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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TK BOOKS
  • 승인 201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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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K BOOK AWARDS 2018
 

여기 스무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해당 출판사의 명예를 걸고 CTK 독자들께 직접 추천하는 책들입니다.

 

 

무디 성경 주석

무디 신학교 교수진 | 김순현 외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 | 2017년 10월
 

“무디 성경 주석이요? 무디가 쓴 건가요?”

누군가에게 「무디 성경 주석」을 소개하면, 열에 아홉은 이런 말을 듣는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 책을 만든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정확히 밝히자면, D. L. 무디가 세운 무디 신학교(1886년 설립 당시에는 ‘성경학원’)의 교수진 30명이 글을 쓰고 편집한 것을, 무디 출판사(1894년 설립)가 펴낸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묵직한 신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스터디 바이블과 교리 관련 책들이 인기를 얻었고, 이름난 권별 주석도 속속 출간된다. 표절 시비로 홍역을 치르기는 했지만, 국내 신학자들의 노작勞作도 눈에 띈다. 그러나 성경 66권을 한 권에 담은 단권주석 분야는 아직 빈약하다. 10년 전에 출간된 「IVP 성경 주석」(IVP)이 건재하고, 가장 최근에 나온 「맥아더 성경 주석」(아바서원)이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마도 개발 자체가 어렵고 기간이 오래 걸릴뿐더러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경영의 안정성만 생각한다면, 단권주석은 손대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는 미련하게도(?) 모험을 택했다. 예상되는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의 가치를 「무디 성경 주석」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디 성경 주석」은 무엇이 특별할까? 보다 진정성 있는 소통을 위해서 홍보용으로 작성한 보도자료가 아니라 독자들의 피드백을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는 몇몇 목회자에게 이 책을 건네며 어떤 점이 유용한지 솔직하게 평가해달라고 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혹은 잡지에 기고할 글을 쓰면서 이 책을 활용해본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해준 이야기는 ‘탁월한 구조 분석’이다. 다른 주석의 2~3배를 능가하는 상세한 ‘개요’를 통해 각 권의 구조가 한눈에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단어가 아니라 단락 단위로 상세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본문의 메시지와 묵상의 포인트를 잡기가 수월하다고 했다. 또한 단권주석의 경우 분량의 제한 때문에 서술이 빈약한 부분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은 다른 단권주석들보다 500여 쪽이 많다. 전체 원고량은 원고지 2만 5000장이 넘는데, 이는 일반적인 단행본을 25권이나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그 외에도 ‘복음 비평 연구’나 ‘바울의 새 관점’ 등을 다룬 코너는 무척 가치 있고 유용한 자료라는 의견을 받았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추가로 내세우고 싶은 강점은 ‘강력한 색인’이다. 특히 94쪽 분량의 성구 색인은 다른 단권주석과 확실하게 비교되는 이 책만의 자랑거리다. 본문 중에 등장하는 관련 성경 구절과 함께 성구 색인을 활용하여 성경을 종횡으로 넘나들다 보면, 평소에 미처 보지 못했던 보석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워낙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보니, 작업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도 많았다. 한창 편집 작업을 진행하던 어느 날, 무디 출판사로부터 잠시 출간을 보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본문 중 일부분이 표절로 밝혀져서 원고를 새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일로 출간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어판 출간 전에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여긴다.

우리는 이 책의 메인 카피를 “창세기만 읽어봐도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로 잡고 “학문적 허기와 실용적 갈증을 채워줄 복음주의 단권주석의 결정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이 성경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모든 이들이 성경 곁에 두어야 할 필독서가 되기를 바라며, 무디 신학교 총장인 폴 니퀴스트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모든 사람이 우리 학교의 훌륭한 교수진에게 직접 배울 수는 없다. 그 대신 이 주석이 그들의 가르침을 가정과 교실, 강단, 삶 속으로 가져다줄 것이다.” ―김준원 국제제자훈련원 편집팀장
 

이 책에서…
 

성경을 읽다 보면 종종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혼자 성경을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나 단어를 발견했을 때, 주일학교 또는 소그룹의 성경 공부를 준비하다가 특정 단락이 앞 단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해졌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해주어야 할 때 등이다. 이 책의 기고자들은 성경을 읽는 평신도나 주일학교 교사, 소그룹 인도자, 목회자가 성경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디 성경 주석」은 성경의 진리를 단순하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신학 용어를 명쾌하게 정의하고, 어려운 단어를 쉽게 풀어냈으며, 독자들이 낯설게 여길 수 있는 고대 자료를 자세히 밝혔고, 성경에 나오는 고대 도시와 마을의 지리적 위치를 알려준다. 기고자들은 가장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담았지만, 독자들이 이 주석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을 참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쉽게 썼다.

사람들은 문학적 맥락이나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경 저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았고, 그분의 영감으로 대단히 아름다운 글을 썼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책은 문학적 구조와 전략을 지닌다. 이 주석은 성경 각 권에 내재된 구조와 생각의 흐름을 따라 서술했기 때문에, 각각의 구절이 전반적인 논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무디 성경 주석」은 성경 각 권의 로드맵을 제공한다.

주석을 참고할 때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어렵거나 논란이 되는 구절을 지나치리만큼 복잡하게 설명한 나머지 정작 필요한 도움을 얻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기고자들과 편집자들은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충분히 인지했으며, 이런 문제점을 명확하게 해설했다. 물론 독자마다 의문점이나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이 다르지만, 이 주석에서는 일반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난해한 질문을 다루었다. 예를 들어, 특정 본문이 다른 본문과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예언을 혼란스러워하며 이 예언이 언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혹은 성취될 것인지 궁금해한다. 「무디 성경 주석」은 바로 그런 주제들을 다룬다. 만약 어렵거나 불명확한 구절을 지나친다면, 그런 주석은 독자에게 그다지 큰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론(18-19쪽)에서

 

 

 

가정, 내어드림

이용규 | 규장 | 2017년 10월
 

선교사, 「내려놓음」의 저자, 교육자인 이용규 선교사가 유치원생부터 고교생까지 네 자녀를 키우며 가정생활에 하나님나라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나눈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녀 양육의 기술이나 요령을 전수할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기에 최선의 원칙이나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다만 가정의 여러 문제에 대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것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방식으로 살며 자녀를 양육하고자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마치 교회 선배가 말하듯 조곤조곤 전한다. 또한 배우자와 관계나 자녀 양육에 지친 이들에게는 격려와 위로를, 자녀 교육과 진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가 없다. ‘불안’과 ‘두려움’ 대신 ‘여유’와 ‘기대’로 자녀의 인생 설계를 도울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저자에게 이런 주제로 제안하게 되었다. 부부 관계, 사춘기 자녀와 관계, 자녀들의 진로 문제, 사역자의 배우자로서의 어려움 등을 어떻게 겪어내며 가족이 함께 믿음의 성장을 이루었는지 진솔하게 나누어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저자가 한 교회에서 진행했던 ‘자녀 교육 세미나’ 내용을 추가하여 자녀들의 진로(대학 진학) 문제에 대한 폭 넓은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하나님 안에 건강하게 뿌리 내린 가정은 한 가족의 바람일 뿐 아니라 건강한 공동체(교회, 사역단체)를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로 저자는 한국 교회와 다음세대의 문제를 아울러 볼 때, 가정에서의 부부 관계와 자녀 양육에 대한 관점의 수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키울 돈이 없어서 아이를 못 낳는다”라는 것에는 아이를 낳으면 산모에게 젖이 도는 것처럼 아이를 낳으면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처럼 이 땅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적하는 수많은 세상의 소문들과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가정과 자녀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돕는다. ―김아진 규장 실장
 

이 책에서…
 

많은 크리스천 가정이 자녀 교육의 목표를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데 두지 않는다. 세상 경쟁에서 이기고, 물질적으로 보상을 잘 받는 자녀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고등학생 자녀를 학원에 보내기 위해 주일학교나 수련회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양육 받은 자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신앙과 타협하며 살아도 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부모를 통해서 확인한다. 부모가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셈이다.

이런 메시지에 익숙하고, 그런 방법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으며 자란 자녀는 세상의 유혹과 압력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면 쉽게 신앙을 부인하고 쉬운 길, 달콤한 길을 찾아간다. 나는 그렇게 자녀를 세상 속에 잃고 만 부모들의 눈물 어린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 101쪽


“자녀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물려주기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면 그 부모의 최우선 가치는 돈이 된다. 자녀에게 물려주기 원하는 첫 번째가 좋은 교육이라면 그의 최우선 가치는 학벌이 된다. 편안한 삶을 물려주고 싶다면 그것이 그의 첫 번째 가치가 된다.

내가 자녀들에게 가장 물려주고 싶은 것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다. 아이들이 그 하나님을 만나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누릴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신앙이 좋은 부모일지라도 경쟁 사회 속에 내던져진 자녀를 인도해감에 있어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두려워서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부모 세대가 느끼는 근본적인 결핍과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내면의 갈등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101~102쪽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겠다고 결단하고 나아가면서도 때로는 자녀에게 실망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해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실패라고 느껴지는 상황을 항상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망해도 망한 것이 아니다. 망한 것 같은데 앞날이 두렵지 않다. 망해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고, 길이 막힌 것 같은데 또 다른 길이 예비되어 있음이 보일 것이다.

시험에 실패했다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이런 실패로 여겨지는 시기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공급하시는 시간이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궁극의 승리와 기쁨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때로는 ‘자녀를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싶은 순간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부모가 무엇을 잘못해서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이와 부모의 유익을 위해서 허락된 시간이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내 안에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몸과 마음이 함께 경험한다. ― 251~252쪽

 

 

 

교회가 알고 싶다

다시 배우는 교회, 교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하여

송태근 | 넥서스CROSS | 2017년 4월


2017년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에 넥서스CROSS에는 야심차게 ‘…알고 싶다’ 시리즈를 기획하여 올 한해 총 3권의 시리즈를 출간하였다. 제목만 들어서는 사실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떠올라진다. 하지만 패러디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먼저 짚고 넘어간다.

종교개혁 500주년! 그러나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다. 500년 전처럼 뭔가 대단한 개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아니 사실 개혁의 바람조차도 없었던 것 같다. 이는 몇 해 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 100주년과는 참으로 비교되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폭발적으로 변혁의 의지가 있었다면, 지금은 그 변혁의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으로까지 해석된다.

조금은 슬프고 씁쓸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니까 ‘쿨’하게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병이 있는데, 그 병은 병이 아니라고 부인만 하면 결코 적절한 시기에 알맞은 약을 공급받지 못해 치료시기를 놓치게 된다. 즉 한국 교회의 병명을 정확히 진단해야 소생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아, 그런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었다.

CTK에서 ‘에디터의 선택’을 제출해 달라고 연락을 받고, 과연 어떤 책을 선택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편집자에게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책은 없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에디터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다가 2017년 한국 교회의 상황을 바라보고, 수많은 책 중에 ‘~ 알고 싶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송태근 목사님의 「교회가 알고 싶다」로 정하게 되었다.

사실 송태근 목사님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은데, 무관심한 것도 잘못이지만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음부의 권세는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미 이겨놓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 소망을 가지도록 하나님이 설계하셨다.” 이는 마치 한국 교회를 놓고 걱정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신 말씀과도 같다.

