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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함께하는 주기도문 산책
송길원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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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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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IPLESHIP]


첫 번째 선물

의료선교사 알렌이 1884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에 입국했다. 그래서 우리는 1884년이나 1885년을 한국 선교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보다 52년을 앞서고 53년을 앞선 선교사 입국이 있었다.

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귀츨라프(1803-1851)다. 1832년 7월 17일, 서양 선박 로드 애머스트호의 선의船醫 겸 통역관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최초의 통상 교섭을 위한 방문이었다. 1866년에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을 앞선 첫 발걸음이었다.

조선 순조 때인 1832년, 그는 끝내 쫓겨난다. 재미 신학자 옥성득 교수는 칼 귀츨라프의 한국 방문에 대해 이런 의견을 제시한다. “‘바닷가를 스쳐 지나갔을 뿐’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평가도 있지만(민경배), 귀츨라프가 일기에 썼듯이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한반도 땅에 뿌려졌으며(백낙준), ‘주님께서 작정해서 짚어 주신 날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으로 보는 관점이 그의 선교 방법론과 연관하여 더 바람직할 것이다.”

난 이렇게 말해 본다. “귀츨라프는 ‘실패’라 썼고 하나님은 ‘성공’이라 읽으셨다.”

그는 황해도 몽금포 해안을 거쳐 서해 고대도에 머물렀다. 고대도에 정박해 있는 동안 한국의 첫 선교사 귀츨라프가 한 일이 있었다.

문화 중계자이기도 했던 귀츨라프 선교사는 감자 재배법을 알려주었다. 가난에 찌든 우리 민족에게 다가온 하늘의 만나였다. 감자는 지금도 가난에서 건졌다는 의미에서 구황救荒 식품으로 불린다. 완전식품이다.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 민족을 그렇게 어루만지셨다. 포도재배와 포도주 담그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언어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홍주 목사의 서생書生 양씨의 도움을 받아 주기도문을 번역했다. 아쉽게도, 귀츨라프가 주기도문을 번역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주기도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다가온 선물인 이 주기도문에 하이패밀리는 ‘주기도문 영성의 길’로 답하기로 했다. (하이패밀리는 2012년부터 ‘주기도문 주일’을 지키고 있다. 7월 넷째주다.) 3만평의 부지위에 2100미터의 길을 5년에 걸쳐 조성했다. 굽이치는 길마다 작품이 놓여졌다. 그리스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부터 원로 토기장이 작가가 빚은 대형 도예 작품 십자가도 정상에 세웠다. 여러 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과 함께 걷다보면 산책길은 어느 사이 ‘걸어 다니는 화랑’이 된다.

“모든 산책은 발견이다. 산책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사물의 전체를 보게 된다.” 미국의 작가 할 볼랜드의 말이다. 산책을 통해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의 삶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산책길은 이야기로 넘쳐난다. 누군가의 일상의 평범하면서 비범한 이야기를 듣다 끝내 내 이야기를 쓰게 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의 일이다. 전쟁이 지루하게 끌려가면서 병사들은 피곤해 했다. ‘언제 가족들의 품에 돌아가게 될는지?’ ‘전쟁에서 과연 아군은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 편인가?’ 바로 그 때 링컨 휘하에 있는 장군이 링컨에게 다가가 묻는다.

“각하, 우리가 전쟁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인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이렇게 고달프지는 않을 텐데요.”

그 때 링컨이 말했다. “이 봐, 나는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에 대해 관심 없어. 하나님이 남군 편인가? 북군 편인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아닌가? 그게 중요해.”

그래서 우리를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다. 내가 서 있어야 할 첫 번째 자리는 ‘자녀의 자리’다.

성경은 이른다.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고후6:17-18)

아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 분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는가? 이래서 주기도문은 ‘신앙고백’이 된다. 첫 번째 신앙고백은 관계의 고백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장조를 보라. 모나리자를 들여다보듯 사람들은 얼굴부터 살피며 읊조린다. 수염 달린 하나님, 할아버지, 옷을 걸친 하나님과 발가벗겨진 아담… 그리고 서로를 향한 ‘눈빛’에 시선이 모아진다. 그러나 정작 놓치는 것이 있다. 서로를 향한 ‘손길’이다. 긴장이 느껴진다. 서로의 손가락이 맞닿을 듯 말 듯 불꽃이 튄다. 대체 저 공간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 걸까?

