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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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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부터 100호까지, 100개의 글에서 100개의 구절을 가려 뽑았습니다.

때로는 통찰로, 때로는 위트로, 때로는 풍자로…,

우리의 영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지성을 벼리고, 우리의 감성을 울리는 보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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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리처드 마우, 관대한 복음, 2008:6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를 길러야 할 의무는 다른 종교 생활 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긴급하게 요청되는 점이다.(38)…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관대함은 우리의 구세주를 갈릴리에 보내신 놀라운 은혜 속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39)

 

002 팀 스태포드, 사마리아에서 살아가기, 2008:7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바벨론이라는 생각은 왠지 석연치 않다.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바벨론이 아닌 사마리아이다.…바벨론은 기독교를 잘 알지 못하는 지역이다. 우리가 바벨론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이상, 바벨론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예배드리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국가의 근간을 흔들었다고 고발당하거나, 정치 싸움에 휘말렸을 때나 주목을 받는 정도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바벨론과 다른 곳이다.(19)…이곳은 당신을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믿는 바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의심부터 하는 그런 곳이다. 당신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동네에 들어서는 것조차 싫어하는 곳이며, 당신이 사회를 지배하려 든다고 미리부터 오해하는 곳이다. 이들이 말하는 관용 사회란, 당신 자신을, 그리고 당신의 생각을 꽉 붙들어 매고 억눌러야 하는 곳이다. 한때 그리스도인의 발자취로 아름다웠던 관용 사회가 이제는 그리스도인을 향해 적대감을 품은 곳으로 변했다.…사마리아에 살면서 대화의 기술보다 더 필요한 것은 오랜 인내와 사랑이다. 분명한 것은 직접적인 반격으로는 어느 누구도 오랜 적대감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적대감을 극복하고 새로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신선한 기회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적개심으로 무장한 다른 편에 서 있는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22)

 

003 필립 얀시, 영성 건강 검진: 50년 신앙생활을 종합검진해 보고 깨달은 것, 2008.8

쉰이 된 올해 나는 건강 종합 검진을 받았다.…내친감에 나는 신앙과 영성 건강 검진까지 일정을 잡았다.…며칠 동안 홀로 묵상하며 지내면서 나는 영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고쳐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수록 목록은 점점 늘어났다.(14)…나의 영적 검진은, 병원의 신체 검진보다 분명 나은 점이 하나 있다. 의사들에게서는 내가 건강을 위해 무엇을 한들, 노화를 멈출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허나 영적인 건강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늘 새로워지며 더 건강해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실천해 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15)

 

004 알리스터 맥그래스, 황혼에 접어든 무신론, 2008:9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을 무신론으로 몰고 가는 요인은, 무엇보다도, 제도화된 종교의 방종과 실패에 반발하는 태도다.(58)…역설적이게도, 무신론의 장래는 그 종교적 경쟁자들 손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바라듯이 무신론이 다시금 강한 매력을 발하려면,…가혹하고, 복수심에 불타고, 아무 생각이 없는 종교가 발흥할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59)

 

005 유진 피터슨, 영적 건강을 위한 마가복음 처방, 2008:10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영성”이라는 것에 끌리고 있다.(19)…오늘날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모른 채 자신들의 온갖 잡다한 경험들로부터 만들어 낸 “영성들”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이다.(20)…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대상, 즉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21)

 

006 벤 패터슨, 기도 학교, 시편: 기도를 배우는 것은 거장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2008:11

훌륭한 기도서인 시편이 노래이기도 한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시편은 기도의 악보이다 오선지요, 대본이며, 영원한 음악의 기초다.(21)…당신이 시편을 읽으면, 시편도 당신을 읽는다. 시편을 기도하면, 시편이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다.(23)

 

007 롭 몰, 스크루지는 살아있다: 헌금을 더 많이 하지 못하는 이유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2008:12

헌금은 할리우드식 낭만과 비슷해야 한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다. 즉흥적이고 흥분되고 화끈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태도가 우리의 봉급 대신에 지갑에서 헌금하도록 바꾸어놓는다. 헌금함이 지나갈 때, 우리는 지갑이나 주머니를 뒤져보고, 거기서 찾은 것을 자유롭고 기쁘게 헌금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소득 중 대부분에 임자가 생긴다.(60)

 

008 마크 뷰캐넌, 예수께서 우셨다: 이 두 단어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슬픔과 분노2009:1

“예수께서 우셨다.”(요11:35)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성경에서 이 부분만큼 많은 신학이 확실하게 녹아 있는 구절도 없다. 이토록 풍부한 의미를 경제적으로 표현해 낸 곳도 드물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그 온전한 성육신이 주어 하나와 동사 하나로 집약되어 있다.(45)

 

009 [인터뷰] 유진 피터슨, 귀 있는 자여, 들리지 않는가? 연구에 머물지 말고 들어야 할 말씀, 2009:2

내 생각에 목회자들은 가장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말하고, 가르치고, 답을 주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 있습니다. 가만히 있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멈추고, 돌아가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듣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84)

 

010 티모시 모건, 사이버 순례자의 길: 사이버스페이스 기술은 종교도 구세주도 해방자도 아니다, 2009:3

인터넷 세계에 침투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약탈적인 과학기술 자본주의자들 못지않게 사이버스페이스를 쓰레기장으로 만들 수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전도를 배가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역 수단을 확장하려는 열망 때문에 과학기술을 활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성경적인 현실, 곧 하나님은 모니터나 키보드나 CUP가 아닌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우리와 소통하신다는 현실을 거역해서는 안 될 것이다.(37)

 

011 리처드 포스터, 영성 형성을 위한 우선 과제, 2009:4

나는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다. 고난을 불러올 만한 많은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욱 커져갈 기독교에 대한 문화 전반의 적대감도 그 중 하나다. 그 적대감에 놀랄 필요도, 아니 그 적대감을 해소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난이 와도 흩어지지 않도록 바위처럼 견고한 공동체 생활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닥쳐오든 함께 서서 함께 기도하며 또 함께 고난 받아야 한다. 우리가 함께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새로이 모으시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59)

 

012 테드 올슨, 예수님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여행에서 얻는 놀라운 영혼의 선물, 2009:5

죄의 심판을 덜어보자는 두려움에서 순례를 떠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순례에 대한 영적 교만의 유혹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때이기도 하다. 순례를 한 것으로 번지르르한 영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28)

 

013 필립 얀시, 겸손의 다양한 모습, 2009:6

아인슈타인의 방에는 평생 두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바로 과학자 뉴튼과 맥스웰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생의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그 초상화를 떼어내고, 알버트 슈바이처와 간디의 초상화를 걸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성공이 아닌, 겸손한 섬김의 역할 모델이 필요했었다고 말했다.(21)

 

