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쓰기까지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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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쓰기까지 [구독자 전용]
  • 송인규
  • 승인 2018.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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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 교수의 책 이야기 | 책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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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개월 전에 “‘짧은 글’ 또는 기사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글쓰기의 과정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짧은 글(A4 용지 4〜8쪽)이 아니고 보통 “단행본”으로 이야기되는 한 권 분량의 책 쓰는 일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짧은 기사든 책이든 둘 다 글 쓰는 활동의 산물이므로 비슷한 점도 있지만 동시에 차이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한 권의 책을 저술하는 과정에 어떤 단계들이 포함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 글쓰기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 자신의 경험을 듬뿍 담아서 좀 더 살과 피가 느껴지는 내용을 꾸밀 생각이다.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가 나오기까지

그래서 나는 내가 쓴 책 가운데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IVP, 2004)를 선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우 길들이기”라는 표현이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로부터 연유한 것임을 쉽게 알아챈다. 이 책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자기를 길들이라고―관계를 맺으라고―제안했고, 얼마 후 실제로 길들여졌다. 그러나 여우는 인류에게 길들여진 적이 없다. 상당히 많은 동물이 순화되거나 인류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지만 여우는 그렇지 않다. 이 점에서 “여우 길들이기”란 하나의 목표요 하나의 이상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우가 세 마리나 된다고? 그렇다. 이 세 마리는 각각 “야망” “질투” “경쟁”을 상징한다. 남들이야 어떻든 간에 나에게는 이 세 주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다루기 힘든 실존적 장벽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만 이런 문제로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사안들에 직·간접으로 휘말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따름이고, 또 이야기해 보았자 납득이 가는 설명이나 방향 제시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조용히 있는 것일 뿐이었다.

우선 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런 어려움을 공론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해결을 위한 예비 단계(혹은 첫 걸음)라는 소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그래도 가장 낫다고 여겨지는 해결 방안이나 지침을 마련하며, 그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과 수고를 경주해야 할 것이다.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는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쓴 것이다. 그 취지가 얼마나 실효성 있는 열매―예를 들어 자극, 각성, 성찰, 돌이킴 등―를 맺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겪는 세 마리 여우의 농간이 결코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라는 것을 설파하고 싶다. 세 마리 여우는 나름대로 “길들여질” 수 있다.


한 권 책 쓰기의 실제적 과정

우선 책을 쓰는 일에 포함되는 단계들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은 과정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도표의 과정에 등장하는 일련번호는 단계들로서 대체로 시간적 선후를 표시한다. [0]의 경우에는 그 단계가 글 쓰는 과정 이전(혹은 이상)임을 나타낸다. 책을 집필할 때 본격적으로 중요한 단계는 [1] [3] [6]이다. 나머지 [2] [4] [5] [7]은 글 쓰는 일을 지원하거나 글 쓰는 일에 방편이 되는 단계들이다.

 

[0] 자료/책 읽기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여러 모로 힘썼지만, 야망·질투·경쟁이라는 주제의 책자들은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에 의한 저술을 발견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야망의 경우 1980년대 초 영국의 의사가 기독의사회Christian Medical Fellowship의 저널에 기고한 글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것은 질투의 주제도 비슷했다. 후에 심리학 분야의 학술지에 질투jealousy에 대한 논문이 꽤 있어서 찾아보았더니, 주로 남녀 간의 애정 관계에서 여성이 느끼는 질투가 주 논의 대상이었다. 내가 고민하는 질투는 기독교 사역자들 끼리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의 질투인데, 그런 맥락에서의 질투를 다룬 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쟁” 또한 만만치 않은 자료 탐구였다. 나는 경쟁을 상당히 부정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데 반해 현대 경제학, 특히 자본주의에서는 경쟁의 원리를 가장 타당한 원리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 외에 경쟁의 문제를 다룬 분야는 교육학과 스포츠 영역이었다. 경쟁 심리가 학생들의 학습 효과에 조장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아니면 저해 요인이 되는지 실증 데이터를 동반한 학술적 연구 결과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스포츠 분야 또한 경쟁을 기본 골격으로 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논의가 꽤 활발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경쟁의 문제에 직면해야 하는 운동선수들의 간증이나 수상문隨想文 같은 것은 두세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서는 자료 찾기가 참 힘든 주제들이었다.


[1] 문제의식

야망·질투·경쟁을 취급하는 그리스도인 저술가나 전문가는 거의 없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들을 자신의 내면에서 시작하여 삶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직면해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i) 야망

내가 야망의 문제와 친히 맞닥뜨린 것은 1976년경부터였다. 그때 나는 20대 중반의 나이였고 한국기독학생회(IVF)의 간사 3년차였으며, 신학교의 목회학 석사 과정에 몸을 담고 있었다. 당시 나의 야망은 “많이 알고 싶다”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장차 ∼이 되고 싶다”라는 식으로 표출되곤 했다. 그로 그럴 것이 한창 젊은 나이라 꿈, 희망, 포부 등이 넘치는 때였고, 미래의 삶이 많은 가능성 가운데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야망은 두 얼굴을 가진 채 접근해 왔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인 젊은이로서 진취적 정신과 태도로써 미래를 꿈꾸고 계획하고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것은 멋있게 보였고 마땅하게 여겨졌다. (누가 앞날에 무관심하든지 미래를 논하기 꺼려하는 도피주의자를 바람직하다 하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적극적 자세를 취하다 보면 어느 새 나 자신의 야망이 “욕심/탐욕”으로 착색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라곤 했다.