그렇다! 음부의 권세는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겨놓으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한국 교회를 놓고 논할 때 결단코 한숨 쉬는 일은 없어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은 이러한 부분들에 있다. 저자는 철저하게 복음 안에서 교회의 의미를 찾아나가고, 그것을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 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생긴 오류들, 오랜 시간동안 풍화 작용을 하여 침식되어 고착화된 토양처럼 한국 교회에서 자주 사용된 교회 관련 성구들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짚어주며 명쾌하게 해석해준다. 얼마나 많이 오용된 성구가 많은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을 바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 설계도’를 밝히고, 초대교회를 향한 바울 서신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파헤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라고 강권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로 바로 서야 할 성도와 그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왜 무장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저자 특유의 성경 읽기를 통해 시원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종교개혁 500주년에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 자평하고 싶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으며, 그 해답을 자의가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신학적 용어가 아닌 그 누구도 읽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잘 설명되어 있다. 이보다 무엇이 좋으랴!

이 책은 2017년 최고의 책이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복음으로 이끈 책이라 생각한다. 단순한 조직신학 개론이 아닌 진정한 복음주의 책이며, 목회자에서부터 평신도까지 모두 반드시 읽어봐야 할 귀한 책이다. 더불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기신자에서부터 이제 막 예수님을 알기 시작한 초신자까지 모두가 반드시 읽어야할 교과서 같은 책이라 생각한다.

작은 소망이 하나있다면, 이 책이 2018년도 한국 교회의 발걸음의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이끄실 소망을 바라보며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주님이 기대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조현영 넥서스CROSS 팀장
 

이 책에서…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교회敎會라는 한자어는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뜻인데 이는 교회의 의미를 잘 담아내지 못한 표현이다. 영어 church는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이어서 교회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인데, ‘에크’(out of)와 ‘클레시아’(calling)의 합성어로 ‘불러냄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어디로부터 불러냄을 입었을까? 사망과 죽음과 음부의 권세로부터다. 그래서 교회는 철저한 분리를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끊어졌다. 세상과 죄에서 불려나와 거기에서 끊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다. 교회는 어떤 조직이나 제도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유기적 공동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설계도(13~14쪽)

 

‘가르치다’의 헬라어는 ‘디다스코’다. 디다스코는 상대방이 체득할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체득된 내용이 열매와 증거로 나타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반복된 훈련으로 내용을 이해하고 체득해서 증거와 열매가 나올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단순히 지식의 유희를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목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제자훈련도 마찬가지다. 제자훈련의 목적은 성도의 삶과 인격이 예수님을 닮게 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제자훈련과 교회의 다양한 가르침은 성도의 삶과 본질의 변화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 반지성주의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삶은 도외시 한 채 지식만 추구하는 태도다. ―교회의 세 가지 사명(45쪽)
 

진짜 종교개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 교회에 선명하게 회복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개혁을 이야기한다. 손으로 만든 장막과 예물과 제사와 율법은 예수님이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 구원을 이루신 십자가 사건으로 온전히 개혁되었다는 것이다(히 9~10장). 그 개혁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빼앗기는 날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슬픔의 날이 될 것이라고 밝힌다. ―예수님의 종교개혁(58쪽)
 

초대교회의 예배가 가족으로, 세상으로 확대되면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교회는 스스로 담을 쌓아 게토가 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유람선 노릇도 그만해야 한다. 손발을 걷어붙이고 슬픔에 갇힌 자, 어둠에 묶인 자에게 물질로, 복음으로 스며들어가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 성도 역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약한 지체를 돌아보고 귀히 여길 것인가를 고뇌하고 결단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75쪽)

 

 

 

에베소서

신자들의 교회 성서주석

톰 요더 뉴펠트 | 황의무 옮김 | 대장간 | 2017년 8월
 

‘교회’를 공부할 때 대부분 에베소서를 읽는다. 이 책은 살아있는 예배와 교회에 대한 강력한 권면을 하나님의 화목사역에 동참하는 은혜로 풀고 있다. 또한 진정한 교회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를 강조한다. 저자는 교회가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새롭게 하는 수단”이라고 확신한다.

지금 한국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드러내는 곳은 현실적으로 교회다. 그러나 그 교회는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를 따를 생각도 없으면서 교회로 꾸역꾸역 들어갈까? 그 목숨과도 같은 돈을 그곳에 쌓을까? 과연 성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성령님은 어떻게 교회와 관계하는가? 수많은 질문 속에서 예배와 교회에 대한 책, ‘에베소서’를 준비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에베소서가 아니라 다른 관점 회복되어야 할 관점을 짚어가고 있으며, 저자는 평생을 에베소서 연구에 몸담은 학자이다.

신자가 아닌데 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믿지 않아도 좋으니 예배에 참여하라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내어놓는 한국 교회에서 우리는 이 절박하고 단호한 에베소서의 편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책은 여전히 이를 나누고 구별하는 거룩한 일에 쓰임 받을 것이다.

제자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거나 첫사랑의 감격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은 에베소서를 마치 해도를 들여다보듯 할 것이다. 특히 교회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악한 권세들과 싸우며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엡1:10) 하는 일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대부분은 이러한 열정과는 거리가 먼 회중에 속하며 오래전부터 장기적으로 인식된 필요에 익숙해 있다.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만일 에베소서가, 바울의 후계자들에 의해 전수되고 2~3세기 신자들이 경험한 바울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면 퇴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회중과 교단은 이 서신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의 급진적 내용은 정확히 이러한 교회들을 깨우는 경종이다. 5장에 묘사된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이라는 이미지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에베소서를 일종의 결혼 갱신marriage renewal으로의 초청으로 보아야 한다.

본 주석은 특정 전승, 즉 ‘성경은 평화와 섬김으로의 부르심’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소위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 전승으로부터 기록되었다. 이 전승의 교회관은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앙 고백을 통해 세례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교회관이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본 주석은 이러한 전승 및 그들의 관점을 존중한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전승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도전을 준다. 한편으로 신자들의 교회 전승은 선한 일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진입로로서 세례에 높은 가치를 두는 본문(2장 및 4장)을 통해 힘을 얻는다. 많은 희생이 따르는 제자도에 대한 강조는 어둠에서 벗어나 악과 싸우라는 명령에서도 반영된다(6장). 평화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핵심적 강조는 특별한 관심사이다(2장). 다른 한편으로, 선택과 신적 주권(1장) 및 죄를 악한 권세들에 대한 예속으로 보는 관점(2장)에 대한 강조는 신자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주장되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믿음과 마찰을 빚는다.

에큐메니즘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또는 하나 됨(가령 4장)에 대한 왜곡된 역설로 인해 힘들어 할 수 있다. 반면에 신자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다 급진적인 요소들은 가부장적 이미지 및 군사적 이미지(5장과 6장)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에베소서가 어떤 도전을 제시하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청하기 위해 기울인 신자교회 전승의 헌신은 성경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고수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교회의 조망을 위한 모범이나 탁자를 제공하는 일, 또는 본문을 구미에 맞게 만들어 내거나, 급진적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지표agenda에 도움을 주는 내용으로 다듬는 작업은 본 주석이 허락할 수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먼저 성경 본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믿음의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게 한 후 공동체로 하여금 자신의 지표를 성경으로 가져오게 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워야 한다. 모든 주석과 모든 독자는 문화나 공동체 안에서 (또한 그러한 것들을 통해) 형성된 의식이나 상상력을 가지고 본문으로 나아온다. 만일 이러한 문화나 공동체가 신실하고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하고 계신 화목 사역에 주의한다면, 그러한 문화 속에서 형성된 선입견은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는 많은 학생들은 하나님이 없는 실재를 설명하고, 죄와 악을 의심하기보다 쉽게 받아들이며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경험에 대해 큰 기대를 갖지 않는, 그런 문화를 통해 형성된 상상력과 세심함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의 선입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장애가 될 뿐이다.

주로 무의식적으로 습득되는 이러한 경향은 본문을 기존의 필요나 요구 및 기대에 부응하는 내용으로 재단하려 할 것이다. 주석가나 독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1장과 3장의 기도가 우리를 위한 것이 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고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온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위한 기도이다.―배용하 대표
 

이 책에서…
 

이 본문[에베소서 2장 11-22]은 전도와 평화 사역을 불가분리의 관계로 볼 것을 요구한다. 평화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화목하게 하셨으며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계신다. 원수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상호 간에도 화목을 이루었다. 그들은 함께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교회는 각자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평화 조약을 맺은 개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화목을 이룬 대적들의 친밀한 공동체이다.(J. H. Yoder, 1983:281-3; 1985:110-2; Yoder Neufeld, 1999a)

이러한 교회가 주님과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허물어야 할 담과 (하나님과, 그리고 상호 간에) 친구가 되어야 할 원수들을 찾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화목하게 하시고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한 하나님의 가정은 충분히 큰 상태가 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가족은 결코 충분히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아직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족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에 관한 한 언제나 거처가 남아 있다. 하나님의 가정은 영원히 지어져 간다.(cf. 요14:2-3)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진정한 평화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본문은 분열의 담을 허는 힘을 교회 안에서 찾는다. 둘째로, 본문은 아직도 상호간 및 하나님의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자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전도를 통해서든 공의와 평화의 사역이나 인간의 물질적 요구에 대한 충족을 통해서든―를 모르는 자들에 대한 선교를 위한 기독론적 기초를 제시한다. ―139~140쪽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팀 켈러 |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17년 6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 고통을 허락하셨는가?”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오랏줄인가?”

“교회에 다니는데도 왜 불의한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는가?”

“과학이 기독교 신앙이 틀렸음을 증명해 낸 것 아닌가?”

“성경의 기적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가?”
 

믿지 않는 친구나 이웃들로부터 한 번은 들어봄직한 질문들이다. 시시때때로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분명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이고, 그럴 때마다 뭐라고 변론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근거들을 제기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이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들’에 대해 과학적, 철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근거들’을 마주하게 해서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

이 책에서 재미나게 읽은 부분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이성적인 듯한 무신론자들의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 하나가 리처드 도킨스의 정중하지 못한 태도를 비난했던 무신론자 토머스 네이글이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장면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신앙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다.…무신론이면 좋겠다.…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하나님이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난한 마르크시스트 학자인 테리 이글턴은 “리처드 도킨스 자신마저도 이성보다는 믿음에 기대어 살고 있다. 인간은 나무랄 데 없을 만큼 합리적인 근거를 갖추지 못한 갖가지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을 만한 이유가 있는 수많은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말한다. 도킨스의 순진한 발상, 다시 말해 신앙에는 합리적인 요소가 없으며 이성은 믿음에 크게 기대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를 공격한 것이다.

우주에서 귀환한 러시아 우주비행사가 하나님을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을 때 C. S. 루이스가 대응한 대목에도 눈길이 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실험실에 가져다가 실증적인 방법으로 분석할 수 있는 물건일 리가 없지 않겠느냐?” 루이스는 하나님의 진리를 안다는 게 어떤 것인지,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해가 떴다고 믿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다. 해가 비치는 세상 만물들을 보기 때문이다.” 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기로 작정하는 것은 되레 우리 망막이 타버려서 사물을 분간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팀 켈러는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태양의 실체를 보겠다’고 덤벼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태양의 실체를 알기 위해 ‘해가 비쳐서 드러내는 것들을’ 보도록 이끌어 나간다. 만물에는 하나님의 실존을 가리키는 신의 지문이 묻어 있음을, 누구나 이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마음의 빈 공간이 하나님이 아니면 죄로 채워짐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을 보여 주며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도록 독려한다.

