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커버스토리
아프간 피랍 사건 10년, 성찰의 3650일다시, 박은조 목사를 만나다
인터뷰 김은홍  |  amos@ctkorea.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7.25  
트위터 페이스북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PHOTO BY 김희돈 / CTK

2007년 아프간 피랍 사건이 발생하고 그 다음 해인 2008년 7월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과 대담을 하셨습니다. “사건 1년, 성찰의 365일”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제목을 잇자면, 이번 타이틀은사건 10년, 성찰의 3650일이 될 것입니다. 2007년 그 한 해만이 아니라 지난 10년은 단순히 흘러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우리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23명이 아프간에 갔다가 두 명이 순교하고 21명이 돌아온 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프간 땅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논산훈련소 다녀온 사람들이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탈레반 비슷한 사람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면 꺼버렸습니다.

그런데 그해 2007년 연말에 어떤 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인데, 장로라고 하면서 꼭 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났더니, 아프간에서 사역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아프간 피랍 사건 보도를 보고 ‘아, 저 박 목사라는 사람이, 샘물교회가 아프간을 위해서 일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구나!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겠구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프간 생각은 안하고 살려고 했는데, 상처가 너무 커서 내 남은 인생은 아프간과 상관없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연말을 보내고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장로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아프간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고, ‘내가 그들을 섬겨야 하는 구나’ 느끼면서 그 장로님이 하는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아프간에 피랍 당시 23명 중 셋이 선교사였고 20명은 봉사자였습니다. 나중에 선교사 중 두 분은 다시 선교하러 나갔습니다. 한 사람은 (건강 때문에 잠시 한국에 와 있지만) 런던에서 아프간 난민 사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W선교회를 통해 K국에서 아프간 난민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학대학원 3학년이었던, 저와 동갑이 한 분 있었습니다. 장로로 있다가 늦게 신학공부를 하고 신대원 3학년이던 그해 여름에 좀 힘든 봉사지에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아프간에 따라 가게 되었다가 그만 붙잡혔습니다. 그 분은 그때 살아 나오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갑상선 암 수술을 받아 약을 계속 복용해야하는데 2주일 치만 가지고 갔거든요. 약을 먹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미 50대 중반으로 나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약을 정부를 통해 몇 번 보냈습니다만, 나중에 보니까 못 받았더라고요. 그런데 멀쩡하게 나왔습니다. 이 분이 지금 아테네에서 아프간 난민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쉼터도 만들고 아프간 교회도 세웠습니다. 아프간 사람들을 현장에서 가장 열심히 돕는 선교사들 중 한 분이 바로 이 분입니다.

이 분이 아프간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40일간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내야 했던 그 억류기간 동안에 아프간을 마음깊이 품고 돌아왔습니다. 당시 탈레반이 피랍자들을 주로 탈레반을 지지하는 가정들에 분리해서 숨겼습니다. 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면서 피랍자들이 아프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과 얘기도 하고 밥도 먹었답니다. 형편이 좋은 집으로 간 한 팀은 그들이 닭도 잡아 주기도 했다지만, 대부분은 먹을 것이 없어 쩔쩔 매는 사람들이 탈레반 윗사람들이 그냥 집에 데리고 있으라고 하면 한 며칠 데리고 있어야 하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아프간 사람들의 삶을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그들의 애환을 다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분은 아프간 사역자로 살아야 된다는 마음을 갖고 돌아왔던 겁니다.

