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글쓰기를 위해 갖춰야 할 세 가지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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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글쓰기를 위해 갖춰야 할 세 가지 [구독자 전용]
  • 송인규
  • 승인 201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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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 교수의 책 이야기 | 책집에서

 

“신학적 글쓰기”란 글쓰기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학 영역/분야의 글쓰기”를 줄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신학적 글쓰기는 전문화된 학술 영역에서의 글쓰기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엄정한 구분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글은 통상 문예문文藝文; artistic writing, 학술문學術文; academic writing, 그리고 실용문實用文; practical writing으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싶다. 문예문은 각종 문학서에서 발견되는 바, 예술 작품의 성격을 띤 글을 말하고, 실용문은 사람들의 실제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정보 차원에서 전달되는 내용의 글인가 하면, 학술문은 전문 지식의 확립과 향상 및 전수를 위한 글을 가리킨다. 현재 내가 언급하는 신학적 글쓰기는 단연코 학술문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신학적 글쓰기가 학술문의 한 갈래로 분류되는 만큼, 글의 특징에서도 문예문이나 실용문과 차이가 나게 마련이고 또 차이가 나야 한다. 학술문의 형식상 특징은 다루려는 주제의 범위를 천명하는 일, 서술문 위주의 구성, 전문 용어의 사용, 각주의 활용 등으로, 문예문이나 실용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항들이다. 더욱 핵심적인 것은 학술문이 나타내는 내용적 특성들이다. 학술문은 여타의 글쓰기와 달리 전문 지식의 전달에 집중하므로, 사상의 정확한 표현, 용어나 개념의 정의, 의미와 용례의 규명 등이 기본 활동으로 되어 있다.

나는 학술문이 보이는 이러한 형식적ㆍ내용적 특성들을 염두에 두고서 신학적 글쓰기를 논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여타의 학술문이 그렇듯이 신학적 글쓰기에는 최소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료화 작업

신학적 글쓰기가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명료화clarification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어떤 주제나 사안을 제대로 다루자면 우선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개념, 용어, 표현 등)을 명확히 묘사/기술해야 한다. 명료화 작업이란 말 그대로 이런 요소들을 명확히 하는 일을 뜻하는데, 나는 편의상 이 작업을 설명, 해명, 판명의 활동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이 세 가지 활동은 특정 주제를 다루면서 조금씩 중첩되는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는 서로 또렷한 구별이 가능하다.

 

(1) 설명

명료화 작업의 기본 단계는 설명이다. “설명”이란 어떤 사물 혹은 사태의 내용이나 이유를 상대방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 주는 행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와 관련하여 마땅히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바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무지/몰이해/피상적 이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설명이다.

설명을 요하는 대상/항목은 여러 가지이다. 가장 흔하고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개념, 용어, 표현 등이 있다. 또 이보다 다소 복잡하지만 사상, 이념 혹은 사조思潮도 설명의 중요한 대상이 된다. 나아가서는 어떤 사건이나 운동, 연관된 인물 등도 명료한 이해를 위해서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설명의 작업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개념과 용어의 의미를 확실히 해야 한다. 어떤 용어―예를 들어, 믿음/신념belief, 종교/신앙religion, 근본주의/원리주의fundamentalism 등을 고려해 보자―의 유래를 밝히기 위해 어원, 의미의 변천, 다양한 용례의 제시가 있어야 한다. 그 용어가 신학이 아닌 다른 영역이나 학문 분야에서도 등장하고 있는 경우, 어떻게 의미가 변천을 겪었는지 부연 해설을 해야 한다. 논하고 있는 이념이나 사상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대로의 내용 축적이 있기까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쳤는지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추상적 개념의 소개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례를 언급함으로써 이해력이 높아지도록 힘써야 하고, 필요하다면 도표, 대조표, 일람표 등을 동원해서라도 이런 목표의 달성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2) 해명

“해명”은 단순한 설명 작업으로는 명료화할 수 없는 경우나 상황에 필요한 활동이다. 사람들은 어떤 주제나 사안과 관련하여 오해, 왜곡, 편견, 혼동 등에 휩싸여 있는 수가 적지 않은데, 이런 사태를 바로잡는 데 해명이 꼭 필요하다.