014 루이스 스미디스, 과거를 바꾸는 용서의 힘, 2009:7

용서란 포로를 풀어 주고 보니, 그 포로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71)

 

015 마크 뷰캐넌, 다니엘처럼, 2009:8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시기한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으스대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솔직하지 못하다. 요나가 보기에, 하나님은 너무 엄하시고 너무 관대하시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는 엄하시고, 원수에게는 관대하시다. 요나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이 편애가 심하신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태도를 취하는 교회들의 숨은 동기기 아닌가 싶다.(51)

 

016 [인터뷰] 강영안, “온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함께 읽으면 더 좋습니다” 2009:9

말씀을 씹고 중얼대면 그것이 어디로 갈까요? 머리에 박히고, 머리에 박히면 마음에 새겨지고, 마음에 새겨지면 손발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됩니다.(38)

 

017 티모시 조지, 존 칼빈, 그의 귀환: 500년 전의 종교개혁자가 새롭게 주목받는 까닭은, 2009:10

칼빈은 보통 지성주의자이며 신학적 이성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의 신학에는 신비가 가득하다. 칼빈은 루터 이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최대의 역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함께/그리고’의 신학자였지, ‘어느 한쪽/또는’의 신학자가 아니었다.(35)

 

018 아그니에슈카 테넌트,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사실까: 캐시미어 스웨터로 세상 구하기, 2009:11

우리가 하는 일이 전부 다 불의로 더렵혀졌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의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희미한 아픔에 주의를 기울이고, 무엇을 사는 데 있어 최소한 이따금씩이라도 우리를 거만한 속물로 만들어버리게 되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33)

 

019 타일러 위그-스티븐슨, 예수님은 브랜드가 아니다, 2009:12

종교에서도 소비자들은 교회를 브랜드 대하듯 자아도취적 태도로 대한다. 예수라는 브랜드를 구입하면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 기독교는 내 비전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까?(32)

 

020 제임스 스미스, 칼빈주의자는 춤추면 안 되나: 오순절 예배에서 물 만난 나의 개혁주의 신학, 2010:1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개혁주의의 확신을 진지하게 취하고자 한다면, 베드로처럼 성령님이 주시는 충격에 담대히 열릴 수 있어야 한다. 때로 오순절의 광기처럼 보일 수 있는 것에 즉시 겁을 내면서 뒤로 물러나기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58)

 

021 레슬리 레이랜드 필즈, 완벽한 부모라는 신화: 최고의 양육 방법으로도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키우지 못하는 이유, 2010:2

우리는 자녀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 그리하실 수 있다. 자녀는 지지대를 세워줘야 할 토마토도 아니고, 길들여야 할 노새도 아니며, 방정식으로 풀어낼 숫자도 아니다. 그들은 경이롭고 신비하게 지어진 인간일 뿐이다.(29)

 

022 마크 챈,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변혁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2010:3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찬 상대주의자들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어려움과 걱정거리에 시달린다. 세계적인 경기침체나 파괴적인 지진은 상대주의자와 배타주의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상대주의자들이 생명의 위기를 겪을 때, 진리에 대한 논쟁은 좀처럼 그들을 이끌어 들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거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실제적인 돌봄과 관심이다. 우리는 차가운 상대주의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추위에 떨고 있는 상대주의자에게 담요를 덮어줄 수는 있다.(36)

 

023 마크 갤리, 왼손의 하나님, 2010:4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무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말구유에 누이셨다.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기적을 행하는 것도 거부하셨다.…예수님은 다른 뺨을 대고 오히려 더 섬기라고 가르치셨다. 이런 모습만 보면 전능함보다 무력함이 먼저 떠오른다. 하나님은 무능한 왼손잡이가 아니실까?(28)

 

024 조엘 반다이크, 크리스 로크, 낯선 땅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질문: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교회는 깨어날 수 있다, 2010:5

‘변혁 선교 센터’(CTM)라는 이름으로 남미 전역의 여섯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장 사역자들은…섬기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거나 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들은 하찮고 열등하고 잊혀진 사람들이라는 잘못된 꼬리표를 달고 사는 이들이다. 함께 읽는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이유는 은혜가 물과 같다는 믿음에서다. 은혜는 아래로 흘러가며 가장 낮은 곳부터 채운다. 극도로 가난하고 폭력이 넘치는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있다.(67)

 

025 CT 논설 ‘지금 우리는’, 쏘지 마라, 하나님의 사자일 수도 있다, 2010:6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 앞에서도, 그녀의 드레스가 더럽고 해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고전 13:6) 것이다. 비록 그 진리가 조롱과 무지 속에 파묻혀 당장은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이것이 종말론적 관점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감추고자 했던 더러움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 또한 그녀를 부당하게 진흙탕 속에서 끌고 다녔던 자들을 심판하실 날을 기다리는 삶 말이다.(70)

 

026 존 오트버그, 당신만을 위한 계획, 2010:7

모든 환자에게 일괄적으로 “아스피린 두 알씩 드세요”라고 처방하는 병원이 있다면 어떨까?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부모는 또 어떤가? ‘모든 자녀들을 다 똑같이 대해야지. 똑같이 보상하면 모든 아이가 똑같이 동기를 부여받고, 같은 벌을 내리면 모두가 다 똑같은 영향을 받을 거야. 그리고 어떤 놀이도 다 똑같은 정도로 좋아할 거야.’ 누군가를 정말로 잘 키우려면 그 사람의 특성에 맞는 방식으로 도와야 한다.(58)…하나님은 결코 두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성장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은 대량생산업자가 아닌 수공업자다.(59)

 

027 크리스토퍼 라이트, 뒤집어진 세상: 본국과 선교지를 따로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2010:8

진정한 선교적 경계선은 ‘기독교 국가들’과 ‘선교지’ 사이가 아니라, 신앙과 불신 사이의 경계선이며, 그러한 경계선은 모든 나라와 실로 모든 지역의 거리 곳곳에 퍼져 있다.(65)

 

028 러셀 D. 무어, ‘아바’ 하고 외쳤을 때 모든 것이 바뀌다, 2010:9

내가 들어본 가장 처절했던 소리는 바로 침묵의 소리였다. 아내 마리아와 나는 구 소비에트 연방 어느 지역에 있는 고아원 복도에 서 있었다. 입양을 위해 두 차례 그곳을 방문했는데, 첫 방문 때 있었던 일이다. 고아원 직원은 우리 부부가 관심을 보인 한 살배기 사내아이 둘을 보여주려고 복도로 안내했다. 우리는 이따금 구역질과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정말 끔찍했던 것은 불결함이나 역겨운 냄새가 아니라 쥐죽은 듯한 고요함이었다. 어찌나 고요하던지 한밤중의 영안실보다 더했다.