편집자로서 팀 켈러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The Reason for GOD가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로 탄생한 것 역시 한국 독자들에게 얼마나 행운인지! 기독교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가진 다음 세대가 오롯이 믿음을 전수받는 길에, 또 믿지 않는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길에, 믿음의 여정을 걷는 수많은 성도들이 스스로 믿는 바와 그 이유를 재평가하는 길에, 이 저자의 변증이 얼마나 귀하게 쓰일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에디터로서 이 책을 두란노의 올해의 최고의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회의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줄 최고의 책! ―권옥경 두란노 출판3부 부장

 

이 책에서…
 

신앙인들은 의심을 자각하고 씨름할 필요가 있다. 제 것만이 아니라 친구와 이웃들의 의심까지 끌어안아야 한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그대로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음에 배치되는 생각들과 길고도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자신은 물론 회의주의자들의 확신에 맞설 신앙적 기초가 마련되는 법이다. 이러한 과정은 눈앞의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도 중요하지만,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뒤에도 의심을 품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이해하게 이끌어 준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신앙 이면에 감춰진 이유들을 살펴야 하듯, 회의주의자들 역시 스스로의 논리 밑바닥에 깔린 모종의 신앙을 짚어 봐야 한다. 언뜻 무신론적이고 냉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의심은 일종의 대체 신앙이다. B라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A라는 신앙을 의심할 수 없다. “참다운 신앙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일 리 없다”는 이유로 기독교 신앙을 의심한다면 그 말 자체가 신앙 행위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도 그런 주장을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보편적인 진리도 아니다. 중동 지역에 가서 “참다운 신앙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일 리 없다”고 말한다면 십중팔구 “왜 그럴 수 없는데?”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표방하는 A라는 교리를 의심하는 이유는 B라는 실증할 수 없는 또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심은 신앙적 비약을 토대로 삼는다. ―23~24쪽
 

기독교 신앙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의심하는 방법은 회의가 드는 요소 하나하나마다 대안이 되는 믿음을 찾아내고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길뿐이다. 자기 확신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신의 믿음보다 크리스천이 품은 신앙을 향해 더 큰 소리로 타당한 이유를 대라고 요구하는 일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처사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하도 흔해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공평하려면 회의 그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는 근거를 확실하게 파악하라.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그 확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온 힘을 다해 찾아보라. 스스로 품은 회의가 겉보기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5쪽

 

 

 

세상에서 배울 수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마티 마쵸스키 | 앤디 맥과이어 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17년 1월
 

교리 교육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요셉, 다윗과 같은 성경 인물 이야기책은 참 많지만 정작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어린이를 위한 책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리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른들에게도 딱딱하고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지지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교리를 배울 수 있을까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의 질문에 어떻게 해야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을까요? 자녀와 부모가, 학생과 교사가 함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교리책 없을까요?

이 책은 우연히 오래된 예배당의 지하실에 들어가게 된 카알라와 티모시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거기서 둘은 아주 특별한 책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이지요. 책 속의 책이라는 독특한 구성과 매 장마다 펼쳐진 재미있는 그림들이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합니다. 설명하기 힘든 어려운 주제들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기발한 비유로 편안하게 풀어 줍니다. 아이들에게는 평생 친구가 되어 주고, 부모님과 선생님들께는 든든한 도우미가 되어 주는 모두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을 책입니다.

단순히 흥미롭기만 한 책은 아닙니다. 이 책은 하나님에 대해, 사람에 대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 교회에 대해, 성경에 대해, 신앙생활에 대해 아이들 눈높이에서 체계적으로 착실히 기본을 쌓아줍니다.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하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한 장에 한 주제씩, 1~3쪽 분량으로 핵심을 확실히 정리해 줍니다. 토의 질문을 통해 아이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고, 각 장마다 넉넉하게 배치된 관련 성구를 통해 성경 찾기 활동과 성경 암송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신학 용어를 어린이 말로 설명한 페이지와 부모님과 선생님을 위한 가이드까지 알찬 구성입니다.

이 책은 어린이 책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리되지 않은 어른에게도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저부터가 이 책을 읽는 동안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큰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청소년, 성인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세계관을 터 잡기 하는 데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안내서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든 못 하든 아이들은 매일 하나님에 대해 배웁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우면서, 잠들기 전 기도하는 법을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에 너무 어린 나이는 없습니다. 가정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막막하다면, 하나님에 대한 질문에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면, 이 책을 활용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 책을 통해 온 세대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영란 생명의말씀사 에디터
 

이 책에서…
 

사랑하는 손주들아,

내 나이 어느덧 아흔넷, 본향으로 갈 때가 되었구나.

먼저 너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너희 열세 명 가운데 누가 나의 길을 따라오겠느냐?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닥칠 심판 날에 몇이나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기도한단다.

“주님, 우리 모든 자녀들과 손주들을 저와 함께 주의 영광으로 데려가 주소서.

이들 모두를 그곳에서 만나 보기 원합니다.” ―칼 라우시 할아버지의 편지글(3쪽)
 

십계명은, 하나가 깨져도 나머지 아홉은 멀쩡한 열 개들이 접시 세트와는 다릅니다. 그보다는 아름다운 열 가지 무늬로 테두리가 장식된 흠 없는 접시 한 개와 같습니다. 열 가지 무늬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랑의 계명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접시 한 귀퉁이에 금이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머지 부분은 멀쩡하니 이 접시는 멀쩡한 접시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접시는 그냥 못 쓰는 접시가 되고 맙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계명에 금이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머지와 상관없이 전체를 망치게 됩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어기는 것입니다. 한 번만 죄를 지어도 그 사람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능한 한 선하게 살라거나 최선만 다하면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하나만 어겨도 율법 전체를 어긴 것입니다. ―97쪽
 

한 지혜로운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왕관을 쓰고 예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 있었지요. 법과 의술과 역사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누구든 그 앞에 서면 존경심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치명적인 병이 나라에 퍼졌습니다. 어떤 의사도 치료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의사마저도 죽어 갔습니다. 왕은 백성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왔습니다. 왕관과 예복을 벗고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의료 가방을 들고 백성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이것이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의 아들은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완전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빛과 기쁨이 가득 찬 천국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성부, 성자, 성령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죄가 병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은 친히 왕좌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백성을 구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광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백성을 사랑했기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죄로 병든 세상을 고치러 오셨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09쪽

 

 

 

뜻밖의 사랑

로자리아 버터필드 |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17년 7월
 

동성애자가 동성애의 삶을 중단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에 의해서일까, 아니면 단번에 이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일까. 하나님이 고쳐 주셔서인가, 용서하셔서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이러한 질문의 기저에 깔린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무엇인가.

「뜻밖의 사랑」은 「뜻밖의 회심」을 쓴 로자리아 버터필드의 두 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책이 그리스도인을 혐오하던 레즈비언 교수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이성애의 삶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사건과 인물 위주로 그려냈다면, 「뜻밖의 사랑」은 단순히 성 정체성을 넘어서 죄와 회개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심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동성애(성 정체성)를 사회적, 심리적, 성경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며 결과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바른 시선을 제공한다.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다. 개인의 감정과 경험은 중요하고, 다양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적 변화는 바람직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관점 위에 올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정의하고 대해야 한다. 어디 동성애뿐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자요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끈질긴 죄의 유혹과 씨름하며 남모를 아픔의 그늘 가운데 머물 때도, 그러한 싸움 중에 있는 이를 바라볼 때도 하나님의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동성애가 큰 줄기를 이루는 이 책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권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저자가 글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성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다. 그녀가 성(性)을 자주 예로 드는 것은, 저자에겐 ‘성적인 죄가 덫이었고 그 결과를 지금도 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점은 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된 타락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릇된 성 정체성은 그중 하나의 양상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는 이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잃는 것’이다. 원치 않는 성적 욕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며 날마다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이들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동성애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으로 안도와 우월감이 뒤섞인 감정에 빠져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기만 하는 것은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할 뿐이다.

우리는 날마다 죄의 유혹과 마주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이 어떠한 핑계도 될 수 없다고 말하며 각자의 형편과 삶의 배경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죄와는 조금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강한 어투에서 필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한편, 큰 위로를 받았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참된 기쁨이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하는 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동성애에 대한 바른 이해뿐만 아니라 기쁨과 당당함을 회복하는 길을 새롭게 확인하는 데 필자가 도움을 받은 것처럼, 이 책이 동성애를 비롯한 갖가지 죄의 유혹과 씨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관점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다지는 기회가 될 것이다. ―홍지애 아바서원 편집장


이 책에서…
 

교회와 대학교에서 강연을 할 때, 청중들은 때때로 내가 치유를 받았는지 묻는다. 예컨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게이로 만들지 않지요. 그러니 당신의 동성애적 욕망이 평생에 사라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신자가 아니든지 열심히 기도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겠죠.” “치유”란 말과 “기도로 동성애를 쫓아낸다”는 철학은 내게 비성경적으로 들린다고 질문자에게 말해 줬다.

나는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그로부터 나를 구출하신 것을 직접 경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혹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죄다.

죄는 반역이지 비염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지 치유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강건해지는 데 필요한 것만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기만적인 속성을 품고 있다. 복음이 약속하는 강건함은 오직 그리스도께 의존할 때만 생기는 것이다. ―90~91쪽
 

성경에는 실패를 미덕으로 보는 대목이 전혀 없다. 겸손을 실패와 섞어 버리는 사람은 겸손의 중요성과 실패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개혁주의 입장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만큼 다른 해결책도 내놓는다. 청교도 존 오웬이 대변하는 개혁파 복음주의 입장은 죄가 우리 속에 거하며(이를 내주하는 죄라고 부른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 속에 계속 남아 있다고 가르친다. 죄를 다룰 때는 실패를 미화하는 태도가 아니라 전투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수단을 총동원해서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 이 입장은 회심이 당신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고, 회개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인 회심에 반응할 자유를 준다고 가르친다. 회심은 당신에게 실패를 예상할 자유가 아니라 회개할 자유를 부여한다. ―101~102쪽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부하신 뒤에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창 4:6-7).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거부하실 때 가인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으신다. 가인의 의향 때문에 그의 입장을 재고하지 않으신다. 제물이 가치를 지니려면 피를 흘려야 한다. 이 기본 진리는 나의 선한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토라진 가인을 책망하시고, 만일 그가 변하지 않으면 더 나쁜 일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이 적에 관해 중요한 것을 선포하신다. 그것은 바로 죄가 네 삶의 입구에 잠복해 있고, 너를 알고 너를 원하고, 네 마음과 애정을 여는 열쇠를 쥐고 있으며, 네가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날마다 말이다. ―108~109쪽

 

 

 

기독교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면

라비 재커라이어스 | 권기대 옮김 | 에센티아 | 2017년 9월
 

내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이 모두 변해야 할 때가 왔다. 믿음이 나를 실망시켰다고 분노하거나 좌절한다면, 내 영혼의 구원은 과연 어디서 찾을 것인가? 20세기의 C. S. 루이스라 불리는 이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라비 재커라이어스는 오늘날 교회 때문에, 신앙 때문에 아파하는 젊음에게 묻는다. “진실로 기독교가 당신을 실망시켰는가? 생각해보라, 당신을 실망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의 이름을 걸고 있는 교회인가?”

