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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세계로!하나님의 미학 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송길원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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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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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IETERMEYRL / ISTOCK

도시로 취업과 공부를 위해 떠난 아들, 어느 날 어머니 부음 소식을 듣는다. 허겁지겁 내닫는다. ‘어~~무이!’ 소리와 함께 엄마 앞에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는 차가운 시신에 놀라 자빠진다. 기절이다. 눈을 뜬다. 바로 그 순간, 말없이 시신을 매만지고 있는 목사님을 쳐다본다. 소스라쳐 놀라 나자빠진 자신과 달리 주검도 두려워 않는 목사님이 경이롭다. 고개를 돌린다. 헛구역질이 나온다. 시신에서 풍겨난 냄새로 속이 매스껍다. 염습을 하는 목사님의 표정은 어찌 그리 평화로운지… ‘감동’이 밀려온다.

어디 이 뿐일까? 영어학원이 생기기도 전 교회는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교회를 찾았던 이들이 믿음에 눈떴다. 드넓은 세계를 꿈꾸었다. 다들 어설픈 영어실력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들이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을 이끌었다. 배고픈 서민들에게는 군수물자를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복지관의 전형이었다. 모든 이들이 교회를 통해 ‘유익’을 누렸다.

교회? ‘재미’로 넘쳐났다. 크리스마스이브가 그랬다. ‘원 리틀, 투 리틀, 쓰리 리틀 인디언…’ 밤새 포크 댄스에 선물교환에…. 문학의 밤은 또 어땠는가? 거기다 성가연습은? 문학의 밤을 주관했던 이들이 소설가가 되고 시인이 되었다. 성가대에 앉아 변성기의 목소리를 가다듬던 이들이 국제 콩쿠르의 상을 휩쓸고 있다.

‘감동’ ‘유익’ ‘재미’ 이를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미학의 3요소라 했다. ‘천국 같은 가정, 가정 같은 천국’은 어떻게 찾아올까? ‘미학을 머금고’ 온다. 누가복음 15장이 그 전형이다.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이 집에 들어선다. “그 많은 재산은 어찌 되었느냐?” “어쩌다 이런 몰골로 돌아오게 되었느냐?” 아버지는 아들을 허물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다. 아들은 놀란다. 형벌 받아 마땅한 자신을 이렇게 환대하다니…. 아버지는 아들의 헤어진 옷을 보신다. 속살이 드러난 아들, 아버지는 그 수치를 가려준다. ‘감동’이다. 헤어진 옷만이 아니다. 아들의 배고픔을 아신다. 주린 배를 채운다. 돼지 쥐엄 열매도 사치스러웠던 아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내놓는다. 아들에게 주어지는 ‘군수물자’다. 이번에는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까지 끼운다. 신분의 회복이다. 풍성한 ‘이로움’이다. 그리고 선언한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문제는 이런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아들이 있다. 큰 아들이다. 그의 행위는 아버지의 미학, 아름다움에 대한 도전이다. 아버지의 한없는 아름다움과 달리 추하기 그지없다. 무엇이 ‘추’醜일까? 한자어를 곱씹어 보라. 술 ‘주’에 귀신 ‘귀’다. 귀신도 끔찍한데 술까지 쳐(?) 먹었으니 ‘개구신’(九神, 아홉 귀신)이 된다.

미학이 무어냐고 묻는다. ‘미적인 것’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학문’으로 정의된다. 성경은 미학의 본질을 이렇게 드러낸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종교개혁가 칼뱅은 말한다. “우리의 눈앞에 창조가 훤하게 펼쳐 있다. 우리의 발은 하나님의 땅을 딛고 서 있으며 우리의 손은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작품을 만지고 있다. 우리는 풀과 예쁜 꽃들의 달콤한 향기를 흠향하며 충만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즐거워한다.”

칼뱅은 자연 세계를 일러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라 했다. ‘조화로운 자연 질서에 대한 경탄, 하늘의 별들의 위대함과 아름다움, 우아한 전경, 동물과 식물 세계의 풍성함에 대한 기쁨… 이런 자연세계가 칼뱅에게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미학을 신론의 위치로 끌어 올린 이가 칼 바르트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의 성경적 언어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1-4)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로마인들에게 편지하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단호했다. ‘아름다움의 본체이자 아름다움의 형상을 알지 못하는 것이 죄다.’ 따라서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보다 ‘당신은 하나님의 미美에 미치지 못합니다’ 또는 ‘알지 못합니다’는 말이 맞다.

어떻게 하면 죄에서 떠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하면 탄식을 멈추고 노래하며 살 수 있을까? 그분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탐사하는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하는 내내 하나님이 내게 물어오셨다.

 

쏟아진 폭우가 시내가 되어서 흐르도록 개울을 낸 이가 누구냐?

천둥과 번개가 가는 길을 낸 이가 누구냐?

사람이 없는 땅, 인기척이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가 누구냐?

메마른 거친 땅을 적시며, 굳은 땅에서 풀이 돋아나게 하는 이가 누구냐?

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누가 이슬방울을 낳기라도 하였느냐?

얼음은 어느 모태에서 나왔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을 돌같이 굳게 얼리는 이, 바다의 수면도 얼게 하는 이가 누구냐?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를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성좌를 묶은 띠를 풀 수 있느냐?

네가 철을 따라서 성좌들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큰곰자리와 그 별 떼를 인도하여 낼 수 있느냐?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

(욥38:25-33)

 

이번에는 내가 내게 묻고 또 묻는다.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가?

부서지는 파도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가?

갓 태어난 아기의 해맑은 눈동자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가?

장미 한 송이 혹은 영화나 책에 등장하는 인물, 아름다운 노래, 계절의 변화 가운데서는?

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또한 맛있는 음식과 감미로운 대화에서 그분을 맛보지 않는가?

 

휴가철이다. 그분이 나를 당신의 ‘영광’의 세계로 부르고 계신다.

“열심히 아파한 당신, 떠나라!” CTK 20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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