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올바로 사용하라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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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올바로 사용하라 [구독자 전용]
  • 송인규
  • 승인 201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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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 교수의 책 이야기 | 책집에서

 

ISTOCK

오늘날 논문/학술문 형태의 글쓰기―신학적 글쓰기도 그 범주에 속하는데―에서 주와 주의 활용은 필수불가결한 사항으로 되어 있다. 신학적 글쓰기를 하면서 주를 도외시하는 일은 아예 그런 글쓰기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주의 명칭에 대해, 주를 사용하는 목적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그런 연후에는 주의 사용과 관련하여 삼갈 바가 무엇인지 논할 것이다. 먼저 주에 관한 다양한 명칭부터 살펴보자.

 

주의 종류와 명칭

“주”는 사전에 보면 “어려운 말이나 글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이해를 돕고자, 그 뜻을 자세히 풀어 주거나 보충 설명을 더하여 주는 글이나 말”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주를 나타내는 명칭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훨씬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 여러 가지 명칭들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답변은 주의 종류를 범주화하는 데 있다. 나는 주의 종류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i) 작성자에 따른 구분

이것은 주를 창출한 이가 누구냐에 따른 구분이다. “원주”原註는 애초에 주 달기 작업을 한 이의 주를 말한다. 그에 반해 “부가주”附加註는 원저자가 만든 것이 아니고 편집자나 번역자가 부가적으로 제공하는 주를 가리킨다.

과거에 발간된 작품 중 일부를 뽑아 후대에 재판을 시도할 경우, 그 재판의 편집자는 글의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해 새로이 주를 다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정할 수 있다. 이때 다는 주는 원저자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후대의 편집자가 착상해서 만든 것이다. 이것이 “부가주”의 한 가지 형성 경위이다.

부가주가 좀더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번역서의 경우이다. 번역자의 입장에서 볼 때 원저술 가운데 어떤 내용은 번역되는 언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이때 번역자는 원본의 주와 별도로 번역서를 읽는 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표현이나 내용, 관념 등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새로운 주를 창출할 수 있다. 이 또한 부가주의 전형적 사례가 된다.

 

(ii) 처리 방침에 따른 구분

주의 처리 방침이란 주를 본문 가운데 포함시키느냐 아니면 훨씬 보편화되어 있듯 별도로 표기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주를 본문 안에 괄호 등의 기호를 사용해서 내용의 출처나 전거를 제시하면, 괄호주括弧註가 된다. 이와 달리 주의 내용을 본문의 울타리에서 해방시켜 별도의 공간/여백을 허용하는 경우, 별도주別途註가 산출된다. 신학적 글쓰기와 논문에서는 거의 대부분 후자의 방안을 채택한다.

 

(iii) 위치에 따른 구분

주의 명칭이 다양화되는 가장 큰 요인은 주가 배치되는 위치 때문이다. 줄잡아서 다섯 가지의 명칭―두주, 측주, 간주, 각주, 후주―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사용 빈도가 그리 많지 않은 데 비해 대부분의 주는 뒤의 두 가지, 곧 각주와 후주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 두주頭註는 주가 본문 위쪽에 자리 잡은 형태이다. 주로 도표나 목록표를 배치시킬 때 사용한다. 둘째, 측주側註는 주가 페이지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달려 있는 경우를 말한다. 주 가운데 상당히 드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간주間註는 두 칼럼 사이에 주의 내용을 배치하는 것인데, 대표적인 예로서 관주 성경의 해설문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 각주脚註는 주의 종류 가운데 가장 흔하고 많이 사용되는 형태이다. 이 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본문의 발치, 곧 하단에 등장한다. 다섯째, 후주後註 역시―비록 각주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사용 빈도가 상당히 높은 방도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본문의 뒷부분에다 주를 수록한 경우이다. 후주는 그 가운데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하다. 하나는 주의 내용을 책의 한 장章 끝에 배치시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책에 등장하는 모든 주들을 책자의 뒤로 몰아넣는 방식이다. 나는 전자를 미주尾註라 하고 후자를 종주終註라 부를 생각이다. (물론 영어의 경우에는 미주와 종주를 따로 구별하는 상응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신학적 글쓰기에서는 각주와 후주(미주와 종주)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까? 이에 대해서는 이거다 저거다 식으로 뾰족하게 답하기가 힘들다. 우선, 후주의 두 가지 유형부터 거론해 보자. 내가 알기에 과거 1980년대까지의 신학 서적에서는 미주도 꽤 많이 발견되었으나 21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는 거의 사라진 듯하다. 이왕 각주의 문제점(이에 대해서는 곧 나온다)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미주보다는 종주가 훨씬 더 간편하고 경제적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면 각주와 종주 사이는 어떤가? 이에 대해서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기술하는 수밖에 없다. 각주의 장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논문을 읽는 이가 주의 내용이 무엇인지 금세 접근할 수 있다. 둘째, 주에 붙은 어깨 숫자superscript의 번호와 하단의 번호를 맞추기가 용이하다. 셋째, 특정 페이지의 본문을 출력하고자 할 때 주의 내용도 함께 출력이 가능하다. 그러나 각주의 단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첫째, 주의 수효가 많든지 주의 내용이 길 때 본문에 할당되는 공간이 급격히 줄어든다. 둘째, 해당 페이지의 구성에 무질서가 초래되어 글의 모양새가 볼품없이 바뀐다. 셋째, 주의 내용에 차트, 도표 등이 포함되어 공간 점유가 높을 경우 주를 적절히 배치하기가 힘들어진다. 넷째, 조판이 번거로워지고 이 때문에 경제적 부담 또한 늘어난다. 원고가 어느 정도 작성된 후에 주를 추가하거나 삭제하고자 할 때, 각주로 처리되어 있는 원고의 경우에는 여러 페이지에 대한 작업 때문에 번거롭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