「경이로움」, 「무신론의 진짜 얼굴」, 「이성의 끝에서 믿음을 찾다」, 「아플수록 더 가까이」 등 일련의 작품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라비가 질서정연한 논리와 자신의 독특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근원적인 질문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간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예수는 누구인가? 기독교는 우리 인생과 이 세상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예수의 복음은 왜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가? 기독교가 우리를 실망시켰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런 실망에 좌절한 영혼을 구하려면 교회는 어떤 점을 고치고 무엇을 시도해야 하는가? 성도는 응답 받지 못한 기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진정한 의미의 ‘응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신 무신론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소실점에 갖다놓은 로버트 프라이스나 바트 어만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도전과 허무주의적 부정에 단호히 맞서 (그러나 수많은 영혼들이 신앙에 실망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라비는 기독교의 사상과 논거를 원점에서부터 해부하고 복음의 유효기간을 다시 점검한다.―베가북스 백승기 편집장
 

이 책에서…
 

오늘날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의심하며 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복음주의의 울타리’를 떠나 다른 무언가를 좇고 있는 걸까?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의 메시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혹은 메시지를 듣는 사람? 혹은 이 셋 모두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문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왜 하나님이 교육이나 경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믿음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셨다고 느끼는 걸까? 신앙에 적대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질문을 던지는 많은 사람들도 이런 회의를 느낀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 안팎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에게 답을 주려는 시도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거부하거나 그를 외면한 사람이 실제로 삶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8쪽.
 

정치적 이론들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국가와 제국들도 흥망성쇠를 겪는다. 문명은 흥했다가 기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자신을 이 땅의 왕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을 거부하셨다. 그가 원하셨던 궁극의 충성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우주의 마지막 싸움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의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지속되고 일관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진실은 먼저 사람의 마음에, 그런 다음 사회에 뿌리를 내린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수많은 철학과 사이비종교의 환상을 위해 공허함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는 짓이다. 그것은 우리가 과거에서 도망치도록 도와줄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부조리한 미래의 품속으로 떠미는 것에 불과하다. ―190쪽
 

삶의 모든 것이 결국 마구잡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그런 판단을 하는 내 생각조차 마구잡이라고 깎아내리는 짓이다. 타당한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 하나의 입장은 반초월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오로지 도덕적이고 인격적이신 창조주, 즉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우리의 이름,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모든 관계, 우리의 숙명은 모두 이 출발점에 달려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기독교는 각 개인을 초월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과 개인이 맺는 관계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일 없이 그 개인에게 그 초월성을 슬쩍 보여준다. 심지어 아이들을 세속의 부모와 연관시키는 것도 그런 식이 아니던가?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죽하겠는가? ―111쪽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때가 있다. 또 호세아가 아내 고멜을 위해 그랬듯이 남편이 실제로 매음굴을 찾아가 아내를 되사오기 위해 줄을 서는 때도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심문(審問)에 나오라는 소환장이 아니라 관계를 누리라는 초대장이기 때문이다. ―314쪽

 

 

 

신학 공부

하나님과 세계

김진혁 | 예책 | 2017년 10월
 

요즘 시절이 참 수상하고 어수선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많은 책이 출간되고 세미나와 컨퍼런스도 더불어 풍성히 열렸지만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습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 많은 성도를 놀라게 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사태를 진즉에 예감한 출판계에서는 한국 교회에 신학이 없기 때문이라는 기치를 걸고, 수많은 진중하고 무게 있는 신학서들을 발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학 공부」도 어쩌면 그 생각에 동참하여 기획되었지만, 이것은 예책 출판사의 방향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책은 한국 성도의 ‘신앙의 기초 체력’을 키우자는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구체적은 실천 방법의 하나로, 「신학 공부」는 어려운 신학을 성도의 삶까지 끌어내려 이해할 수 있고, 알기 쉽게 써서 일상에 적용 가능하도록 만들어 보자는 의도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이원석 작가의 “신학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교양이 되어야 한다”는 추천의 글이 이 책의 목적을 잘 설명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성도는 새벽기도, 금식기도와 부흥집회, 찬양집회와 영성훈련, 제자훈련 등 수많은 프로그램과 훈련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는 것 같았지만 막상 하나님의 정의로 바르게 판단할 자리에서는 혼동하고, 조그만 시험이 와도 흔들리는 어쩌면 나약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이 모든 것을 다해 보았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신학을 한 번 공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성경에 굳게 서서 의지적이고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단단한 신앙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해 보는 것입니다.

신학은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일반적인 접근 방법을 택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신학이 아닌 내 삶과 신앙 가운데에서 신학을 찾고 발견하고 도움을 얻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질문입니다. 신앙 가운데 생기는 근원적인 질문에 조직신학적인 답변을 찾아가는 형식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문제를 설교나 상담이 아닌 조직신학의 풍성한 언어와 깊은 통찰을 가지고 지혜롭게 풀 필요가 있다는 주변의 요청도 있었고, 이를 통해 신학과 신앙, 이론과 실천 사이의 오랜 괴리를 좁혀 보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신학 공부」는 총 3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1권 “하나님과 세계”, 2권 “예수와 사람”, 3권 “성령과 공동체”입니다. 신학을 쉽게 쓰기 위해 단권으로 만든 책들이 내용을 깊이 있게 전하지 못하는 단점을 보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리를 풀이할 때에도 실제 삶이나 교회 생활의 예를 들었고, 소설이나 영화 등의 문화적 소재를 끌어와 신학과 현실의 틈을 좁히고 조금이라도 독자와 친근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특정 교단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기 위해 성서에 기초하면서 그리스도교 전통의 다양한 모습을 균형 있게 담았습니다.

「신학 공부: 하나님과 세계」는 총 3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부 ‘신학의 정의와 사료’에서는 신학의 정의, 신학의 기반이 되는 신학의 자료,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2부 ‘신론’에서는 삼위일체, 계시론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루고, 3부 ‘하나님과 세계’에서는 창조론, 섭리론, 신정론을 다루는데, 특히 신정론은 3장에 걸쳐서 ‘악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왜 악이 있을까?’,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도 괴로워하시는?’에 대해 다양한 견해와 의견을 담습니다.

이 책은 한국 성도들의 흔들리는 신앙을 단단하게 할 목적도 있지만 우리 성도들이 소그룹 성경공부의 수준을 넘어 ‘신학’을 공부하는 수준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신학생이나 목사님들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성도와 함께 읽고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인문학적 신학을 소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자는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단순한 알파벳에 지나지 않던 글자들이 모여서 새로운 의미가 되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신학의 언어를 배우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이 단지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까지 주실 정도로 사랑하는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현실 사회가 나를 규정하는 출신, 학력, 권력, 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바라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장악하는 힘과 논리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부여받게 된다고 말하는 저자의 진심어린 격려를 전하고 싶습니다. ―장병주 예책 대표
 

이 책에서…
 

신학을 통해 현실 사회가 ‘나’를 규정하는 출신, 학력, 권력, 재력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익힐 특권도 받는다(창1:26-27). 우리의 삶의 무게중심이 신학이 펼쳐 놓은 낯선 세계로 옮겨지면서, 지금 이 세계를 장악하는 힘과 논리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으로 살아갈 가능성도 생긴다. ―13쪽
 

“여러분이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개념―여러 가지가 뒤섞인 해롭고 낡은 개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학 공부는 자기 안에 자리 잡았을지 모르는 암묵적인 신학을 성찰하고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33쪽
 

계시가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바로 깨달을 수 없다. 또한, 계시 없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나는 나 자신에게마저 이방인일 뿐이다. ―123쪽
 

성서와 우리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강박적으로 성서를 현대 상황에 적용하려 노력하면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성서를 통해 이야기하게 된다. 성서의 ‘적용’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130쪽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 특별히 근대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인간들을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우주의 기원을 알려 주신 결과물이다. 창세기는 그 자체로 완결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신앙 속에서 성숙하고 자라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답고 지혜롭고 권위 있는 설명이다. ―167쪽


지금도 창세기는 여러 정신적·물리적 억압의 사 슬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에게,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 시며 ‘너’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행복하도록 창조된 존재라고 알려 주고 있다. 이처럼 창조론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역사 적 보고로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 주는 생동적인 교리라 할 수 있다. ―179쪽

 

 

 

우리 아이 매일 기도

소피 파이퍼 엮음 | 바바라 바뇨치 그림 | 옐로브릭 | 2017년 11월

 

기도의 기쁨과 유익을 아는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누구나 내 아이가 다윗처럼 진솔하게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도를 가르쳐 주어야 할까? 때로는 어른들의 틀에 박힌 대표기도, 관념적이고 생활과는 동떨어진 종교 언어만 접하면서 우리 아이들의 기도가 ‘어른 흉내’ 정도로 머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기도란 지루하거나 비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아이들의 반짝이는 마음을 담아내기엔 기성세대의 기도 언어는 너무 작은 그릇이 아닐까. 빼어난 문학이기도 한 다윗의 기도 시편들이 우리에겐 때로 푸석푸석한 화석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말이다.

「우리 아이 매일 기도」는 옐로브릭에서 두 번째 선보이는 어린이책이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나 읽어 주고 싶은 좋은 책을 발견하면 쇠붙이가 자석에 이끌리듯 출간을 결정했던 것 같다. 첫 번째 어린이책은 남아공의 평화 정착을 이끌면서 전 세계에 용서와 화해의 모범이 된 지도자 데스몬드 투투의 「하나님의 아이들 이야기 성경」이다. 작은 1인 출판사의 부족한 홍보력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입소문이 나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어린이 성경이다. 그에 용기를 얻어 엄마의 마음으로 한 번 더 선택한 책이 올 겨울 출간한 「우리 아이 매일 기도」다. 영국의 아동 작가인 소피 파이퍼가 오래 사랑받는 전래 기도, 유명 영성가, 시인들의 기도를 엮고 직접 쓴 기도서 145편이 들어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동시집을 비롯한 좋은 아동 창작물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어 기쁜 일인데, 그에 비해 기독교 출판계에서는 오래 간직할 만한 아동 문학을 찾아보기가 어려워 늘 아쉬웠다. 기도서로 나오는 책들을 보면 실용적인 대표기도 예문집 위주다. 나처럼, 어린이의 생각과 생활을 잘 반영한 친근한 기도서를 하나쯤 아이들 곁에 놓아주고 싶은 부모들이 많이 있으리라 믿고 「우리 아이 매일 기도」를 출간하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기독교 인구가 많은 나라들에서는 어린이 기도서도 다양하게 출간되고 많이 읽힌다. 그중에서도 이 책을 소개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가족, 여행, 식사, 학교 같은 소박하고 친근한 소재에서 출발해 절기, 이웃, 난민, 자연 등 큰 주제로 확장되는 균형 잡힌 주제가 돋보인다. 둘째, 종교적 엄숙함보다는 위로와 공감, 위트를 따뜻하게 장착한 기도문들로 구성되어 기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말로든 드릴 수 있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셋째는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인 바바라 바뇨치의 그림이다. 모든 페이지를 장식하는 환하고 명랑한 그림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책이다.

이 책 번역은 온라인으로 모집한 독자 번역단 50분과 옐로브릭 편집진이 함께 했다. 자원해 주신 분들 모두 실력을 멋지게 발휘해 주셨고 다채로운 개성이 살아 있는 기도서로 탄생했다. 기도서를 매일 읽는 문화가 앞으로 더욱 발전해서 우리말로 쓴 좋은 기도서, 기도 시편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이에게 어떻게 기도의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오늘부터 편안하게 이 기도서를 하나씩 같이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이 책을 보고 ‘어린이 기도서인데 어른인 내가 더 깊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시는 독자들이 많았다. 정말 그렇다. 좋은 어린이책은 어른이 읽어도 마음에 울림이 있는 책이라고 믿는다.―옐로브릭 임혜진 대표
 

이 책에서…
 

저 여기 있어요, 하늘 아래에.