나는 멈춰 서면서 마리아의 팔꿈치를 당겼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아기들이 가득한 곳인데 말이야.” 아내와 나는 늘 소란스럽고 이따금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우리 교회 유아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귀를 쫑긋하고 자세히 들어보면 아기들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 아기 침대가 벽에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아기들은 울지를 않았다. 먹을 것을 달라고, 얼러달라고, 사랑해달라고 울어봤자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듯했다. 그들에게 반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울음을 멈춘 것이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두 아기가 있는 방에 들어설 때도 그 침묵은 계속되었다. 작은 아기 세르게이(지금은 디모데)가 우리를 보고 미소 짓더니 침대 난간을 붙잡고 춤을 추듯 일어났다 앉았다 했다. 맥심(지금은 벤저민)은 똑바로 선 채 마치 러시아 황제처럼 당당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둘 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아기들이 영어를 못 알아듣겠지만 달님과 달을 뛰어넘는 소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는 잠자리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래도 아기들은 울지도, 떼쓰지도, 낑낑거리지도 않았다. 방을 떠날 때도 들어갈 때와 달라진 것 없이 침묵 속에서 방을 나왔다.

방문 일정 마지막 날 마리아와 나는 입양 소개 서류를 받았던 때부터 줄곧 두려워하던 순간을 맞았다. 두 아기와 작별해야 했다. 법에 따라 일단 미국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다가, 법적 서류절차가 끝나야 아기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아기들을 안고 입맞춤을 한 후 마리아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우리는 이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복도를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맥심이 침대 난간에 기대서서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아마도 맥심은 자기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했다. 자기에게도 이제 아빠와 엄마가 생겼음을 거의 본능적으로 안 것 같았다. 그 아이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 머리칼이 쭈뼛했던 전율을 결코 잊지 못한다. 여름성경학교 때부터 암송해온 성경구절들, 특히 신약성경의 ‘아바’라는 부르짖음이 이렇게 강렬한 것인지 그 아이의 소리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구절에 대한 내 이해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스스로 놀랐다.(17)

 

029 박영신, 소통의 혁명을 일으키다, 2010:10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는 변화를 이끄는 힘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변화되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 말씀만이 변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말씀에 힘입어 우리 역사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소통의 문화를 바꿔버린 것도 그 말씀의 힘이었다.…그리스도인들은 한글 중심의 삶을 모범으로 살아가고자 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한 세기 남짓한 지난 역사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실로 조용한, 그러나 기억해야 할 소통의 혁명이었다.(65)

 

030 존 오트버그, 선지자처럼 설교하기: 하나님의 시선을 가진 이가 불의 앞에서 침묵할 수 있을까, 2010:11

설교를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30)

 

031 팀 켈러, 겸손으로 오시다: 자신에게 몰두하는 태도를 끊어야 하는 이유, 바로 예수 때문이다, 2010:12

낮아짐은 아주 조심스러운 것이다. 낮아짐을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낮아짐은 날아가버린다. “제가 겸손한가요?”라고 묻는 것조차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살피고, 심지어 교만을 경계하는 태도가 종종 ‘나는 부지런하고 신중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한다.

C. S. 루이스가 한 말이 기억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스스로를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군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더 이상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축복받은 자기 망각”이다.(32)

 

032 필립 얀시, 기독교를 오해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2011:1

복음을 처음 듣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와 교회에 다니다가 신앙을 떠난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말하는 내용이 달라야 한다고 루이스는 강조했다. 처녀에게 구애할 때와 이혼녀에게 구애할 때의 방법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처녀는 사탕발림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만 이혼녀는 불신의 앙금을 사라지게 할 정성 어린 애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70)

 

033 미로슬라브 볼프, 교회가 보여준 최악의 역기능, 2011:2

탱크에 올라 탄 한 세르비아인 병사는 자축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손가락 세 개는 성삼위 하나님을 상징했고 자신은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들에게 속했다는 뜻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가 살인기계나 다름없는 탱크에서 승리를 자축하게 된 데에 신앙이 정당성을 부여했다. 피에 굶주린 전쟁론이나 국수주의를 합법적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그 병사 혼자만은 아니다. 그들과 맞서 싸운 크로아티아 병사들도 같은 짓을 했고, 십자가와 애국심을 동일시 여긴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피눈물의 흔적만을 남긴 과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57)

 

034 존 쾨슬러, 하늘에서 시작해 땅으로 이어지는 예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일어나는 일, 2011:3

예배는 개인 행위가 아니다. 천상의 주요한 일이며 모든 피조물의 의무다. 교회의 예배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과 상호간의 불편함이 끝날 그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다소 혼란스럽더라도 우리가 더 큰 교회의 일부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더 큰 교회인 천상에서는 믿음의 조상과 선지자, 천사들이 다함께 천지창조 첫날부터 시작된 합창을 부르고 있으며 그 찬양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초청한다. 찬양의 첫 부분은 하늘 보좌 주변의 이들이 먼저 부른다. 그들의 노래는 흘러넘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 전체에 울려 퍼진다. 이제 남은 일은 그들의 노래에 우리의 목소리를 합하는 것이다.(26)

 

035 양혜원, 현우 이야기: 죽음을 기억할수록 짙어지는 부활의 소망, 2011:4

유산한 아이든 사산한 아이든 같은 교인으로 대우하고 함께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마땅한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아니고서야 낙태 반대 운동은 왜 한단 말인가. ‘뱃속의 아이도 다 같은 생명’이라는 입장은, 낙태를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함께 이런저런 이유로 개월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도 온전한 생명으로 대해줄 때 비로소 일관성을 가진다.(20)

 

036 권택명, 3.11과 3.30 사이: 동일본 대지진과 독도, 2011:5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간애보다 못하다면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19)

 

037 고든 맥도날드, 찌꺼기를 제거하라, 2011:6

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안개가 자욱한 밤에 전함이 항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함교의 감시병이 외쳤다. “우현에 불빛이 보입니다.” 함장은 불빛이 멈춰 있는지 고물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물었다.

“멈춰 있습니다.”

함장은 통신병에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저쪽에 알려라. 충돌 위험이 있다. 항로를 20도 이동하기 바란다.”

잠시 후 회답이 왔다. “그쪽에서 항로를 20도 이동하기 바란다.” 함장은 화가 치밀었다. “전하라. 여기는 전함이다. 그쪽에서 항로를 20도 이동하라.”

회답이 왔다. “여기는 등대다.”

