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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내 유일한 동반자싱글은 나의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고 오늘, 이것으로 나는 충분하다.
에케미니 우완  |  Ekemini U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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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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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결혼하고 싶은 바람이 있지만 
지금까지 나는 진지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하나님은 그 바람을 느슨하게 붙들어보라고 
나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iStock

singleness[독신]을 화제로 이러쿵저러쿵하는 데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나는 생기지 않는다. 싱글을 마치 치유가 필요한 만성적인 어떤 상태이거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원치 않는 선물인양 얘기할 때도 있다. 싱글을 고통이라는 틀 속에 짜 맞추어 논하기도 한다. 싱글을 자신의 운명일 거라고, 무시하듯 또는 체념하듯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싱글과 데이트’를 주제로 한 대다수의 대화들에는, 연애중이거나 정기적으로 데이트는 하지만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관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줄곧 싱글인 사람의 관점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30대 싱글 여성이며 한 번도 데이트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을 만나게 하려고 집에 데려온 사람도 없다. 구애를 받은 적도, 심지어 한번 서로를 알아가 보자고 한 사람도 없다.
20대 초반에는 사람들이 내가 싱글인 것을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20대 후반이 되자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당혹스러움으로 퇴보했다. 30대 초반에 들어서자 당혹스러움은 혼란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이제 나는 30대 중반이고, 혼란스러움은 진정 기이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되어본 적이 없다.

아직도 나는 대체로 내가 매력을 느끼는 남자들에게 먼저 호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초조해서 그렇다. (한번은 과감히 내 본래 성향을 제쳐버리고 끌리는 남자에게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렸지만. 아, 또 곁길로 빠졌다.) 내가 줄곧 싱글이었다는 것은 수수께끼이긴 하지만, 노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난 분명 은둔자는 아니다. 나는 여행을 하고 축제에 참여하고, 행사에 가고, 콘서트를 즐기고, 내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학술 강연에 참석한다. 온라인 데이트도 시도해본 적 있는데, 결국 “썸 타는” 관계situationship에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검은색이나 흰색을 거부하는 회색 회전판처럼 암묵적인 상호호감이 강요되고, 관계에 수반하는 불안과 비통함에 온통 휘말려 버리고 마는 그런 가짜 관계 말이다. 몇 개월 또는 심지어 1년 정도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난 뒤에, 내게 어떤 일이 있었다—‘여자친구’라는 타이틀조차 없었음에도—는 증거는 비통함과 슬픔뿐이었다.
싱글에 대한 내 특별한 경험은, 실패한 연애를 했거나 사랑을 찾았다가 상실한 사람의 경험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며 영혼이 바수어지는 경험인지 나는 상상할 수 있을뿐더러, 더하여 분명한 관계 설정의 예의조차 없는 흐지부지한 상태를 경험해왔다. 나는 분명, 실패한 관계에 수반되는 고통을 축소시키고 싶지 않다. 기쁨은 기쁨이고 고통은 고통이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노출되고 있지만 구애를 받지 못할 때 겪게 되는 또 다른 차원의 비통함이 있다. 내가 새로운 어구를 만들어본다면 그것은 강요된 기권을 통한 거절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선택받지 못한 데서 기인한 거절감, 또는 먼저 고백하기를 선택했으나 그 바람에 응한 사람을 만나본 적 없는 데서 기인한 거절감이다.

 

거절과 수치

전통적인 지혜에 따르면 “좋은 여자는 꼴찌를 면치 못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승선이 결코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자리에 수치심이 도착한다.

오랫동안 싱글로 있으면서 거절과 수치는 나의 교사였다. 그것은 나의 주의를 내면으로 돌리고 추궁하는 거짓말들로 나를 학습시키면서 쌍으로 작동했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 나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나는 바람직한 사람인가? 나는 예쁘지 않다. 그래서 남자들이 나에게 구애하지 않는다. 나는 적합한 사람인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충분치 않다. 나는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 수치스럽다.
수년간의 기도와 말씀 묵상, 제자도, 성경적인 상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 덕분에 사악할 정도로 고질적인 수치와 거절감의 뿌리는 내 마음으로부터 은혜롭게 들어 올려졌다. 지금도 여전히 흉터가 있긴 하다. 수치가 과거로부터 악랄하게 가르쳐준 교훈들이 문득문득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은 나를 살피신다

수치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순간에, 나는 이집트 여종 하갈을묵상한다. 그녀는 창세기 16:1-16에 그 이야기가 기록된 아브람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사래와 아브람은 그들이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점점 조바심이 난 나머지, 하갈을 아브람과 결혼시켜 아이를 잉태하게 함으로써 저당물로 이용했다. 사래의 학대의 무게는 하갈에겐 너무 지나친 것이었고, 수치는 하갈을 벌집처럼 쑤셔놓았다.
사래와 아브람으로부터 받은 학대로 비틀거리며, 하갈은 집을 떠나 광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의 천사를 맞닥뜨리게 된다. 천사는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하며, 이내 다음 약속에 표현된 그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언해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창16:10) 주님으로부터 이 소중한 약속을 받은 후에,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창16:13)

주님의 천사의 등장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유대인이 아닌, 그 당시 구속 역사의 언약에서는 배제된 이방인 하갈과 마주치는 장면에서였다는 것이 나는 경이로웠다. 게다가 그녀의 처지를 하나님이 무시하지도, 잊지도 않으셨다는 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녀의 수치를 들어 그녀를 영화롭게 하셨다. 주님은 하갈의 머리를 들어주신 분이었다. 그분은 또한 나의 머리, 그리고 쇠약하게 하는 수치의 본질을 경험해온 다른 이들의 머리도 들어주신다. [전문 보기: 싱글, 내 유일한 동반자]
 
 

에케미니 우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은 반인종주의 작가이자 연사이다. sistarmatictheology.com에서 그녀의 글을 읽을 수 있고, Twitter @sista_theology에서 팔로우할 수 있다.
Ekemini Uwan, Singleness: My Only Companion 
CT 2017.1.17; CTK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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