저 혼자서 기도하려고 말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걸 알아요.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니까요. ―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9쪽)
 

오,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두 이방인이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여행 중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를 이방인이나

외부인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빚어진,

같은 사람으로 서로 대하게 해주세요. ―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요(43쪽)
 

하나님,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해 주세요.

하나님, 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해 주세요.

하나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축복해 주세요.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요. ― 하나님은 모두를 축복하세요(141쪽)
 

좋으신 하나님,

귀신과 유령들과 다리 긴 곤충들과

밤에 부딪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세요.(영국 콘월 전래 기도) ― 천사가 지켜줘요(149쪽)

 

 

 

공동서신의 신학

‘세상 속의 교회’, 그 위기와 해법

채영삼 | 이레서원 | 2017년 4월
 

공동서신 연구의 독보적 선구자 채영삼 박사는 이 책 「공동서신의 신학: ‘세상 속의 교회’, 그 위기와 해법」에서 공동서신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신학적 주제를 찾고 그 주제가 공동서신 각 권 내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논리적으로 분석한다. 야고보서부터 베드로전후서, 요한서신, 그리고 유다서를 한데 묶어 이를 하나의 정경 모음으로 보고, 그 안에서 ‘세상 속의 교회’라는 거대한 한 흐름을 살피는 시도는 그동안 거의 없었다. 사실 공동서신 전체를 묶어 ‘공동서신의 신학’이라고 상정하는 것조차 생소하다. 공동서신 각 권에 대한 주석을 쓴 학자들도, 주로 역사비평학적 접근으로 각 서신의 저자와 역사적 배경 혹은 서신서 내의 문학적 구조 정도만을 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관계는 역사비평학적 분석에 의해서 그 연관성이 부각되었지만, 공동서신 안의 한 책을 다른 책과 연관해서 일관된 주제나 신학을 끌어내는 시도는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신약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연구도 미진하여 미지의 영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 분야에서 감히 선구자적 이정표를 남겼다고 인정할 만하다.

공동서신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사도들의 목소리요 그들의 신학을 담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날, 교회는 이신칭의의 전통을 견고히 보전하면서, 동시에 바울과 협력하여 교회의 ‘온전한 신앙’을 세워 갔던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과 유다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일이 필요하다. 초대 교회는 결코 바울 혼자 세워 간 것이 아니었다.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선교의 물결도 거셌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뿌리 깊은 신학과 교회 통합적 노력도 빛을 발했다. 유대교를 상대해야 했던 초대 교회가 바울서신들을 남겼다면, 다른 한편으로 로마라는 거대하고 적대적인 세상을 상대해야 했던 교회는 공동서신을 남겼다. 여기에 공동서신이 현재 한국 교회에 대하여 갖는 적실성이 있다. 저자는 사회 속에서 도전에 직면한 교회의 본분과 사명이 바로 공동서신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보고, 현재 세상 속에서 세속화의 강력한 도전 속에 휘말려 있는 한국 교회에 공동서신이 매우 적실하고 시급한 지침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받은 구원을 확신하는 이 땅의 교회가, 참으로 다루기 어려워하는 대상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복을 받고, 그 받은 세상 복 속에서 점점 더 세상처럼 되어 가는 교회의 위기를 바라보며, 공동서신이 제공하는 전략과 메시지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세상과 짝하지 않는 전심全心의 교회(야고보서), 그래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세상을 지나가며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베드로전서), 그런 교회 속으로 밀려들어 온 세상을 몰아내고 신적 성품에 꾸준히 성장하는 교회(베드로후서),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거하며 세상을 이기는 교회(요한서신), 그래서 끝내 세상 속에서 성도의 구원과 영광을 지켜 내는 교회(유다서)! 이것이 공동서신이 그리고 있는 세상 속의 교회의 큰 그림이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꿈꾸고 이루어야 할 모습이자 아울러 반드시 회복해야 할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오늘날 공동서신은 잘 읽지도, 잘 설교하지도, 잘 연구되지도 않는, 불모지와 같은 분야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튼튼히 쌓아올린 학문적인 뒷받침을 통해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의 목소리는 그 잃었던 지위를 되찾고, 신학적, 윤리적 위기에 봉착한 한국 교회는 교회론적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의 행위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서신에 치우쳐 있는 한국 교회의 이해를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송혜숙 이레서원 편집자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동서신의 배경이 되는 ‘세상’이 대체로 ‘적대적’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교회 역시 대체로 ‘세상 부인적(world-denying ethos) 정서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곳은 가난한 자들이 핍박을 받는 곳이며(약2:1-7), 허망한 부의 유혹이 사람들을 죄와 사망으로 몰고 가는 장소이다(약4:1-4; 2:12-15). 혹은 하나님의 집에 속한 자들을 소외시키며(벧전1:1, 11), 교회가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성향과 방향을 가진 장소이다(벧전4:1-6). 불경건의 소굴이고, 심판의 대상이다(벧후2:1-5; 3:1-6; 유1:13-15). 마침내, 그곳은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어둠과 거짓, 미움과 사망의 처소이다(요일2:15-17; 3:13-14; 4:1-6). 이렇듯, 공동서신의 배경이 되는 ‘세상’은 공동서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공동서신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세상이 아니라, 공동서신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56쪽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교회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영역들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 원리와 의미, 그리고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서신이다. 예컨대, 국가 안에서 ‘세상 주권자들과의 관계’(2:13-17), 집안에서 ‘종과 주인과의 관계’(2:18-20),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3:1-6),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장로들과 젊은 자들과의 관계’(5:1-5a)에 대한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베드로전서의 이런 본문들은, 특히 ‘순복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와 함께 나타나는데, 그 배경으로는 신약의 다른 유사한 본문들과 함께(엡5:21-6:9; 골3:18-4:1; 딛2:1-10)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이론이 제시되어 왔다. ―307쪽
 

바로 이러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교회이다. 세상의 유혹과 위협 앞에 서 있는 교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스스로의 힘이나 어떤 이념이나 원리로 이 세상을 변혁시키고 뒤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혹은 그 반대로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동떨어진 채,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종말만 기다리는 온전히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공동서신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 세상을 맞닥뜨린 교회에게 요청하는 것은, 결국 ‘진리와 사랑’의 문제에서 승리하라는 요구라고 할 수도 있다. 야고보서 식으로 하면,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하여 시험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식으로 하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받은 거듭난 심령의 교회는 오직 그 많으신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사랑 안에서, 이 세상을 십자가의 길 곧 선한 양심의 길로 가시며 불의한 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인도하신 그리스도를 좇아 제사장의 임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777쪽

 

 

 

사랑으로 이겨내라

시편묵상필사

인크라이스트 편집부 | 인크라이스트 | 2016년 12월
 

30대 초중반 청년의 경계선에 서있는 저희 세 사람이 함께 인크라이스트를 창업했을 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충만할 때 기획한 「사랑으로 이겨내라: 시편묵상필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리즈’로 출간한 첫 번째 책이자 인크라이스트의 초도작입니다.

기성세대에게 풀렸던 삶의 숙제가 하나둘씩 막혀가는 세대, 2030 청년세대는 이제 N포 세대, 오포세대를 넘어 7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 7가지를 모두 포기한 세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말에 공감과 위로를 느끼던 세대가 어느덧 지나간 듯합니다. 청춘이니까 정말 아파도 괜찮을까요? 오늘날 기성세대는 “좋겠다, 젊어서.”, “지금이 딱 좋을 때야.”라는 입버릇으로 청년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 위로를 책으로 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 책이 학업과 취업, 육아로 분주한 청년들의 일상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인크라이스트는 시편에서 그 열쇠를 찾았습니다. 끊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가장 많이 받은 다윗이 쓴 시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메시지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편 속에 담긴 ‘위로’의 씨앗을 하나하나 찾아 73편의 싹을 틔우고 보니 따뜻한 한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눈물 골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승리한 다윗과 수많은 시편의 저자들처럼 이 시대 청년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이겨냄이 가능하다”는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독자가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필사 책의 특성이 말씀을 통한 힐링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왼편에는 시편의 원문을, 오른편에는 여백을 두어 시편을 따라 쓸 수 있는 필사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또 필사 책이지만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책을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감성적이고 잔잔한 일러스트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프롤로그와 가이드를 읽고 가벼운 마음으로 책에 있는 시를 필사해도 좋고, 책에 새겨놓고 싶은 글귀를 적거나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도 좋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독자는 머리와 가슴으로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오감五感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시편 문장들을 가만히 곱씹으며 따라 쓰다 보면 저자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문장으로 풀어냈는지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채워나가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한층 깊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홍성아 인크라이스트 편집장
 

이 책에서…
 

시편 언어에 마음을 실어보세요.

쓰지 않고 읽기만 해도 좋고

여백에 낙서를 하거나

기분에 따라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아요.
 

그렇게 조금씩 읽고 쓰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따뜻한 위로가 있는 사랑이 시작될 거예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그 사랑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어요.

새롭게 하는 힘이 있어요. ―프롤로그

 

 

 

바하밥집

따뜻한 한 끼, 새로운 삶의 디딤돌

김현일 | 죠이북스 | 2017년 7월
 

바하밥집 김현일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바하밥집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읽고 나서 책을 작업하며 최종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여기, 사람 있습니다.”

바하밥집에 대한 소식은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CBS>의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김현일 대표가 출연하기도 하셨고, 여러 기독교 언론 매체에 바하밥집이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자에게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뭔가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짤막하게 소개되기에는 뭔가 아쉽다는 마음에 김현일 대표를 찾아갔습니다.

김현일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살아온 삶의 구석구석을 누벼볼 수 있었습니다. 험악하게 살아온 젊은 날,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노숙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인 듯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된 과정, 삶의 가치관과 시각을 바꿔준 여러 사람들…. 바하밥집을 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나님이 “김현일”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빚어 가셨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김현일 대표와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바하밥집 사역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그리면서 노숙인과 봉사자, 바하밥집 사역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사실 노숙인에게 무료 배식 사역을 하는 단체를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바하밥집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김현일 대표와의 인터뷰가 더 진행되면서 조금씩 해소되었습니다.

