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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을 주기도문 되게
송길원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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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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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질 것이 터졌다’ 살충제 달걀을 놓고 하는 말이다. ‘밀집 사육’ ‘공장 형 축산’이 가져온 재앙이다. 0.05㎡, 이는 산란계 한 마리의 적정 사육 면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0.062㎡다. A4용지보다 작은 면적이다. 닭이 날개라도 펼치려면 최소 0.065㎡가 돼야 한다. 날갯짓을 하려면 0.198㎡가 필요하다.

가두어 키우지 않고 방사를 하게 되면 닭은 ‘모래 목욕’을 한다. 몸에 붙은 이물질이나 기생충을 스스로 없앤다. 태아가 출산의 천재이듯 닭도 방역의 천재다. 그런데도 인간의 우매함이 살충제 살포라는 극약 처방을 썼다. 닭들이 비웃는다. ‘닭대가리들 아녀?’ 그것도 모자라 피프로닐을 썼단다. 피프로닐이 뭔가? 간이나 갑상선에 영향을 미친다. 체내에 흡수되어 해독작용 기관을 모조리 망가뜨린다. 끔찍하다.

난, 살충제 달걀에서 ‘주기도문’의 신세(?)를 보았다. 모래목욕은커녕 일생을 누워보지도 못한 채 서서 알만 낳다 죽는 닭의 짧은 인생, 주기도문도 그렇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므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축도를 할 수 없을 때 끼어드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꿩 대신 닭’이다. 그것도 모자라 ‘암송’이다. 그러는 동안 주기도문은 ‘주문’이 되었다. 펄펄 살아 숨 쉬어야 할 주기도문의 숨통을 조였다.

빅토르 쉬클로프스키가 말한 그대로다.

“결국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파도의 속삭임에 익숙해져서 그들은 그것을 듣지 않는다. 이런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우리도 우리들이 말하는 언어를 거의 듣지 않는다.…우리는 서로 바라보지만(look)우리는 더 이상 주의 깊게 쳐다보지는(see)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시들어 버려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한 인정(recognition) 뿐이다.”

주기도문은 어느 사이 형해화形骸化 되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기력해졌다.

그 뿐이 아니다. 주기도문은 사라지고 아기도문我祈禱文만 남았다. 주기도문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의 모습을 본다.

하늘에만 계세요. 나의 아버지.

제 이름이 유명히 여김을 받게 하옵시며,

나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시오며 뜻은 하늘에서만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나에게 3대가 먹어도 남을 만한 양식을 주옵시고,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못할지라도 나의 죄는 사하여 주옵시며,

시험에 들 때나 악할지라도 꼭 구하옵소서.

대개 이 땅의 권세와 영광이 나에게 영원히 있사옵니다. ‘나만!’

‘아멘’ 대신 ‘나만!’ 요새 신세대의 표현대로 ‘헐’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졌다. 주님은 뭐라 하실까?

또 있다. 주기도문은 언제나 ‘물구나무서기’다. 웬 뜬금없는 소리냐고?

사뿐하게 이륙한 비행기가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방 착륙할 줄 알았던 비행기가 공항을 맴돈다. 승객들은 불안하다. 착륙시간을 훌쩍 넘겼다. 시계를 들여다본다. 두리번거린다.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그 때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사람들은 숨죽여 듣는다.

“승객 여러분, 지금 저희 비행기는 바퀴의 오작동으로 비상동체착륙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안전벨트를 매시고….” 기장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이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있다.

“오 마이 갓!” 그러고는 탄식처럼 쏟아내는 말이 있다. “살려 주세요!” 순간 공포가 밀려온다. 짧은 순간 죽음이 떠오른다. ‘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이 3인칭의 죽음(그, 그녀. 즉 누군가의)이 1인칭(내가)의 죽음으로 바뀐다. 몇 차례나 착륙을 시도하다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웅성거리는 승객들, 사람들은 이 때 딱 떠올리는 것이 있다. “용서하여 주세요!” 그 동안 지었던 죄가 떠오른다. 이대로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기도는 절절해진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아,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어야 하는데….’ 시간은 점점 가슴을 옥죄어 온다. 그 때 다시 떠오른 것이 있다. “재산 좀 미리 정리해 둘 걸….” 자식 놈들이 생각난다. ‘저 녀석들이 (굶지 않고) 잘 살아야 할 텐데….’

어떤가? 주기도문은 순서가 있다. ‘아버지’로 시작해 ‘거룩’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양식’과 ‘용서’와 ‘보호’로 이어진다. 그런데 한 순간 주기도문은 뒤집힌다. 물구나무서기다.

주기도문이 도대체 어떤 기도인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첫 질문이 있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은 답하지 못했다. 주님이 모법 답안지를 들고 오셨다.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정확하게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가리킨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7-18) 그러니까 ‘자녀’의 자리에 있으란다. ‘깐죽대면 안 된다. 까불거려서도 안 된다. 건방 떨지 말아야 한다.’ 왜? 아버지 앞이니까. 그리고 거룩의 자리에 늘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해야 한다. 이게 주기도문이다. 포지셔닝이다.

산상수훈이 우리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이 내미신 축복의 반지라면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정중앙에 박힌 보석이다. 151자의 글자로 세공된 약속이 있다. 보증이 있고 꿈이 있다. 그 깊은 의미를 알게 된 사막의 교부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에 며칠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하지 않던가?

주기도문을 우리의 편견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주기도문을 풀어놓아야 한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11:44)

종교개혁 500주년, ‘주기도문을 주기도문 되게’ 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CTK 2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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