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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2017년 9월, ‘무척산 기도원’ 가는 길
박명철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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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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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신대학교

남 김해시 생림면 생철리에 위치한 무척산無隻山은 이름 그대로 주변에 짝을 이룰 만한 높이의 산이 없을 만큼 높은 산이다. 해발 700미터 높이의 이 산은 금강산처럼 기묘한 바위들과 깊은 계곡이 있어 산세가 험하다.

버스에서 내리면 곧장 가파른 경사길이 시작되어 숨이 턱 막힌다. 무척산은 첫 인상부터 그리 친절하지 않다. 걸음에 속력을 낼 수 없어서 낑낑거리며 20분 쯤 걸어 오르면 포장된 찻길이 끝나고 좁은 등산로 입구가 열린다. 이제부터는 산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만들어준 지그재그 길을 사다리를 오르듯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여름이 기울었으나 더위는 여전해서 등허리가 흠뻑 젖었고, 얼굴에선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헉헉거리며 한 시간 쯤 아무 생각 없이 오르면 어느 샌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요란한 물소리가 주변의 소리란 소리들은 모두 삼켜버린다. 폭포다. 거대한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 이 깊고 높은 산속 어디에 저토록 많은 물이 고여서 이처럼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지 의아하고 신비롭다.

폭포를 만든 비밀은 산정에 펼쳐진 못이었다. 백두산의 천지나 한라산의 백록담을 줄여서 옮겨놓은 듯한, 아담하고도 신비로운 못. 이름도 ‘하늘 못’ 곧 천지天池이다. 어찌 생겼을까? 가야 수로왕 국장 때 장지에 물이 고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산에 못을 파서 물을 담자 더 이상 고이지 않았다. 그때 판 못이 천지라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천지 아래로는 수로왕이 어머니를 그리면서 지었다는 모은암母恩庵도 있고 보니 여기는 온통 철의 나라 가야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참 머나 먼 시간을 품은 못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하늘을 담아 온 그릇인 셈이다.

무척산기도원은 하늘 못 천지를 빙 둘러서 자리하였다. 돌로 지은 예배당을 지나 산책로를 걸으면 숙소와 식당과 밭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이 높은 산으로 식재료나 이런저런 물건들을 등에 지고 오르내리는 당나귀 두어 마리가 가끔 울어대면 까마귀와 또 이름 모를 새들이 정적을 깨며 울어줄 뿐 이곳은 그야말로 인적이 끊어진 세상하다. 햇살이 기우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은 캄캄해지고 하늘에선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인다.

나는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 홀로 서 있다. 고요하고도 캄캄한 여기에 서기까지 돌아보니 오랜 시간과 수많은 일들이 흘러갔다.

대학에 다닐 때였으니 30년도 더 지났지 싶다. 누구의 소개였는지 몰라도 여름이 기울고 가을이 올 무렵 나는 홀로 몇 차례 버스를 갈아타면서 산속 깊은 기도원을 찾았다. 태풍이 지나가던 날 밤이었다. 나무들이 바람을 맞아 꺾일 듯 흔들렸고, 계곡을 흐르는 물도 사납고 거셌다. 처음 가는 낯선 길, 그러나 아무도 동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돌아갈까 싶은 후회가 솟구쳤다.

대체 그 나이에 나는 어떤 문제를 안고 그런 길을 나선 것일까? 지금이야 ‘뭘 그런 일로’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때로선 아마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큰 문제였으리라. 마치 어릴 적 그렇게 커보이던 산이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보면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한 것처럼….

사나운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리는 작은 기도원에서 나는 기도를 하다가,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고, 그러다가 밖으로 나가 어둠 속을 산책하고 다시 들어와 기도하고 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눈앞의 십자가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새벽을 맞을 무렵이 되어서야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여전히 태풍이 물러간 뒤의 흔적처럼 물소리만 크게 들릴 뿐이었다. 지난밤 그렇게 바람이 부는 가운데도 누군가 방언으로 찬양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간절하고 아름답던지, 오래도록 귀에 남아 울렸다. 아침 해를 안고 내려올 때 길가에서 꽃 몇 송이가 환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는 나팔꽃, 찌는 여름을 건너 무서운 태풍이 지나는 밤까지 견디어 낸 뒤 비로소 피어난 그 찬란한 꽃이, 그야말로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지 않았다. 산은 멀었고 삶은 분주했다. ‘천지’라는 못이 하늘을 담아 푸르던 그 시각, 나는 무엇을 담아서 그리 멍들었는지 내 안의 푸른 상처는 내가 살아온 시간 내내 곪고 곪아서 결국 피도 물도 아닌 고름으로 터져 흘렀다.