현재 바하밥집은 “바나바하우스 보문 공동체”라고 하는 공동체의 한 사역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노숙인과 비노숙인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김현일 대표가 무료 배식을 하면서 보게 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밥을 주어 한 끼를 해결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데까지 시선이 이른 것입니다. 그 시선이 바하밥집을 넘어 카페 브룩스, 만두 동네와 같은 가게를 열게 만들었고, “하루를 쓰다”, “희망백팩”과 같은 협력 사역으로도 이어지게 한 것입니다. 첫 단추는 바하밥집이었지만, 완성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김현일 대표는 단순한 무료 배식 사역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공동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흘러가고 드러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바하밥집 사역을 통해 노숙인뿐 아니라 봉사자들, 활동가들,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까지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깊숙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그분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고 분투하는 김현일 대표의 이 삶이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이 되길 바랍니다.―신현정 죠이북스 에디터
 

이 책에서…
 

지금 이 시간, 수많은 밥상이 차려지고 있겠지만 우리 밥집에서 차린 이 밥상은 예수님이 차려 주신 밥상이고, 여기 오신 분들은 예수님이 초대하신 손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식탁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여기 오신 손님들을 예수님의 손님, 나의 왕의 손님이라 여기고 항상 눈을 마주치고 거룩하게 대해 주십시오. 봉사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이 순간만큼은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손님으로 이분들을 대해 주십시오. 걸인이나 노숙인으로 대하지 말고 최고로 소중한 손님으로 대해 주십시오. ―55쪽
 

오랫동안 노숙 생활을 하다가 부랑으로 가는 분들은 내적 동력이 없어서 무엇을 해도 성공할 확률이 없어요. 실패가 반복되면 더 이상 도전하지 않으시고요.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책임 있게 돌보고자 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필요하죠. 잠시 자활의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박수 치며 떠나보내서는 안 돼요. 그 사람이 직장에서 큰 갈등 없이 계속 적응하고 이겨 나가는지 등 사후 관리를 위해 공동체로 품어 주는 게 중요해요. ―121쪽
 

밥집 일을 하면서 예수님의 임재를 더 현실적으로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임재라고 하면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느끼는 따뜻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님을 진짜 나의 왕으로 여긴다면 왕이신 그분을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왕이신 그분이 계신 곳에 내가 가는 게 당연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임재”라는 대명제가 선명하게 정리되더라고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도 죄인, 세리, 창녀, 노숙인, 전과자, 탈북자, 성적 소수자들 사이에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곧 제 삶에서 드려야 할 예배처가 어디인지가 바로 결정되더라고요. ―146~147쪽
 

저는 바하밥집을 통해 도시 빈민 공동체의 그림을 조금씩 그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봐요. 직업 자활 센터를 통해 카페 브룩스가 생기고, 베이커리, 만두 가게가 생기고, 공방이 생기고, 사랑방이 생겨서 인문학 수업이 진행되고, 자활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문동으로 이사하며 함께 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공동체 안팎에서 “바나바하우스 보문 공동체”라는 도시 빈민 공동체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죠.

바하밥집의 무료 급식 사역은 이제 바나바하우스 보문 공동체 안의 한 사역으로 인식되고 있어요. 여러 사역의 그림을 통합적으로 그려 가면서 각자 공동체 사역임을 이해하기 시작한 거죠. ―190쪽

 

 

 

일상적 폭력, 폭력적 종교

구약성서 형성과 수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에 대한 연구

이종록 | 쿰란 | 2017년 10월
 

처음 이 원고를 접했을 때,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폭력과 종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의 주제는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다. 그러면서도, 호모 사피엔스(지적인 인간)는 호모 비오랑스(폭력적 인간)이지만, 호모 페스티부스(축제하는 인간)이기도 하다는 데까지 주제를 발전시킨다.

뉴스에서, 주변에서 온갖 폭력을 갈수록 더 많이 접하는 요즘이다. 일상적 폭력인 것이다. 언어폭력, 학교폭력, 성폭력, 살인, 내란, 전쟁…. 저자는 묻는다. “왜 인간은 폭력적인가?” 실제로 인간 생활의 어떤 측면도 폭력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인간의 삶 자체가 폭력적이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강력한 신적 계명은 인간이 살인하는 존재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들마저도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저자인 이종록 교수는 5년 가까이 폭력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쓰는 기간 내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이 책은 이종록 교수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저술지원사업에서 연구비를 지원 받아 출판되었다. 2014년 「예술·신체·공간」 라는 전문적인 학술서를 쿰란에서 출간하면서 알게 된 이종록 교수는, 책날개 사진에서 보듯이 긴 머리에 미소가 멋진 분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누어, 구약성서 형성 및 수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성―라멕의 노래에서, 노아의 저주에서, 이삭의 저주에서, 요셉의 이야기에서, 드보라의 노래에서, 정복 전쟁에서, 솔로몬 통치에서, 갈멜 산 사건에서―을 보여주고, 성서본문이 성서적 가치관이 아닌 당시의 현실논리를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규명하면서 종교와 폭력의 관계를 밝힌다.

저자는, 성서의 기록들이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에 당시의 현실 논리가 자연스럽게 그 기록에 스며들었고, 독자들은 성서를 읽으면서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저자는 ‘닫는 글’에서 마지막으로 달란트 비유 읽기를 통해 축재蓄財의 폭력을 논한다. 결론적으로 축재가 아닌 축제祝祭 하는 인간, 더불어 사는 축제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축재의 종말, 종말의 축제를 꿈꾼다. ―오완 쿰란 편집부장
 

이 책에서…
 

인류 역사는 기득권층의 의도와 달리, 민중들이 축제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해온 역사이다. 그래서 축제는 환상의 축제이며, 종말의 축제는 축재의 종말로 모두가 평등하게 어우러져 먹고 마시고 춤추며 사는 음주가무의 세상이다. 그것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진정한 잔치의 나라라는 점에서 더욱 카니발스럽다. 축제 없는 축재蓄財의 세상에서, 우리는 온 생명체가 누리는 진정한 몸의 축제, 온전한 카니발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 ―502쪽
 

한국 교회의 위기는 한국 교회가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비기독교적이고 비성서적인 설교를 하는데, 그것을 상당수 한국 기독교인들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자들이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것들이 설교에 부적합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오히려 한국 교회는 정용섭이 말하는 대로, 설교자들이 성서에 대해, 신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크래독이 지적하는 것과 달리, 한국 교회가 귀납적이지 않고 상상력이 부족해서 설교의 위기를 맞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설교가 만연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김운용이 말하는 것과 달리 들려지지 않은 설교가 문제가 아니라, 그릇된 설교가 잘 들려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그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는 성서를 바르게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성서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교회적인 사명과 사회적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아닌, 그들의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하나님 말씀으로 전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범하는 가장 큰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죄가 교회적인 영역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사회 전체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에서 성서를 잘못 읽거나 그릇 읽고 선포하는 행위는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중죄임을 한국 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115쪽

 

 

 

시편적 인간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월터 브루그만 | 박형국 김상윤 옮김 | 한국장로교출판사 | 2017년 8월
 

어쩌면 삶이란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풀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일찍이 발터 카스퍼는 자신의 저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죄와 악의 세력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서사시적 승리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우리에게 이르러 오디세우스적인 화려한 결말보다는, 볼품없고 초라한 주인공이 나오는 짤막한 희극쯤으로 끝마치는 듯하다. 왜 우리는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의 삶의 승리로 풀어내지 못하는가?

단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월터 브루그만은 거칠고 강렬하게 기독교를 저항하는 방식으로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드러낸다. 그는 기독교의 신앙과 문화 그리고 언어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가?” “기독교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정한 사고 패턴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가?”

“시편은 무엇을 노래하는가.”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적 인간」에서 지극히 생경하게 들릴 수 있는 이 질문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견고하게 짜인 기독교의 방진方陣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우리는 시편에서 교회가 자주 애송하는 수많은 찬양들을 발췌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의 경건한 묵상을 방해하는 좌절과 분노, 복수를 염원하는 강렬한 열망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개의 극단적 사고방식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의 간극처럼 전혀 거리낌 없이, 어떠한 화해도 시도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 브루그만은 이와 같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자아 내부의 간극을 적당하게 좁히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긴장을 인류가 가진 ‘영혼의 흔적’처럼 이해한다. 우리는 아는 것 그 너머에 있는 비가시적이며 불가해한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신앙하며 산다. 어쩌면 믿음이란 태생적으로 이 내적인 간극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난해한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기대하며 「시편적 인간」의 첫 장을 펴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브루그만은 이 질문에 대해 손쉬운 대답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계류한다.

기독교 문화와 시대의 문화 사이의 대충돌, 예루살렘의 파괴된 도성처럼 황폐해진 우리의 삶의 자리, 내재된 분노와 응답 없음으로 인해 식어 버린 기도, 부의 극단적 편중과 정의가 사라진 무질서의 세계, 심지어 오늘도 스마트폰에서 ‘오늘의 핫딜’을 검색하며 구매욕과 씨름하는 일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는 이러한 주제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시편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다.

이 책의 원서 From Whom No Secrets Are Hid(주께서는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사오니)는 성공회의 공동기도서에서 차용한 것이다. 브루그만은 이 책에서 ‘양식비평’과 ‘심리학’이라는 두 가지의 학문 체계를 가지고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위의 주제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우리 속에 있는 은밀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폭로’한다. 시편에 대한 해석에서 그가 사용한 이러한 시도는 독보적이면서도 탁월하다. 그는 시편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심도 있게 고찰하는 한편, 그 속에 드러난 인간 보편의 감정을 매우 정교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쫓는다.

그의 책 속 시편의 화자, 다시 말해 ‘시편적 인간’은 매우 수동적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아뢰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의 탄원은 매우 단순하고 저급하기까지 하다.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궁에서 건져 주시기를,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응징이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자식에게까지도 미치기를. 우리가 외면할 수는 있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실은, 이러한 ‘시편적 인간’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브루그만은 이 책을 통해 그것마저도 기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상황에 굴복하고 안주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향해 울부짖는 일은 그 어떤 행위보다 적극적이고 저항적이며 혁명적인 행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시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가 가진 힘인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독자는 한층 더 찬양과 기도의 자리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찾은 그 자리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시편적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것들을 다윗과 아삽 그리고 성전을 오르던 수많은 순례자들의 노래를 빌려 하나님과 자신 앞에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 월터 브루그만이 한국어판 서문에도 밝히고 있듯이, 시편은 시대를 넘어 이스라엘의 찬양을 오늘 우리의 찬양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장소를 초월하여 하나의 신앙을 공유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이들을 놀랍게 연합시킬 것이다. ―이우진 한국장로교출판사 에디터
 

이 책에서…
 

나는 시편에 대한 두 가지 질문과 함께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우리는 시편이 우리의 신앙과 예배 그리고 영성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두 번째 질문은 “시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대부분은 시편 가운데 단지 여섯, 일곱 편만을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나는 위의 두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포함하여, 삶의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세상의 현상, 상징 그리고 기억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시편은 우리를 이렇듯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과의 긴장과 모순관계, 곧 ‘역 세상’(the counter-world)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실현 가능한 모든 세상들 가운데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자주 느낀다.…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와 긴밀하게 연결된 이 세상을 뛰어넘는, 또는 완전히 다른 그 어떤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37~38쪽
 

정직한 기도는 우리의 삶의 기저에 펼쳐진 현실을 표현한다.…마음속 비밀과도 같은 미움이 완전히 드러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분노를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0, 188쪽
 

기도는 하나님의 대답을 얻으려 애쓰고, 대답이나 해결책이 부족할지라도 마땅히 따라야 할 신실함을 행하며, 어두움, 침묵, 부재 가운데서 진리를 외치며, 깊은 수령에 잠식되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다.…기도는 단지 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다. 기도는 현 사회를 유지, 관리할 수 있는 체제의 힘 너머에 있는 사회적 힘을 동원하려는 시도다. ―219, 224쪽

 

 

희생되는 진리

 

르네 지라르와 무라카미 하루키, 기독교를 옹호하다

오지훈 | 홍성사 | 2017년 7월
 

이책에서 저자는 르네 지라르René Girard(1923~2015)의 희생양 이론을 통해 군중의 폭력성에 따라 왜곡되고 굴절되는 진리를 사회적 맥락에서 다시 발견하고 바로 세워야 함을 환기한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담긴 지라르의 통찰을 통해 현대 사회의 제 문제를 예리하게 주시하는 하루키에게 기독교가 재발견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두 사람이 나름의 방식으로 폭로하는 ‘범속한 대중의 전체주의’는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룬 많은 논의의 바탕을 이룬다.

