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따라, 정말 천천히, 그리고 평온하게
상태바
그녀를 따라, 정말 천천히, 그리고 평온하게
  • 박명철
  • 승인 2017.06.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br>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2017, 한국, 홍주연 홍현정 감독, 하정우 윤안나

 

장 일정을 아껴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을 들른 까닭은 꽃 한 송이라도 그녀의 묘비 앞에 바치고 싶어서였다.

광주의 5월은 분주했고, 선교사 묘역 아래 호남신학대학교에서도 축제가 한창이었다. 묘역은 앞마당처럼 넓지 않아서 포근했다. 유진벨, 윌슨, 오웬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펼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이름을 담은 묘비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다. 5월의 눈부신 햇살이 신록들 사이로 반짝인다. 나는 묘비들을 돌며 그녀의 이름을 찾아낸다.

Elisabeth Johanna Shepping, 서서평.

그녀의 묘비 앞에는 이미 여러 개의 꽃다발이 놓여 있다. 영화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그녀의 삶에 주목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자신의 오늘 속에서 의미 있게 해석하려고 한다.

책을 통해서건, 영화를 통해서건 역사 속으로 이미 퇴장해버리고 잊힌 사람을 오늘이란 시간으로 굳이 불러내려는 시도는 자칫 뜬금없고 불온할 수 있다. 그러한 초대는 시간의 거리만큼이나 왜곡과 거짓의 허울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이란 시간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하여, 아니면 오늘이란 시간을 치유하고 내일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하필 지나버린 역사 속 누군가의 시간에 굳이 잇대어 보려고 노력한다.

서서평은 서른두 살이던 1912년 조선에 왔다. 하나님께서 조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사용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것이 선교사가 된 유일한 이유였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조선에서 간호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었고, 여성 지도자를 키우는 이일성경학교를 설립했다. 한센병 환자들을 비롯한 행려병자들과 길거리에 넘쳐나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았다. 풍토병을 앓으면서도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보살피고 거두느라 결국 54세에 영양실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시신까지 기증하고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만납시다” 인사한 뒤 그야말로 빈손으로 떠났다. 1934년이었다.

 

 

 

그녀의 장례는 광주지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렀는데,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은 가난한 양림천의 거지들과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 비로소 조선의 첫 여성이고자 했던 성경학교의 제자들이었다. 그녀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리 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하늘처럼 받듦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제자가 된 셈이었다.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도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서서평 선교사의 목소리와 손길과 눈물을 만나고자 하는 영화이다. 많은 이들의 발품이 든 영화인데, 틀림없이 그녀를 잊지 못하거나 그녀의 인생에 빚진 이들이 더욱 간절하게 그 일을 감당한 것이리라, 확신했다. 나는 그 간절함에 귀 기울이고자 집중했다.

어찌되었든 영화를 보면서 다시 그녀의 시간에 마음을 둘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이 머물던 장소를 찾아 천천히 평온하게 거닐 수 있어 좋았다. 나의 기쁨은 그러나 영화의 ‘행간’에서 찾은 기쁨인지 모르겠다.
가령 이런 것이다.

서서평 선교사가 떠난 뒤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를 만큼 유명한 그 구절.

우리는 열심히 외운 ‘not A but B’의 이 문구에서 B에 주목하느라 A가 지닌 부정의 정체까지 건너뛴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은 틀림없이 성공이 아닌 섬김에 방점이 찍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문구를 거기 침대 머리맡에 붙여둘 때 그녀의 마음이 와 닿았다. 아마 그 말은 타인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자신을 향한 다독임이었을 게다. [전문 보기: 그녀를 따라, 정말 천천히, 그리고 평온하게]

 

 

박명철 객원기자 CTK 2017: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