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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ㅣ'돌이킬 수 있음'의 약속“주님이 우리와 함께 우시니, 우리도 그분과 함께 웃을 수 있다.”
필립 얀시  |  Philip Yanc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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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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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채 네 살이 되지 않았을 무렵, 누군가 미친 듯이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잠옷을 입은 어머니는 문을 열고, 흥분해서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한 아주머니 한 분을 집안으로 급히 들인 다음, 재빨리 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아주머니의 남편이 고주망태가 되어 깨진 병을 들고 뒤쫓고 있었다.

그리고 30분간, 나는 침대에 누워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집안에서는 아주머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밖에서는 남편이 문에 주먹질을 해대며 협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을 우리 집 담장에 던져 와장창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곧 경찰이 도착했고, 경찰차의 요란한 불빛이 온 동네를 훤히 비췄다. 우리 집 앞에 모여든 이웃들 얼굴에 붉은 불빛이 비쳐 무시무시해 보였다.

이런 기억도 있다. 우리 어머니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린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지저분한 아저씨”를 조심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내 팔을 붙잡고는 내가 진짜 그랬기라도 했던 것처럼 “절대 그 아저씨 가까이 가지마” 하고 주의를 주시곤 했다. “뒤뜰 그네 바깥쪽으로는 절대 나가선 안 돼.”

1950년에, 당시 유행했던 소아마비로, 우리 어머니는 스물여섯에 과부가 되셨다. 이제 어른이 되어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애틀랜타의 가난한 백인 거주 지역에서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이해가 간다.

내가 다섯 살 때, 우리 집은 그곳을 떠나 엘런우드라는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갔다. 찰스 디킨스에서 마크 트웨인만큼의 심리적 거리를 뛰어넘은 셈이었다. 이제 우리는 가로수를 심은 번듯한 길가에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집은 다른 집과 연결되지 않은 단독 주택이었다. 그해에는 온통 행복한 기억뿐이었다. 아이들은 싱싱한 수박을 잔뜩 실은 탈선한 화물 열차에 기어올랐다. 기차가 덜컹거려 미끄러져 내리면서 서로 깔고 뭉개기도 했다. 옆집 노새는 고맙게도 우리 집 정원에서 재배한 크고 맛없는 오이를 해치워주었다. 우리 집 잡종개 버스터 브라운은 뚜껑 열린 정화조 가까이서 어슬렁대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비스듬한 널빤지에 고깃덩어리를 아무리 많이 올려놓고 유혹해도 꿈쩍을 안 해서, 친절한 옆집 아저씨가 정화조에 들어가 버스터를 구해줄 때까지 우리는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웠고, 글자를 깨쳤고, 야구공 잡는 법을 배웠으며, 나무 타기와 줄 타고 계곡을 건너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어느 해 부활주일, 나는 영어에서 가장 끔찍한 한 단어의 의미를 깨치게 되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에서는 개를 키웠다. 하나같이 잡종이었다. 예방접종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개들은 얼마 못 가 죽었다. 하지만 한 마리가 죽으면 또 다른 강아지가 와서 우리 가정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개와 함께 기억되었다. “아, 그해에는 레벨이랑 같이 살았지. 검둥이가 죽은 직후였어.”

그런데 엘런우드로 이사 오기 전까지 고양이는 한 번도 키운 적이 없었다. 필라델피아에 사시는 이모님이 연립주택에서 고양이를 여러 마리 풀어놓고 키우셨다. 어머니는 그런 이모님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엘런우드로 이사한 첫해, 드디어 어머니의 마음이 누그러지셨던 모양이다. 우리는 6주 된 새끼고양이를 얻어왔다. 다리에 신은 하얀 ‘부츠’를 제외하고는 온통 새까만 모습이, 얕은 페인트 접시에 살짝 발을 담근 것 같았다. ‘부츠’라는 이름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형제는 새끼고양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형과 나는 애완동물을 고이고이 키워서 어머니가 애완동물을 더 키울 수 있도록 허락하시게 만들 작정이었다. 부츠는 종이상자에 넣어 칸막이를 한 베란다에서 키웠다. 삼나무 대팻밥을 채운 베개를 베고 잠을 잤다. 고양이를 집안으로 들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베란다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부츠가 넓은 세상에 나가기 전에 스스로 방어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러고는 부활주일로 날을 잡으셨다.

부활주일을 앞둔 며칠 동안 우리는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대감에 불탔다. 드디어 시간이 됐다. 부츠가 세상 구경을 나서는 날.

조지아의 태양빛에 이미 봄은 만개했다. 부활주일 아침은 의무적인 교회 예배로 시작되었다. 예배 후 우리는 튤립과 수선화 옆에 죄수들처럼 줄지어 서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사진촬영 내내 곁눈질을 하며 구시렁대던 나는 끝나자마자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부츠를 해방하러 집으로 달려갔다.