누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

전함은 항로를 변경했다. 전함은 언제나 등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교회도 등대를 마주할 때는 항로를 바꿔야 한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등대다.(36)

 

038 랍 몰, 죽음도 간증이 될 수 있다, 2011:7

오늘날 우리는 갈수록 값비싼 의료기술에 기대어 죽음을 피하려는 문화 속에 산다. [그러나]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미 죽음을 이기셨다. 불필요한 생명 연장술에 기대지 않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는 그리스도인은,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예수를 증언하는 최고의 간증이 될 수 있다.(67)

 

039 [인터뷰] 달라스 윌라드, 제자도가 치유 못할 교회 문제는 없다, 2011:8

[손봉호 교수의 다음 질문에 대한 달라스 윌라드의 답변: 저는 한국 교회 부패 척결에 관심을 갖고 싸우고 있습니다. 저를 보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면서 질타를 해요. 그렇지만 심각한 부패를 보면 참기가 힘듭니다.]

분노를 즐기시는 건 아닙니까?(웃음) 화가 나는 것은 문제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의지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서 해결될 일이라면, 화를 내지 않으면 더 잘 해결할 수 있지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최선을 다하되, 나의 최선이 최고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해요. 그렇게 분노의 짐을 덜면, 상황을 더 잘 보고 더 잘 행동할 수 있습니다. 분노가 죄는 아니지만, 죄를 저지르게 쉽게 만들지요. 분노는 두통 같은 것입니다. 두통이 죄는 아니지만, 불필요한 것 아닙니까? 두통은 무엇인가 잘못 됐음을 알려주는 징후지요. 수면이 부족하거나 신체상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경고해주지만, 바람직한 증상은 아니지요. 분노가 바로 그렇습니다.(37)

 

040 [인터뷰] 유진 피터슨, 목사는 누구인가, 2011:9

회중이 자기 목사를 잘 모르면 그를 단상에 올려놓고 탈인격화하기 쉽습니다. 또한 자기 성도들을 잘 모르는 목사는 성도들을 그저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 십일조를 내는 사람과 내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비인격적 명칭들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대신 사회적 혹은 심리학적 범주로 대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아주 좋지 않은 일 중 하나는 MBTI 검사를 도입해서 사람을 이해하려 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듣고 그들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검사하고 그룹별로 모은 후 성격유형을 보여주는 작은 표를 달고 다니게 합니다.(48)

 

041 토드 T. W. 댈리, 므두셀라 따라잡기: 오래 살려는 수많은 시도들에 얼마나 더 마음을 뺏겨야 할까, 2011:10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수명에 어떤 규칙을 정해놓지는 않으셨다. 또한 순종하는 사람에게 장수를 보장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예수님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사는 동안 무엇을 하는가다.(25)

 

042 존 쾨슬러, 친밀해지고 실망하고…아직은…, 2011:11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보다 큰 사역”이라고 쓰여 있는 교회 간판을 보았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구절을 암시하는 간판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런데 성경구절의 일부라는 사실보다는 그 간판이 너무 낡았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간판이 걸려있는 낡은 건물에 걸맞게 간판의 활자 역시 금이 가고 색이 변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저 교회에게 있어서 ‘더 큰 일’이란 우선 간판부터 새 것으로 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판의 글귀와 낡은 건물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보였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과장된 미사여구와 대다수 사람들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신앙생활의 모순점을 정확히 반영하기 때문이다.(52)

 

043 에이미 줄리아 베커, 완전한 내 아이, 2011:12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함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라 납득하기 힘들다. 예수님은 천국을 큰 결혼잔치에 비유하셨다. 그 잔치에 함께 한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 곤고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함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54)

 

044 CT 논설 ‘지금 우리는’, 학대하지 말지니라, 2012:1

일부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체벌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체벌하려는 부모는 결코 분에 찼을 때 학대하는 방법으로 매를 들어서는 안 된다. 체벌은 훈육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분노에 찬 성인은 아동의 신체가 얼마나 약한지 상상도 못한다.(63)

 

045 노종문, 성령의 열망을 좇아가라: 영성 훈련을 바로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2012:2

신약성경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도구로서의 영성 훈련의 필요성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부분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매우 분명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핵심 방편으로서 복음 선포와 말씀의 능력을 제시한다. 달라스 윌라드의 몸의 훈련에 대한 유익한 통찰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에 제시하신 단순한 방식은 말씀을 직접 듣고 직접 순종하는 것이라는 성경적 사실을 더 진지하게 의식해야 한다. 즉, 영성 훈련이라는 간접적 도구에 감탄한 나머지, 성경이 제시하는 더 단순한 방식을 제쳐두어서는 안 된다.(21)

 

046 에이미 블랙, 미친 선거, 어떻게 처방할 것인가: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는 길, 2012:3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논쟁의 어조를 하룻밤 만에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더 나은 본보기가 될 수는 있다. 당파성을 더욱 부추겨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면서 의견을 달리하고, 보다 예의 바르고 진실한 정치 참여의 모범을 보인다면 정치 영역에 소금과 빛을 선사할 수 있다.(24)

 

047 린다 하르츠 럼프, 기독교는 여성을 억압하는가, 2012:4

기독교가 여성을 억압했는가? 그렇다. 그리스도가 여성을 억압했는가? 아니다.(34)

 

048 CT 논설 ‘지금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사는 ‘괴물들’: 기독교 공동체 내부의 아동성범죄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2012:5

성범죄자를 회복시키는 일은 공동체 생활 속에 그들을 자동 편입시키자는 뜻이 아니다. 분명 그 일은 수감 생활과 심리검사, 집중적인 회복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다. 아동사역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도 거기에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복음에 기초한 공동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성범죄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들의 인생도 마지막 날 예수의 사랑 어린 심판으로 새로워지리라는 소망까지 함께 붙들어야 한다.(63)

 

049 마크 갤리, 낮은 곳의 예수를 높은 데서 찾다, 2012:6

월요일, 빨간불 신호에 멈춰 서서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노숙자 한 사람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적선을 구했다. 습관적으로 나는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무척 불편한 순간이지 않은가? 나는 이미 교회에 헌금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거기 서서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예수에게서 눈을 돌려버린 것이다.(75)

 

050 앤드류 루트, 희미해지는 가족사진, 2012:7

이혼이라는 주제를 용감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혼 가정 자녀들에게 필요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혼 가정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로할 수 있는 곳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교회는 청소년들이 이혼 때문에 헤쳐 나가야 할 존재론적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기를 꺼릴 때가 많다.(83)

 

051 케이트 브루스, 어떻게 해야 목사의 설교가 더 나아질까, 2012:8

설교가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목사들은 설교 준비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 사람들은 설교가 줄 수 있는 것에 깊이 목말라 있다. 목사들은 아무렇게나 대충 만든 샌드위치 하나로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간단한 간식이 아니라 잘 차려낸 정찬이다. 교인들은 목사가 매주 그런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야 한다.(69)

 

052 트레빈 왁스, 하나님의 진노를 기뻐하라: 왜 우리는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가, 2012:9

정말 두려운 신은 성경이 말하는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을 보며 눈을 감고 어깨를 으쓱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무시하는 신이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죄에 대해 전혀 분노하지 않고 아무런 형벌 없이 악을 내버려 두는 신은 경배할 가치가 없다. 심판하지 않는 신은 사랑이 넘치는 신이 아니다. 사랑이 부족한 신이다.(33)

 

053 맥스 루케이도, 숨겨왔던 나의 진상, 2012:10

고백은 철저히 은혜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한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내 죄보다 더 크십니다. 그래서 제 죄를 고백합니다”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작게 여긴다면, 고백도 작을 수밖에 없다. 마지못해, 머뭇거리며, 갖가지 변명과 자격에 얽매여, 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큰 은혜는 정직한 고백을 낳는다.(59)

 

054 켈리 J. 마틴데일, 나도 저지른 잘못,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고 어떻게 말할까?, 2012:11

오랫동안 나는 혼전 성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엄마도 했잖아요. 엄마가 우리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칠 자격이 있나요?”하고 거부할까봐 두려웠다.

