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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설교자는 정치 장사꾼이 아니다정치 열기가 충만한 시대에 복음 설교하기
A. J. 스보보다  |  A. J. Swob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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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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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성도의 40퍼센트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또 다른 40퍼센트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나머지 20퍼센트는 어느 당도 지지하지 않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상당히 정치성 강한 (그리고 정치의식이 충만한) 공동체다. 이러니 설교를 준비하는 나로서는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짐작컨대, 민주당을 지지하는 성도들은 내가 사회-생태적 퇴보, 인종차별, 부부의 동등성 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더 많이 설교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지만 다른 절반은 회개, 성적 순결, 건강한 기도생활 같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더 많이 다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간단히 말해서, 다들 저마다 바라는 것이 다르다. 이게 모든 설교자들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중대한 질문 하나를 던져 보아야 한다: 정치적인 열기가 충만한 교회에서 어떻게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복음은 정치적이다

복음은 정치적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실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려고 옛 하늘과 옛 땅으로 내려오셨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옛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고후5:17) 이 새로운 “은혜의 경륜”은 신속하고 즉각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3:2) 이 나라는 멀리 있지 않다. 오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사변적인 나라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바울은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이라 불렀다(고전15:45). 창조 이야기에 죽음을 초래한 첫 번째 아담의 나라를 폐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첫 번째 아담의 이 완전한 “흑암의 나라”를 폐하시고, 사람들을 새로운 나라로 “옮기신다.”(골1:13). 예수님은 이렇게 하실 때,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죽음의 서사는 이것이 시작된 바로 그것―나무―에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 들어있는 정치적 뉘앙스는 결코 미미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은 창조세계를 다시 위대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설교단이 믿음의 삶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역할을 잘 알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전하는 말이 이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가 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항상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설교단에서 우리는 흑암이 가득한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빌2:16)

우리가 설교자로서의 임무를 악용하여 “생명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우리의 입장, 억측, 추측―을 전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정치 에너지가 넘쳐나는 우리 문화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신학자 레너드 스윗은 설교: 그리스도의 피를 교회에 수혈하기Giving Blood에서 설교자가 범할 수 있는 최악의 것들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지적한다. “성도들이 [설교자의] 정치에 의해, 사적인 계획들에 의해, 개인적인 기호에 의해, 사사로운 복수심에 의해, 예배를 강탈당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성경 본문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치적 결론을 내놓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나 심지어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설교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정치학에 관하여 설교할 수 있을까?

 

‘예수는 주이시다’: 정치적인 설교를 안 하면 안 될까?

설교 서클들 안에서 종종 이런 질문이 나온다. 정치를 설교해야 하는가?

“예수는 주이시다.”(고전12:3) 초대 교회는 이렇게 고백했다. 대중의 주군Lordship 관념이 ‘카이사르가 주이시다’라는 말에 함께 향했던 대상이 로마 황제였던 그 시대에, 초대 교회의 “예수는 주이시다”라는 고백은 당연히 정치적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정치적이다. 선지서—특별히 하나를 꼽는다면, 이사야서—를 읽을 때면 언제나 우리는 거기서 정치적 뉘앙스를 인지하게 된다. 이사야는 예수의 통치를 대담하게 내다본다.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사9:12)

정치를 설교해야 할까? “예수는 주이시다”라고 말하면서, 복음은 정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대놓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모든 복음 설교가 정치적이다. 복음 설교는 세상의 주와는 다른 주를 제시한다. 복음 설교는 세상의 정치를 대체하는 정치를 설교한다. 복음 설교는 새로운 나라를 선포한다. 마이클 그린이 초대 교회의 복음전도에서 지적했듯이, 초기 기독교가 멸시를 받은 까닭은 그들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러했기 때문이다.

그린은 우리에게 로마 세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 종교(“religio”)에 예배하게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국가종교 숭배 의무를 지키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사적으로 원하는 미신(“superstitio”)을 가질 수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사적인 미신들은 그것들을 자신에게 한정하고 로마의 평화를 깨트리지 않기만 하면 무엇이든 허용되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의 잔재는 지금도 여전히 서구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면, 교회는 비영리 단체이다. 비영리 단체인 교회가 영리를 취하고 강단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불법이다. 기독교계 일각에서 “강단 자유 주일” 캠페인을 벌이면서 이러한 사고방식에 맞서 싸우고 있는데, 이것 역시 로마시대의 종교-미신 관념의 잔재로 파악해야 한다. 로마식 시대정신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진리인 것은 당신에게는 진리일 것이다. 다만 그것을 당신에게 한정하고 정치적인 문제들에는 끌어들이지 말라.”