한편, 저자는 과학주의 무신론으로 시작해 동성애와 낙태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가장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 방법을 논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성경의 권위와 신앙 또는 신학에 기대지 않았는데, 서로 반대되는 입장과 대화하려면 소통 가능한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 3부에서 저자는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바람직한 모습 되찾기를 모색했다. 한국 교회 안팎에 깊게 뿌리내린 편견을 제거하고 발상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 좌파 지식인과 복음주의자 목사의 예를 통해 그 접점을 살펴보았으며, 복음주의가 선택할 제4의 선택지(‘정책적 진보와 문화적 보수’)를 제시했다.

많은 기독교 변증서가 국내 저작물 및 번역서로 소개되어 있지만 기독교 밖에서, 특히 철학적·사상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를 다룬 책은 발견하기 쉽지 않다. 르네 지라르는 이 점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사람이다. 그의 이론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한 세대가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현대철학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져온 것과 달리 기독교계에서의 접근은 미미했으며, 대중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라르와 기독교 그리고 일반 독자를 잇는 삼각점과 그 적절한 균형추를 찾아오던 홍성사에서는 이 저자의 글에 주목했다. 이미 출간된 국내 저서·번역서들과 달리 르네 지라르 이론의 핵심을 일반 독자들에게 더욱 쉽고 명료하게 전하는 한편, 오늘날 인간과 사회에 팽배한 문제적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에 새롭게 다가가게 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언뜻 보기에 이 두 사람은 공분모가 없을 듯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통해 기독교가 옹호되고 재발견됨을 예리하고 탁월하게 분석하고 정리했다. 자칭 ‘지라르와 하루키 덕후’라고 했지만 저자의 명확하고 일관된 논지 전개는 ‘덕후스러움’을 넘어 깊은 공감과 울림을 준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기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할 때 어떤 접점을 찾아 서로 공감하며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기를,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한 노력은 오늘날 희생양을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받는 ‘이 시대의 마지막 희생양’,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기독교 진리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승호 편집부장
 

이 책에서…
 

하루키는 개개인의 사랑이 진정으로 숭고하고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에 모델이 필요한데, 그것을 기독교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은 신의 은총에 의해 맺어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리틀피플’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힘이다. 그 사랑은 군중의 폭력으로부터 한 사람을 지켜 내는 소중한 용기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토리는 르네 지라르의 논지와 연결되고, 복음의 핵심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데 왜 하필 신인가(251쪽)

 

지라르와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진리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게 되는데, 저자는 이를 토대로 ‘진부한 비판과 옹호를 넘어 기독교를 보는 시각’을 제공하려 했다. 또한 오늘날의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논한 것은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 진리를 재발견하기”라는 저자의 일관된 지향점으로 수렴된다.

지라르에 의하면 오늘날 사탄, 즉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그리스도의 가면을 쓰고 그리스도를 흉내 낸다. 그리하여 지라르는 오늘날의 사회를 “기독교를 모방하며 기독교를 적대하는 희화화된 초(超)기독교사회”라고 말한다. 결국 안팎의 공격에 처하는 마지막 희생양은 이제 희생양을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받는 ‘기독교’가 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사회는 기독교적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화적이다. … 지라르는 신화를 분석하면서 군중의 인지불능을 언급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알려지고, 희생양에 대한 근심이 절대적인 가치가 된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은 희생양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희생양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희생양, 기독교(201쪽)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김중락 | 흑곰북스 | 2017년 7월
 

생뚱맞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해서 여기저기서 루터 관련 책이 쏟아지는 중에 갑자기 스코틀랜드라니. 멀어도 너무 멀다 싶다. 출판사도 의외다. 흑곰북스는 일반 신자에게 쉽게 다가가는 교리 학습서를 주로 내던 곳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엔 학술서를 찍었다. 흑백 양장본이 오히려 낯설다. 저자도 목회자나 신학 교수가 아니라 역사를 전공한 국립대 교수다. 여러모로 뜻밖의 책이다.

내용을 보면 이해가 된다. 장로교회는 한국 개신교에서 다수를 점한 교파이다. 그리고 장로교회의 역사적 뿌리는 스코틀랜드의 1, 2차 종교개혁으로 본다. 그런데 이제껏,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를 직접 다룬 책을 떠올리면, 딱히 없다. 생각할수록 이상할 정도다. 어느 교파든 자신의 탄생 배경을 알고자 하는 노력은 있는 법인데, 100년을 훌쩍 넘기는 장로교회 역사에서 그게 없었다. 바꿔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가 스스로를 잘 몰랐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서서히 변하는 조짐이다. 교계 뉴스가 어지러이 공중파를 타고 네티즌의 공분을 사는 시절이다. 교회됨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뿌리부터 다시 점검하자는 필요가 바닥부터 솟아나는 까닭이다. 2016년에 예약판매로만 1쇄 물량을 판매한 동일 출판사의 교회사 학습서 「특강 종교개혁사」가 하나의 증거였다. 이 책은 장로교회의 ‘헌법’을 생산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과감하게 종교개혁의 정점으로 꼽으면서 등장한 다소 특이한 책이었으나, 독자들은 반응했다. 그 후속작이자 ‘학문적 백업’을 담당하는 아이템이 이 책이다. 즉, 이 책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처참한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눈감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기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를 투영한다는 점에서 적실성이 높다.

또한 학술서임에도 쉽게 읽힌다. 저자는 역사가 본래 ‘학문’이 아니라 ‘이야기’였음을 강조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이야기는 학자의 몫이 아니라 이야기꾼의 몫이고 이야기꾼이 상대하는 대상은 학술회장의 교수들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백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학술서의 형태는 띠고 있지만 지극히 대중적인 출판물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는 역사 서술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주변국의 형편과 연계하여 설명한다. 다만 기존의 종교개혁사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위인전으로 쉬 흐르던 것을 탈피했다. 종교개혁자들의 그늘진 면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그들을 뒤에서 후원하던 귀족들의 면면도 사료에 근거해서 밝혀준다. 말 그대로 ‘팩트 체크’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의 그것과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글은 한 세기를 훌쩍 지나 17세기 중반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이르기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진다. 잠깐, 웨스트민스터는 런던이 아닌가? 런던은 잉글랜드의 수도이고, 잉글랜드의 국교는 성공회이다. 그렇다면 왜 성공회의 수도 런던에서 장로교회의 헌법이 만들어지는가? 바로 이런 의문을 1부에서 풀어준다.

2부는 인물편이다. 1부에서 등장한 인물 중에서 일곱을 선별해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 중에 우리가 잘 몰랐던 특별한 인물들이 눈에 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활약했던 스코틀랜드 총대들이 그들이다.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침착하고 객관적인 어조로, 그러나 그 인물들에 대한 호의와 존경을 담아 2부를 써내려간 것으로 읽힌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이들이 바로 한국 장로교회의 사실상의 부모들이다.

위대한 조상을 가진 후손인데 우리의 현실은 왜 이토록 박약한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야 하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는 길은 결국 모든 일의 시점이었던 뿌리부터 다시 찾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뜻밖의 초청장을 건넨 스코틀랜드가 낯설면서도 반가운 이유이다. ―황희상 흑곰북스 책임편집자
 

이 책에서…
 

종교개혁의 성패는 정착의 기간으로 단정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1천 년 이상 지속되어온 교회의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일은 단기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이어받고자 한 것도 아니지만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중세적 전통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수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은 단지 교회만의 수정이 아 니라 필연적으로 세상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종교개혁은 ‘사회개혁’이고 ‘긴 종교개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탄식한 것은 종교개혁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죄된 속성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그들의 탄식 속에는 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이 지속되길 바라는 소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러한 ‘긴 종교개혁’은 대부분의 개혁교회가 경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긴 종교개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의 개혁교회가 “가장 잘 개혁된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실은 1560년 이후 1638년 글래스고 총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순수한 장로교회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전진과 후퇴가 수없이 반복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주교제와 장로회제도가 서로 뒤얽혀 있는 기간이 더 길었다. 긴 종교개혁을 극명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그래도 장로회제도를 탄생시켰고, 장로교회는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월이 흘렀고 사회가 변하였으니 변화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아는 것은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의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서가 부재한 상황이 안타까웠다. 이 책은 이러한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이 책을 통해 더 깊은, 더 많은 연구가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6~7쪽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4년 전에 총회는 우리들 중 몇몇을 존경스럽고 소중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보내 소중한 씨, 즉 적들이 말하듯이 우리 교회의 씨가 아니라 모든 빛과 진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씨를 뿌리게 하였습니다. 비록 씨 뿌리는 일에 많은 고독과 당혹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우리의 수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좋은 추수로 인해 우리뿐 아니라 바다 양편의 수천의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베일리의 1647년 스코틀랜드 총회 보고서 중에서(359쪽)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칼뱅파 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들어 낸 결과들을 그들의 헌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존의 모든 신앙고백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신교 신앙의 표준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총회의 유산은 스코틀랜드 특사들의 학식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의 결과이다. 교회사의 걸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서, 예배모범서, 장로교 정치서는 무려 한 세기 전부터 시작된 기나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완성이자, 장로교 종교개혁의 완성이었다. ―280~281쪽

 

 

 

사랑학교

고뇌와 연민으로 삐걱거리는 부부를 위한 사랑의 기술

게리 토마스 | 윤종석 옮김 | CUP | 2017년 1월
 

연애 시절 서로 뜨겁게 사랑하던 커플이 결혼하고 나면 이런저런 이유로 다투고 투쟁하다, 종국에는 이혼까지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우리나라는 다른 국가에 비해 혼인율이 높아 OECD 국가 중에서 3위인데, 이혼율도 높아 OECD 국가 중 7위, 아시아에서는 1위라고 한다.-2014년 기준).

고학력 시대의 현대인들은 일을 위해서는 열심히 배우고 성장하지만, 관계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적다. 그러다 보니 가장 원초적인 관계, 부부 관계에 들어서면 필수적으로 만나게 되는 관계의 여러 갈등 앞에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댄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높은 신앙 수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서로 상처 받고 상처 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힘들어 하는 부부들을 흔히 만난다. 어디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끙끙대다 이혼에 이르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복음주의 사역자로서 많은 부부들을 상담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간파한 게리 토마스는 남편과 아내의 심리적, 생리적 차이를 다룬 책 「부부학교」를 펴냈고, 결혼의 현실 인식과 배우자 선택의 길을 알려 주는 「연애학교」를 펴냈다. 특히 「사랑학교」는 많은 사례를 바탕으로 실제적이고 깊은 공감을 일으키면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결혼생활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주는 힘이 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친밀함과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설계하셨다.

우리 중 누구도 몇십 년 동안 상대를 계속 매료할 만큼 매혹적인 사람은 없다. 남녀가 90분의 로맨스 영화를 보기는 쉽지만, 90년 동안 로맨스를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이유는 사랑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결혼만 하면 자동적으로 사랑이 깊어지고 행복이 퐁퐁 솟아날까? 게리 토마스는 관계는 가꾸지 않으면 시들어 죽는다고 말한다. 이 책은 부부 관계의 비결을 다루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배우자를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 딸로 볼 수 있도록 사랑의 관점을 새롭게 하고 확장시켜 준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평생사랑이란 단지 부부가 끝까지 함께 사는 것 이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게리 토마스는 우리의 결혼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한다. 결혼은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지극히 영적인 행위다. 이 책은 그저 또 하나의 결혼 서적이 아니라 결혼을 본연의 고귀한 자리, 웅대하고 초월적인 영광의 자리로 다시 끌어올려 줄 것이다.