내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았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성경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 멀리 옮기셨다”고 내게 말씀하셨다(시10:12). 하나님이 내 죄를 씻어주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죄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내 말의 진실성을 설득할 필요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그런데 엄마는 왜 그래?”라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했던 마음을 일단 극복하고 나자, 나는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잠22:6).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에 대한 특별한 계획을 예비하심을 믿으며, 내 아이들 역시 이를 깨닫길 바란다.(76)

 

055 존 스텍하우스 주니어, 이 (모호한) 정치적 삶: 교회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2:12

까다로운 사안일수록 “순전히 기독교적”인 정책이나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곧장 나온 정책 같은 것은 드물다.(40)

 

056 배리 쿠퍼, 노예로 살 것인가, 2013:1

우리는 ‘결정 보류’라는 우상을 섬긴다. 이 거짓 우상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결정 보류 우상은 우리에게 사람들과 너무 깊은 관계를 맺지 말라고 속삭인다. 그렇게 우리의 인간관계를 끝장내버린다. 결정 보류 우상은 너 자신을 위해 주말을 사용하라고 속삭인다. 그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게 만든다. 결정 보류 우상은 지금은 경제가 불확실하니 언제 돈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속삭인다. 그렇게 나눔을 원천봉쇄한다. 결정 보류 우상은 너무 영적으로 보이지 말라고 속삭인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즐거움을 앗아간다.(44)

 

057 고든 맥도날드, 꾸중 듣는 자는 복이 있나니, 2013:2

함부로 지껄이는 것은 좋은 꾸지람이 아니다. 훌륭한 꾸중이란 깊은 생각 끝에 나오는 것이다. 기도, 때로는 눈물 없이는 좋은 꾸중도 없다. 사람을 쉽게 꾸짖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을 달리 해야 할 것이다.(44)

 

058 김은홍, 우리를 꾸짖을 어른이 필요하다, 2013:3

우리 교회 공동체의 권위를 우리 스스로 세우자. 문제와 분쟁이 일어난 곳도 우리 교회 공동체요, 그 문제를 해결할 곳도 우리 공동체이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자치권을 포기하는 공동체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보다도 그 전통이 깊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이렇게 말한다. 장로회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65)

 

059 존 오트버그, 권위를 회복하라, 2013:4

고백하건대, 나도 이따금 권위를 남용했다. 어떤 때는 설교 원고를 쓰면서 특정 교인에게 화가 치밀기도 했다. (물론, 지금 교회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예전의 교회들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내가 험담하고 있다면, 험담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를 생각하거나. 어쩌면 나를 험담하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교할 때는 그 사람을 짐작할 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누구 들으라고 말하는지 당신이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소.” 물론, 이렇게 할 때, 내 권위는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27)

 

060 로라 오트버그 터너, 자신만의 은사로 부름 받은 사모들, 2013:5

진짜 ‘퍼스트레이디’로 불리는 대통령 부인을 제외하고는, 남편이 하는 일에 따라 배우자에게 그렇게까지 제약이 따르는 직업은 없을 것이다. 치과의사나 변호사, 혹은 배관공의 아내에게 자신의 재능을 포기하고 남편의 일에 동참하도록 요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목회자와 결혼한 여성은 당연하다시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고유한 재능과는 아무 상관없는 역할을 교회 안에서 이행하라는 요구에 직면한다.(92)

 

061 [인터뷰] 한완상, “사랑보다 더 진보적인 가치는 없습니다, 2013:6

[윤환철 미래나눔재단 사무국장의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평화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싶어도 이를 구체화하고 실행할 사람들이 뒷받침돼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북한이라는 쉽지 않은 상대와 대립도 하고 협력도 하면서 조율할 수 있는 인재들이나 구성체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런 사람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오히려 비선에서 결정을 주도하는 것입니다. 개성공단 철수 과정을 보면, 독수리 훈련 종료를 며칠 앞두고 갑자기 북한에 최후통첩 하듯 대화를 제의하고, 언제까지 답이 없으면 철수한다는 식으로 조건을 붙였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대통령 당선 후 지금까지 그래도 침착하게 남북관계를 다뤄온 셈이라 그 신중함에 칭찬도 하고 참 잘한다 싶었는데, 갑작스런 태도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비선 같은 소통구조가 따로 있구나 싶었죠. 만일 그렇다면 굉장히 위험한 소통구조죠. 확실한 것은 통일부나 외교부 장관, 청와대 수석들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비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죠.(12)

 

062 브루스 위딕, 세상을 바꾸고 싶으세요? 한 아이를 후원하세요, 2013:7ㆍ8

자카르타에서, 컴패션이 후원하는 아동들과 비후원 아동들에게 비오는 날의 자기 모습을 그려보라고 했다. 아동들의 심리적 건강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왼쪽은 5세 비후원 남자아이의 그림이다. 그림에는 아이의 정서가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단색은 낮은 자존감과 절망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몸동작과 표정은 불행을 드러낸다. 이 아동은 통계심리학의 행복 지표에서 하위 17%에 해당했다. 추가적으로, 아이가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이 그림은 낮은 자기효능감(하위 23%)도 보여준다.(24)

오른쪽은 후원을 받는 13세 여자아이의 그림이다. 다양한 색깔과 밝은 색상은 희망과 낙관론을 보여준다. 이 아동이 연구자의 질문에 제시한 답변과 그림의 특징으로 볼 때, 이 아동의 행복 지수는 상위 30%에 해당한다. 그림에서,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우산을 쓰고 있는데, 이는 더 높은 수준의 자기효능감(상위 6%)을 보여준다. 빗줄기가 우산 꼭대기에서 튕겨 나가고, 우산 아래 있는 소녀는 안전하다. 해가 먹구름 뒤로 가만히 얼굴을 내미는 부분에 주목하라.

