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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역사학자 마크 놀이 ‘오직 성경’의 올바른 사용법과 잘못된 사용법을 풀어내다.
마크 갤리  |  Mark Ga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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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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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은 500년 동안 프로테스탄티즘의 홀마크 같은 역할을 해 왔지만, 우리의 믿음을 “오직 성경”에 기초한다고 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신학적 콘텍스트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다른 어떤 종교개혁 교의보다도 이 교의에 교회 파편화의 책임이 더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의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CT 편집인 마크 갤리가 교회에서 성경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많은 학문적 이야기를 해 온 학자, 마크 놀을 인터뷰했다. (그는 최근에 노트르담 대학교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The Bible in American Public Life, 1492–1783(시작에 말씀이 있었다: 미국의 공적 삶에서 성경, 1492-1733)의 저자이며, 여러 학자들이 함께 쓴 Protestantism After 500 Years(500년 후의 프로테스탄티즘)에도 그의 논문, “Chaotic Coherence: Sola Scriptura and the Twentieth-Century Spread of Christianity”(카오스적 질서: 오직 성경과 20세기 기독교의 확산)이 실려 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오직 성경) 사상은 마르틴 루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사상이 그의 삶에서 드러난 것은 언제입니까?

이 사상은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및 교황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변호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는 가운데 나왔습니다. 그는 직접 성경에 기대어 그들을 논박했습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한 그의 이 드라마틱한 발언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이 “우리가 축하하는 주님의 만찬은 상징적 만찬이라고 오직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친다”고 주장할 때 긴장이 생겼습니다. 그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맞지 않다. 주님의 만찬에 관한 성경 구절은 성경의 다른 모든 구절들 및 과거 신학자들의 최상의 해석들과 연결해서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신학 전통들의 선택적 전용뿐만 아니라 해석학적 논쟁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직 성경, 이 사상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붙잡았던 것일까요?

‘오직 성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의 수준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사용하는 길을 열어준 해방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과 ‘만인 제사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오직 성경’은 내가 가령 스가랴와 이사야와 에스겔을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의righteousness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과 그 기준에 내가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은 성경은 열린 책이며, 최소한의 지능만 있어도 창조와 죄, 타락, 구속, 영적 성장,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 이런 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경’의 이와 같은 관점이 우리 삶을 바꿉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토마스 빌니Thomas Bilney라는 영국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연구하면서 혁명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로마서의 사도 바울을 읽고서 그는 오직 그리스도께 소망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이해를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헨리 8세 치하의 억압과 해방의 격동기에 그는 소환되어 책임추궁 당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집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될 거야.” 그는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것을 설교했습니다. 성경에서 그가 발견한 바로 그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헌신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와 같은 해방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은혜에 대한 성경의 큰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가톨릭교회의 공식 가르침도 이와 유사하다고 말해야 공정할 것입니다. 물론 가톨릭 교인들에게 이 메시지는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이것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직 성경’은 가장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선물입니다.

 

‘오직 성경’을 “카오스의 원천”이라고 하셨는데요.

‘오직 성경’에 대한 의존reliance이 의미하는 바를 몇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개인적 차원에 관하여 얘기했습니다. 그 다음 차원은 이것입니다. “이 구원의 메시지 안에서 신자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바울서신들, 복음서들, 그리고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도덕적으로 조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사용해 온 내용들로 넘쳐납니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세 가지입니다.”

세 번째 차원에서는, 성경은 사회를—경제, 의학, 교육, 기타 등등에서—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네 번째 차원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를 위한 성경’이라는 차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성경은 정치권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사회적 원칙들을 조직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지혜 왕 프리드리히 치세 하) 루터의 작센에서, (츠빙글리의 영도 하) 취리히에서, 통치자들은 분명하하게 성경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적 질서를 모든 사람들에게 강제했습니다. 그곳의 지도급 신학자들이 정의한 대로 말입니다. 청교도의 뉴잉글랜드는 기독교적 원칙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의 더욱 확실한 사례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변론할 때 성경의 장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원들을 통과할 때 ‘오직 성경’에 대한 혼란이 생깁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말할 때, 어떤 불일치가 발생합니다. “법, 군사적 갈등, 경제, 예술, 그리고 기타 공적 삶의 영역들을 조직할 때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이렇게 질문할 때 불일치는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전체 사회에서 성경적인 법을 가르칠 때 강압적인 힘이 가해진다면 그 불일치는 훨씬 더 커집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학자 브래드 그레고리Brad Gregory가 그의 The Unintended Reformation(의도하지 않은 종교개혁)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핵심적인 통찰입니다. 루터주의 시대, 개혁주의 시대, 성공회 시대, 가톨릭 시대가 있었는데, 시대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회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각 시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강제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저마다 달리 생각할 때, 그것은 단지 교회 안에서의 토론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불일치, 심지어 끔찍한 박해와 때로는 전쟁까지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경’에 대한 또 하나의 일반적인 비판은 교회를 갈라놓은 약 4만에 이르는 프로테스탄트 교파들과 관련한 것입니다. 이 사상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조장할까요?