문제는 복음에 대한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정치 이해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화적 위선이 가해진다: 누구든지 정치를 할 수 있고, 이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단, 그 정치 행위가 그 사람의 신앙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친구인 설교자 스탠리 존스에게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의 신앙을 선언하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단지 당신의 신앙대로 사십시오. 장미처럼 되십시오. 장미는 말없이 조용히 향기를 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존스는 그 시대에 매우 적절하고 중요한 반응을 보였다. 존스는 간디 자신이야말로 영국의 통치로부터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가장 잘 선전하는 사람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존스는 간디에게 물었다. “당신이 정치를 설교하는 것은 괜찮고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인 대화의 장에서 환대 받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예수를 특정한 정파와 등치시켜왔다. 당신이 해야 할 가장 어려운 설교에서 브라이언 채플은 거의 10년 가까이 “정치적 우파의 목소리가 빈번하게 복음주의적 우선순위들에 뒤섞이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확신과 정치적 의제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개탄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신앙은 집 안에 두고 나오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초가 빛을 두고 나올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두고 나올 수 없다. 교회는 “소금”과 “빛”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신앙과 복음은 정치의 세계에서도 축복이 되어야 한다. 저 유명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가 선포하듯이, “영혼이 몸 안에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은 세상을 통치하려 해서는 안 된다. 틀림없이, 예수님은 세상이 “통치”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을 거부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기 위해” 왔지만, 그는 그들을 떠나 고독한 기도의 자리에 들어가셨다고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들려준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셨다. 왜? 이미 왕이신 자신을 그들이 억지로 왕으로 삼는다고 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셨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자신에게 하실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이 하겠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얄팍하고 선택적이고 거룩하지 않은 정파 이념을 갖고서 설교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그런 이념은 예수님의 일부를 입맛에 맞게 멋대로 선택한다. 예수님의 정치와 우리의 정파 이념은, 의심의 여지없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다. 바로 이것이 쉬아르Shuhard 추기경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의미했던 바라고 나는 생각한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선언에 참여하는 것과도, 누군가를 선동하는 것과도 일치할 수 없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살아있는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떤 생명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세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증인은 선전을 하지 않는다. 증인은 진리를 증언한다. 그리고 우리의 이념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소망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성의 자리에 앉으려는 목적으로 출마하는 것을 거부하는 제3당의 후보이다. 그는 기꺼이 왕좌에서 사망과 지옥의 무덤으로 떨어지고, 예비경선을 치르고,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왕좌에 오르는 길을 선택하신 영원한 현역이시다. 그의 나라는 우리의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걱정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정치를 설교한다는 것

첫머리에서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나의 목표—예수님의 목표와 닮았다고 내가 확신하는 그런 목표—는 열심당원 시몬과 나란히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배운 세리 마태를 우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슈하드의 말처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교회 문화를 만드는 데 근접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서로 다른 정치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서로 사랑하고 더불어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교회일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와 같은 교회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우리 교회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 가운데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설교의 일차 임무는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회심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도모하는 계획들로 회심시키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 가지 회심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슴의 회심, 머리의 회심, 그리고 지갑이 회심. 우리의 정치는 회심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은 회심시키고, 그러면 우리가 투표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심은 어느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의 회심을 자동적으로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 없고 허무맹랑한 이단설이다. 교회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치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먼지투성이 방랑자들The Dusty Ones: Why Wandering Deepens Your Faith에 이렇게 썼다:

설교자로서 나의 콘텐츠는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설교자는 여론을 퍼뜨리는 행상인이 아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이라는 팩트를 나르는 것이다. 설교자는 어떤 입장이나 날카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전달하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일체의 입장을 못 박는 것이다. 설교자의 지고의 소명은 이런 저런 교리적 입장을, 이런 저런 교단을, 종말에 대한 이런 저런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든지 아니면 다른 무엇에 세워진다는 것을 엄중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중간 지대는 없다.

둘째, 설교자가 무엇인가를 지지하고 무엇인가를 반대해야 할 때가 있다. 설교자는 다양한 때에 다양한 설교를 한다. 회중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겨야 할 때를 위한 목양 설교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설교해야 할 때가 있다. 선지자적 설교를 해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이 깊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무엇인가의 편에 서서 그것을 지지해야 할 때가 있다.

눈앞에 나치 제국을 두고서 사역했던 디트리히 본회퍼를 보자. 나치 비밀경찰에 맞서야 한다는 그의 마음을 읽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설교가 정치적인 일을 수행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독일을 위해 늦기 전에 정치적인 책무를 위해 일어서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는 “값비싼 은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두려운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또는 엄중한 상황에 두고서 주장하지 않은 채. 우리는 온 나라에 세례를 베풀고, 신앙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선언했다. 우리는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은혜를 퍼주었다.”

본회퍼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무엇일까? 그는 결코 어려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우리는 만사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현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설교가 시대의 어둠에 맞서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설교자로서 우리의 역할일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우리의 설교는 항상 중앙 통로의 양편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성 바실리우스의 법칙이 여기서 교훈이 된다. 초대 교회의 설교 천재였던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허세를 부리거나 무엇인가를 파는 사람처럼 말씀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청중에게 아부하고 우리 자신의 즐거움이나 필요를 만족시키려고 교훈의 말씀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사꾼. 장사꾼은 이윤을 위해서 무엇이든 팔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이든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이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고후2:17) 바울이 말한 바로 그 “장사꾼”이다. 설교자인 우리 안에 이런 장사꾼의 이미지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예수님의 장사꾼일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그의 말씀과 그의 생각과 그의 가르침을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현실이 이러니 이 정치의 시대에 우리의 증언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설교단에서 나오는 모든 정치적인 말이 예수의 정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치를 주장하기 위한 기회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나와 정치적 입장이 일치하는 사람들만 있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교회임을 멈추고 나의 종교집단이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중심에 두고 정치적 다양성을 포용한다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론을 반영한다. 그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다양한 정치적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나는 확신한다. CT

A. J. 스보보다 오리건 주 토트랜드 데오필루스 교회의 목사이며, 조지 폭스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수이고, 혼돈: 하나님의 좋아하시는 방식Messy: God Likes It That Way의 저자이다.

A. J. Swoboda, “God's Huckster: Preaching Jesus in a politically-charged climate” PreachingToday; CTK 2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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