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이가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요건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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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이가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요건 [구독자 전용]
  • 송인규
  • 승인 20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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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 교수의 책 이야기 | 책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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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글 쓰는 이’란 결코 전문적 글쟁이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거나 비정기적 잡지·소식지 등에 글을 올리는 이면 된다. 심지어는 온라인으로 모종의 이슈나 주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곤 하는 사람들도 ‘글 쓰는 이’라 할 수 있다.

 

‘일곱 가지 요건’ 또한 너무 철칙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어떤 이는 내가 제시한 항목들 가운데 한두 가지를 빼고 싶어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반대로 자신으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항목이 한두 가지 더 있다며 부가를 요청할지도 모르겠다. ‘일곱’이 확고부동하지 않듯 ‘요건’ 역시 다소 느슨한 개념이다.

어쨌든 나는 글 쓰는 일을 하며 “야, 이건 매우 중요하구나!”라고 되뇌어 온 조건들이 있었다. 물론 이 조건들은 내 특유의 고집과 뒤얽혀 있어서 다분히 주관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이런 성격의 주장은 그렇기 마련 아닌가? 하여튼 그렇게 중요시하던 항목들을 정리해보니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이 항목들을 하나씩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요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계발되어야 한다.

이 조건은 하등 특별할 것이 없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꼭 글 쓰는 이가 아니더라도―누구에게서나 기대되는 점이다. 그런데 뭐 하러 첫 조건으로 등장시켰느냐고 탐탁지 않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 평범한 내용이 실제로 마땅히 중요시되지 않기 때문에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예상하면서도 이렇게 명시하는 것이다. 감히 밝히건대, 이 첫째 요건은 다음에 거론하는 나머지 여섯 가지 요건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특히 둘째·셋째·넷째 요건에 대해서 그렇다.) 아니 할 말로 첫째 요건이 빠진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어구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내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라 내거는 표현 속에는 서너 가지 요소가 함께 맞물려 있다.


•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요15:1-5)를 지속적으로 추구함.

•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찾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22:37-40)을 신앙생활의 근본 원리와 실제적 동인으로 마음에 새김.

• 삶의 전반 및 크고 작은 사안에 대해 신앙적 관점/기독교적 안목을 형성하고 활성화함.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계발되려면 개인적 경건의 훈련, 하나님의 인도 원리 터득,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내면화 작업, 기독교적 세계관의 함양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의 묘사에 따른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짧은 시간에 달성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이런 점에서 내로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관계의 계발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자격 갖춘 ‘글 쓰는 이’로 만든다는 소신만큼은 명확히 하고자 한다.

 

둘째 요건: 성경의 내용을 숙지해야 한다.

글쓰기에서는 이번 조건도 상당히 중요하다. 내가 ‘글 쓰는 이’라 했을 때 글쟁이라는 것은 극구 부인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쓰는 글이 신변잡기 논조의 수상이나 피상적 감동 위주의 ‘간증’류도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오히려 어떤 주제/이슈/사안에 대한 개인의 주장·견해·입장을 표명하는 성격의 기사記事를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글은 종종 어떤 주제나 이슈를 성경적으로 비추어 보는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연관 본문들의 의미를 자세하고 정확히 밝혀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이런 과제나 소임을 책임 있게 감당할 수 있을까? 가장 근본적으로,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글쓰기란 우리 앞에 주어진 여러 가지 상황과 현상에 대해 성경적으로 판단하고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는 일인데,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런 판단과 적용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아는 것인가? 최소 두 가지 방도를 예시할 수 있다. 첫째, 전체와 세부(혹은 ‘숲’과 ‘나무’의 은유가 적절한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다. 즉 성경의 내용을 전체적 흐름 가운데 구속사적으로·연대기적으로 조망하는 일과 주어진 본문의 범위를 좇아 세부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추론의 유형을 도입하여 말한다면 귀납적 방식에 의한 성경 이해와 귀납적 방식에 의한 성경 이해를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성경의 내용을 책별로 (실제로는 작은 단위의 본문으로) 파악하는 것이요, 후자는 주제별로 (대표적인 예로서 교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각 장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지 머리에 그려볼 수 있고, 또 다른 편으로는 ‘사탄’(혹은 귀신) 하면 성경의 어디 어디에 언급되는지 순서대로 열거할 수 있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아는 것에 해당이 된다. (물론 이런 수준에의 도달이 본인을 포함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현재로서 요원한 일이지만, 어쨌든 목표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밝히는 바다.)

