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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보여준 최악의 역기능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 무익해서는 안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  |  Miroslav V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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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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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패의 요인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런 그가 수만 명을 상대로 수억 달러가 걸린 대규모 사기행각의 주동자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그리스도인 경영자가 연루된 수많은 비리가 있었다. 왜 이들의 신앙이 범죄를 막지 못했을까? 그들의 신앙이 보기 좋게 참패한 데는 최소한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

첫째는 '유혹의 손길'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경제계의 비리는 결혼생활의 외도나 학계의 무단표절에 비할 수 있다. 심지어 높은 도덕 기준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도 굴복하고 만다. 예로부터 인류는 유혹에 쉽게 넘어갔지만 유혹을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들도 많다. 고결한 인품을 갖는 것이 도덕적 지식을 쌓는 것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었던 아담과 하와처럼, 로마서 7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는 알면서도 악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해서 죄를 범한다. 인격이 뒤틀리면 신앙은 무익해진다.

두 번째는 '조직의 힘' 때문이다. 유혹의 손길에 조직력이 더해지면 그 효과는 배가된다. 어느 조직이든 상관없다. 아이디어 시장이든, 재화와 용역의 시장이든, 정치계나 매스컴이나 모든 조직은 힘을 갖고 있다. 100여 년 전 막스 베버는 현대 시장을 ‘철장’에 비유했다. 시장 원리에 따라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므로 결국, 도덕적 양심이 아닌 이윤추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여러 분야에서 그곳만의 내부원칙을 따라야 하는 현대인들은 결국 이중적인 삶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이중적 삶의 유혹을 경험한다.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들은 자신의 굳은 신념에 배치하는 사회 규범을 거부한다. 이들은 자기 영혼의 성역이나 사적인 공간,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서 일상 업무를 볼 때에도 믿음의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세 번째로 '잘못된 신앙관' 탓이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며, 특히 기독교 신앙을 꼬집었다. 즉, 종교는 인간을 현실과 격리시키고 천국의 이상론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진정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앙이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각성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을 진정시키거나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약물 역할에만 그친다면, 사실상 그 신앙은 기능 불량인 것이다.

물론 성경이 ‘구원’과 ‘축복’이라는 신앙의 양대 기능을 대략 수행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구원의 믿음은 몸과 영혼을 회복하고, 내면의 상처와 좌절을 치유한다. 축복의 믿음으로 힘을 얻어 능력과 집중력과 독창력으로 맡은 일을 훌륭히 수행한다.

하지만 믿음이 치유하고 힘을 주는 역할만 한다면, 삶의 방식이 아니라 아픈 다리를 의지하는 목발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세상에는 그런 식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많다. 뉴에이지 운동을 비롯해서 다양한 종류의 신비주의 신앙이 그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종류의 신앙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합당한 역할을 하고, 그 길을 인도하며, 걸음마다 의미를 부여해준다. 우리가 신앙을 품을 때(즉,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실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이 인류를 상대로 펼치시는 대서사극에 초대되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 들어설 때 믿음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고, 피해야 할 어두운 길을 경고해준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사소한 일부터 막중한 큰일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서사극에 따라 일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일은 의미 있으며, 금처럼 빛나며 길이 남을 것이다. 혹여나 하나님의 대서사극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일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게 지푸라기처럼 타버릴 것이다. 그 일로 생애 최고의 흥분과 만족을 느꼈다 하더라고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기독교 신앙이 무익해서는 안 된다. 의사에서 청소부까지, 회사 중역에서 예술가까지, 주부에서 과학자까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쓰시는 대서사극에 참여해야 한다. 대서사극의 기본 원리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함은 물론, 사람들의 인격도 올바로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계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우려스럽다. 

강압적인 믿음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가장 귀하고 소중한 개인의 자산이자 사회의 자산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특정한 이해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익에 손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무익한 신앙이 오히려 다소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적극적인 신앙을 두려워한다. 샘 해리스Sam Harris종교의 종말(한언 역간)이라는 책에서 “성경은 삶을 망치는 횡설수설로 가득 차 있다”고 기독교를 악평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아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생명 파괴적인, 사회에 해악이 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탱크에 올라 탄 한 세르비아인 병사는 자축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손가락 세 개는 성삼위 하나님을 상징했고 자신은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들에게 속했다는 뜻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가 살인기계나 다름없는 탱크에서 승리를 자축하게 된 데에 신앙이 정당성을 부여했다. 피에 굶주린 전쟁론이나 국수주의를 합법적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그 병사 혼자만은 아니다. 그들과 맞서 싸운 크로아티아 병사들도 같은 짓을 했고, 십자가와 애국심을 동일시 여긴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피눈물의 흔적만을 남긴 과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과 악을 규명하려는 엄청난 싸움을 하려 한다면, 기독교와 주요 타종교 간의 폭력 사용은 불가피하다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악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보다 더 심각한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모든 싸움이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이지는 않다.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유일신을 숭배하는 일신교일수록 세상을 ‘우리’(참 하나님을 숭배하는 자들)와 ‘그들’(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로 철저히 구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온갖 잡신을 숭배하는 다신교 역시 ‘우리’와 ‘그들’로 구분하는 것은 일신교와 마찬가지다. 만일 종교 영역에서 진리의 문제를 배제한다면 다양한 신들의 주장을 판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유혈충돌밖에 없다. 무신론자들도 스탈린과 마오쩌둥과 폴포트의 무자비한 정권을 저지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단순한 일신교가 아니다. 특히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의 역사가 만나는 사실은 인류 번영의 가장 큰 자산이다. 비평가들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하나님이 아들을 학대한 것으로 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신 것이다. 하나님의 그러한 행위는 인간 서로 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인 것이라고 신약은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전부 하나님이 원수를 죽이는 것뿐이라고 비평가들은 비난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절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수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와는 반대로 순교자들, 즉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신다.

폭력자들은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이들이 말세에 임하는 사랑의 세계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폭력’은 이 같은 배제의 심판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평강의 신앙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종종 폭력을 휘두르는 걸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주로 신앙의 무익함과 연관이 깊다.

첫째, 약한 믿음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명령에는 충실하지만 그 명령을 수행하는 방법과 과정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설득을 방법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전문 보기: 교회가 보여준 최악의 역기능]

Miroslav Volf The Church's Great Malfunctions CT 2006:10; CTK 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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