부츠는 그날 난생 처음 풀잎 냄새를 맡았다. 난생 처음 보는 수선화에 신기하다는 듯 두 눈을 깜박거렸다. 처음으로 공중을 폴짝폴짝 뛰며 나비를 쫓아다녔다. 동네 친구들이 부활절 계란 찾기를 하겠다고 쳐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부츠의 재롱에 푹 빠져있었다.

하지만 옆집 친구들이 들이닥치고 나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보스턴테리어인 옆집 개 퍼그가 우리 집 마당까지 따라와서 부츠를 찾아내더니 으르렁거리며 덤벼들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우리는 모두 부츠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퍼그는 연약한 새끼고양이를 입에 물고 양말처럼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이들은 폭력 현장 주변에 동그랗게 둘러서서 퍼그를 겁주려고 소리도 지르고 협박하는 자세도 취해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퍼그의 이가 번뜩이는 것과 공중에 털이 날리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얼마 후, 퍼그는 새끼고양이를 풀밭에 떨어뜨리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떴다.

부츠는 다행히 목숨이 붙어 있었다. 애처롭게 야옹 소리를 내는 부츠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여기저기 물린 자국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반짝이는 검은 털은 퍼그의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고양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달려가 고양이를 수의사에게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웃에 사는 한 아저씨는 부츠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진 것을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이 부러졌네. 살기 힘들겠어.”

어른들이 우리를 멀리 내쫓은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동안은 몰랐다. 어른들은 부츠를 삼베 부대에 넣어서 계곡 물밑으로 떠내려 보냈다.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죽음을 맞게 해준 것이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 부활주일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는 ‘돌이킬 수 없다’irreversible라는 끔찍한 단어를 배웠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기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했다. ‘안 돼요! 말도 안 돼!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어쩌면 부츠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설령 죽었더라도 다시 살 수 있을 거야. 주일학교 선생님이 예수님도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날 아침을 지워버릴 수는 없을까. 시간을 되돌려 그 끔찍한 장면만 빼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부츠를 밖에 내놓지 않고 베란다에서만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면, 이웃집에 이야기해서 퍼그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담장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시나리오가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결국 현실이 승리했고, 나는 부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죽음을.

그날 이후, 내 어린 시절의 부활주일은 그날 풀밭의 폭력과 죽음의 기억으로 얼룩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돌이킬 수 없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한번은 숲속에서 친구와 함께 계곡 옆에 상자거북 17마리를 일렬로 세워놓고 그 위에 큰 돌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등껍질이 깨지고 내장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며 우리 둘은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내 속에 숨은 잔인함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의 잔인함은 동물에 대한 사랑쯤은 가볍게 무시해버렸고, 나는 오랫동안 그 수치심과 죄책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되돌리고 싶은 기억들은 계속되었다. 패싸움, 부러진 팔, 수업시간에 내뱉은 멍청한 말, 예정에 없던 쪽지시험, 어쩔 수 없었던 첫 번째 오토바이 사고 등 성장 과정에서의 이런저런 사소한 사건들은 하나같이 ‘돌이킬 수 없다’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가난한 백인 동네에서 평화로운 시골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해서 비극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생은 슬픔인 동시에 기쁨이요, 다만 내 인생이 펼쳐지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다. 어른들의 인생도 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나는 곧 배우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런 사실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경우는 결코 없고, 인생에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묘하게 공존한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되는 비극에 지친 우리는 더 이상 그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도시에서 살다보니 어린 시절의 자연 사랑이 많이 무뎌졌는데, 밥 맥킬킨이라는 젊은 사진사와 가까이 지내다보니 갑자기 그 마음이 되살아났다. 그때 나는 잡지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밥은 나를 지지부진한 일상에서 구출하여 흥미진진한 외부 세계를 소개해주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한번은 밥이 지프를 몰고 내 사무실에 와서는, 본인이 최근에 구조한 아기 올빼미 두 마리를 내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털이 드문드문 난 이 어미 잃은 올빼미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쥐와 도마뱀을 잡아서 먹이를 대더니, 그 다음에는 스스로 먹이사냥을 하고 나는 법까지 가르쳤다. (밥이 새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다니!) 폭풍우에 쫄딱 젖어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아직 비 피할 곳을 찾을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밥은 전기 헤어드라이어를 가져다가 조심조심 깃털을 말려주곤 했다.   

그런가 하면 너구리 새끼 두 마리가 며칠에 한 번씩 밥의 집을 방문했다. (맛있는 게살 오믈렛을 만들어주는데, 안 오고 배기겠는가?) 뜨뜻한 여름날 저녁이면, 그는 침대 위 채광창을 열었다. 그러면 이름이 레이더인 예의 바른 박쥐가 들어와 무료로 모기 소탕 작전을 펼쳤다. 밥의 집에 있는 물건은 하나같이 자연과 연관이 있었다. 욕실 벽 한쪽에는 수족관을 짜 넣었다.