샘물교회 선교목사로 있다가 난민촌을 몇 번 방문한 후에, 아프간은 입국 금지 국가여서 들어가지 못하고 아테네로 들어가 사역하고 있습니다. 아테네에 와 있는 난민들이 그곳에 머물면서 EU로 들어가는 난민비자를 받게 되는 데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립니다. 이 분이 그런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고 복음을 전하는데, 굉장한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중간 지점에 프리몬트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아프간 사람들이 10만 이상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 뜻을 같이 하는 한인 교회 목사님이 예배당을 예쁘게 짓고 아프간어로 예배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너무 어려운 겁니다. 교회를 다니는 아프간 사람들이 있어도, 미국인 교회에 숨어 다니길 원하지 자기들끼리 모여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 뉴 라이프 교회가 앞장서서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러니 난민촌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참 불행한 현실이지만, 난민들이 계속 생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현재로서는 1200만에 이르는 시리아 난민들이 가장 큰 문제인데, 시리아 난민들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프간 난민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1979년에 아프간-소련 전쟁이 발발하면서 생기기 시작한 아프간 난민이 현재는 파키스탄에만 270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란에도 200만 이상의 아프간 난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터키에는 난민이 450만 명이 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300만 명이 시리아 난민이고 아프간 난민도 15만 명이나 됩니다. 이 15만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터키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터키 정부는 450만 난민들을 81개 주에 흩어져 살게 합니다. 그런데 터키도 가난한 터라 그들이 정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난민들이 터키를 디딤돌로 해서 유럽으로 가려고 합니다. 제가 몇 년 전 아테네의 난민촌에 가서 들은 얘기는, 당시 마피아에게 3000달러를 내면 그리스 해변에 떨어뜨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EU 국가로 들어가는 길도 지금 계속 막히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이 사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터키 현지 사역자에게 들은 바로는, 시리아 난민이 터키 땅에 무려 300만이나 와 있는데도 아랍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10명도 안 됩니다. 아프간 말로 아프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란과 아프간이 같은 페르시아 계통입니다. 이란 사람들이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란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 아프간 교회가 같이 세워집니다. 이란 난민이 터키에 3만 명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 7000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터키 땅에 아프간 가정교회도 난민들 속에 10개 이상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4월 말에는 그들을 위한 수련회도 열었을 정도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분들이 터키 땅에서 난민 선교를 하면서, 진젠도르프 모라비안 공동체처럼, 자신들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이슬람을 위해서 쓸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지고 운동을 시작했는데, 마침 그 운동에 제가 연결이 되어서 같이 섬기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아프간 사람은 제 마음에 품을 여유도 없었고 전혀 마음속에 계획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한 장로님을 통해서 도전하셨던 겁니다.