“우리 교단은 유일하게 바르고, 나머지 다른 교단들은 신실하지 못하다.”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은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특수화되기 마련임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이 이와 같은 ‘차이의 근원’이시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나의’ 교단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교단들을 덜 기독교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이 땅에 있는 기독교가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태평양 섬에 있는 어떤 교회가 뉴욕 15번가에 있는 어떤 교회와 같아야 할까요? 그 교회들이 모두 하나의 조직 안에 들어와야 할까요? 아마도 이상적으로는 그럴 것입니다만, 다양한 개신교 그룹들이 서로에 대해 희망이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다양성은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열린 ‘세계 복음화 로잔 대회’는 역사상 가장 큰 국제 기독교 회합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로잔에 대표단을 보낸 굉장히 다양한 그룹들이 서로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개신교인들과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제는 일부 가톨릭 교인들과 일부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도, 교단 간, 문화 간, 민족 간 협력의 의미있는 수준이 많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일입니다.
 

‘오직 성경’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실제로 기능할까요?

“우리는 성경만 따르고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때, 그들은 거의 언제나 “우리가 신뢰하는 해석자들의 동아리가 해석한 성경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제1장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과, 성경에서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것들”이 최고의 권위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이 스코틀랜드에서 토지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설사 최고의 권위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문제를 겪었을 겁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주요 고백들은—하이델베르크, 웨스트민스터, 39조—사람들이 신뢰하고 따르기로 동의한 성경 해석들이었습니다. 남침례교 같은 비-신앙고백 그룹들조차도 이러한 공식적인 신앙고백들이 했던 것과 실제적으로 같은 기능을 하는 성경 해석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그 구원의 메시지는 서로 다른 해석 전통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때때로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에 의존합니다.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는 우리는 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성경의 중요한 또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진리이기 때문에, 교리나 실천에서 심각한 차이점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하나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성경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경’의 축복과 혼란 사이의 이러한 긴장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몽고에 그리스도인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뒤로 수십 년 동안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1972년에 존 기번과 그의 몽고인 아내가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 정부가 붕괴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몽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곳에서 몽고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성경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다른 그룹들이 특정한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두고 서로 싸웠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 같은 것들을 두고 말입니다. 15년 만에 최소한 예닐곱 개의 개신교 신약성경 번역판이 나왔습니다. 서로 적대적으로 말입니다. 이겁니다. “최고의” 프로테스탄티즘. 혼란과 불일치.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또한 수만 개의 몽고 예배가 이러한 경쟁적인 성경 번역과 함께 존재합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성경이 그들에게 열려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경이 경쟁적인 방식으로, 몽고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는 방식으로 열려있다 하더라도, 성경의 메시지—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가 몽고에 노출된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억압하던 시기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현재 몽고에는 330개의 개별 교단들이 있습니다. 거의 5만 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학생과 젊은 성인들입니다. 성경에 의존할 때에 어느 정도 혼란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그룹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에 반응할 때 놀라운 일치가 있습니다.앞으로 500년 ‘오직 성경’에 대해 우리 개신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기독교 역사학자로서, 성경에 대한 진지한 개방성이 존재했을 때, 하나님과의 화해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바뀌고자 하는 바람이 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이전, 중세 수도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13세기에,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에 그러했습니다. 16세기 후기 가톨릭 개혁자들에게서도 자체의 방식으로 그러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성경’이 살아남아 융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직 성경”을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방식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CT
 

Mark Galli, “Solar Scriptura” CT 2017:6; CTK 2017:10

#오직 성경#종교개혁#개혁 500주년#Sola Script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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