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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중심이면, 절대 편파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전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김근주 ‘올해의 책’ 대상 수상자
김은홍, 김근주  |  김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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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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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공공성과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가 CTK 도서대상 올해의 책 대상과 우수상에 각각 선정되었습니다. 같은 저자에게 1등상과 2등상이 동시에 돌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자로서는,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 두 권에 담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복음의 여러 가지 특징 중 하나에 대해서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만 복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하지 않으셨고 삼위일체나 부활, 십자가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셨던 유일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것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의 시대에는 구약이라 부르던 책들이 유일한 참고문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은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구약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구약성경을 예화로만 처리합니다. 디모데후서 3:16은 모든 성경 즉 구약을 하나님의 감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것을 늘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네 교회에서는 구약을 예화로만 사용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조직신학이나 교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3장까지가 전부입니다. 1장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3장의 선악과 사건, 원죄, 타락…. 창조, 타락, 그 다음은 구속이잖습니까? 구속은 예수님의 사건입니다. 이런 식의 구도에서는 구약성경은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조직신학 책들이나 교리책들을 보면 구약의 나머지 부분은 인용 자체도 잘 안 됩니다. 거기에 이사야, 열왕기, 아모스 등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이 가끔 들어가는 것은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음이여” 같은, 원죄 이야기 정도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완벽한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의 극히 일부만 필요하다면,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일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정말 복음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구약은 전제조건이고 필수인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 복음이라는 게 뭐였는지를 저는 차근차근 따져보고 싶었습니다.

요즘 우리네 교회가 워낙 끔찍한 집단으로 비춰지다 보니, 복음의 사적이지 않은 공적인 본질을 강조하는 이 두 권의 책이 눈에 띈 것 같습니다. 작년에 대통령이 탄핵될 때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문에 “사사로이 했다”는 말이 몇 번 나왔습니다. 결국에는 대한민국의 끔찍한 현실도 ‘사사로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대통령뿐만 아니라 군사독재 시절의 대통령들도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가 사사로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다가 오는 것이 있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최근 담임목사직 세습으로 명성을 높인 어느 교회처럼, 오늘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십시오. 누구나 지적하는 것이 공교회성을 상실했다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도 ‘공’ 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교회의 공교회성, 교회의 보편성을 늘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 공교회성이 우리 신앙고백에 너무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 개신교 교회에는 이 공교회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줘버리고도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행복하면 그만이고 교인들의 압도적 다수가 찬성하면 괜찮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직 폭력배 패거리, 제가 즐겨 쓰는 용어로 “양아치 집단”도 자기네들끼리 투표해서 세운 보스가 최고입니다. 자기네들끼리는 가장 행복한 결과가 보스인 것이고 보스가 지지하는 누군가가 그 다음 서열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보고 “저 사람들 굉장히 체계적이야”라고 하지 않고 “양아치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양아지 집단이 아닌 다음에서야 교회를 그렇게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개탄합니다. ‘우리가 믿고 내가 믿는 예수님이 내 삶을 이렇게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는데, 교회가 어떻게….’
다른 수많은 좋은 책들도 있습니다만, 복음의 공공성이나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가 이런 시기에 잘 맞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 일반과 교회의 문제점이 사사로움에 있다고 하셨는데, 다른 말로 하면, 집단주의 또는 집단 이기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공’이라 착각하거나 우기는 많은 행태가 사실은 집단 이기주의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와 ‘공’을 달리 정의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정, 자녀, 부부를 사적인 영역에 묶어둡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 또는 국가의 일, 직장의 일은 무조건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롭다는 것의 특징은 그것이 나의 유익인 된다는 것입니다. 공적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에서 ‘나를 넘어선다’는 것은 곧 ‘사사로움을 넘어선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유익 추구가 내 이웃의 유익에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사사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해가 되는 나의 유익은 사사로움인 것이고, 여기서 ‘나’가 좀 더 커지면 ‘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가족에겐 굉장히 이로운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가 됩니다. 좀 더 확장되면 ‘우리’ 교회에는 유익이 되는데 한국 교회 전체에게는 욕먹을 짓이라면, 이것이 곧 사사로움입니다. 담임목사직 세습을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끔찍한 “관행”들의 대부분이 곧 사사로움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자기들끼리는 무난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 본질은 사사로움입니다. 더 넓게 보면, 대한민국에는 유익이 되는데 일본이나 중국에게는 해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도 결국 사사로운 것입니다. 나랏일이라고 무조건 ‘공’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만 유익에 된다면, 그것도 곧 사사로운 것입니다. 관점을 더욱 넓혀, 지구에는 유익한데 우주에 해가 된다면, 이것 또한 사사로운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자기와 자기 집단의 유익을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 아니겠습니까? 본능적으로 그것을 선택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 사건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의 욕망을 다른 어떤 것보다 최우선의 자리에 두었을 때, 이것이 사사로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기 같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위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우상의 본질은 ‘자기를 위한 것’ 곧 사사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은 이러한 사사로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이 되려면 거창한 것이 필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을 생각해보면 되는 겁니다. 선조들은 이것을 ‘역지사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무 멋지게 표현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게 바로 역지사지입니다. 저 사람이 해줬으면 싶은 것을 내가 해 주는 것, 이런 입장을 갖는 것을 바울은 달리 표현해서, (바울이 구약을 요약한 것이지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곧 ‘나한테 소중한 것이면 저 사람에게도 소중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입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7:12에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복음서가 구약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핵심이 바로 이것,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두 번이나[롬13:9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두 분 다 구약을 요약할 때 ‘하나님의 언약’ 이런 것으로 요약하시지 않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이 말씀으로 요약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성서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가 접점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을 요약하실 때, 어떤 엄청난 기독교적 용어가 아니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고 가르치셨다는 이 사실에 바로 그 접점이 있습니다. [전문 보기: “약자 중심이면,   절대 편파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전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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