성경의 내용을 이처럼 알려면 평소에 우리는 성경을 경건 훈련의 차원에서 가까이해야 하고, 또 지성적 차원에서 탐구나 공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숙지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어쨌든 성경의 내용을 숙지하는 정도만큼 글 쓰는 이로서의 자격 조건 또한 갖추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셋째 요건: 현실에의 참여와 성찰이 요구된다.

기독 신앙은 삶의 현장과 동떨어져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현실 생활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교훈이 신앙과 삶의 분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을 뵙는 것(마5:8)이 신앙의 정수인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곧이어 그러한 신앙인이 동시에 세상의 소금과 빛(마5:13-16)임을 깨우친다. 더욱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2:11)는 이 세상 속에서의 경건한 삶(딛2:12)과 전후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또, 성육신의 실상이 기독 신앙의 참여적 특징을 반영한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생애의 초두부터 인간의 현실 상황에 진입하는 일이었다. 그는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헤롯을 피해 애굽행을 감수해야 했으며,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 속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히4:15). 그는 자신이 존재의 뿌리를 내린 현실 세계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요4:34).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실존이 신앙과 삶의 참여를 긴밀히 연관시킨다. 우리 모두는 신체적·심리적·영적·사회적 존재다. 우리 자신의 영적 측면은 사회적 측면과 기능적 통전성 가운데 융합되어 있다. 비록 두 측면이 이론적으로는 구별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의 영적 측면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사회적 존재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세워진 삶의 터전을 떠나 독자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믿는 이들과의 공동체적 현실 속에서, 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세상적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그 가운데 우리는 함께 삶의 모순·고통·슬픔·불행을 겪는다. 그렇기에 현실에의 참여와 그에 대한 성찰이 없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글 쓰는 이가 갖추어야 할 또 한 가지 요건이 등장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실에 참여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성찰을 시도하지만, 글 쓰는 이는 이 면에서 훨씬 더 민감하고 세심해야 한다. 남들보다 더 기꺼이 고난과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문제의 실상을 더 깊이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개선책을 모색하기 위해 복음의 빛을 더 강력히 비추어야 한다.

인간의 현실적 삶에 대한 이러한 통찰력과 혜안이 없이는 신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실제적인 방향 제시나 변화에의 시도 방안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니 어찌 이 조건을 글 쓰는 이의 자격 요건 가운데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넷째 요건: 책 읽기의 습관화가 마련되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 책 읽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지난 1/2월호 “책 읽기와 글쓰기”에서 충분히 논했으므로 더욱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책 읽기의 유익을 네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책 읽기는 글 쓰는 이에게 ‘모방’의 기회를 제공한다.

• 글 쓰는 이는 책 읽기를 통해 자신의 저술 작업과 관련한 ‘영감’을 얻는다.

• 책 읽기로 말미암아 어떤 주제의 글(및 책자)을 써야 할지에 대한 힌트와 아이디어를 제시받는다.

• 책 읽기는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실제적 자원의 조성에 크게 기여한다.

 

‘습관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 가지 사항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첫째, 평소에 다양한 범주의 책을 읽는 일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다양한 범주란 기독교 서적과 일반 서적, 기독교 변증 서적과 (무신론/타종교인들 편에서의) 기독교 비판 서적, 각종 장르(수필, 소설, 문학서, 논술문 등)의 서적을 총망라한 것이다. 이것은 폭넓은 책 읽기를 의미한다.