그러므로 무척산에 오르는 일은 곧 그 푸른 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반성인지 모른다. 무척산은 2014년 4월부터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엔 반가운 사람들을 맞고 있다. 고신대 총장을 비롯한 교수들과 학생들이 이곳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방문은 어느새 무척산기도원의 다른 이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무척산기도원을 지켜온 송은파 전 원장이 고신대에 기도원의 운영을 넘겼다. 송 원장은 고신대에 기도원을 기증하고, 고신대는 송 원장으로부터 기도원을 인수하였다. 고신대는 송 원장에게 그 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이름이 ‘고신대경건훈련원’이다.

 

   
 

무척산에 오르다

고신대는 왜 무척산기도원에 오르고자 했고, 기도원은 고신대에 소유권을 넘겼을까? 여기에는 오래된 사연들이 역사가 되어 쌓여 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대동아공영”의 야욕을 키워가던 일제는 이제 하나의 사상을 목표로 1935년부터 식민지 조선의 모든 학교가 신사참배를 하도록 명령했다. 엄혹한 명령 앞에서도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여러 학교들이 이에 저항하였고, 결국 폐교되기에 이르렀다. 숭의학교와 숭실학교가 대표적이다. 일제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잔인하고 무도한 제국의 강요 앞에서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뜻에 따라 순응하기로 결정했다. 감리교회를 비롯해 개신교 교단들도 하나둘 무릎을 꿇어갔다.

바로 그 무렵인 1938년, 부산의 삼일교회에서 목회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롯해 밀양 예림교회 윤술용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등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조선 그리스도인들이 결연히 일어나 일제의 탄압에 맞서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그들의 뜻을 지켜나가고자 무척산에 올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다. 목숨을 건 이들의 기도를 지원하고자 다른 목회자와 성도들이 식량을 지고 무척산을 오르내렸다. 세 사람은 무척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며칠 동안 기도에 전념했다. 무더운 여름밤, 풀벌레들과 날벌레들 속에서 세 사람은 목숨을 건 출사표를 준비한 셈이었다.

무척산에서 내려와 부산 수영 바닷가에서 다시 기도회를 가질 때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성도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마치 성령을 받아 용감하게 예수를 증언하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에는 출석은 물론 연보도 하지 말자고 권고하면서 오히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교인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검속이 강화되었고, 결국 주동자들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예정된 옥살이인 셈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출옥한 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시무하였고,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부산에 머물던 중 박윤선 주남선 등과 신학강좌를 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고신대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므로 무척산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에 저항하던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던 자리인 동시에 예장 고신 교단의 뿌리를 이루는 터이기도 한 셈이다, 이곳이 오늘날의 무척산기도원이 되었고, 무척산기도원이 그 명성을 얻기까지는 누구보다 명향식 전도사의 남다른 행적을 빼놓을 수 없다.

   
2016년 6월, 고신대학교 경건훈련원이 무척산기도원 인수 감사예배 후 가진 기념촬영. 손봉호, 강영안 교수도 함께했다.

명 전도사는 해방 후 유명한 부흥강사로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명 전도사는 한국전쟁 중에도 여러 교회를 방문하여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1953년 부산 자성대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에 한 신도로부터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신사참배 반대가 일어나던 때 목사님들이 산에 숨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셨어요. 우리는 그분들의 밥을 해드렸어요.”

명 전도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감동하여 “우리도 그곳에 가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명 전도사의 딸로 얼마 전까지 무척산기도원을 지켜온 송은파 전 원장은 처음 기도원이 잉태되던 그 시기의 이야기를 소상히 전해주었다.

“그 이튿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트럭을 대절하여 어머니를 비롯해 여러 성도들이 쌀 소금 고춧가루 깨소금 초 성냥 담요 등을 머리에 이고 무척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 보니 깊은 연못이 있고 산중턱에 암자 한 채가 있으며, 숯을 굽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우선 저녁을 지어 요기를 하는데 밥 위에 소금 깨소금 고춧가루 등을 뿌려 비벼먹는 맛이란 무엇에 비할 바가 없었겠지요. 저녁이 되어 예배를 드리는데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던지 다들 일어나 춤을 추고 산에 흩어져서 기도를 했대요. 내려올 땐 모두들 은혜가 충만하여 가져간 보따리를 이고는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명 전도사는 자주 무척산을 찾아 기도회를 가졌다. 은혜는 날로 더욱 새로웠고, 이 은혜를 모두가 받아야 한다며 1953년에 무척산 천지 옆으로 버려진 절간을 보수하여 작은 교회당을 지었는데 이곳이 오늘의 무척산기도원이다. 명 전도사는 무척산기도원 초대원장으로 1979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25년 동안 수없이 이 산을 오르내리며 기도의 단을 쌓았다. 명 전도사는 무척산기도원을 거점으로 부산경남지역은 물론 타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말씀을 증거하며 부흥사로 활동했는데, 특히 고신대 이상규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예장 고신 교단의 큰 인물들 중에는 무척산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할 만큼 무척산기도원은 성지나 다름없는 장소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CBS국민일보가 한국 교회와 함께 펼치고 있는 ‘나부터캠페인’에 참여한 이성희 예장통합 총회장은 “나부터 돌아가겠습니다. 목사로서의 소명감과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는 운동을 나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자기 개혁의 과제를 밝혔다. 개혁이라면 당연히 ‘새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는 오히려 잃어버린 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중요한 가치들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러나 ‘돌아가자’는 메시지는 비단 한 개인의 고백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성장의 세월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상실해버렸다.

