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빌리 그레이엄
오늘의 기독교를 바꿔놓은 겸손한 복음전도자교회는 분열되고, 목회자들은 자기네 교단에 집중했으며, 신자들은 문화적 영향력을 피했다. 자유주의 모더니즘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빌리 그레이엄을 만드셨다.
마이클 S. 해밀턴  |  Michael S.Hawmi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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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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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기다림: 빌리 그레이엄이 자신의 설교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1964년 2월 보스턴 파크 스트리트 교회에서. EDJENNER / THEBOSTONGLOBE / GETTYIMAGES / 게티이미지코리아

스 벨이 미래의 남편감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기숙사 계단을 한 번에 두 계단씩 급히 내려가고 있었다. 루스는 그를 ‘자기가 갈 곳을 확실히 아는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이 어디로 갈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역사상 그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하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루스가 받은 두 번째 인상은 정확했다. “그는 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했어요.” 그의 이 열망은 참으로 남달랐다. 복음주의자들이 재림을 간절히 고대하던 시대에, 빌리 그레이엄은 주님이 천천히 오시기를 소망한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분이 오시기 전에, 그분을 위해 큰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의 바람대로 주님은 지체하셨고, 그는 그 시기를 최대한 선용했다. 만약 영어권 복음전도자들을 위한 러시모어 산이 있다면, 그레이엄은 휫필드, 피니, 무디, 선데이에 이어 다섯 번째를 차지할 것이다. 그토록 많은 군중이 이들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든 이유를 짐작하기란 대체로 쉽다. 키 작고 사시였던 조지 휫필드는 마치 회오리바람 같은 목소리로 성경 드라마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야외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포즈를 취하고 눈물을 흘렸다.

찰스 피니는 영혼의 약점을 파내는 무서운 눈매를 지녔고,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는 그의 불같은 설교는 사람들의 노출된 불안을 조준했다. 빌리 선데이는 화려한 정장과 영화배우 같은 외모, 객석을 환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닌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농담과 VIP들을 위한 아부를 하고 난 다음에는, 모자와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연단 위로 뛰어올라—때로는 대형 성조기를 흔들면서—죄를 지적하고 죄인들에게 예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드와이트 무디의 매력을 한마디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약간 뚱뚱하고 상냥했던 그는 할아버지 같은 풍모를 지녔다. 그는 죄보다는 사랑에 대해 많이 가르쳤다. 그가 강단에 선 모습을 그린 옛 그림들은 그가 덩치가 크고 무신경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빌리 그레이엄의 진정한 모델은—휫필드와 피니, 선데이를 다 합친 것 이상으로—무디였다. 그레이엄이 존경한 사람은 무디였다. 그레이엄이 한 일을 가능하게 해준 인물이 무디였다. ‘괴짜’crazy 무디야말로 20세기 복음주의를 설계하고 기초를 놓은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물려받아 무디의 그 괴짜 같은 꿈을 현실로 완성한 이가 빌리 그레이엄이었다. 21세기 초, 무디-그레이엄 프로젝트는 미국 기독교의 스카이라인을 재형성했고, 세계 곳곳에 도달하는 새로운 종류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출범시켰다.

 

백 투 더 퓨처: 미래로 돌아가기

빌리 그레이엄의 초기 설교 스타일은 무디보다는 휫필드나 선데이에게 빚진 바가 크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그레이엄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때까지 쉼 없이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을 권총처럼 가리켰으며, 어찌나 말을 빨리 했든지 독일 신문들은 그를 “하나님의 기관총”God’s Machine Gun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레이엄의 예리하고 푸른 두 눈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때로 그의 설교는 휫필드처럼 행위예술 같았다. 그의 설교에 놀란 1950년 보스턴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는 흑표범처럼 강단을 휘젓는다.…그가 거만하고 냉소적인 로마인이 되면, 도도하게 머리를 뒤로 젖히고 목소리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걸걸해진다. 회개하는 죄인이 되면, 고개를 떨어뜨리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위쪽을 쳐다보면서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가 된다. 그는 복수하는 천사가 되기도 한다. 어깨가 머리까지 솟아오르고 기다란 손가락을 맹수의 발톱처럼 내민다. 한결 깊어진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파멸의 목소리다. 그 묘사가 얼마나 완벽한지 앞에 앉은 청중은 긴장한 채 몰입한다.

 

선데이처럼 그레이엄의 초기 설교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면서 하나님과 조국을 매끈하게 섞어놓았다. “공산주의나 기독교,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해답은 “전통 아메리카니즘”이었다. “초기 아메리카니즘의 이상을 통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그레이엄의 미래는 선데이를 넘어서서 무디가 설정한 영역에 속해 있었다. 무디의 천재성은 전통적 복음주의의 기준들—성경에 기초한 회심 중심 신앙, 단순한 설교와 대중적인 노래들, 대대적인 자기홍보, “나는 끊임없이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근면성—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와 해외 선교의 긴급성 같은 새로운 요소들을 한데 모아 융합하는 능력에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 혼합물을 새로운 제도적 틀 곧 패러처치parachurch 단체에 쏟아부었다. 무디 이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성직자라기보다는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은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기업가 같은 모습이었다. 이들은 평신도 근로자들을 고용하여 고도로 특화된 임무를 실행에 옮겼다.

