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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를 무너뜨리다, 부드럽게그레이엄은 철의 장막 안에서 설교했다. 그 일로 그의 비판자들은 경악했다.
데이비드 에이크만  |  David Ai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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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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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연합뉴스

1950년대의 빌리 그레이엄은 그 시대 미국의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그의 반공주의는 1949년 로스엔젤리스 전도 집회에서 소비에트의 무시무시한 위협을 적시할 때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다.

“반들반들한 러시아 폭탄들”이 미국을 타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청중에게 그는 외쳤다. “공산주의 불순 세력이 미국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로스엔젤리스에서 가장 많이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는 공산주의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선전포고를 한 사탄이 주입하고, 부추기고, 지시하는 종교”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레이엄은 불을 내뿜는 애국적 연사로서의 태도를 충실하게 견지했다. 그러나 1992년, 그는 이제 지구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공산주의 정권의 하나인 북한을 정중하게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의 독재자에 대한 그의 논평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김일성을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점잖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도처에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정말 그를 좋아합니다.”

하기야 사람들은 아마도 스탈린을, 마오쩌둥을, 그리고 20세기의 다른 공산주의 독재자들을 “정말” 사랑했을 것이다. 그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다가는 남은 인생을 강제수용소에서 보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그레이엄의 관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왜?


전략상의 변화

그레이엄이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한 관점을 실제로 바꾸었다는 것은 답이 되지 못한다. 죽는 날까지 그는 공산주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탈하려는 사악한 시도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공산주의‘자들’―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리고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정권들에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레이엄은 사악한 정권들과의 직접 맞서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정권들을 다루는 그의 새로운 접근법은 복음을 전파를 위한 일을 자신의 신학과는 극명하게 다른 신학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접근법을 확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지극히 혐오스러운 방식이었다.

1954년 영국 헤링게이 전도 집회와 1957년 뉴욕 전도 집회에서 자유주의 성직자들과 협력함으로써 그레이엄은 밥 존스 대학의 설립자인 근본주의자 밥 존스를 분노케 했다. 세월이 흘러 1980년대에 그레이엄은 소련이 후원한 기독교 “평화” 대회 참석을 수락했다. 이러한 일들이 잇따르면서, 그는 냉전 시대 미국의 소련 감시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불만을 일으켰다.

1960년대에 미국이 베트남에서 겪은 일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을 시기에 그레이엄은 외교와 전쟁, 평화의 관리를 백악관에 전적으로 맡기는 인상을 주었고, 미국 저 멀리에서 벌어진 거대한 전쟁에 관하여 별로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이 되면서 그의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975년, 그레이엄은 기독교의 자유가 전 세계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가능성을 공공연하게 예측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협보다는 핵전쟁의 증가하는 위협을 더 우려했다.

그레이엄의 관점의 주요 변화에 뚜렷하게 기여한 것은 1970년대 말에 국방부의 고위 관리로부터 받은 사적인 브리핑이었다. 그 관리는 핵전쟁이 미국에 가져올 매우 심각한 결과들을 그레이엄에게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노스캐롤라이나 주 모트리트에 있는 그레이엄의 집까지 먼 길을 달려왔다. 그레이엄은 정부기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기밀 정보에 대한 브리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정말 음산했다. 그레이엄 전기 작가 존 폴락에 따르면,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들었을 때 그레이엄은 “오싹했다.” 이런 오싹한 현실들에 비추어 볼 때, 반공주의의 덧없는 진실들은 더 이상 그렇게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가 공산주의 국가 헝가리를 처음으로 설교 방문하려 한 복잡한 협상은, 1977년 가을에 그레이엄이 실제로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5년 동안이나 진행되었었다. 그 해 초에 그 나라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그가 발표하자,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헝가리 망명자들은 그레이엄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들에 대한 그레이엄의 답변은 1957년 뉴욕 전도 집회 때 자유주의 개신교인들과 빈둥거리고 있다고 그를 비난한 근본주의자들에게 했던 답변과 거의 똑같았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에 어떤 훼방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든 갈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누가 후원하든 가겠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설교 여행―십자군crusade[이번호에서 모두 ‘전도 집회’라는 중립적인 용어로 번역했음-CTK]이라는 표현은 헝가리 공산주의 통치자들을 존중하여 사용하지 않았다―은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수천 명의 개신교인들이 마지막 날 야외 캠프 집회에 모였고, 그 가운데는 소련을 포함하여 소비에트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헝가리에 온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공산당을 만나지 않았고 만나달라는 요청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헝가리 방문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헝가리에는 종교의 자유가 존재합니다.…헝가리에는 교회가 살아 있습니다.”

곧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문호를 개방했다. 1978년에 그는 폴란드를 방문하여 크라쿠프 인근의 한 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로부터 바로 4년 뒤에 크라쿠프의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은 교황(“요한 바오로 2세”)에 선출되었다.

1년 안에 이루어진 그의 두 번째 공산주의 국가 방문은 그의 반핵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소련과의 무기 통제 협정(“Salt 2”)에 서명하라고 미국 정부에 촉구하는 자유주의 개신교인들의 청원을 지지했다. “우리가 평화를 갖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그는 이렇게 반문하면서, 자신은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진일보했는지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어떤 한 국가나 인종의 선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그레이엄의 이런 발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그레이엄을 설득하여 전형적인 소비에트 “평화” 선전 캠페인의 특징들을 갖고 있던 그 1982년 대회에 참석하게 함으로써 중요한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고 틀림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 대회는 “핵 재앙으로부터 생명의 신성한 선물인 생명을 구하기 위한 종교 활동가들의 세계 대회”라 불렸다. 모스크바가 그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빌리 그레이엄이 모를 수 있었을까? TV 논객들로부터 그리고 대외 정책 기관의 전문가들로부터 그레이엄은 격한 비판을 받았다.


북한 방문

   
평양: 1994년 빌리 그레이엄은 평양 만경대 김일성 생가를 방문했다.   AP/연합뉴스

1992년 그레이엄의 북한 여행은 그레이엄이 1997년에 처음으로 시작했던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과의 만남이라는 큰 흐름의 논리적인 발전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관계가 공식적인 외교적 노력보다 더 많이 국가들 사이의 이해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피력했다.

1992년 북한의 특이한 독재자 김일성과의 만남은 그가 1994년 그레이엄을 다시 초정할 정도로 분명히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까지도 북한의 핵시설들을 조사하겠다는 국제원자력에너지기구의 요구에 평양 정권이 협조를 거부하면서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이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메시지를 김일성에게 설명하는 순간 그 방문은 처음부터 거의 끝장날 뻔했다. 그레이엄의 통역자로 동석했던, 한국에서 사역했던 선교사 집안의 후손인 스티븐 린턴은 김일성이 클린턴의 요구에 대한 설명에 “과장되게” 짜증을 냈다고 말했다. [전문보기: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다, 부드럽게]

 

데이비드 에이크만David Aikman Billy Graham: His Life and Influence(Thomas Nelson)베이징에 오신 예수Jesus in Beijing의 저자 CT/CTK 2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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