그 장로님은 미국 시민권자고 미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미국의 유수 식품회사에서 많은 연봉을 받고 일하던 분이 나이가 들어 ‘내가 복음을 위해서 뭔가 좀 해야 되겠다, 전공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셨습니다. 해외 출장을 가면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2000년대 초반에 아프간에 들어갔는데 ‘여기다!’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아프간은 콩을 심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해야 살 수 있는데 단백질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은 소고기를 먹거나 달걀을 먹거나 우유를 먹거나, 아니면 콩을 먹어야 합니다. 다른 세 가지 방법은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들지만 콩은 아주 쉽습니다. 심고 석 달만 지나면 수확을 하는데 이 나라가 콩을 전혀 심지 않는 것을 보고 이 분이 아프간 정부에 콩을 심자고 한 겁니다. 처음에는 정부 관리들이 시큰둥했습니다. 그게 뭔지를 잘 모르니까요. 그런데 이 분이 영양학자였습니다. 콩을 심기 시작해 시험재배에 성공하고 아프간 정부도 괜찮아 보이니까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농가에 콩 씨앗을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주고 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아프간 38개 거의 모든 주에서 다 심습니다. 수확의 절반은 그들이 먹고, 절반은 사 줍니다. 또 이것을 사서 씨앗을 나누어주고 두유를 만듭니다. 두유를 만들어서 가난한 아이들을 먹이고 두유에서 나오는 비지로 쿠키를 만듭니다. 쿠키와 두유를 빈민촌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먹이는 일을 하는데, 아프간 정부로서는 너무 고맙지요. 그런 사역자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프간 민족을 섬기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지난 10년 동안 목회나 이미 하고 있던 몇 가지 중요한 사역 외에는 아프간 민족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 일에 최대한 시간을 쓰고 씨름을 하면서 10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피랍되어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아프간 현지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목격하면서 그 민족을 마음에 품었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7, 8년 전에 아테네에 아프간 난민 사역을 하는 선교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샘물교회에서 단기 봉사팀을 꾸려 의사 3명을 포함한 25명이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아프간에 피랍되었던 5명도 같이 갔습니다. 우리가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식사봉사와 의료봉사와 그분들을 돕는 일을 일주일 동안 하는데, 제가 유심히 보면서 눈에 띈 것이 있었습니다. 의사들이 통역을 통해서 처방을 하고 약국에서 약을 만들고 봉사자들이 아무개 씨라고 부르는 식이었는데, 아프간 말은 잘 안되지만, 그 사람에게 약을 주는데 그냥 주지 않고 한 쪽 옆에 앉아서 잠깐 몇 마디라도 주고받고 ‘기도 한 번 할까요?’ 라고 하면 대개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주로 피랍자들이 했습니다. 그들이 아프간 사람들을 대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다정하게 대하는지, 꼭 자기 친척처럼, 형제처럼…. 남자는 남자를 여자는 여자를 대하면서 몇 마디를 주고받고 껴안아 주는 게 전부였지만, 기도를 해도 저 쪽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로 기도하는데도, 아프간 사람들을 향한 이 분들의 태도를 보면서 ‘아! 어떻게 저 마음이 생겼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트라우마가 생긴다고 하는데, 이것을 ‘긍정의 트라우마’라고 불러야 할까요? 가해자까지도 품을 수 있는 회복력과 치유력인데, 그런 심리학적인 개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심리학에는 없더라도 복음 속에는 있지요. 현재 국제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난민 문제입니다. 시리아 난민들 가운데서 난민 사역하는 해외 교회 소식들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논산 훈련소 얘기도 하셨습니다만, 그 기간에 탈레반만 미웠던 것이 아니라 아마 한국에 있는 많은 언론들이나 많은 공격들이 있었는데,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사실 초기에는 한국 언론이나 한국 사회가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누가 욕을 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정부쪽 사람은 저에게 와서 남자 여섯 명이 다 죽어야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저쪽에서 한 사람씩 죽이면서 압박을 가하는 이유가 아프간 정부에 잡혀있는 탈레반 포로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인질을 붙잡은 겁니다. 돈 때문에 붙잡거나 선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붙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부쪽 전문가들이 볼 때 탈레반이 여자들에게는 손을 안 댈 것 같은데 남자들이 다 죽을 때까지 압박을 가하지 않을까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한 사람 죽을 때마다 피눈물이 나는 상황이고 두 번째로 죽었을 때는 정말 멍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여자 두 사람을 풀어주었습니다. 탈레반 입장에서는 전에 국가를 만들어서 경영했던 사람들이기도 해서 세계 여론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죽일 건가 말 건가 고민하기 시작했고 미국 정부나 아프간 정부에서는 절대 못 풀어 준다고 버티니까 그 방법을 포기를 하면서 돈 얘기를 한 겁니다. 돈 얘기를 했다는 말은 풀어주겠다는 신호였습니다. 돈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에서 비로소 기사들을 보니까 엄청나게 욕을 하고 있더라고요. 주로 욕을 먹고 있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그때 당시 국가의 고위 관리 한 사람이 언론 책임자들을 불러 놓고 브리핑을 할 때 ‘샘물교회가 가지 말라고 했을 때 안 갔으면 좋을 뻔 했는데’라는 말을 했던 겁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언론은 저희를 그렇게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언론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공격을 받으면 교회가 문을 닫을 수 있겠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에 공격이 계속 되는데 기자들이 100명 가까이 저희 교회에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와서 저녁에 퇴근했지요. 그 중에 두 사람이 따로 저를 찾아 왔었습니다. 젊은 남자 두 명이었는데 이분들이 저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언론이 팩트와 상관없이 무조건 공격을 해대는 것이 너무 죄송하다고 그랬습니다. 그때 모 언론사 기자 중 하나는 나이가 28세인가 29세 밖에 안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눈물을 제 앞에서 뚝뚝 흘리면서 목사님 제가 한국 언론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목사님께 사죄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언론이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친구의 말에 치유가 참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일반 언론 혹은 인터넷 쪽에서 말도 안 되는 찌라시 같은 소리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우리 교회 때문에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상황 자체가 참 힘들었습니다. 우리가 가지 말라는 것을 간 것도 아니고 가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봉사팀이 간 것인데 이것이 촉매제가 되어서 한국 교회를 향한 온갖 공격이 함께 쏟아 부어졌으니 그 때 참 억울한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공격하는데 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지만 그래도 저 사람들에게 공격받을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렇게 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기도를 며칠 동안 꽤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순교가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어느 날 아침에 원망 섞인 기도를 하고 아침에 집에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서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제 앞에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게 뭐였냐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돌을 맞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제가 19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피투성이가 되고 있는데 제가 팔짱만 끼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데, 나의 어머니 아버지인 한국 교회, 내가 그 일원인 그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조금도 마음아파 하지 않고 나는 저 사람들과 상관없고 그렇게 욕먹을 짓 안 했다는 기도를 몇날 며칠 동안 하고 있던 겁니다. 그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그 장면 하나 보여주시는 것으로 저에게는 충분했습니다. 그 순간 제가 그 자리에서 바닥에 엎드려져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울면서 회개기도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집으로 가는데 마음에 두려움도 없어지고 욕을 먹어도 내가 한국 교회와 함께 간다는 마음의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 사건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과 함께 지금은 전혀 그런 문제에 대한 아픔이나 트라우마는 없고 함께 이 짐을 지고 가야된다는 성숙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5년 전 샘물교회를 떠나니까 짐은 조금 더 가벼워지고 새롭게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여기에서 같이 섬기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KCF, Korean Church for Afganistan이라고 하는 선교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아프간에서 믿음도 있고 훈련이 잘 된 청년을 지난 2월에 장학금을 주고 국내 K대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지금은 언어를 배우고 있는 단계인데, 지도자 한 사람을 잘 세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 형제를 언어학습 1년, 대학교 4년, 5년 동안 K대학교 외국인 기숙사에 넣고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아프간 난민 가정이 하나 와 있습니다. 한국에서 난민비자까지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도 지금 K대 영문학과를 4년 다니고 지금은 신학교에서 교육학 공부를 더 한 후 사역자로 가겠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영어는 곧잘 하고 한국말도 조금 합니다.