둘째, 자신이 쓰고자 하는 분야/이슈/주제 관련의 전문 서적을 읽는 일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상기한 방도와 달리 깊이 있는 책 읽기를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책 읽기는 어떤 특정 주제의 책을 저술하고자 할 때 꼭 필요한 일이다.

셋째, 각종 사전 및 참고 자료를 찾아 읽는 일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글 쓰는 이에게 있어 사전류의 참고 서적은 기계공에게 있어 연장통과 같다. 그러므로 각종 사전·백과사전과 주석류(전권 혹은 단권)의 자료(온라인과 오프라인)를 참조하여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은 글 쓰는 이에게 필수불가결의 훈련 항목인 것이다.

 

다섯째 요건: 생각하는 능력이 향상되어야 한다.

글쓰기의 근본 의도는 사상의 전달과 설득을 매개로 한 바, 변화에의 촉구다. 이 의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느냐 아니면 은휘적隱諱的으로 에두르느냐, 또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직접적 방편을 채택하느냐 간접적 수단이 활용되느냐 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가 지금까지 소개한 성격의 글쓰기에 있어서 설득의 과정은 관찰 〉 진단 〉 제안의 단계를 거쳐야 효능이 발휘된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에는 중심적 사고 활동이 개재되어 있으니, 관찰에는 분석적 사고가, 진단에는 비판적 사고가, 제안에는 종합적 사고가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 활동을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첫째, 관찰을 제대로 하려면 분석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이는 글쓰기 작업의 초기에 크게 요구되는 바로서, 주로 관찰의 활동과 연관된다. 글 쓰는 이가 어떤 주제나 이슈를 글쓰기의 소재로 삼고자 할 때 그는 이미 어느 정도 그 주제/이슈가 문젯거리로 등장했음을 감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글 쓰는 계기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그는 날카로운 관찰을 통해 과연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해야 한다. 이때 제기된 문제의 표피를 헤집고 들어가 심층의 근인根因을 밝히는 것은 대체로 분석적 사고에 의해서 가능하다.

전에 기복 신앙을 다루는 글을 쓰면서 내가 가장 중시한 것도 기복 신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 일이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나는 기복 신앙의 생성에 각각 다른 요소들이 뒤섞여 작용하고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분석적 사고를 통해 그 혼재된 요소들을 따로 분리해내고, 분리된 요소 각각을 추적함으로써 드디어 그 뿌리와 근원을 밝힐 수 있었다. ‘자기 실현에의 욕구’, ‘무교적 가치관의 영향’, ‘구약식 복 개념의 형성’이 관찰의 결과였는데, 분석적 사고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날카로운 관찰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올바른 진단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판적 사고가 기용되어야 한다. 글 쓰는 이에게는 문제를 찾아 분석하는 것 못지않게 진단 또한 중요하다. 관찰이라는 첫 단계에서도 기독교적 독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색깔’을 나타내는 것은 대체로 진단의 단계에 들어서서부터다. 진단이 옳아야 그에 따른 처방이나 해결책의 제시 또한 정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단이 정확하고 합당하려면 문제를 유발한 시대정신이나 세속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에 비추어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적 가치관이다. 글 쓰는 이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적 가치관에 비추어 목하 논의 중인 주제나 이슈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 점을 앞서 소개한 기복 신앙의 문제와 연계하여 살펴보자. 성경의 교훈과 기독교적 가치관은 ‘자기 실현에의 욕구’ 및 ‘무교적 가치관’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특히 ‘구약식 복 개념’의 경우에는 아예 그 자체가 성경 신학적 테마이기 때문에 더욱더 정교한 취급이 요구된다. 복 개념에 대한 구속사적 발전을 염두에 둘 때 구약식 복 개념은 마땅히 비판을 받고 성경적 복 개념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이렇듯 비판적 사고가 제 기능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문제점에 대한 올바른 진단 또한 정상적 궤도에 오를 수 있다.

