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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시대,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CTK 창간 10주년 기념] 발행인의 초대
오정현, 정성진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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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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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ock

   
PHOTO BY 김승범

초대의 글

오늘 우리는 ‘분노 사회’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특히 집단 분노collective anger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여러 보편적 감정들 가운데 하나인 분노가,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다양한 미디어를 통하여 집합적으로 생산ㆍ동원ㆍ증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는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분노의 표출 방식도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양한 물리적ㆍ언어적 폭력이 동원됩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분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의 분노는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분노입니다. 분노의 표적이 되는 이들만이 아니라 분노를 표출하는 당사자들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분노의 희생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고민을 정성진 목사님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발행인 오정현 목사: 미국 생활 21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고, 이제 15년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이 땅을 떠나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어떤 면들에 대하여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장점도 보이고 단점도 보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보기에 한국 교

   
 

회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신앙적 열정입니다. 한국 교회의 헌신적인 신앙의 열정은 세계 교회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에만 열정이 넘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 모두가 열정의 민족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 열정이 폭발할 때 발산하는 긍정적 에너지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의 이면이라고 할까요?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극단으로 치닫는 성향 또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극단성이 결국 우리에게 깊은 트라우마, 사회적 분노를 남겨 놓았습니다. 우리 사회 일반이 그러하고, 한국 교회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한국 사회로서의 우리도 그리고 한국 교회로서의 우리도, 일상화된 분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이 서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집단들이 서로를 정죄하며 극한 분노를 발합니다. 교회 밖의 반기독교 그룹이 교회를 조롱과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성진 목사: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대 초창기, 한참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에는 갈등이 내재되었으나 아직 표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 목사님이 한국에 돌아왔을 바로 그 무렵부터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이, 그동안 응축되어 있던 갈등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받았을 사회적ㆍ문화적 충격이, 그리고 영적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공감이 갑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베를린예술대학교의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착취의 사회가 됐다. 그래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피로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한 교수는 이렇게 찾습니다: 지난 사회는 금지사회, 통제사회였다. 국가적인 통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집안에서도 교회에서도 조심해야 된다는 풍토를 갖게 했다. 그런 사회가 지금은 성과 사회로 바뀌었다. ‘해서는 안 된다’ 사회에서 ‘할 수 있다’ 사회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주고 받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우울증을 앓는다. 과잉활동, 과잉자극을 낳는 바람에 낙오자를 양산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 사회가 갈등을 유발하는 사회, 갈등이 분노를 유발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가슴에 칼 하나씩, 손에 돌 하나씩 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인터넷이 더 무서운 것은 사이버 공간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거기 숨어서 악마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익명성 보장이 클수록 비방과 폭력성의 수위는 올라갑니다. 
 

: 이어령 박사께 이러한 집단 분노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마다 혁명기를 거치기 전에 계몽기를 겪는데, 이 시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배우는 시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몽기를 거치지 않고 바로 혁명기에 넘어와 버렸다. 인터넷 보급은 세계 최강인데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기를 건너뛰었다는 겁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보 폭탄을 맞았고 이 정보폭탄 속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가 언론이 되고 인터넷이 되고 정치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심어주는 생각이 아니라 자기만의 생각을 정립해야 하는 시대인데,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보 처리에는 데이터—정보—지식—지혜, 이렇게 네 단계가 있답니다. 데이터를 정보로 삼아 지식을 만들고 그 지식을 지혜로 확장하는 과정을 가져야 하는데, 대한민국은 지식 단계에서 지혜로 발전하는 단계가 멈춰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어령 박사님의 말씀대로 정말 인터넷의 데이터나 정보가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인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요 큰 숙제입니다. 
 

: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집단 분노, 교회가 교회를 파괴하는 분노,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 방식을 우리가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10여 년간 연합 활동을 해본 경험으로는 지금의 수직적 리더십 구조를 갖고는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죽는 구조입니다. 때문에 우리 세대는 수평적 리더십을 살려야 합니다. 리더십의 형태를 원형 탁자, 원형 회의 형태로 바꿔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또한 우리 목회자들의 사명은 치유입니다. 화해와 치유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보혈로 덮어야 하는데, 분노를 길어 올리는 방식으로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고 가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화해를 이루는 일에는 못 나설망정 분노를 길어 올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안에 율법적 복음주의가 강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율법적 복음주의가 분노를 낳았고 비판을 낳습니다. 이 율법적 복음주의를 어떻게 생명의 복음주의로 바꿀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큰 과제입니다.
 

: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어령 박사님의 이야기처럼 분노사회를 치료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합리적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합리적 사회는 합리적 개인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합리적 인식을 가진 개인이 많아질 때, 큰 목소리가 되고 합리적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집단이 적기 때문에 묻혀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들이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말을 안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로운 삶과 평등한 대우를 받는 삶을 바랍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와 욕구가 지나치면 타인에 대한 분노가 되고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폭력이 행사되는 순간 타인의 가치를 훼손하게 되므로 사회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녀사냥식의 여론 재판이 되는 겁니다. 진실이 사라지게 됩니다.

: 목회에는 두 가지 트랙이 있습니다. 선지자적 사역과 제사장적 사역이 그 둘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대한 호불호가 있습니다. 선지자적 사역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제사장적 사역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지자적 사역은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을 가지고 도전을 해야 하므로, 대체로 머리가 깨어 있고 많이 알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선지자적 사역의 은사를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그런데 선지자적 사역자들은 그 사역의 특성상 늘 선지자적 도전을 하다보니까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갖게 됩니다.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비관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거룩한 비관을 하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내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 앞에서 엎드리고 깨어집니다. 그런데 거룩한 비관이 아니라 똑똑한 비관으로만 가면 비판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남을 만날 때 평안을 빌라. 받지 않으면 그 평안이 네게로 돌아온다.” 바로 그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니까 스스로 비판적인 사람이 되고 그래서 분노가 되는 겁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스스로 그렇게 정죄의식을 갖게 되니까 축복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제사장적 축복권을 스스로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 그래서 선지자적 비판주의에 휩쓸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제사장적 책임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적 도전을 제일 많이 받았던 것이 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선지자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선지자들이 외쳤건만 북이스라엘에는 결과적으로 선한 왕이 한 명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개혁은 선지자적 비판으로만 하면 안 됩니다. 제사장적 책임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시작된 개혁이 남 유다 개혁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선지자적 비판도 필요하고 심지어 비관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본연의 제사장적 책임과 소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집단분노의 사회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를 성경적 제사장론과 선지자론으로 설명을 해 주셨는데, 저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금 더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과 화해하는 사람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율법주의 얘기를 나눴는데, 분노라는 것은 제도를 등진 사람보다 제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율법을 따르고 지키는 율법주의자들이 분노를 더 많이 한다는 뜻이지요. 제가 한국 교회를 ‘유교적 기독교’로 명명하는 가장 큰 증거가 이것입니다. 서두에서 목사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는 신앙생활을 뜨겁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유산을 교회에 남기는 사람은 없고 전부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철저히 ‘유교적 기독교인’으로 끝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미국 교회를 봅시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좀 미지근해 보이지만 유산을 교회에 남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적인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는 ‘유교적 기독교인’입니다. 
 

: 율법주의는 결국 공로주의로 갑니다. 한국 교회의 공로주의는 말로 다 못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내부적으로 폭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로주의적 기득권입니다. 이것이 없는 교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복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선지자적인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 그 이상으로, 우리가 주님의 심정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문 보기: 분노의 시대,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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