밥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활동적인”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난 10월에 그가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다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을 때 그 소식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밥이 죽었다고? 상상할 수가 없었다. 밥이 어떤 일을 하는 장면이든 다 그려볼 수 있지만, 꼼짝없이 누워있는 장면만큼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이었다. 파란색 격자무늬 플란넬 셔츠를 입은 서른여섯 먹은 남자의 시신이 관에 누워있었다. ‘돌이킬 수 없다’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또다시 홍수처럼 밀려왔다. 이제 다시는 밥과 스키를 탈 수 없었다. 몇 시간이고 앉아서 눈사태를 구경할 수도 없었다. 그의 집에서 방울도마뱀 고기나 버펄로 버거를 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내게 장례식에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일 중에 그렇게 힘겨운 일은 처음이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잡지 편집자들과 디자이너들,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을 보니 새끼새들이 떠올랐다. 먹이를 달라고 주둥이를 크게 벌린 밥의 올빼미들 말이다. 그들은 위로와 희망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밥이 마지막으로 다이빙을 하던 날 오후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 수요일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시카고 대학교 구내 카페에 앉아 롤로 메이Rollo May가 쓴 「미의 추구」The Quest for Beauty를 읽고 있었다. 책에서 이 저명한 심리학자는 평생 아름다움을 찾아 헤맨 곳들을 회고한다. 그중에는 그리스 반도에 위치했으며 수도원이 많기로 유명한 아토스 산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롤로 메이는 우연히 그리스 정교의 부활 축하 예전을 목격했다. 밤새도록 계속된 교회 미사의 끝자락이었다. 공중에는 향냄새가 진동했고, 빛이라고는 부활절 사탕에서 반사된 빛이 전부였다. 미사가 절정에 이르면, 사제는 참석한 모든 신도에게 부활절 계란을 세 개씩 나누어주었다. 예쁘게 장식해서 포장까지 한 계란이었다. 그런 다음 그리스어로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하고 외쳤다. 롤로 메이를 포함해서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예전에 따라, “예수님은 정말로 다시 사셨습니다!”  하고 화답했다. 

롤로 메이는 이렇게 적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영적인 실재에 사로잡혔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밥이 죽은 그날 오후 롤로 메이의 질문을 읽었다. 그리고 밥의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 질문은 마음 언저리에서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어떤 의미일까? 왜 수도사들은 밤새워 부활을 기리는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에 모든 것을 걸었다. 부활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던지,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을 정도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전15:14)

밥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나는 부활의 의미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섯 살 부활주일에, 나는 돌이킬 수 없다는 힘겨운 교훈을 배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부활절이 ‘돌이킬 수 있다’라는 놀라운 약속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것도―어린 시절의 잔인한 행동도, 수치스럽고 후회스런 경험도, 심지어 죽음까지도―결정적인 것은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있었다.

금요일에, 예수님의 가까운 친구들은 무자비한 역사의 순간이 그들의 모든 꿈을 앗아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이틀 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파다할 때, 그들은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이 땅에 일어났음을 확신했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 나서야, 갈보리에서 무서워 도망쳤던 이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했던 것이다.

밥 맥킬킨의 장례식에서, 나는 롤로 메이의 질문을 빌려다가 우리가 당한 슬픔에 대입해 보았다. 밥이 다시 산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흘간 슬픔과 고통에 시달린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서 있었다. 죽음의 무게가 우리를 짓눌렀다. 장례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더니, 놀랍게도 주차장에 밥이 서 있다면 어떻게 될까? 밥이 거기 있다면!  또렷한 회색 눈을 가진 밥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으면서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면.

이런 상상을 하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첫 부활절에 어떤 심정이었을지 조금 이해가 갔다. 그들도 사흘 동안 슬퍼했다. 하지만 주일 아침, 그들은 또 다른 무언가를,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놀라운 실마리를 엿보았다. 부활절은 새로운 가능성, 희망과 믿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 옛날 예루살렘 묘지에서 하셨던 일을 온 세상을 위해 얼마든지 다시 하실 수 있고, 또 다시 하시리라는 사실 말이다. 이 세상을 위해, 밥을 위해, 우리를 위해…. 모든 역경과 저항을 무릅쓰고, 우리가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돌이키실 수 있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성금요일과 부활절의 엄청난 간극을 단 한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인류 역사를 잘 요약해주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시기 때문에, 언젠가 우리도 그분과 함께 웃을 수 있다.” CT

[수정:2015.04.05]
[게시:2009.04.09]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냐…”(눅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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