셋째, 해결에의 제안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종합적 사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글 쓰는 이가 문제를 분석하고 비판적 사고를 동원해 진단에 힘을 쏟는 이유는 결국 다루는 주제/이슈와 관련하여 실행 방침을 제안하거나 해법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원래 의도했던 변화에의 촉구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행 방침이나 해결 방안의 제시가 효력을 발생하도록 마지막까지 채비를 하는 것이 종합적 사고다.

우선, 체계적 정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분석과 진단의 단계를 거치며 논의되거나 거론된 내용들을 흩뿌려두지 말고 일목요연하게 조직화해야 한다. 각각의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들이 일관성 있는 흐름 가운데 상호 연계가 되지 않으면 설득력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비된 자료들은 글 쓰는 이가 제안하려는 몇 가지 지향점을 중심으로 내용이 응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제안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눈에 들어오도록 주된 논점(주장점)을 선명히 부각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 역시 제안하는 해법이나 방침이 강력한 설득 효과를 산출하게 만들려는 조치다. 이처럼 종합적 사고는 체계적 정리와 지향점의 확립이 이루어지기까지 쉬지 않는다.

역시 종합적 사고를 기복 신앙의 주제에 맞추어보자. 복 개념 및 구속사적 발전 등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질서 있게 구조화하려면 ‘체계적 정리’가 요구된다. 이어서 기복 신앙의 문제에 대한 대안적 사고방식을 제안하고 이와 연관된 실천 방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곧 ‘지향점의 확립’이다. 체계적 정리와 지향점의 확립이 별개의 항목으로 설명되었지만, 실상은 기복 신앙에 관해 읽는 이들을 설득하고 움직이기 위해 종합적 사고가 마련한, 단일한 조치다.

 

여섯째 요건: 글 쓰는 재능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한다.

이 조건을 설명함에 있어 나는 ‘글 쓰는 은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글 쓰는 은사’라고 하면 글 쓰는 일이 일부 그리스도인들에만 국한되는 특수 활동인 것처럼 오도될까 염려해서다.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글 쓰는 은사를 보유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고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글 쓰는 은사를 이들의 전유물로 치부하는 것은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능성 발현과 꿈을 막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재능이란 꽤 많은 이들의 경우 훈련과 노력에 의해 계발될 수도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글 쓰는 일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훈련받으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발전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글 쓰는 일이 ‘전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우리 주위에는 남들보다 뛰어나게 전도의 효과를 올리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전도는 매우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며 성취감 높은 활동이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전도의 은사’라는 개념이 해당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전도의 실적이나 활약이 미미하게 나타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전도의 은사가 없으니까 이 일은 내 책임이 아니야”라는 식으로 포기나 회피를 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다. 전도의 은사가 없더라도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반복된 노력과 훈련 가운데 어느 정도 효과적인 전도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글 쓰는 은사가 있든 없든 글 쓰는 노력을 통해 다소라도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글 쓰는 은사’ 대신 ‘글 쓰는 재능’이라는 표현을 채택한 것이다.

글 쓰는 일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글 쓰는 재능을 검증하는 것보다 글 쓰고 싶은 욕구를 확인하는 일이다. 욕구가 있다면 시작하라. 그것이 단연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일단 글을 쓰면서 자신이 보람을 느끼고 만족한다면 처음에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면서 자연히 다른 이들의 반응과 평가에 접하게 될 것이다. 또 그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이러저런 채널을 통해 글에 대한 피드백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검의 과정을 마친 후에야 글을 쓰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재능도 계발이 된다. 이것은 글쓰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글쓰기의 재능을 갈고닦으려면 글쓰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주로 남의 글을 흉내 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조금 지나면 자기 나름대로 습작이라 할 수 있는 형태로 노력을 쏟게 된다. 그리고 때가 오면 공식적인 기회를 얻어 ‘기고’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 처지가 어떻든 글쓰기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글 쓰는 재능을 연마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요건: 마지막까지 끈기와 열정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마지막 요건은 글쓰기 자체와 본질적으로 연관된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볼 때 글쓰기의 성패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끈기와 열정은 다른 모든 활동에도 필수불가결의 요소이지만 글쓰기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요인들이 지속적 글쓰기에 방해거리로 등장하는가? 무슨 이유 때문에 글을 쓰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한풀 꺾이고 진취적 기상에 적신호가 켜지는가? 세 가지 사항이 즉각적으로 떠오른다.