 

063 마크 뷰캐넌, 종족을 몰살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2013:9

10여 년 전에 중국에서 시작된 전 세계적인 현상이 있다. 흔히들 알박기라고 하는데, 도시 개발에서 집주인이 개발업자에게 자기 집을 팔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남는 집을 가리킨다. 그러면 개발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집 주변을 파내고 건물을 세우게 되고, 그 집은 무너질 듯한 지반 위에 위태롭고 흉물스러우며 완강하게 덩그러니 남겨진다.

소위 알박기 집들이다. 그 집들은 평평하게 깎아놓은 주변 현장 가운데서 우뚝 솟아 있으면서 마치 아무리 망치질을 해도 박히지 않는 못을 닮았다고 해서 못처럼 솟은 집nail house이라고도 한다. 영화사 픽사가 몇 년 전에 제작한 <업>이라는 영화는, 바로 그런 집과 그 집의 변덕스럽고 고집 센 늙은 집주인의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경우, 개발업자가 그 집을 부술 수 있는 법정 명령을 획득한다.

그래서 알박기 집은 패할 수밖에 없는 저항 행위다. 가망 없는 저항의 제스처다. 저항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하려는 시도이며, 멈출 수 없는 것을 멈추게 하려는 시도이며, 무찌를 수 없는 것을 무찌르고자 하는 최후의 절망적인 시도다. 가차 없이 무자비하게 무너뜨리는 파괴자를 향해 공중에 내지르는 외로운 주먹이다.

성경은 알박기 집들의 책이다. 그러나 전 세계 대다수 알박기 집들과는 달리, 그 집은 무모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버텨! 포기하지 마!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져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좌로나 우로 치우친다 해도, 너의 패배가 아무리 불가피하게 보인다 해도, 끝까지 버텨내! 하늘의 최고 법정은 네 편으로 판결할 거야. 결국엔 네가 이긴다고.” 이를 테면, 애굽의 히브리 노예들이나 다윗과 골리앗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알박기 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야말로 역사상 가장 힘 있는 알박기 집이랄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지옥 같은 독재에 저항하면서 황량한 언덕 위에 높이 서 있는 알박기 집이다. 이번에는 집주인이 이겼다.(33)

 

064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 남편이 딸이 아들이 교회를 등졌다, 2013:10

‘방탕’prodigality이라는 개념의 중심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놓여 있다. ‘탕자’라고 번역되는 ‘prodigal’(방탕한)이라는 단어에는 ‘다량의’, ‘아낌없는’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작은아들에게 적용될 때처럼 ‘낭비하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전달하지만 ‘과도한’, ‘풍성한’, ‘호화로운’ 같은 긍정적인 의미도 전달한다. 따라서 하나의 단어가 작은아들과 아버지라는 양극단의 존재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방탕을 뛰어넘는 풍성함을 보여준다. 작은아들이 떠날 때와 돌아올 때 아버지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사랑은 ‘과도한’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과오도 현재의 이해관계도 철저히 외면한 조건 없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음껏 낭비할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모종의 회유, 설득, 협박을 통해 탕자를 지혜로운 삶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조차 없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끊임없이 기도하며 무한히 인내하는 사랑이다.(53)

 

065 사이먼 챈, 아버지가 가장 잘 아신다, 2013:11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특히 기독교 이야기가 재연되는 전례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버지는 문화적 제약을 받는 용어가 아니라 신적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타당한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그의 아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정의되는지 보여준다. 교회의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삼위일체의 정체성은 위기에 처해 있다. 포용적 언어를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얻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신학적 대가를 요구한다.(64)

 

066 마크 갤리, 성공을 응원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2013:12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르는 휴게소가 아니다.(67)

 

067 [인터뷰] 데일 파인, 가식 없는 목사: 떠받들린 목사는 추락한다, 2014:1ㆍ2

교회 가면을 쓰고 부정하고 방어하느라 바쁘면 교인들은 목사를 완벽한 사람으로 여긴다. 교인들은 ‘아아, 나는 목사님을 따라갈 수 없어. 나는 하찮은 존재야. 하나님은 왜 나에게는 목사님에게 하시듯 역사하지 않으실까?’라고 느끼면서 목사를 찬양한다. 하지만 목사는 교인들이 찬양할 대상이 아니다. 목사들의 정직함이 교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 정직은 목사가 실제 자신을 내보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면 교인들도 목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소망을 그리스도에 두게 된다.(33)

 

068 나단 데일리 윌슨, 하나님은 유쾌한 창조자: 그분은 즐거우신데 우리는 왜 이리 찡그리며 살까, 2014:3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원칙,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그분을 닮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원칙을 따르기보다는 점잔과 체면을 더 추구한다. 수면 위로 솟구쳐 공중제비 하는 돌고래,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송골매, 환희의 깃발을 휘날리듯 트럭 짐칸에 앉아 혓바닥을 팔랑거리는 멍멍이, 이것들이 만인이 인정하는 사상가, 신학자, 꼬박꼬박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창조주를 닮았다.(10)

 

069 티모시 홀, 오색찬란 그리스도, 2014:4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흥을 깨고 사사건건 반대하는 데는 우주에서 가히 넘볼 상대가 없는 발군의 실력자로 전파하느라 무던히도 애쓴다. 우리가 그린 그리스도는 즐거운 일만 생기면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고, 누가 무슨 멋진 일을 꺼내놓기만 하면 일언지하에 묵살하는 분이다.(10)

 

070 레슬리 레이랜드 필즈, 용서에 대해 우리가 잊고 있는 것, 2014:5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그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빚을 탕감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용서가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용서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하다. 곧,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다.(33)

 

071 버트 크레이브, 감항능력을 갖춘 영혼: 선장은 무엇으로 항해하는가, 2014:6

이렇게 말하는 목회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여러분 아시죠? 나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또는, “나는 이웃의 아내를 탐해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나는 목사니까요.”

우리는 결코 이렇게 할 수 없다. 이렇게 하고서도 무사하길 바랄 목회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버젓이 이렇게 말하는 목회자가 너무나 흔하다. “나는 목사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랬고, 더 이상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됐다.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일주일에 하루는 꼭 쉬어야 하는 성경적 의무가 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것은 명령이다. 위반하면 비참한 결과가 따르는 명령이다.(55)

 

072 N. D. 윌슨, 기꺼이 창피 당하자: 우리는 하나님만 두려워한다, 2014:7ㆍ8

우리의 입장은―특히 논쟁 중에 있을 때―동네 커피숍의 분위기가 아니라, 오로지 정직한 말씀 이해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때로 우리는 세상이 주는 창피를 달게 받아야 한다. 창피의 뜨거운 압력이 밀려올 때 우리는 둔감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창피를 원하시면, 우리는 기꺼이 음란한 여인과 혼인을 한 다음에 사자굴 속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쇠똥으로 불을 피워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역겨운 것들과 메뚜기로 밥을 지어 먹어야 한다.(11)

 