종주 역시 강점과 약점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실은 각주의 약점이 종주의 강점이고 각주의 장점이 종주의 약점이 된다.) 종주의 장점으로서 네 가지 사항을 거론할 수 있다. 첫째, 글을 읽는 독자가 본문의 내용에 주목하기가 쉽고 글의 흐름을 매끄럽게 파악할 수 있다. 둘째, 본문의 페이지가 외형상 흐트러지거나 무질서해 보이지 않는다. 셋째, 저술에 나타난 모든 주의 내용을 한자리에 앉아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넷째, 편집 과정이나 조판 시 번거로움과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 물론 종주에는 약점 또한 존재한다. 첫째, 특정한 주의 내용을 읽고자 할 때마다 일일이 책의 뒷장을 펼쳐 보아야 한다. 둘째, 본문의 주 번호와 종주의 번호를 정확히 기억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불일치가 생겨 본문과 종주 사이를 몇 번씩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셋째, 글의 내용을 출력할 때 본문 따로 주의 내용 따로 출력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각주의 방식을 선호하지만, 이것은 결국 글 쓰는 이 각자가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이제부터는 “주” 대신에 “각주”라는 용어를 채택할 것이다. 따라서 “각주”는 일종의 제유적 표현, 곧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각주가 아닌 다른 형태의 주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그렇다고 명확히 표명할 생각이다.

 

각주의 세 가지 용도

각주는 왜 필요한가? 신학적 글쓰기(이하에서 나는 “신학적 글쓰기”를 “논문”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겠다)에서 글 쓰는 이는 무슨 이유 때문에 각주를 사용하는가? 나는 각주의 사용 목적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i) 전거 제시

각주 사용의 가장 흔한 목적으로서 전거典據 제시가 있다. 이것은 논문의 내용 전개 시 내세우는 주장이나 인용문의 출처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이런 목적의 각주를 기원起源 명시용 각주라 부를 수도 있겠다.) 전거 제시 목적의 각주는 축자적逐字的·비축자적 인용에 사용된다. 축자적 인용이란 다른 이의 글 내용을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논문 작성자는 반드시 각주를 사용하여 그 내용의 출처를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 또 타인의 글 내용을 그대로 옮겨 오지는 않되 그 사상이나 핵심 관념만큼은 요약해 제시하는 수가 있는데, 이 또한 전거 제시 목적의 각주 사용을 필수화한다.

그 외에도 어떤 인용문의 경우에는 원본의 내용에 접할 길이 없어 부득이 다른 이가 인용해 놓은 것을 글 쓰는 당사자가 그대로 따오게 되는데(이른바 “재인용”에 해당함), 이 경우 역시 전거 제시 목적의 각주는 필수적이다.

논문 작성자는 왜 이처럼 인용의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할까? 세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도 등장하는 내용이나 사상 또는 논지가 자신의 독창적 산물이 아니고 다른 이의 창안임을 인정하고 밝히기 위함이다. 이것은 정직성과 겸손의 발로로부터 생겨난 태도라고 하겠다. 이것을 은근히 감추고 있으면 타인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과 명예를 빼앗을 뿐 아니라, 자신을 마땅히 인식해야 할 정도보다 어떻게든 높이려는 탐욕의 존재로 만들게 된다.