첫째, 가장 흔한 이유는 중도포기나 도중하차 등 글쓰기와 관련된 과거의 부정적 경험이 글 쓰는 이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사실 글을 쓰다가 중간에 멈추거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건강한 이가 감기에 걸리듯이) 흔한 일이다. 그런데 글 쓰는 경험이 적은 이들일수록 이런 흔한 현상을 견디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만 하면 무기력이나 나약의 상태에 빠지곤 한다는 말이다.

글 쓰는 일에 무슨 적합한 시기나 그럴싸한 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원고를 옆으로 물린 지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든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동일한 주제를 놓고 과거 몇 번을 실패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것에 개의치 말고 그저 글을 써야 한다.

둘째, 종종 글 쓰는 작업이 난관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일은 힘들다. 잘 풀릴 때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아이디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아 애를 태우게 되는가 하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과 몇 줄밖에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번에 걸쳐 고쳐 쓰느라 심신이 지치고 실망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 역시 매우 흔한 일이며 글 쓰는 이 모두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고통을 겪을 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만 있는 일인 양 과장되게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작품은 글 쓰는 이의 인고와 진땀을 먹고 태어난다. 힘들어도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 때에야 비로소 글이 그 윤곽을 드러낸다.

셋째, 글에 대한 반응이나 평판이 저조하기 때문이다. 글은 아무래도 독자나 다른 이들의 눈길을 의식하고 쓰는 것이므로, 글 쓰는 이는 사람들의 논평이나 반응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반응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날 때 발생한다. 자신의 글로 인해 꽤 큰 반향이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독자들에게서 거의 아무런 움직임조차 찾아볼 수 없을 때 상당한 실망감에 휩싸인다. 전혀 예측하지 않은 내용이 비난의 표적으로 등장할 때 무척 견디기 힘든 심리 상태에 빠진다. 동일한 수준, 비슷한 주제의 글이나 책인데 다른 이는 각광을 받고 자신은 망각의 뒤안길로 내침을 받을 때, 그의 내면의 상태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 억울함, 약간의 굴욕감 등으로 뒤범벅이 된다.

이런 심리적 어려움에도 충분히 공감을 한다. 나 자신이 여러 번 비슷한 상태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글 쓰는 노력을 좌절시킬 필요는 없다. 사람들의 반응이란 여러 경우 편파적이고 자의적이어서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또, 즉각적인 반응은 부정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진가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심지어, 어느 한쪽에서는 평이 인색했지만 다른 계층의 사람들로부터는 호평을 받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정말 자신이 보기에도 졸작이 되었다고 하자. 그래도 그것 때문에 글쓰기를 두려워하든지 회피하는 구실로 삼을 수는 없다. 한 번 실패는 병가의 상사라 하듯이 글쓰기에 있어서의 빗나간 반응 또한 매우 흔한 경험이다. 사람들의 평을 초월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그것에 너무 괘념치 않고 꿋꿋이 글을 쓰는 용기 또한 글 쓰는 이가 가져야 할 소중한 미덕이다.

지금까지 나는 글 쓰는 이에게 일곱 가지 요건이 있다고 외쳤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어떻소?” 하고 묻는다면 나 역시 자신 있게 선뜻 대답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 요건들은 자격 갖춘 그리스도인 글쟁이를 찾아내기 위한 표준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글 쓰는 이들이 지향하고 이르러야 할 목표로 삼는 편이 훨씬 더 낫겠다 싶다. CTK 2018:7/8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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