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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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 마크 갤리 | Mark Galli
  • 승인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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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스도인의 활동은 비-활동과 함께 시작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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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템플턴상 수상 연설에서,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말했다. “여기서 다시 20세기 전체의 주요 특징을 간략하게 식별해 보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다시 한 번 이 말을 되풀이 하는 것 말고는 더 정확하고 간결한 것을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잊었다.” 이러한 현실은, 물론, 21세기에도 배어들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 흔적을 본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잊었다기보다는 더 긴급한 일, 가령 교회를 성장시킨다거나 희망을 설교한다거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일에 참여하면서, 그분을 선반 위에 올려둔다. 우리가 하는 이런 일들도 모두 나름 옳은 일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부가적인 생각이나 수단이 될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것은 새로운 유혹이 아니다. 바울은 이웃 사랑과 비교하면서 이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에 더 많이 적용된다: 우리는 권력을 향해 기적의 혀로 또는 선지자적 진리로 말할 수 있고, 우리는 문화를 바꿀 만한 믿음을 가질 수도 있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1-4).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면,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겠는가?

가을은 활동의 계절이다. 새 학기가 시작하면, 가족들은 온갖 종류의 계획들과 일과들을 실행에 옮긴다. 교회들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지금이 선거의 해라면, 활동가들은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다들 이렇게 외친다. 우리의 시간이 되었다.

미국 기독교, 더 구체적으로는 복음주의 기독교의 구별되는 특징이 그 행동주의activism에 있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푸드 뱅크를 열고,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정치적 이해집단에 참여하는 것 같은 실제로 행동하는 행동주의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말도 또한 행동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가리지 않고, 설교단에서도 강의실에서도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도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딤후3:16)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말이 “울리는 꽹과리와 소리 나는 구리에” 지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리의 말이 사회적 소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을 볼 수 있도록 더 크게 소리 지르고 더 열광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은 보통 바위를 깨트려 날려버리는 바람 가운데서나 지진이나 화염 속에서가 아니라, “세미한 음성”(왕상19:12)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동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속삭임과 함께한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그때 성령이 수면 위에서 조용히 운행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세상이 구원 받고 있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무섭도록 침묵하셨다), 천국에서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린 후의 거대한 고요함까지(그때 최후의 심판이 시작된다).

이 교훈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들어왔고 또 그 만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것에 싫증을 내어서는 안 된다. 그 만큼 이 교훈은 중요하다: 우리는 행동과 말은, 이것이 울리는 꽹과리 이상이라면,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고요한 예배에서 성숙해져야 한다. “우리가 행동의 중심에 있는 한,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느낀다.” 리처드 포스터는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고독의 경험이 모든 가식을 잘라낸다. 물러남의 행동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난다.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경건의 시간devotions” 또는 “조용한 시간quiet time” 또는 “아침 기도”―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이것을 시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말의 소음으로 가득 채워 하나님을 괴롭히거나, 의례적인 기도를 아무 생각 없이 되풀이한다면, 이 비-활동non-activity은 또 다른 종교적 활동으로 바뀌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 시간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그 일부의 시간을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아 침묵과 세심한 경청으로 채워야 바람직하다.

성령은 우리의 깊은 곳 위에서 계속 운행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만들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세상을 결국 바꾸는 것은 사람들 각자와 우리의 문화가 잊어버린 그분을 다시 기억하도록 돕는 것이다. 조용한 예배 가운데서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우리가 잊어버린 그분에게 더욱 귀를 기울일 때,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 가실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말과 행동은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것이다(고후2:15). CT/CTK 2018:9
 


 

마크 갤리 CT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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