둘째, 논문을 작성할 때 어떤 자료를 참조했는지 정보를 제공하려는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특히 논문의 독자가 논문 작성자와 비슷한 처지 및 수준의 인물이라는 가정에 기초해 있다. 각주를 통한 정보 제공은 일반 독자에게도 어느 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겠지만 가장 도움과 지적 자극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논문 쓰기를 업으로 여기는 전문가들에 대해서이다. 나의 경우에도 관심 있는 논문을 읽을 때면 자연히 그 내용과 글의 구성이나 흐름에 마음이 쏠리지만, 곧 이어 (아니면 거의 동시에) 그 저자가 인용한 원저작과 인용의 출처에 혹하곤 한다. 또 각주에 제공된 그런 정보로 말미암아 연구에 자극을 받고 실제로 발전을 꾀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비록 이렇게 도움 받는 이들의 수효가 많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전문가에게 유익을 끼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야말로 매우 독특한 형태의 형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셋째, 다른 이가 작성한 논문을 논평하고자 할 때 부분적으로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은 종종 논평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어떤 논문이 논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논문의 학문적 특질이나 잠재적 영향력이 다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서양처럼 지적 전통이 유서 깊은 풍토에서 더욱 사실이다.)

어떻게 논문의 특질을 평가하고 공정한 논평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일차적으로는 논문의 주장과 논지가 얼마나 적확하고 참신하며 정곡을 꿰뚫느냐 하는 것이 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또는 그와 직간접으로 긴밀히 연관이 되므로) 중요한 점은, 그런 주장과 논지가 어떤 자료나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각주의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이는 종종 각주의 내용이 논문의 형성 과정과 흐름을 가늠하는 데 핵심적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유들을 고려할 때 각주를 통해서 인용과 참고의 출처를 밝히는 일은 논문 작성의 생명줄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논문 작성자는 전거 제시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각주의 내용 가운데 그 구체적 항목―저자, 역자, 서명, 책자(혹은 정기간행물) 내 논문의 제목, 판edition의 수와 계기, 출간 연도와 장소 및 출판사 이름, 정기간행물의 경우 권volume과 호issue의 수효, 인용/참조의 페이지 등―어느 하나라도 빠짐이 없이 정확하고 꼼꼼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언어로 된 원본 내용을 인용문으로 삼아 한글로 옮길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번역본이 있어서 그 일부를 인용문으로 삼고자 했다가 그 번역 내용이 부실하거나 부정확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지 개진에 오히려 장애 요인이 된다는 판단이 설 수도 있다. 그때 논문 작성자는 원본을 참조하여 번역본의 번역 내용을 좀더 완벽한 쪽으로 수정할 수 있는데, 그 경우 수정된 내용이 사역私譯에 의한 것임을 필히 밝혀야 한다.

또 원래의 글을 인용하면서 어떤 이유 때문이든 그 내용을 변형했거나 주장 항목을 축소·요약했을 때, 또 주장 사항 중 일부를 삭제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없는 항목을 부가했을 때, 논문 작성자는 반드시 원문의 변경 실상 및 수정 이유를 납득이 가게끔 설명해야 한다.

 

(ii) 부연 설명

각주는 또 논문의 내용을 개진하면서, 부연 설명이 필요할 때 도입되는 수가 많다. 논문의 내용을 작성하다 보면 두 가지 바람 사이에 갈등이나 충돌을 의식하게 된다. 하나는 글의 흐름을 유연하게 유지하는 일이요, 또 다른 하나는 논지의 정확성과 적실성을 빈틈없이 지켜 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종종 두 가지를 함께 보전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글의 흐름에 신경을 쓰다 보니 논지의 날카로움에 지장이 찾아오고, 반대로 논지의 완벽성에 모든 것을 걸다 보니 글의 자연스런 흐름이 막힌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각주에 있다. 각주를 통해 논문의 주장이나 논점에 필요한 부연 설명을 제공하면 글의 흐름도 유연하게 지키고 논지의 예리함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의 부연 설명 기능은 다음과 같이 묘사해 볼 수도 있다. 논문을 작성하면서 빈번히 부딪히는 상황인즉, 어떤 용어·인물·사건·사상·논변과 관련하여 더 이상의 자세한 해설·해명·안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연적 설명을 논문의 본문 가운데에서 시도하다 보면, 글의 흐름이 끊어지거나 본문의 내용이 불균형적으로 길어지기 마련이다. 이때 각주를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말끔히 처리된다. 바로 여기에서 각주의 부연 설명적 역할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제 더욱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의 여러 가지 경우들을 열거하도록 하자. 여섯 가지 항목이 머리에 떠오른다. 첫째, 현재 설명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비슷한 용어가 연루되어 있을 때 부연 설명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지금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교리적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장로교 소속이 아닌 복음주의자들은 이 주제를 다루면서 “구원의 영원 보장”eternal security이라는 용어를 더 즐겨 쓴다. 이런 실태를 글의 본문에서 장황하게 소개하기보다는 각주에서 부연적으로 설명하면 깔끔한 처리가 가능하다.