073 마크 브라우어, 아, 친구가 없다: 목사의 고립, 그 원인과 몇 가지 해법, 2014:9

정직하게 말하면 다른 목사와 친구가 된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질투와 경쟁심이 생겨날 수 있다. 게다가, 목사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서 시무하고 있는 경우라면, 혹시라도 각자의 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이 서로의 교회로 옮겨 가거나 옮겨 올 경우, 목사들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정직해질 수 있고, 우리가 늘 쓰고 있는 익숙한 가면을 벗어 버릴 수 있다면, 목사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정말 멋진 것이 될 것이다.(53)

 

074 존 H. 암스트롱, 사랑의 테이블 매너, 2014:10

우리가 어떤 것이 주의 만찬 교리로 더 나은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종종 주의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를 잊고 있다. 심지어 훼손하기까지 한다. 바로 교회의 일치이다.(47)

 

075 필립 젠킨스, 절멸의 벼랑끝에 서다, 2014:11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또 때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어렵지 않게 듣기도 한다. 교회 절멸의 사례는 끔찍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처음에는 철저한 절멸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우리 눈에는 결정적인 소멸의 행동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자주 듣듯이, 절멸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 영원히 계속 변할 뿐이다.(38)

 

076 이어령, 40일 광야가 없는 기독교가 기독교인가, 2014:12

예수님이 그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다.

남들과 여럿이 물 길러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안 믿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남들이 오지 않을 때 와서 물을 길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절대적인 자기 외로움과 절대 소외, 이 세속적 삶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암환자라도 좋고 죄수라고 좋고 탕자처럼 버림받은 자식이라도 좋고, 그런 사람이 마지막 손을 내밀 수 있는 곳이 예수님이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다.(84)

 

077 정마태, 온성도 교회의 ‘성도’들, 2015:1ㆍ2

나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과 같은 파키스탄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엘리야는 갈멜 전투의 위대한 승리 후에 자기 혼자만 남았고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왕상 19:10). 마치 오늘날 선교사들이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 무슬림 국가에서 사역하는 이들에게는 안전과 보안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신다고 하셨다.(28)

 

078 케빈 A. 밀러, 성도의 변화를 이끄는 대화 기술, 2015:3

목회자로서는 성도들과 보내는 시간은 선물이요 은혜요 옥합을 깨는 일이다. 여과 없이 경청한다는 것은, 교회 일정 관리 차원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지금 이 시간에 그 사람에게 목회자로서 우리의 최고의 시간과 에너지를 준다는 것이다.(58)

 

079 샤론 호드 밀러, 몸에 새겨진 상처, 2015:4

첫 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내 상처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경험했다.

남편의 고백이 나를 놀라게 했다. 산후에 나는 남편에게서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매력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엉덩이는 펑퍼짐해졌고, 아랫배는 축 처졌지만, 내 몸의 이런 변화는 그의 두 아들을 낳은 영광의 광채요 트로피였다. 남편에게 그것은 아름다운 상처였다.

남편의 시선은 산후의 몸은 창피하게 여겨야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제 내게 산후 여성의 몸은 부활 후 가장 사랑스러운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표지판이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의 상처는 우리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줄 수 있다. 임신한 몸의 변화를 무시하거나 신경 쓰는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을 낳기 위해 희생한 몸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다.(23)

 

080 이재근, 여인천하, 2015:5

성경은 ‘여인천하’다. 세계 교회사도 한국 교회사도 ‘여인천하’다.(35)

 

081 [인터뷰] 맥스 루케이도, 기도로 이끄는 공동체, 2015:6

공적인 기도는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신실한 기도의 본을 보일 기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종교지도자들을 호되게 질타하셨습니다. 목회자들에겐 정직하고 진정한 기도의 본을 보일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공적인 기도를 나의 영성을 과시하는 시간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37)

 

082 브래들리 나시프, 작은 일의 기쁨과 의미2015:7ㆍ8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전업주부의 마음으로 경건한 성품의 꽃다발을 장식하는 하나님의 손이다. 점원이 거친 손님을 대하면서 영적 인내의 은혜를 배울 때 데오시스가 길러진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은 새벽 두 시에 환자에게서 걸려올 응급 전화를 받기 위하여 잠을 자지 않고 대기하고 있는 의사의 영혼에서 묵묵히 나타난다. 공장 노동자는 조립라인의 단조로움과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5:17)는 바울의 권면을 통합할 때 살아있는 기도의 사람이 된다.

우리의 일터는 일상의 작은 일들을 영적인 목적을 담은 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훈련하는 운동장이다.(41)

 

083 마셜 셸리, 복음 침투작전, 2015:9

미국 해군 특수임부부대 네이비 실Navy SEAL의 이름은 이 특수부대가 임무수행을 위해 침투하는 세 가지 루트―해상Sea, 공중Air, 육상Land―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다.…특수임무부대에 세 가지 침투 수단이 있듯이, 어떤 상황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세 가지 핵심 수단이 있다.…기도, 함께함, 성경: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다가가라고 하신 사람들의 삶에 침투하는 세 가지 루트.(52)

 

084 킴 쿠오, 우리의 마지막 날들을 하나님께 맡기자, 2015:10

문화의 조류에 휩쓸린다면, 우리는 조력자살이 긍휼을 베푸는 행위라고 믿는 쪽으로 기울고 말 것이다.…이것은 불치병에 맞서 가장 존엄하게 싸우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마치 좌절에 빠져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어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는 안 된다.(65)

 

085 김은홍, 우리도 한때는, 2015:11

우리도 한때는 난민이었습니다.(5)

 

086 캐롤린 아렌즈, 수프 맛 좀 보시오: 교회 갈 이유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2015:12

한 남자가 식당에 들어간다. 수프를 주문한다. 웨이터에게 오라고 손짓을 한다.

손님이 웨이터에게 말한다. “수프 맛 좀 보시오.”

“손님, 뭐가 잘못 되었나요? 금방 다시 갖다 드리겠습니다.”

“수프 맛 좀 보시오.”

“손님, 제가 주방장에게 뭐라고 전할까요?”

“수프 맛 좀 보시오.”

“그럼, 맛보겠습니다.” 웨이터는 좀 짜증이 난다. “어, 스푼이 어디 있지요?”

“그러게요.”

