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이슈 & 특집
말씀 설교자는 정치 장사꾼이 아니다정치 열기가 충만한 시대에 복음 설교하기
A. J. 스보보다  |  A. J. Swoboda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5.07  
트위터 페이스북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는 성도의 40퍼센트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또 다른 40퍼센트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나머지 20퍼센트는 어느 당도 지지하지 않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상당히 정치성 강한 (그리고 정치의식이 충만한) 공동체다. 이러니 설교를 준비하는 나로서는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짐작컨대, 민주당을 지지하는 성도들은 내가 사회-생태적 퇴보, 인종차별, 부부의 동등성 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더 많이 설교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지만 다른 절반은 회개, 성적 순결, 건강한 기도생활 같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더 많이 다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간단히 말해서, 다들 저마다 바라는 것이 다르다. 이게 모든 설교자들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중대한 질문 하나를 던져 보아야 한다: 정치적인 열기가 충만한 교회에서 어떻게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복음은 정치적이다

복음은 정치적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실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려고 옛 하늘과 옛 땅으로 내려오셨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옛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고후5:17) 이 새로운 “은혜의 경륜”은 신속하고 즉각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3:2) 이 나라는 멀리 있지 않다. 오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사변적인 나라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바울은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이라 불렀다(고전15:45). 창조 이야기에 죽음을 초래한 첫 번째 아담의 나라를 폐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첫 번째 아담의 이 완전한 “흑암의 나라”를 폐하시고, 사람들을 새로운 나라로 “옮기신다.”(골1:13). 예수님은 이렇게 하실 때,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죽음의 서사는 이것이 시작된 바로 그것―나무―에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 들어있는 정치적 뉘앙스는 결코 미미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은 창조세계를 다시 위대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설교단이 믿음의 삶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역할을 잘 알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전하는 말이 이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가 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항상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설교단에서 우리는 흑암이 가득한 죽어가는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빌2:16)

우리가 설교자로서의 임무를 악용하여 “생명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우리의 입장, 억측, 추측―을 전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정치 에너지가 넘쳐나는 우리 문화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신학자 레너드 스윗은 설교: 그리스도의 피를 교회에 수혈하기Giving Blood에서 설교자가 범할 수 있는 최악의 것들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지적한다. “성도들이 [설교자의] 정치에 의해, 사적인 계획들에 의해, 개인적인 기호에 의해, 사사로운 복수심에 의해, 예배를 강탈당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성경 본문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치적 결론을 내놓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나 심지어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설교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정치학에 관하여 설교할 수 있을까?

 

‘예수는 주이시다’: 정치적인 설교를 안 하면 안 될까?

설교 서클들 안에서 종종 이런 질문이 나온다. 정치를 설교해야 하는가?

“예수는 주이시다.”(고전12:3) 초대 교회는 이렇게 고백했다. 대중의 주군Lordship 관념이 ‘카이사르가 주이시다’라는 말에 함께 향했던 대상이 로마 황제였던 그 시대에, 초대 교회의 “예수는 주이시다”라는 고백은 당연히 정치적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정치적이다. 선지서—특별히 하나를 꼽는다면, 이사야서—를 읽을 때면 언제나 우리는 거기서 정치적 뉘앙스를 인지하게 된다. 이사야는 예수의 통치를 대담하게 내다본다.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사9:12)

정치를 설교해야 할까? “예수는 주이시다”라고 말하면서, 복음은 정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대놓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모든 복음 설교가 정치적이다. 복음 설교는 세상의 주와는 다른 주를 제시한다. 복음 설교는 세상의 정치를 대체하는 정치를 설교한다. 복음 설교는 새로운 나라를 선포한다. 마이클 그린이 초대 교회의 복음전도에서 지적했듯이, 초기 기독교가 멸시를 받은 까닭은 그들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러했기 때문이다. [전문 보기: 말씀 설교자는 정치 장사꾼이 아니다]

 

A. J. 스보보다 오리건 주 토트랜드 데오필루스 교회의 목사이며, 조지 폭스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수이고, 혼돈: 하나님의 좋아하시는 방식Messy: God Likes It That Way의 저자이다.

A. J. Swoboda, “God's Huckster: Preaching Jesus in a politically-charged climate” PreachingToday; CTK 2017: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68길 98 5층  |  대표전화 : 080-586-7726  |  팩스 : 02-6919-1095
발행인 : 오정현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은홍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홍  |  사업자등록번호 : 214-88-27116  |  통신판매업신고 : 제01-2602호
Copyright © 2017 Christianity Today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