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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차리신 밥상
송길원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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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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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을 넘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길어진 밤, 주전부리를 찾다 시집을 손에 들었다.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점 메뉴 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 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나의 어린 날과 겹치면서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 그러다가 다음 시어에 목울대가 떨리며 소리를 낸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황지우, 거룩한 식사

 

예수님도 거절한 혼밥

이어령 교수는 묻는다. “최후의 만찬은 ‘먹는다’는 것이 단순한 배부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수많은 말씀과 이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어째서 마지막 메시지를 ‘먹는 것’으로 끝마무리했는가. 왜 그 흔한 한 조각의 빵을 자신의 육체라 하고 그 값싼 한 방울의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했는가. 십자가는 혼자 지고 가도 식사만은 홀로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제자들은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했다.”

그 중요한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 깊은 묵상에 잠긴다.

성경의 첫 책이 창세기다. 거기 아주 슬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간의 타락이다. 타락이 무엇으로 시작되었나?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다. 비극의 서막이었다. 먹는 것을 넘어서는 탐욕과 교만이 있다. 그 결과는 참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이다. 죽음이 찾아왔다.

예수는 먹는 문제로 타락한 인간에게 먹는 문제로 답을 주신다. 성찬이다. 성찬은 단순한 배부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거기 구원이 있다. 신적인 생명, 영적인 생명의 회복이 있다. 이런 기막힌 반전이 어디 있나? 그것만이 아니다.

창조의 첫 장면을 들여다보라.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창조로 끝맺음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먹는 것’으로 끝난다. ‘차림표’가 있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을 부요하게 하는 어떤 제안도 없다. 명상법을 일러준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아름다운 음악을 주신 것도 아니다. 식단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온갖 식물과 열매 맺는 온갖 나무를 너희에게 양식으로 준다.’”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있다. 그분이 ‘받으셨다’가 아니다. “주셨다!” 모든 우상들은 보상을 요구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들이 인간과 같은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은 신들로 포장되고 둔갑된 거짓 피조물이다. 그들은 의존적이다.

하나님은 창조자다.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로부터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아니 어떤 피조물도 그분의 요구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제공할 수 없다. 제사상은 인간이 차린 밥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인간을 위해 밥상을 차리신다. 식탁을 차리시는 하나님, 배고픔으로 자신을 갈망하게 하셨다니…

이런 것을 두고 ‘역설의 역설’이라 할 것인가? 유물론자 포이어바흐의 말도 그렇다.

“인간은 무엇을 먹느냐에 의해 규정된다.”
 

음악이 떡과 포도주가 된 세상?

“오늘날 교회에서는 음악이 떡과 포도주가 되었다.”

미국의 예배사역자 조나단 에이그너Jonathan Aigner가 한 말이다. 교회가 나쁜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 가운데 하나다. 그는 말한다.

“음악은 예배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많은 교회에서 찬양을 한 후 설교를 듣는다. 우리는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기 전에 워십밴드, 워십리더, 워십시간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의 행위를 구성하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기도, 사도신경, 신앙고백이 있을 자리가 없다. 후속 모임이나 선포, 감사도 없이 그냥 보낸다. 다만 음악, 대화, 더 많은 음악이 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잊힌 것이 있다. 성찬이다. 한 번 더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예수님은 분명히 ‘여기 내 살과 피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성찬은 매우 특별한 은혜, 자비, 치유,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여정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성찬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러운 일을 버리려는 우리의 의지를 의미한다.”

성도의 모임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복음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전을 바르게 집행하는 것이다. 복음 선포가 ‘들리는’ 말씀이라며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다. 그런데 ‘들리는’ 말씀은 있는데 ‘보이는’ 말씀이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핑계는 많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다.

“성경의 실천적 명령은 ‘이것을 숙고하라’가 아니라 ‘이것을 행하라’는 것이다.”(피터 J. 레이하르트)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끄트머리’(끝과 시작), 성찬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배고픈 밤은 깊고 성찬의 유혹은 강렬하다. CTK 2017:12

 

#예수님#혼밥#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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