아프간 말로 복음을 전하고 돌볼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을 양육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약 3000명 정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프간 내부에 있다고 합니다. 가끔씩 그런 분들이 직업 훈련 같은 것을 받으러 오면 저와 만나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의 연결 루트를 통해서 말입니다. 1, 2주일 훈련 받으러 오면, 훈련 끝나면서 하루 쯤 자유 시간을 줍니다. 그러면 다들 명동이나 다른 곳으로 흩어지는데 저하고 같이 밥 먹고 자기네 지하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프간 내부에서도 부흥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꾸준히 지하교회 교인들이 모이고 있고 저희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아프간을 위한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데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5~7년이 지나면 이러한 변화가 어떤 형태로든 고착되고 복음 전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래서 이 불안한 상태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5~7년 안에 피크를 이룰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 사역을 위해 주변에 뜻 있는 교회들이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간 전체 그리스도인 수가 3000명 수준이라지만, 이 나라 밖으로 탈출하는 난민들 중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을 겁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난민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그들이 난민이 되는 데는 신앙의 문제라는 또 하나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가 이중으로 걸려있는 것이지요.

 

   
 

아테네에 있는 아프간 난민들 중에서도 사역자가 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아테네에 우리와 같이 일하는 S형제가 있는데, 아프간 현지에서 한국 선교사들과 일했던 사람입니다. 한국 선교사들과 일한 것 때문에 늘 위협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형제가 큰 아들만 데리고 아테네로 와서 우리 선교사를 만난 겁니다. 그래서 이 형제로 사역자 후보로 지정하고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부인과 아이 넷이 아프간에 살고 있는데, 나중에 그들을 인도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형제가 그리스에서 인도로 넘어가 한 달 동안 함께 있다가 다시 그리스로 돌아가고 그의 가족들은 인도에 있는 선교사가 돌보고 있습니다. 일단은 정식으로 비자를 받아서 나왔는데, 인도에서 기다리면서 남편이 그리스에서 난민비자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유아 사망률이 아프리카보다도 더 높은 곳이 아프간입니다. 최빈국의 하나이고 산모 사망률도 높은 나라입니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민족인데 사는 게 너무 힘들다보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제가 콩 사역 영상을 아테네에서 직접 상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아프간인 여러분을 도우려 한다는 개념으로 복음을 바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시절 한국과 서울의 참혹한 상황을 보여주고 지금의 서울 장면을 대비시켜 보여줬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이런 가난한 나라였고 전쟁 때문에 힘든 나라였는데 여러 나라에서 우리를 도와줘서 이만큼 발전했다. 우리가 이 빚을 이웃에게 갚고 싶다.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는 여러분에게 이 빚을 갚고 싶어서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란인 통역사가 아프간 말로 통역을 해줬는데,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영상을 보여준 곳이 식당이었는데, 밥 한 그릇 먹으러 온 굶주린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서 자존심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왜 이렇게 도울까’ 의아해 했는데, ‘이들도 과거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한국 교회와 함께 이 민족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10년 전 아프간 피랍을 통해 떨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 혼자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 교회 전체가 조금 더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10년 전에 있던 사건을 회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10년 전에 당신의 백성 23명을 붙잡고 전 세계의 이목을 40일 동안 집중시킨 하나님의 뜻, 아프간 민족을 섬기라는 그 뜻을 한국 교회 모두가 함께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CTK 2017:7/8

 

[관련기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68길 98 5층  |  대표전화 : 080-586-7726  |  팩스 : 02-6919-1095
발행인 : 오정현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은홍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홍  |  사업자등록번호 : 214-88-27116  |  통신판매업신고 : 제01-2602호
Copyright © 2018 Christianity Today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