왜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때가 있다. 손님에게 스푼 갖다 주는 걸 잊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수프를 맛봐야 한다.…

최근에 내게도 “수프 맛 좀 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내게 수프는 교회다.…

수프를 맛본다는 것은,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주님의 식탁에 함께 모이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잊고 빼먹은 스푼만이 아니라 만찬까지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44-45)

 

087 크누트 M. 하임, 늑대의 시대에 희망을 노래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시편 23편의 시가 필요한 때다, 2016:1ㆍ2

시편 23편은 ‘지금 여기’의 희망을, 죽음 앞에 있는 생명의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우리의 육신이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그 어두움 안에서 말이다.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탄압을 받고, 고삐 풀린 테러리즘이 들풀처럼 번져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절제되지 않은 탐욕과 소비에 빠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유명한 라틴 격언은 이렇게 말한다. 호모 루푸스 호미니Homo lupus homini.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하지만 우리의 포식자들은, 그것이 사람이든 다른 어떤 것들이든, 우리를 궁극적으로 넘어뜨릴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걸으신다. 우리와 함께 그 골짜기를 지나가신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집, 우리를 먹이시는 희망의 풀밭으로 이끄신다.(54)

 

088 [인터뷰] 임영수, 목사님,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함께하셨습니까?, 2016:3

우리는 대부분 신앙생활과 영적 생활을 도덕적 이상 속에서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100번 실패합니다.…‘나’로서 돌아와야 합니다. ‘나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요 내성적인 사람이요 나의 내면은 이런 사람이요….’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줍니다. 말구유는 곧 진정한 ‘나’로서 다시 태어나는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높은 도덕적 수준에서 시작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자기로서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주님과 시작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여정의 출발점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도덕적 기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실패합니다. ‘나’의 이런 결심을 내려놔야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훌륭하게 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만이 나를 만들어 가실 수 있네요.’ 이렇게 고백하면서 시작돼야 합니다.(60)

 

089 데이비드 코이지스, 그리스도인의 시민불복종, 2016:4

시민불복종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고심해야 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선택이다.(35)

 

090 미로슬라브 볼프, 천국에서 만나게 될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라, 2016:5

예일의 동료 교수인 칼로스 아이어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뵈러 갈 때면 그분의 친구들이 모여 사는 작은 쿠바 이민 공동체에 들러 그들의 신학 상담자가 되어 드리곤 했다. 한 여성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카스트로가 죽어가면서 회심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예, 갈 수 있습니다.” 아이어 교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바로 그게 기독교 신앙이지요. 속죄의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은 없답니다.” 그녀가 대꾸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네요.”

칼 바르트는 쿠바 카스트로 정권에서 쫓겨난 이 여성의 질문과 반대 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 천국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인가요?” 바르트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랍니다!” 위대한 신학자의 이 예리한 한마디―당신이 싫어하는 사람들도 천국에서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천국을 가득 채우고 싶어 하는 우리의 바람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천국의 공간을 함께 나누고 싶지 않은 나만의 ‘카스트로들’이 있다.(33-34)

 

091 지용근, “당신 목사지?”, 2016:6

이 땅의 모든 택시기사 목사님들이 모자를 벗고 떳떳하게 손님을 맞게 되는 날을 기대한다.(29)

 

092 칼 베이터스, 내가 설교시간에 듣고 싶은 아홉 가지, 2016:7ㆍ8

당신이 설교거리를 온라인에서 건져 올린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당신 교회에 출석하겠는가?(69)

 

093 박희천, “읽고 읽고 또 읽으십시오. 성령님께서 알려주실 때까지 그렇게 읽으십시오.” 2016:9

설교자는 본문의 앵무새가 되어야 합니다.(65)

 

094 티쉬 해리슨, 우리가 잊고 있던 아메리카, 2016:10

미디어와 대중문화에서 트럼프가 백인 노동자 계급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이 찡그려진다. 가난하고 덜 배운 백인들의 고통과 분노와 결핍에는 주의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그저 아연실색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위선자들일 뿐이다.(61)

 

095 앤서니 B. 브래들리, 너희는 이 땅의 거름이다, 2016:11

농업용 소금이 황폐한 땅을 갈기 쉽게 만들고, 식물이 중요한 영양소를 잘 흡수할 수 있게 하고, 거름이 땅을 더욱 비옥하게 만들게 한다면, 예수님은 이 땅의 소금인 우리를 비상하고 대항문화적인 무엇이 되라고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농업용 소금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각오해야 하며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는 곳으로 마땅히 가야한다. 밝고 새롭고 흥미진진한 곳으로 가는 대신에,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 기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 받았다.

 

096 지용근, 우리 머릿속에도 “샤먼”이 들어있다, 2016:12

“점쟁이!”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 타임스〉가 최순실을 표현한 말이다. 최태민과 박 대통령의 오랜 관계를 설명해 놓은 우리 언론 보도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다는 단어가 ‘샤먼’이다. 이 단어는 다시 ‘무당’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돌아왔고 한국은 어느새 ‘샤머니즘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대한민국 대통령의 머릿속에 샤머니즘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샤머니즘이 유독 대통령의 머릿속에만 있을까?(30)

 

097 앤드류 윌슨, 엘리사의 곰 이야기에서 복음을 읽다, 2017:1ㆍ2

엘리사와 곰 이야기…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장난 좀 쳤다고 아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시는 하나님? 성경의 선지자들에게는 유머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영국 어느 신문의 칼럼니스트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아이들을 곰에게 먹이로 주는” 그런 신이라고?…이 이야기를 더 잘 읽으려면, 바알-숭배와 싸우는 엘리야, 사탄과 싸우는 예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 읽어야 한다. 유머라고는 조금도 없이 유치원 아이들을 공격하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메신저들도 장난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장난이 아니다.(24)

 

098 제레미 트리트, 밖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2017:3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맘대로 해야 하는 성미 고약한 노인이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고 죄의식을 심어주고 두려움을 갖게 하여 꼼짝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대놓고 떠들지는 않더라도 내심 신자들조차도 하나님을 “나를 잡으려고 밖에 와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벌을 내릴 할당량을 채우려고 우리가 죄 짓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노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76)

 

099 프랭크 A. 제임스 3세, 예정은 사랑이다, 2017:4

하나님은 마음속에 나를 품고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나는 추가도 부록도 추신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용기일 것이다. 바울은 선언한다. “사랑 안에서 그는 우리를 예정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은 예정을 위한 진정한 동기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정되었다는 것을 안다고 참혹한 환경들의 긴박함이나 절박함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예정된 사랑을, 그리고 현재의 고난이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보장해준다. 결국, 바울은 예정이 사랑의 교리임을 우리가 알기를 원한다.(66)

 

100 A. J. 스보보다, 말씀의 설교자는 정치 장사꾼이 아니다. 2017:5

장사꾼은 이윤을 위해서 무엇이든 팔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이든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이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고후2:17) 바울이 말한 바로 그 “장사꾼”이다. 설교자인 우리 안에 이런 장사꾼의 이미지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안타깝게도, 우리가 예수님의 장사꾼일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그의 말씀과 그의 생각과 그의 가르침을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현실이 이러니 이 정치의 시대에 우리의 증언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설교단에서 나오는 모든 정치적인 말이 예수의 정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치를 주장하기 위한 기회로 보이기 때문이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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