오해나 왜곡의 대표적 예로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아예 저주까지 동원했다든지(마26:74), 성경신학 운동은 그 역사적 뿌리를 보수적 장로교에서 찾을 수 있다든지, 개혁파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은 개혁교단이 표방하는 인식론의 입장이라든지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사안들은 해명의 작업으로 사상이나 사태의 진면목이 명확히 밝혀진다.

편견 역시 올바른 이해를 저해하는 큰 장벽이다. 동방 박사가 성탄 전야에 아기 예수를 경배했다든지, “성령의 역사” 하면 항시 기적적이고 일상 초월적인 현상만을 떠올린다든지, 동성애자들은 모두가 다 동성혼을 지지할 것이라든지 하는 것이 구체적 예이다.

혼동은 훨씬 더 흔하다. 성경의 예만 들어도,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빌립(요6:5-7)과 예루살렘 교회의 일꾼인 빌립(행8:26-40)을 혼동하고,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막9:2)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행15:13-21)를 혼동하는가 하면, 수리아 안디옥(행13:1)과 비시디아 안디옥(행13:14)을 혼동한다.

해명은 편견과 혼동의 문제까지도 해결함으로써 명료화에 기여한다.

 

(3) 판명

마지막으로 “판명”判明은 어떤 사실을 판단하여 분명하게 밝히는 일인데, 이 글에서는 어떤 두 가지 항목 사이의 차이distinction를 명확히 구별하는 활동에 적용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evangelical과 evangelistic은 영어의 스펠링이 비슷하지만 각각 “복음주의의/복음주의적”과 “전도(목적)의”라는 뜻을 갖고 있어 그 차이가 상당히 크다. 신약과 구약을 대조할 때에도 그 대조가 의미로서의 신구약―새 언약 vs. 옛 언약―인지, 아니면 책으로서의 신구약―신약 성경 vs. 구약 성경―인지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심지어는 theology라는 용어도 조직신학의 첫 소재/영역locus인 “신론”神論; theology proper을 뜻할 수도 있고, 흔히 사용하듯 전공과목으로서의 “신학”을 가리킬 수도 있다. 동일한 역사적·신학적 뿌리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Reformed와 장로교회Presbyterian 사이에는 생각보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또 유신론·무신론을 언급할 때와 불가지론agnosticism을 말할 때에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차원―존재론적 vs. 인식론적―이 거론되는 것이다.

이렇게 둘 사이의 세미한 차이를 밝히는 것이 판명의 활동이다.

나는 지금까지 명료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설명, 해명, 판명의 활동이 원활해야 함을 강조했다.
 

논변의 확립

신학적 글쓰기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명료화 작업을 시도할 뿐 아니라 논변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논변論辨; argumentation은 자신이 주장하는 논점을 그 명확한 근거와 함께 제시하는 일이다. 따라서 논변은 두 가지 요소―논점과 논거―로 구성된다. 논점論點은 어떤 주제나 사안에서 자신이 내세우는 주장점을 뜻하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진리 주장truth-claim을 표명하게 된다. 논거論據는 그런 주장의 근거로서 제시되는 증빙 사항인데, 주로 성경과 신학의 내용이 우선적이지만, 그 외에도 일반 학문의 이론이나 학설, 그리고 가끔씩은 상식이나 직관까지도 논거로 활용될 수 있다.

(1) 논점의 명확한 표현

논변을 확립하려면 우선은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상당히 많은 경우 신학적 글쓰기가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주장하려는 논점이 무엇인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논점을 명확히 제시하는 일과 연관된 사안은 논점의 항목을 몇 가지로 구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논점은 두 가지일 수도 있고 세 가지일 수도 있지만, 왜 두 가지(혹은 세 가지)로 설정하는지 글 쓰는 이 편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과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논점(주논점)은 필요에 따라 다시금 두 세 항목 정도의 하부 논점(부논점)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역시 이때에도 여차하면 이러한 구성을 시도하는 불가피한 이유나 사정이 표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의 해설을 도표화해 보자.

(2) 논점과 논거: 연관 관계의 형성

논변의 확립이 보장되려면 논점의 명확한 제시도 중요하지만 그런 논점을 뒷받침하는 논거의 확보 또한 등한시할 수 없다. 특히 이 글에서 나는 논점과 논거 사이에 긴밀한 연관 관계가 형성되어야 함을 강조할 것이다.