난 그것을 ‘기다림’이라 표현한다. 덥석 손을 낚아채지 않고 기다린다. 창조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겼다. 모든 동물은 암수로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은 달랐다. 동물들의 이름을 부여하도록 기회를 주신다. 창조의 작업에의 동행이다.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부여하며 발견한다. 다들 짝이 있는데 나만 짝이 없다는 것을. 이처럼 하나님은 아담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질문할 필요가 없는 동물들과 또 다른 관계의 설정이다. 숨을 돌리기 위해 바위에 걸터 앉아본다. 떠오르는 시편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시작해 ‘견디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지를.

성경은 이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소리. ‘아, 아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두 형제가 있었다. 배를 훔치려던 둘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분개한 그들은 둘을 가만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했다. 회의를 소집했다.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극한 주문부터 처음이니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잠잠히 듣고 있던 촌장이 입을 열었다.

“설령 저들의 한 짓이 크고 커도 그 목숨까지 빼앗을 자격이 우리에겐 없소. 그렇다고 충고만 하고 끝내기에는 너무나 중하니 도둑질을 했다는 표식을 남기면 어떻겠소. 저들이 지은 죄를 두고두고 후회하며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 형제의 이마에 ‘ST’가 새겨졌다. ‘Ship Thief’(배 도둑)의 머리글자였다. 사람들은 볼 때마다 ‘배 도둑’이라고 수군거렸다. 이마에 깊이 새겨진 스티그마stigma(낙인)는 큰 상처였다.

수치심을 견디기 어려웠던 형은 어느 날 야밤에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글자까지 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어디를 가도 ‘ST’가 따라다녔다. 궁금해서 묻는 사람들이 싫어 숨어 지내다 보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괴로움과 회한이 그의 마음을 짓눌렸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깊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하지만 동생은 어디를 가도 죄를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죄과를 달게 받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도 묵묵히 견디어 냈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간다. 사람들 역시 자기네 일에 바빠졌다. 관심은 희미해져 갔다.

동생은 하루하루 참회하는 심정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사람들은 동생의 모습에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도움을 청할 때면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그네가 그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한 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글자 ‘ST’를 보고 궁금해 묻는다.

동네 사람이 대답한다. “저 분은 우리 마을의 자랑이자 우리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지요. ‘저 분처럼만 살아라.’ 이마에 새겨진 글씨는 Saint(성자)의 약자랍니다.”

‘거룩’은 ‘몸부림’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떼제 공동체, 2005년 8월의 어느 날, 기도 시간이었다. 90세의 로제 수사도 함께 했다. 그 때 한 여성이 성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칼을 빼더니 맨 뒤에 앉아있던 로제 수사의 목을 찔렀다. 로제 수사는 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 젊은 수사 몇 명이 로제 수사를 업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착한 응급차에 싣고 병원으로 내닫는다. 로제 수사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범행을 저지른 루마니아 여성은 정신착란 상태였다.

성당 안에 남아있던 수사들은 차분하게 저녁기도를 마쳤다. 그들은 무엇을 간구했을까?

“주님, 저 여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찾아 나서는 떼제 공동체에는 떼제만의 영성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라고 할 수 있는 힘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래서 ‘도리질’이 아닌 ‘끄덕임’으로 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스코틀랜드, 남편을 잃고 아들을 홀로 키우는 엄마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버겁다. 끼니가 다가오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어느 날, 빈 밀통을 긁다가 울고 만다. 엄마의 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섯 살 난 아들이 엄마 옷소매를 붙잡고 묻는다.“엄마, 왜 우세요? 하나님이 엄마가 통 밑바닥을 긁어모으는 소리를 못 들으실까 봐서요?”

주님은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약속 앞에 무엇이 겁나랴?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감사를 드린다.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된다. 거기 자족의 정신이 함께한다. 어느 부자인들 하루 열 끼를 먹을 자 있겠는가? 아니, 양식을 구하는 기도 속에 우리의 꿈도 새겨진다. 나의 세끼 양식을 뛰어넘어본 일이 있는가? 나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감사할 식탁을 구할 때 비로소 나의 꿈도 자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눈물을 닦고 얼굴을 든다. 눈앞에 다가온 십자가, 십자가를 통해 세상(서종마을과 북한강)을 들여다본다. 그러고 보니 십자가는 ‘열린 십자가’였다. 십자가에 둘린 리본도 눈에 띤다. 위로와 치유의 상징인 리본이 어느새 ‘Re-Born’(재탄생)이 되어 있음을 안다.