 

가슴을 잃어버린 머리,

여성을 잃어버린 남성,

자연을 잃어버린 문명,

일상을 잃어버린 진보,

 

그리고 이 모든 상실의 회복을 의미하는 소재로서 ‘무척산기도원’을 생각한다. 수도원운동을 상징하는 베네딕토가 머물렀던 몬테카지노가 해발 519미터의 산에, 그것도 이교도의 신전이 있던 곳에 자리한 것과도 생각의 끈이 이어진다.

이는 곧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야만 비로소 우리가 선 자리의 좌표를 알 수 있는 것과도 같다. 맞다, 돌아선다는 것은 후퇴가 아니라 벗어나버린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무척산기도원’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이다.

 

   
 

무척산을 살다

명향식 전도사는 191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넉넉한 집안이었으며, 외가의 경우 할아버지 대에서 대제학을 지냈고,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영특했다. 일제의 압제를 피해 부모를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스무 살에 사업가 청년과 결혼했으나 서른넷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두 아이를 키우며 재혼하지 않고 살았다.

명 전도사는 기독교를 만나기 전에 먼저 사회주의와 접하였다. 하얼빈에서는 여성동맹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김일성을 환영하는 군중대회의 환영사도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그는 이때의 일을 평생 부끄럽게 참회했다. 하얼빈에서 그는 또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여하여 기독교를 접하기에 이르렀다. 해방을 맞아 하얼빈을 떠나 국내에 들어왔고, 이때 공산주의를 버렸으며 서울에서는 사업이 번창하여 크게 일어났다. 그는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그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이 일이 잘못되어 가세가 주저앉고 말았다.

이 무렵 명 전도사는 신앙의 거대한 물살을 마주한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므로 목숨을 건 기도에 나섰다. 딸 송은파 전 원장은 이때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어느 집사님에게 청하여 김치움막을 빌렸어요. 가마니를 깔고는 죽기 살기로 기도했대요.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당신이 안 계시면 나도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기도를 했던 거예요. 사흘간 입에 물도 대지 않고 기도하는데 움막 입구에 환한 불빛이 비취더래요. 그런데 그 빛 가운데로 손 하나가 있어서 어머니는 혹시 예수님 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예수님 손이라면 못 자국이 있을 것이다’ 싶어 자세히 보니 손바닥에 못 자국이 있고, 그 위로 빨간 피 세 방울이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핏방울을 먹여주시더랍니다. 그때 어머니는 ‘주님은 살아계시며 나의 구주이십니다’라고 울며 고백했대요.”

명 전도사는 그 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살아가느라 평생을 보냈다. 1980년대 초까지 무척산기도원을 왕래한 사람은 3000명이 넘었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금식하며 기도했다. 누구보다 명 전도사는 40일 금식기도를 많이 하였고 곳곳에서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명 전도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잉태했다고 한다. 명 전도사의 설교는 성경의 글자로 머물지 않고 설교자의 삶과 인생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운처럼 드러났다. 마치 누군가의 표현처럼 “생나무 껍질을 벗기듯이” 강하게 다가왔고 청중들에게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누군가는 설교 중에 한 명 전도사의 간증을 오래 기억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어느 날 명 전도사가 감자밭에서 감자꽃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밭주인이 감자꽃의 목을 똑똑 잘라내어서 의아하게 생각한 나머지 “예쁜 꽃을 왜 잘라버리세요?” 하고 물었더니 주인이 “이놈은 꽃이 피면 뿌리가 자라지 못합니다. 지금이라도 꽃을 잘라내야 뿌리를 키울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꺾인 자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물방울이 맺혀 있어서 명 전도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가엾은 감자야. 꽃이 잘려 나가고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구나. 그동안 오래도록 모든 진액을 쏟아 예쁘게 피웠건만 주인 손에서 잔인하게 잘려 나가니 얼마나 아프고 섭섭하겠니. 그래도 참아라. 너는 숙명적으로 아름다운 꽃을 가질 수 없는 몸이다. 주인은 너의 그 화려한 꽃잎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뿌리를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이렇게 설교하듯 말했다고 한다.