이러한 연관 관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각개적各個的 연관 관계요, 또 하나는 누적적累積的 연관 관계이다. 전자는 각각의 논거 하나하나가 독자적으로 논점을 지지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각 논거가 자체만으로써 논점을 지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이 논거들이 합성적으로 작용할 때 결국 논점을 지지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두 가지 연관 관계를 역시 도표로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구체적 사례를 통해 이 두 가지 연관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i) 각개적 연관 관계의 구체적 사례

상기 논점은 세 가지 논거 각각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논거 1도 (다른 논거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논점을 지지한다. 논거 2도 그렇고 논거 3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경우 논점과 논거들 사이의 관계는 각개적 연관 관계인 것이다.

(ii) 누적적 연관 관계의 구체적 사례

상기 논점은 논거 하나하나씩으로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세 가지 논거가 함께 누적적으로 작용하면 결국 논점의 타당성은 입증되고야 만다. 이 경우 논점과 논거들 사이의 관계는 누적적 연관 관계가 된다.

논변의 확립은 각개적 연관 관계를 통해서든 누적적 연관 관계를 통해서든 이루어질 수 있다. 단지 신학적 글쓰기를 하는 이는 자신의 논변이 어떤 형태의 연관 관계에 의해 확립되는지 뚜렷이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논점과 논리 사이에 긴밀한 연관 관계가 형성이 되고 이로써 신학적 글쓰기의 또 다른 요건―논변의 확립―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인식적 맞닥뜨림

신학적 글쓰기의 마지막 요건으로서 인식적 맞닥뜨림을 거론하고자 한다. 인식적 맞닥뜨림은 신학적 사실이나 진술 내용을 새로이 부각함으로써 읽는 이들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자극하고 그들의 인식적 지평을 확장시키는 일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식적 맞닥뜨림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까? 나는 세 가지 정도의 방도를 소개할 생각이다.

 

(1) 예기치 않은 사실에의 노출

이것은 특정 주제를 논의하는 도중 전혀 예상하지 않은 사실이나 진술을 노정露呈함으로써 상대방의 인식에 “충격”을 가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듯이 인식적으로도 정착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실이나 사태를 확고히 붙잡음으로써 인식적 안정을 꾀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납득이 가는 현상이지만, 한 가지 약점은 이런 성향이 미구에 고정 관념이나 인습적 고착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우리에게는 인식적인 “뒤흔들림”과 “요동”이 필요한데, 예상 밖의 현상이나 사실에 직면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신학적 글쓰기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로마가톨릭 내의 신학적 다양성을 언급하는 도중 “가톨릭교도로 자처하면서도 어떤 이들은 현재 교황의 정통성을 극력 부인하고 있다”는 진술을 날리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또 안식일의 의미를 논하다가 “안식교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부 침례교인들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 “마이클 비히Michael Behe가 지적 설계를 주창함으로써 다윈의 진화론을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신진화론자이다”라는 언급은 지적 설계 지지자들의 사상적 폭이 얼마나 넓은지 재고하게 만든다.

물론 이때 사실의 노정이 논의의 맥락을 벗어나게 만들거나 논의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오도한다면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지 않는 한 상기한 예상 밖 사실/진술에의 노출은 우리의 인식과 깨달음을 새롭게 할 것이다.

 

(2) 관점적 이해의 획득

관점적 이해perspectival understanding란 어떤 사상, 주제, 사안을 다른 이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식적 전망을 얻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똑같은 데이터와 정보를 보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의 조정이나 관점의 차이에 따라 논의 중인 사안에 대해 전혀 새로운 “빛”이나 엄청난 인식의 도약을 경험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신학적 논리나 지식의 내용에 수정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신학 지식이 인식자 개인에게 허락된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인해 새로이 재편되고 새로운 “틀”바꿈을 하는 일이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관점적 이해의 단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 말과 병거와 많은 군대를 보낸 장면(왕하6:14)이 안성맞춤이다. 여기에서 엘리사의 관점과 사환의 관점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사환의 관점은 우리가 흔히 관찰하고 인식하는 일상적 차원의 관점이다. 그러나 엘리사의 관점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초자연적 차원의 관점이다(왕하6:17). 이 시점에서 사환의 눈이 열리고 엘리사처럼 볼 수 있게 된 것은 그에게 허락된 관점적 이해 덕분이다. 즉 이제는 사환이 자신의 시각이 아니라 엘리사의 시각으로 실상을 파악한 것이다.

