는 성경 말씀을 읽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더욱 저항했다. 나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그분이 나의 일상적인 계획들이나 안녕보다 시리아 전쟁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더 염려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그런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타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고 응답하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은 적이 결코 없다. 하지만 예수님조차도 성부 하나님의 부재의 느낌을 아셨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없을 때일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며, 내 감정이 언제나 실제를 가장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지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문 보기: 두려움이라는 선물]

로라 오트버그 터너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작가이다.

Laura Ortberg Turner, Nathan Barczi, “The gift Fear!” CT 2016:7/8;CTK 2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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