둘째, 동일한 주제를 언급하지만 신앙 전통에 따라 그에 대한 이해가 현격히 다를 때에도 부연 설명이 필수적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성령 세례”라는 주제를 들 수 있다. 지금 오순절 신도를 대상으로 “성령 세례”를 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오순절 계통이 아닌 복음주의자들은 “성례 세례”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이 경우 성령 세례에 대한 다른 이해가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임을 부연해서 설명하는 일이 필히 요구된다. 이 작업 역시 각주를 통해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셋째, 개념상 오해나 혼동, 편견이 만연해 있을 때에도 각주를 통한 부연 설명은 큰 도움이 된다. 지금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라는 철학적 주제를 다루면서 “이원론”을 설파하고 있다고 하자. 이것은 인간이 영혼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실체 이원론substance dualism의 요체로서, 흔히 기독교 세계관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성속 이원론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런 오해와 혼동을 불식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각주는 이런 활동을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하다.

넷째, 현재 다루는 특정 주제의 진면목을 드러내려면 좀더 넓은 맥락에서 조망하는 일이 필요한데 이 역시 부연적 설명이 수반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아마도 “선택” 같은 주제가 이 점을 밝히는 데 적절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그리스도인의 창세 전 예정과 선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자. 여기에서 말하는 “선택”은 개개인의 구원이라는 의미에서의 선택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명확히 부각시키고 싶다면, 선택의 다른 용례들―(i) 이스라엘 집단의 선택, (ii) 개인의 직분적 선택―과 대조시키면 효과가 크다. 이런 모든 내용을 글의 본문에서 다루려면 앞에서 지적했듯 지면의 제약과 글 흐름의 끊김이라는 악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부연적 설명을 각주가 맡아 준다면, 본문에서의 난관도 해결되고 주제의 핵심을 부각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별 탈 없이 달성될 것이다.

다섯째, 다루는 주제가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질문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도 부연적 설명을 통하여 불필요한 사상적 마찰을 피할 수 있다. 지금 장로교인 대상의 논문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자. 많은 이들은 논문의 내용에 도움을 얻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비신자 가운데 특정인이 구원 받도록 예정되었다면,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위해 노력하거나 책임을 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떨치기 어려울 수가 있다. 이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 논리적으로 양립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저 언급이라도 해 주면, 글의 독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런 부연적 설명을 어디에서 시도할 수 있단 말인가? 두말 할 나위 없이 각주를 활용하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여섯째, 현재 주장하고 있는 논지와 연관하여 강한 반론과 반대 견해가 존재함을 알고 있을 때 반드시 이에 대한 부연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 지금 침례교인들이 포함된 독자층을 향하여 유아 세례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고 하자. 아무리 그 논지가 정교해도 침례교인들은 유아 세례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논문의 주장점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기가 십상이다. 이때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반론을 중립화시킬 만큼의 부연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감당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각주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각주가 부연 설명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매우 적합함을 여섯 가지 사례를 통해 밝히고자 했다.

 

(iii) 상호연계

이 목적의 각주 사용은 두 번째 목적―부연 설명―이 심화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즉 부연적 설명 가운데 어떤 것들은 “상호 연계”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호 연계”란 현재 논하는 내용/주제/주장점과 여타 부분―같은 논문의 다른 곳이거나 아예 다른 논문이거나―에서의 논점이나 설명이 서로 관련된다는 뜻이다.

나는 상호 연계를 목적한 각주 사용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예시하고자 한다. 첫째, 같은 논문에서 상호연계 시켜야 할 경우가 있다. 논문을 쓰면서 이미 앞에 나온 내용을 재론하든지 아니면 앞으로 개진될 바라는 사실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을 때, 상호연계 작업이 요구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이미 얼마 전에 기술/묘사/언급했듯이”라는 어구와 더불어 각주를 마련하고, 후자의 경우는 “앞으로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겠지만”이라는 표현과 함께 각주를 단다.