이제 신학적 글쓰기와 연관하여 관점적 이해의 예를 들어 보자. 지금 글을 통해 장로교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자. 보통 장로교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이고 다수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장로교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남부 지역에 머물면서 알아본다면 장로교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경도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에게 대표적인 장로교는 한국식의 보수적 장로교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앞서가는 자유주의 계통의 장로교이다. 장로교를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은 관점적 이해의 결과이다.

비슷한 예이지만 전혀 다른 배경의 관점적 이해도 말할 수 있다. 이번에는 개신교 전체를 염두에 두도록 하자. 역시 개신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한국에서 꽃피운 부흥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개신교를 어떻게 볼까? 그리스는 그리스정교의 중심지인데, 그렇다면 그리스정교인들의 관점에서는 개신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그리스정교인들은 개신교를 일종의 이단 종파로 본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가톨릭까지는 정통적이라고 인정을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개신교도들은 정통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동방정교의 시각에 비친 개신교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관점적 이해로 말미암아 알 수 있는 바이다.

동일한 신학적 사실과 내용이라도 관점적 이해가 허락되면 전혀 새로운 인식의 장이 펼쳐진다. 신학적 글쓰기는 우리의 관점과 시각에만 안주하지 않고 이처럼 다른 이의 관점에서 비롯된 이해와 인식이 어떠한지 알아보도록 만드는 자극제이다.

 

(3)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열

우리는 보통 자신의 신학적 신념이나 견해를 객관화해서 살필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까지 견지해 온 특정 입장을 더욱 더 강화하고자 애쓸 때가 많다. 이렇게 자신의 입장, 자신의 견해에만 파묻혀 있다 보면 독단과 아집의 전형으로 탈바꿈하기가 쉽다. 심한 경우 다른 세계와는 단절된 채 개인 혹은 집단 수준의 신학적 고립주의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우리를 이러한 폐쇄성과 교조적 태도로부터 건져 줄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매우 중요하고 적실한 교정책으로 등장한다. 기독교 신앙에 속한 여러 주제나 사안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 가지 입장이나 견해로 고착되어 있지 않다. 비록 내가 속한 신앙 전통이나 교파 혹은 교단은 어느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할지 몰라도 기독교 전체의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다양한 견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은 이처럼 어떤 주제나 사안에 대해 좀더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안목을 갖도록 돕는다. 자신의 입장도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하나로 배열되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이나 견해를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배열시킨다고 해서 그 입장에 대한 자기만의 소신이나 확신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입장이 다른 여러 입장들과 어떤 면에서 공통적이고 어떤 면에서 독특한지 객관적 파악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입장에 대한 신학적 주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다른 신앙 전통이나 신학적 견해에 대해 폐쇄적이지 않은, 건전한 신학의 보유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제시는 오늘날 “대조 시리즈”counterpoint series나 “다중 견해 시리즈”multiview series 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이 다루는 주제들도 “하나님의 섭리” “성화” “교회 성장” “성경의 무오성” “동방정교” “몸과 마음의 관계” “기독교와 심리학” “신적 예지” 등 이미 100종을 넘어섰다.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열에 의해 인식적 맞닥뜨림의 효과를 만끽할―“예기치 않은 사실에의 노출”을 통해서나 “관점적 이해의 획득”으로 말미암아 그랬던 것처럼―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 글쓰기는 크고 작은 정도로 그러한 인식적 맞닥뜨림의 효과를 산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신학적 글쓰기의 요건을 세 가지 사항으로 정리해 보았다. 명료화 작업, 논변의 확립, 인식적 맞닥뜨림이 바로 그 요건들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신학적 글쓰기에서 이 세 가지 요건을 마음껏 드러냈노라고 공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어떤 이가 신학적 글쓰기를 시도했는데 그 글에서 지금 언급한 세 가지 특징이 전혀 현시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쑥스럽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우리의 신학적 글쓰기가 전기한 세 가지 요건을 착실히 반영하는 글이 되기를 고대해 본다. CTK 2018:9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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