동산을 내려선다. 이번엔 ‘깔딱 고개’가 가로막고 있다. ‘어떻게?’ 하는 순간, 손에 허브 정원에서 막 딴 애플민트를 건네준다. 딱 한 잎이다. 코에 가까이 댄다. 향이 뇌신경을 휘감아 돈다. 머리가 시원하다. 이번에는 폐부를 찌른다. 온 몸이 춤을 추는 듯 발걸음도 사뿐사뿐. 큰 숨 몇 번에 ‘깔딱 고개’가 ‘작은 둔덕’이 되고 만다.

이번에는 짧은 아포리즘 하나가 건네진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혀 떠나보낸다.”

요셉이 그랬다. 자기를 팔아 남긴 형제들에게 보복은커녕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창50:20-21)

인생의 깔딱 고개(죽음), 요셉의 고백(유언)이 절절하다. 할 수 있는 것을 다한다. 말 그대로 ‘다함’이다. 창세기는 ‘처음에’의 의미를 가진 책이다. 처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창세기를 보면 모든 답이 있다. 끝자락에 이르러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는 뜻밖에도 용서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 장면은 드라마틱하다. 요셉에게 와서 엎드려 비는 형제들, 요셉은 창자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형제들을 다독인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화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사명”이라 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떠날 것처럼 사랑하라.’ 요셉의 생애를 이보다 더 잘 요약한 말도 없다. 요셉의 마지막이 부러운 것은 왜일까?

청년이 한 신학자에게 다가와 묻는다. “언젠가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인가요?”

“그렇다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네.”

천국에 가기에 앞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워놓을 수 없을까?

다시 그림에 시선을 돌린다. 몬토파노의 십자가형이다. 두 강도를 옆에 두고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떠올린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성경이 이른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골3:13)

하지만 여전히 용서는 어려운 삶의 과제다. 용서를 어떻게 시작할까?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하는 일로부터 용서는 시작된다. 시작의 책, 창세기는 여전히 나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절, 노라 패릭스라는 교회 지도자가 있었다. 수색대를 피해 산으로 도망친다. 바위틈에 있는 작은 굴을 발견한다. 몸을 감춘다. 그도 안다. 수색대가 이 정도의 굴을 못 찾아낼 리 없다는 것을.

패릭스는 마지막 기도를 드린다.

“나의 생명을 받아 주소서.”

추격군이 동굴 입구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수색을 포기한다. 패릭스가 굴속에 있는 동안 거미가 바위 입구에 거미줄을 쳤다. 거미줄이 귀찮았던 수색대원들은 그곳을 피해 가 버렸다. 기적같이 생환한 패릭스는 이렇게 고백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돌 벽과 쇠문도 거미줄처럼 약하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거미줄도 철문보다 강하지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름다운 하늘과 땅과 강, 바이블 마운틴, 그리고 높은 곳에 대형 십자가. 흙 한줌 한줌이 1250도라는 고온을 견디어 낸 아트도자 벽화가 모여져 거대한 주님의 십자가 이루었다. 한 장 한 장 땀방울과 손놀림을 넘어서 혼을 보는 듯 또 하나의 삶의 완성이 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세워진 십자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유 받고 주님이 행하신 일 위에 기쁨과 환희의 찬양을 드리길.

그렇다. 주기도문 산책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송영頌榮을 올린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시104:1)

야간 산책길에서 한 참가자가 말했다.

“저는 내일이면 킬링필드라 불리는 캄보디아로 떠납니다. 한데 오늘 이곳 바이블 마운틴에 와서 주님의 부르심을 발견했습니다. 가서 킬링필드를 힐링필드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무엇으로?

‘십자가의 힘으로!’

   
 

“비계를 증오한다. 당신도 비계에서 몇 시간이고 누어 천장에 그림을 그려 보라. 물감이 붓으로 귀로, 입으로, 수염으로 떨어지는 꼴을 당해 보라. 저녁이 되어 비계에서 내려오면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미켈란젤로의 고백이다. 모든 창조에는 이렇듯 고통이 따른다. 산모의 고통처럼.

작품을 제작한 원로 도예 작가 윤석경 선생도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팠단다. 하지만 작품의 열정을 꺾지 못했다. 여름을 지나고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이어졌다. 눈물 나는 작업이었다.

작업장 돌뫼에 놓여있던 자식 같기만 한 작품, 어느 날 이것을 주기도문 프로젝트에 내놓기로 한다. “이 작품을 내 집에 두면 작품으로 남겠지만 기독교 성지와 같은 이곳에 두면 명품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마음을 받으셨을까? 햇볕 아래 반짝이는 십자가가 웃고 있다. CTK 2017:10
 

송길원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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