“나도 내 청춘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단다. 그런데 내 주인 하나님은 그 꽃을 그냥 두지 않고 꺾어버리시더구나. 나의 그 고고하고 자랑스럽던 인생의 꽃이 잘려 나갈 때 그 아픔 견디기 힘들어 많이도 울었지. 그렇지만 내 인생의 꽃이 화려해지면 십자가의 의미가 사라져버린다는 거야. 그렇다는 걸 어쩌겠니. 아파도 참아야지.”

이처럼 명 전도사는 빛나야 할 것을 위해 빛나지 않아야 할 것을 어둠에 두려고 했다. 그의 삶은 그렇게 가려져 있어서 어쩌면 더욱 빛나는지 모른다. 무척산에서 살면서 어느새 자신의 삶조차 무척산의 영성을 살아간 삶이었다.

대신 그를 만난 많은 이들이 빛나는 십자가를 만났다. 누군가는 선교사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으며, 누군가는 목회자로 뜨겁게 사랑했으며, 누군가는 의사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다.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는 왕성하였다. 박명철 객원기자 CTK 2017:10
 

“우리는 지금 뿌리를 봅니다”

“총장에 취임했을 때 주위의 기대는 온통 경영능력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이사들 앞에서 저는 출마의 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물론 중요하지만 학교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을 키우는 일이 우선입니다. 머니 파워보다 맨 파워입니다.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좋은 일꾼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러자면 먼저 영적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영적인 가치를 올바로 세우는 일, 그것은 기도운동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는 지금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가야 합니다.”

전광식 총장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무척산이었다. 그곳에 고신의 뿌리인 무척산기도원이 있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신사참배에 맞서 목숨을 걸고 기도한 곳, 수많은 고신의 일꾼들을 배출한 곳,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우리는 2014년 4월 이후 매월 무척산기도원으로 올라갑니다. 오후 세 시까지 기도한 뒤 내려옵니다.”

전 총장은 얼마 전 중국의 지하교회 지도자들이 학교를 방문해서 한국 교회를 배우고자 할 때 “한국 교회의 진수를 보려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고는 무척산기도원으로 인도하여 여느 때처럼 토요일의 기도회를 그들과 함께 가졌다고 한다.

전 총장은 이 일이 무엇보다 고신대의 뿌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타히티를 두 번째 방문한 고갱이 자신의 유언이라고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1888년 작, D'où Venons Nous/Que Sommes Nous/Où Allons Nous)입니다. 보스턴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는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고 봅니다. 고신의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의 출발은 신사참배 반대 이후였고, 1980년대까지 우리는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고 목회자를 키웠어요. 그리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성을 확보했지요. 의대와 간호대를 비롯해 20여개의 학과가 생겨났어요. 여기서 다양한 인재들을 키워냈죠.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체성이 희석되었는데, 이제 이후로는 이 다양성의 토대에서 정체성 회복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70주년을 맞은 우리 학교의 고민입니다.”

무척산기도원을 인수하고 기도운동을 다시 일으킨 데는 바로 고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려는 전 총장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척산기도원은 우리나라의 어떤 기도원과도 다른 것이 차를 타고 올라 갈 수가 없어요. 한 시간 동안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해요. 그렇게 땀 흘리며 오른 끝에 우리는 비로소 기도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육체적인 치유와 영적인 치유를 맛보게 되지요.”

고신대는 무척산기도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부산 울산 경남지역 교회들이 이곳을 찾아 기도하도록 독려하고, 절기마다 다양한 집회를 개최하며 여름과 겨울에는 영적인 수련회의 장소로도 개방할 계획이다. 특히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 해외의 젊은이들을 초청하여 이곳에서 머물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고신대와 국내의 중요한 장소들을 여행하도록 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 이 영적인 장소에서 뜨겁게 기도하면서 이 나라의 교회를 위해 고민하는 대화의 자리도 만들어볼 예정이다.

“아마 이후로 우리는 무척산 선언이니, 무척산 심포지엄이니, 무척산 지도자대회니, 무척산 산상음악회니 하는 말들을 자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바라보는 일인 동시에 우리가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며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작업일 것입니다.” CTK

 

 

 

 

 

 


 

 

 

#종교개혁과 기도#기도#무척산 기도원#예장고신#전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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