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이슈 & 특집
‘먼저 은혜’인가 ‘오직 은혜’인가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현재 동의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갈라놓은 것
로버트 배론, 로저 E. 올슨  |  C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4.25  
트위터 페이스북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로버트 배론 주교
가톨릭의 관점

 

나는 오래 전부터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신부가 한 말에 공감하고 있다. 그는 종교개혁 분열의 양 진영에 있는 인물들이 머리와 가슴을 조금만 더 열었더라면, 오늘날 가톨릭교회 안에 루터교단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미니크, 프란치스코, 베네딕투스,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처음에 속해 있는 바로 그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이 가톨릭 교단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콩가르에게는 일부 종교개혁자들이 취한 행동에는 옳고도 중요한 것이 있었고, 그들을 가톨릭교회 안에 통합했다면 유익이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콩가르의 생각에는 다른 면도 있는데, 슬프게도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들도 있었다. 과장, 과잉반응, 동기에 대한 의심과 비난, 미숙한 조치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 결과로 교회 내부의 개혁이 교회의 분열로 악화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여기에서 콩가르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개혁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많은 주제들―그리스도 수위권, 열정적 복음화의 필요성, 교회의 생활에서 성경의 중심적 위치,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 모두 사용, 모든 신자의 제사장 됨―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이 공의회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통합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표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모두 이 점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은혜의 우선성

동시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갈라놓은 본질적인 쟁점들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마땅히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신학적 행보를 따랐던 사람들의 가장 의미 있는 한 가지 공로는 은혜의 우선성the primacy of grace에 대한 강조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한다는 강조는 성경적 증언에, 그리고 기독교적 영적 전통에 절대적인 핵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웅적인 영적 공로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은 에서보다 명백하게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결국 그는 주님의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결국 약속을 받은 자가 되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가장 준수하지도 않았고 재능이 가장 탁월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에게 “주님의 영이 강하게 임했다”(삼상 16:13). 주님은 시몬의 허락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가 가장 능숙한 어부였다고 평가하지도 않으셨다. 주님은 이 남자의 배에 가셔서 명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은혜의 우선성을 매우 직설적으로 요약하신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요15:16)

이 원칙을 잊을 때 영적인 질서에 무수한 문제가 따른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곧 자력구원의 오류이다. 우리가 영웅적인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의 대상으로 바꾸고, 구원자의 필요성을 제거한다.

16세기 초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루터는 교회의 생활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보았으며, 그래서 그는 진정한 선지자적 열정으로 은혜의 편에서 외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벌써 오래전에 펠라기우스에 직접 맞섰던 자신의 영적 아버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소리를 다시 울렸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오늘날처럼 급진적으로 세속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런 때에는 특히 그렇다. 기독교 세계 전체는 이를 증언한 마르틴 루터에게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라티아 프리마’gratia prima(먼저 은혜grace first)를 말하는 것에 자신을 제한했더라면, 루터는 가톨릭주의 내부에서 꼭 필요했던 개혁을 이루어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라티아 솔라’gratia sola(은혜만으로grace alone)를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전문 보기: ‘먼저 은혜’인가  ‘오직 은혜’인가]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68길 98 5층  |  대표전화 : 080-586-7726  |  팩스 : 02-6919-1095
발행인 : 오정현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은홍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홍  |  사업자등록번호 : 214-88-27116  |  통신판매업신고 : 제01-2602호
Copyright © 2017 Christianity Today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