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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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에 대하여
  • 박명철
  • 승인 201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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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영화  대립군, 2017, 한국, 정윤철 감독, 이정재 여진구 주연

 

옛선현들은 지극히 간절한 마음, 그래서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치곡’致曲이라 하고 이 마음을 바탕 삼아 단단히 무장하여 살아가기를 바랐다.

최성현 작가는 영화 〈역린〉에서 〈예기〉 ‘중용’ 23장을 정조 임금의 간절한 다짐을 담아 이렇게 풀어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其次 致曲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曲能有誠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誠則形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形則著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著則明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明則動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動則變

변하면 생육된다. 變則化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唯天下至誠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爲能化

 

세상을 바꾼 정조의 천하지성天下至誠은 곧 간절함이었다고 풀이한 셈이다. 실제로 정조는 〈예기〉 ‘중용’을 즐겨 읽었다. 정조의 통치는 실로 간절한 염원들이 점철된 시간이었다.

나는 성경에서도 자주 이런 간절함의 기록을 접한다. 역대하 31장 끝부분에 기록된 히스기야 임금의 시간에 대한 설명도 나에게는 간절함의 마음으로 읽힌다.

그는 주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

무엇보다 간절함의 정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응축되어 있다.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는 겟세마네 기도가 그러하고, 십자가의 한마디 한마디가 또 그러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간절함들이 그곳에 응축되어 있는 것 같고, 이 간절함이 핵폭발처럼 터져 나와 마침내 부활의 아침을 열었다고 나는 믿는다.
 

대립군軍 또는 대립군君

전쟁이 나자 늙고 겁 많은 임금은 백성과 사직을 내버려두고 피란을 떠나기에 바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들을 대신 보냈다. 임금은 아들에게 “이제부터 네가 전쟁터의 임금이다” 하고는 조정을 나누어 주었다. 아비인 임금의 말은 ‘가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싸가지 없었다.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는 어린 임금은 졸지에 ‘목숨받이’ 신세가 된 셈이었다.

전쟁의 땅에서 어린 임금은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화살이라도 날아들면 새파랗게 질린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임금의 보위는 위태롭기보다 안쓰러웠고, 제 처지를 알지 못하는 임금은 백성들에게 짐이거나 폐일 뿐이었다. 적의 위세에 압도당하여 이미 전쟁의 판세가 기울어져버린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의 경계는 지엄하지 못하였다. 그 경계를 세우는 일 또한 어린 임금의 몫이었으나 대신들은 늙고 교활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에서도 어린 임금을 조종하며 제 앞날의 입지를 다지기에 급급했다.

전쟁이 휩쓸고 간 나라의 백성들은 도망 다닐 힘도 없이 배고프고 피로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만백성의 아비인 체 하며 거들먹거리던 임금이 정작 아비로서 백성을 지켜야 할 때가 되니 제 살 궁리에 눈이 뒤집혀 도망을 쳐버렸으니 어느 백성이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키려 할 것인가. 아무도 아까운 목숨을 나라를 위해 내던질 리 만무했다. 전쟁터에 불려나온 이들은 밥벌이를 위해 누군가를 대신하여 나와 있을 뿐이었다. 사지에 불려나온 그들의 처지도 딱했으나 그 와중에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으니 차라리 오감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름 하여 ‘대립군’代立軍이라 불리는 그들의 대립질에는 혼과 눈물이 고일 리 없었다. 대립질을 하다 혹여 목숨을 버린다면 그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전황이 급하면 지키는 이의 눈을 피해 도망하기 일쑤였다.

간절함을 빚고 벼리는 일에 대하여

임금의 권세가 오롯하지 않은 전쟁터에서 철없고 어린 임금은 군왕의 길을 배워나갔다. 자신이 보기에도 보잘것없는 군왕의 존재, 그런 자에게 밥 한 그릇을 올리고자 목숨 같은 땀을 흘리는 백성들의 수고를 목도하고 나서야 어린 임금은 비로소 책에서만 읽어 온 ‘애민’愛民의 간절함에 눈을 떴다. 군왕이라면, 만백성이 아비라 부르는 임금이라면 마땅히 애민으로서 모든 시간을 부지런히 살아야 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지금 어린 임금은 백성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백성들의 고단한 시간을 위로해주고 싶으나 마땅한 게 없다. 그러자 어린 임금은 군왕의 체면을 훌훌 내던지고는 스스로 광대가 되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임금의 춤사위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구슬프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카메라는 천천히 임금의 춤을 지켜보는 백성들의 놀라움과 어린 임금에 대한 감정,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만감의 변화를 읽어간다. 어린 임금은 그렇게 제 처지를 깨달으며 임금이 서야 할 자리로 성큼성큼 스며들었다.

이제 어린 임금은 삶과 죽음이 맞닿은 전쟁터에서 비로소 간절한 소망 하나가 생겼다. 희망을 담을 만한 그릇 하나를 빚는 듯했다. ‘나는 살아서 왕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담아낼 그릇이었다. 희망이 아름다울수록 간절함은 더욱 깊은 법이다. 아니, 아름답지 않은 희망을 담아낼 간절함이란 처음부터 없는지 모른다. 어린 임금에겐 이것이 운명으로 내려앉았다. 비록 죽는 편이 쉽고 덜 구차한 길일지라도 끝내 살아서 이루어야 할 꿈, 더 이상 백성들이 대립질 같은 절망에 내몰려 개죽음을 당하는 일만큼은 없게 만들어야 했다. 자신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 내리며 어린 임금은 무당처럼 몸서리를 쳤다.

어린 임금은 자신을 향해 휘몰아쳐오는 두려움과 수치와 비굴함 앞에서 비로소 맞서고자 한다. 백성들은 “저하, 아무리 힘들어도 걸어가야 합니다”라고 어린 임금의 등을 떠밀었다. 운명처럼 절박한 임금의 간절함 앞에서 비로소 백성들도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누군가를 대신하여 불려나온 사람들이 아닌, 내 가족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내가 아끼는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나의 자존감을 위해 백성들은 소리쳤다.

“이제 우리를 위해 싸우자!”

비로소 나라도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절한 시간을 기억하고자 한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추억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이 가져오는 과거는 왜곡되거나 부정확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마모되고 찌꺼기가 쌓이더라도 여전히 섬세한 촉수를 내린 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

누군가의 이론처럼 사람은 자신이 어느 특정한 시간에 경험한 그 경험의 척도로써 가치를 결정하고 선악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 특정한 시간이란 다름 아닌 ‘간절함’에 목말랐던 시간일 것이다. 하여 누군가의 기억을 접한다는 건 어쩌면 그가 살아온 간절한 삶에 대해 묵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이런 묵상들이 가져다주는 유익이란 것도 삶을 모름지기 간절함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새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언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간절함’일 것이라고. CTK 2017:7/8
박명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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