무디가 새로운 복음주의의 융합을 이루어내고 있던 바로 그때, 스스로를 근대주의(또는 자유주의)라고 칭하는, 초자연성을 거부하는 기독교 형식이 북부의 대형 개신교단들의 신학교와 본부들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보수주의자들이 이들을 ‘주류’mainline 교파들에서 내쫓으려고 애쓰다가 실패했을 때, 복음주의의 중력 중심은 교단에서 무디가 시작한 패러처치 운동으로 옮겨졌다. 패러처치의 독립성과 무교단성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막대한 이점을 주었다. 이들은 교단 지도층을 우회하여, 교단 차이를 초월하는 단순하고 생생한 복음을 들고 직접 사람들에게 갈 수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이전과 이후의 그 누구보다도 이런 이점을 잘 활용했다.

빌리의 십대 시절, 그의 부모에게 무디 스타일의 복음전도는 노스캐롤라이나 교회의 엄격한 장로교보다 더 중요해졌다. 빌리의 어머니는 패러처치 운동에서 세대주의를 받아들였고, 그의 아버지는 부흥사 모디카이 햄Mordecai Ham을 마을로 초청하도록 도왔다. 며칠 저녁을 햄의 집회에 참석한 빌리는 마침내 자신의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하게 될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기로 결단한 것이다.

빌리가 1936년에 대학에 진학할 준비가 되었을 때 패러처치 운동에서는 그와 그의 부모가 고려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제공했다. (교리적 순수성을 강조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하는) 근본주의와 (복음전도와 제자훈련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의 차이점은 이미 드러나고 있었고, 빌리의 대학 생활은 그가 어느 편에 설지를 미리 보여주는 전조가 되었다. 밥 존스 대학의 경직된 근본주의와는 잘 맞지 않았지만, 무디 네트워크에 소속된 플로리다 성경학교와 휘튼 대학은 잊지 못할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교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미국 개신교의 뿌리에는 복음전도자가 호소할 수 있는 성경적 신앙이라는 공동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 휘튼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에 크게 관심이 없는 학생 문화를 만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탁월한 휘튼 졸업생들은 무디의 청사진을 이어받아, 기독학생회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트랜스월드라디오Trans World Radio, CSBChristian Service Brigade 같은 새로운 패러처치 사역을 시작하여 그 공백을 채워나갔다.

1943년, 빌리와 루스는 결혼하여 시카고 외곽에서 목회를 시작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미국 동부에서는 휘튼 졸업생 퍼시 크로포드가 라디오와 부흥운동, 청소년 문화를 엮어 멋진 작품을 만들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토요일 밤 집회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다른 도시의 복음주의 기업가들도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YFC)라는 비슷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휘튼 졸업생 토리 존슨은 YFC를 시카고로 옮겨와서 25세이던 그레이엄을 주 강연자로 활용했다. 크로포드의 화려한 의상과 생생한 프로그램들, 속사포 같은 설교, “크고 좋고 빠를수록 좋다”는 사고방식은 그레이엄과 딱 맞아떨어졌다. 몇 달이 안 되어 존슨은 전국의 개별 조직을 국제 YFC라는 한 단체로 통합하고는, 그레이엄을 초대 전도자로 고용했다.

그레이엄은 이 여정을 시작하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1946년 무렵, YFC 집회는 토요일마다 수백만 청소년들을 끌어 모으면서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2년 내에 그레이엄과 그가 이끄는 팀 클리프 배로우스, 조지 비벌리 셰아, 그랜디 윌슨은 독자적인 부흥 집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남은 평생 함께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섯 차례 전도 집회 이후, 고작 31세의 빌리 그레이엄은 로스앤젤레스의 8주 집회 성공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비평가들은 그레이엄의 전도 집회가 미국 기독교의 좋지 못했던 과거의 끝물이라고, 곧 시대착오적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규모 부흥 집회가 건물의 외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외관 밑에는 당당한 상부 구조, 곧 전통 복음주의의 신념들과 신선한 아이디어, 새로운 제도 형태를 아우른 무디의 통합이 있었다. 근본주의-근대주의 논쟁은 무디의 프로젝트에서 잠시 중단된 공사에 불과했다. 이제 일꾼들이 복귀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빌리 그레이엄이 될 것이었다. [전문 보기: 오늘의 기독교를 바꿔놓은 겸손한 복음전도자]
 

마이클 S. 해밀턴 잇사갈 펀드의 프로그램 부대표, 어드민스에서 출간 예정인 Calvin College and Revival od Christian Learning in America를 작업 중이다. CT/CTK 2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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