이 책에는 성경적 지혜와 실제적 제안으로 가득하다.

매 장마다 토론문제와 작은 기도문이 제시되어 있어 부부 간에, 공동체 내에서, 부부 관계 그룹에서 함께 읽고 나누면 더욱 풍성한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김혜정 CUP 편집장
 

이 책에서…
 

내가 하나님의 딸과 결혼했음을 깨닫고 나서부터 결혼을 보는 내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이 그분의 딸, 즉 내 아내를 대하시는 심정은 내가 내 딸들을 대하는 심정보다 더 거룩하고 열렬하다. 갑자기 결혼생활이 나와 상대방 둘만의 일이 아니라 제3의 열정적인 이해 당사자와의 관계로 변했다. 내 평생에 예배의 주된 형태 중 하나는 아내를 잘 돌봄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분의 눈에는 내 아내가 언제나 “사랑스러운 우리 딸”일 테니 말이다. ―32쪽

 

부부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해 주는 이런 일들을 중단하면 관계가 시들어 죽는다. 거짓된 친밀함의 한계에 도달한 부부들은 안타깝게도 관계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상대를 탓할 때가 많다. “그동안 우리가 관계를 잘 가꾸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짝을 잘못 만난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최고 수준의 설계사에게 의뢰해 설계도를 받아 놓고는 집을 반쯤 짓다 말고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설계도에 하자가 있다. 지붕의 구멍으로 물이 샌다!”

문제는 설계사가 아니다. 집을 지어야 할 사람들이 작업을 다 끝내 지 않는 게 문제다. ―164쪽

 

결혼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특히 고통스럽다. 그래서 전형적 권력 이동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친밀함이 그 속에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이를 통해 우리가 자라갈 수 있다. 권력 이동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성숙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대개 거기서 원망과 원한이 싹튼다. 그러다 권력이 내 쪽으로 넘어오면 그 원한 때문에 권력을 무기로 휘둘러 관계에 더 큰 해를 입히기 쉽다. ―170쪽

 

 

 

이것이 복음이다

톰 라이트 | 백지윤 옮김 | IVP | 2017년 2월
 

톰라이트, 그는 영미 복음주의 신학계와 출판계에서 여전히 가장 ‘핫’한 신학자이자 저자로 지명되고 있다. 톰 라이트의 메시지를 욕먹을 각오를 과감하게 집약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올해 번역 출간한 그의 「이것이 복음이다」 는 그런 그의 메시지가 대중적 언어로 압축되어 있는 책이다.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독자들의 서평 릴레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은 줄곧 큰 관심 속에서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그는 복음이 ‘충고’가 되어 버린 오늘의 현실을 한탄하며 복음의 정체가 ‘소식’이었음을 강조한다.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방법’이나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을 알려 주는 충고나 윤리 정도로 축소시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세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이 복음은 세상을 과거와 현재, 미래 차원에서 영향을 미친다. 즉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해 세상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게 되었으며, 미래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건을 소망하게 하며, 그 결과 지금 여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무엇보다 선포된 이 소식은 그에 반응하는 새로운 백성을 낳으며, 그들 안에서 마지막에 완성될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된 증거를 드러낸다. 톰 라이트는 이 소식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명명하고 이 책에서 힘 있게 선포한다.

이미 톰 라이트의 주요 책을 출간한 대표적 출판사로서 IVP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압축적으로 명징하게 보여 주는 이 책을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번영신학, 기복신앙 같은 유사 기독교만이 아니라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화석처럼 굳어버린 기독교 이해와 현대화된 복음 이해 또한 복음을 축소하거나 왜곡할 위험을 갖고 있음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이란 그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소식이다. 죽은 뒤에 천국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책보다 복음을 복음 되게 하려는 톰 라이트의 신선한 시도가 돋보이는 책이었고, IVP는 이를 많은 독자의 선택을 받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자 만물을 회복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복음의 이야기를 재진술하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감싸고 있는 가장 큰 배경 이야기가 창조주 하나님의 귀환이라는 이야기임을 절묘한 예화를 적시적소에 사용해 잘 드러내준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이는 <톰 라이트 애브리원 주석> 시리즈에서 이미 확인된 바이긴 하나, 이 책에서 독자를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한 추천자의 말대로 “톰 라이트가 쓴 책들 중 단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다!” 올 한 해 8000여 독자가 그랬듯 여러분도 이 책과 함께 복음의 능력을 다시 확인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누리는 봄날을 맞게 되기를 기대한다. ―정지영 IVP 편집장
 

이 책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시면서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물론 이 기도에는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소식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준다. 좋은 소식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 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우리는 좋은 소식의 사람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약 예수님 자신이 궁극적인 좋은 소식의 사람이셨다면, 그분이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주신 이 기도야말로 가장 훌륭한 시작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른바 주님의 기도(마6:9-13)라고 하는 이 기도는 유명하다. 성인이 되어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도 어릴 때 배운 이 기도만큼은 기억한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이상한 점은 아주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보는 시각을 기도로 옮긴다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와는 다를 것 같다. 아마도 그 기도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바로 지금 제가 죄를 그만 지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오 하나님, 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오 하나님, 제 가족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을 허락해 주세요.

오 하나님, 당신의 세상이 너무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정의를 이루어 주세요.

오 하나님, 애니와 벤과 캐롤린과 데이비드와 엘리노어와 프랭크(이상 알파벳순)를 고쳐 주세요.
 

이 기도에서 그 자첼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용서, 윤리적 비전, 용기, 먹을 것, 정의, 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는 모두 훌륭하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가 이런 내용을 모두 포함할지언정 그 시작은 이런 내용이 아니다.

나는 주님의 기도가 핵심 주제를 쭉 나열해 놓은 목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순위에 따른 목록이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기도의 뒷부분에서 시작하여, 아예 앞쪽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도 많다. 좋은 소식을 배우고 좋은 소식의 사람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순서대로 이 기도를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225~226쪽

 

 

 

도킨스의 신

‘이기적 유전자’에서 ‘만들어진 신’까지

알리스터 맥그래스 | 김지연 옮김 | SFC | 전면 개정판 | 2017년 7월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맥락에서 쓰이기는 하는데, 일단은 취업이 안 되어 부모님 뵐 낯이 없는 문과생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애초에 다수가 문과에 진학하는 우리 제도교육의 현실에서는 좀 이상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느끼는 모양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과학적인 이야기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낯부끄러움을 표현할 때도 쓰입니다. 예를 들자면,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결정되면서 웹 공간에서는 ‘문송함의 물결’이 넘쳐났습니다. 중력파 연구 성과가 어쨌든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과학을 공부하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송합니다’는 곧 우리 사회의 젊은 층들에게 과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공업’이 산업 분야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최근에 게임이나 BTS와 같은 여러 문화 콘텐츠들이 국외로 많이 수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판로를 (혹은 시장의 인식을) 가능케 한 것도 모두 ‘공업’ 분야의 성과였습니다. 한국은 몰라도 삼성은 아는 외국인들이 꽤 있는가 하면, 삼성이 망하면 한국도 망하는 게 아니냐며 의심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공학이,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는 과학이 생존과 번영의 지름길이며, 사실상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 일상의 삶을 구성하는 숱한 테크놀로지들로 말미암아 더 강화될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실제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존과 번영의 근간’인 이공계열로 향하지 않은 문과생들이, 그리고 ‘생존과 번영의 근간’인 과학에 어두운 일반인들이 ‘문송합니다’를 외치는 것이, 물론 농담이 섞여있기는 해도 마냥 웃어넘길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 씨가 자신의 주장들을 자신만만하게 내놓았을 때, 아마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문송합니다’를 외치며 그에게 열광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과학은 너무나도 어려워 감히 입에 올리기 송구한 것인데, 도킨스 씨가 그 어려운 것을 꽤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도킨스 씨가 종교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들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과학철학적 사변에 가깝다는 평이 많지만, 뭐 일단 앞에 ‘과학’이 붙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그렇게 도킨스 씨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의 허구성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한 도킨스 씨에게 맞서 기독교 신앙이 허상이 아니며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려면, 이 시대에는 어쩔 수 없이 ‘과학적으로’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우리 시대의 문송한 사람들은 신학이나 인문학과 같은 자신들의 문송함의 기반이 되는 학문들에게 설득당하기보다는 위대한 이과적 후광을 빛내는 사람들에게 호응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는 신학자인데도 불구하고 문송하지 않은 사람이 필요한데, 그렇습니다. 바로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그런 사람입니다. 신학자이자 과학자인 그는 이 책으로 종교에 관한 한 리처드 도킨스 씨가 사실은 ‘과학적 약장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잘 지적해줍니다.

저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기독교 분야 책을 만드는 지극히 문송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이러한 우리 현실의 맥락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 책의 중요성을 설명해보았습니다. (절대로 귀찮아서가 아닙니다). 만약 도킨스 씨에게 약을 사 드신 형제자매나 일가친척이 주변에 계신다면 얼른 이 책을 권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아마 이 책만 한 약이 없을 겁니다.

도킨스 씨가 신간을 계속 내 온 만큼 맥그래스 씨도 개정판을 내시는 바람에 문송하게도 저희도 개정판 번역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초판을 읽으신 분들도 도킨스 씨의 새 책들에 말려들지 않으시려면 개정판인 이 책을 다시 읽으셔야 합니다. 독감 예방주사를 괜히 해마다 맞는 게 아니니까요. CTK에서는 출판사의 명예를 걸고 책을 소개하라고 하셨는데, 저희는 문송한 나머지 맥그래스 씨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과학 앞에서 심히 쪼그라드는 신앙인들께 이 책을 권합니다.―SFC출판부 송드바램 편집장
 

이 책에서…

 

전반적으로 볼 때 도킨스의 유전자의 눈 관점은 진화 과정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데 발전적 교수법으로서 유용한 것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중 하나의 접근법일 뿐, 독보적인 결정적 진화 이론은 아니라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 105쪽

 

나는 도킨스가 신앙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을뿐더러,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학자도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다. 도킨스가 주장하는 신앙의 정의는 여러 기독교 교파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신앙 중에 어떤 것으로도 변호될 수 없다. 도킨스가 내린 신앙의 정의는 그 혼자만의 정의일 뿐이다. 도킨스는 자신의 의도에 맞춰 신앙을 정의하고서는 마치 자신이 비난하고자 하는 대상이 실제로 그러한 것처럼 호도하고 있을 뿐이다. ― 117쪽

 

도킨스는 ‘무작위적 변이와 비무작위적 누적적 선택 이론’을 통해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명 기제로서 신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여기까지 도킨스의 주장이 맞다고 치자. 이 주장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도킨스는 신을 개연성 없고 무관한 존재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무신론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입장이라는 주장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 결론을 추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논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도킨스는 무신론만이 의미 있는 유일한 입장이라는 결론이 자명하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 170쪽

 

도킨스는 다윈주의를 무신론으로 가는 지적 고속도로라고 표현했다. 실제로는 도킨스가 그린 지적 궤도는 불가지론이라는 홈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는 듯 보인다. 도킨스의 주장은 오도 가도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다윈주의와 무신론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커다란 공백이 있다. 도킨스는 이 공백을 증거보다는 레토릭으로 이으려는 듯하다. 확실한 결론에 이르려면 수사법이 아닌 다른 증거에 기초해야 한다. 다윈주의가 필연적으로 무신론으로 귀결된다고 호소하려면 더 논리적인 이유를 대야 할 것이다. ― 209~210쪽 CTK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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