둘째, 자신이 쓴 다른 논문이나 책자의 내용과 상호연계 시킬 경우가 발생한다. 이것은 현재 기술하는 내용의 주장점이나 논지와 어느 모로든 연관되는 바가 다른 논문이나 책자에 나타날 때 각주를 통해 두 가지의 상호 연계성을 밝히는 일이다. 또, 지금 논하고자 하는 바가 이미 다른 곳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그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때에도, 상호연계 목적의 각주가 빛을 발한다. 그 외에, 현재 작성하는 논문의 깊이가 기본 수준을 능가할 때 좀더 기본적인 내용을 쉽게 설명한 부분이 어디에 있다는 식으로 각주에 소개하면 이로써 상호연계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셋째, 다른 이가 쓴 논문을 언급함으로써 상호연계 시키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논문 가운데에는 현재 자신이 마련한 논지나 주장점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든지 아니면 조금 다른 식으로 설명하든지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설명 사이에 비슷하지만 보완이 되는 부분이 있을 때, 각주를 통하여 상호연계를 시도할 수 있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논문만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논문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때에도 역시 상호연계를 목적하여 각주를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상당히 긴 지면을 할애하여 각주의 사용 목적을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이제 끝으로 각주의 사용에 있어 삼가야 할 바를 언급하고자 한다.

 

각주의 윤리학, 각주의 심리학

이토록 각주의 사용이 필수적이고 유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논문 작성자가 위선적인 심리 상태에 빠질 때, 각주와 연관한 온갖 비리가 등장하고 각주 사용의 타당성은 일그러지고 왜곡된 행습에 먹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위선적 심리 상태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은폐 심리요, 다른 하나는 과장 심리이다.

 

(i) 은폐 심리의 문제점

각주 사용의 은폐 심리는 분명히 각주를 사용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경우로서, 주로 전거 제시 목적의 각주를 기피함으로써 발생한다. 이리하여 논문 작성자는 개진하고 있는 내용, 주장, 논지가 자신의 독창적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자기 것인 양 꾸미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기피의 정도가 심할 때 소위 표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상이나 주제의 경우―“형이상학” “열등의식” “패러다임 변화” “구속사적 설교” “구속의 유비” 등―에는 이미 만인 공유의 지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구태여 그 기원을 밝힐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다. 또, 논문 작성자가 어디에서 읽은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 출처를 밝히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각주를 이용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밝혀야 한다.

전거 제시 목적의 각주를 기피할 경우 꼭 도둑질이나 표절의 문제까지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마땅히 입수해야 할 정보를 차단하고 논문 작성자 자신의 주장과 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투명한 노출을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섬김과 희생의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부연 설명 목적의 각주나 상호연계 목적의 각주를 기피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ii) 과장 심리의 문제점

하지만 때로 우리의 위선적 심리 상태는 묘하게도 반대 극단의 모습―과장 심리―을 취하기도 한다. 이는 은폐 심리와 정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논문 작성자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자료를 노출시키고자 하는 과시 욕구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심리는 주로 전거 제시 목적의 각주와 연관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상호연계 목적의 각주에도 표출되곤 한다. 논문 작성자는 각주에 여러 자료들을 잔뜩 인용함으로써, “나는 심지어 이런 자료까지 다 참조했다” “다른 이들이여! 놀랄지어다! 이런 희귀한 내용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아니냐?!”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교묘히 가장된 학문적 위선이요 비열한 형태의 지적 교만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정당한 논리적 설득의 길을 버리고 자신의 논지를 적당히 얼버무린 채, 소위 권위 있다는 이의 글에 호소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대가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찍소리 하지 말아라!”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권위 호소ad verecundiam argument라는 논리적 오류의 전형적인 예로서, 자기 부족을 위장하고자 하는 야비함과 있는 대로의 자기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의 절묘한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항시 각주를 적실하고 합당히 구사했다고, 또 “나는 은폐 심리나 과장 심리에 빠져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할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 지도자로서) 가능하면 이상과 같은 이론적·윤리적 오류를 줄여 보고자 몸부림치는 것뿐이다.

나는 이번 글을 통하여 각주의 올바른/합당한 사용과 왜곡의 문제점을 기술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부지런히 삼감으로써 우리 모두가 신학적 글쓰기의 보람찬 과업을 제대로 감당했으면 좋겠다. CTK 2018:11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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