문제는 이것이 그저 나 하나의 고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간사와 선배로서 후배인 학생들의 고민이나 질문에 대해 무언가 의미 있는 답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앞길을 내다보면서 야망의 문제에 직면하지만, 제대로 된 설명이나 지침이 거의 없어서 도움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실은 개인 및 집단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한 것을 수없이 목도한지라, 이 주제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답변은 더욱 갈급히 요청되었다.

(ii) 질투

질투라는 사안 역시 합당한 취급에 대한 요구 때문에 결코 적당히 얼버무리는 정도로 끝낼 수가 없었다. 내가 질투의 문제에 심각히 직면한 것은 역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까지의 간사 생활 때였다. 나는 사역자로서 나보다 뛰어난 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선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학생들에 대한 영향력·인기·유명세에서 관록을 드러낼 때마다 묘한 질투의 감정과 심리 상태에 빠지곤 했다.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왜 …?’ 이 질문이 계속 내 심령을 괴롭혔다.

그런데 지금 나이가 칠순에 접어들었으면서도 “질투”의 문제는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질투의 대상이 동료나 선배들이었다면, 지금은 후배들로 바뀐 것밖에 없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내가 제일 적임자가 아니던가?”이런 (드러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질투의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질투가 우리 심령을 사로잡으면 제일 먼저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 우리의 내면은 불안, 동요, 혼란 등에 휩싸인다. 또 함께 일하는 사역자나 그리스도인들을 질투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공동체 내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제 사랑과 동료 의식을 고갈시킨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하나님인양 군림하고자 하는 사탄적 유혹에 자신을 내주게 된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끼리의 질투를 취급하는 책이나 자료는 매우 드물다. 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제에 대한 언급을 야망보다 더 꺼린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질투”가 남성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렇기에 남성 사역자가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질투가 아예 문젯거리조차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니 어찌 이런 주제를 공공연히 다루고자 하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편견과 인습을 깨고 이 주제를 더욱 백일하에 드러내야 한다.

(iii) 경쟁

경쟁이라는 사안은 세 마리 여우 가운데 가장 늦게 찾아왔다. 물론 이 주제 또한 내게 일찍부터 어려움을 끼치기는 했지만, 야망이나 질투만큼은 아니었다. 그것은 경쟁이 질투와 다소 중첩되기 때문에―실은 경쟁의식과 질투가 중첩되는 것이지만―질투의 문제를 다루면서 경쟁 또한 어느 정도 해소가 이루어진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적어도 40대 이후(1980년대 후반)에 가서야 나는 이 주제의 문제점을 심각히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경쟁의 문제로 고민을 시작한 것은 섬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때문이었다. 주님의 교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하는데, 세상의 생활 방식은 철저히 경쟁 위주였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 활동의 동인 가운데 경쟁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잡고 있는 터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학교든 회사든 경쟁의 관문을 뚫어야 의도한 집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섬김과 경쟁은 반대의 개념인데, 과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이 가진 이론적 허점과 올바른 생각에 대해서는 [3]생각의 정리에서 좀 더 자세히 취급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야망과 질투의 경우처럼 납득이 가는 설명이나 해결 방안을 제시 받을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인은 모순된 이중적 삶―신앙 공동체에서의 “섬김” 강조와 세상 속에서의 “경쟁”적 생활 방식―을 살고 있는데도, 이것을 문제시하든지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적어 보였다.


[2] 파일 시스템

나는 아직도 주제별 분류 철이 담긴 서랍을 가지고 있다. 비록 요즘은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주제에 따른 파일들이 촘촘히 꽂혀 있는데,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가 출간되기 전까지는 그 가운데 야망·질투·경쟁에 관한 파일도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각각의 파일을 열어 보면 그 안에는 펜으로 끼적거려 놓은 크고 작은 종이들이 들어 있다. 어떤 것은 그 주제들과 관련해 떠오른 생각이나 관련 서적 명을 적은 종이이고, 어떤 것은 연관 성구들과 의미 해설이 적힌 교회 주보의 일부인가 하면, 심지어는 질문 받고 답변한 내용이 고스란히 적힌 냅킨도 있다.

일단 집필에 들어가면 기존의 자료들을 모아서 재정리한다. 가급적이면 어느 하나라도 빠지지 않도록 번호를 매기고 그것들을 하나의 종이에 옮겨 적는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금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류를 한다. 그 어간에 중복되는 내용은 빼고, 서로 엮을 수 있는 주장점은 함께 모으며, 어떤 부분은 앞으로 보내고 어떤 부분은 중간과 맨 뒤에 배치할지 결정을 한다. 이런 자료들은 책의 더 큰 부분에 흔적도 없이 합병될 수도 있고 논점의 일부로 뚜렷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


[3] 생각의 정리

이 단계는 아마도 한 권의 책을 쓸 때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글을 쓰는 것은 [6] 글쓰기에서 이루어지지만 [6]이 가능하도록 제반의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은 [3]이다.

이 단계에서는 글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인지 명확히 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이다. 또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어떤 핵심 논변(들)을 동원할지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연관 사항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풀도록 함과 동시에 주장점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책의 구성 장章마다 필요하고 동시에 한 권의 책 전체를 놓고서도 필요한 바이다.

(i) 야망

사실 “야망”의 주제는 이미 「야망: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중책자(IVP, 1988년)에서 다룬 적이 있었다. 그때 야망의 삼요소를 “야망의 목표” “욕구로서의 야망” “야망의 동기”로 분석하고, 또 이에 따라 야망의 종류를 그릇된 야망, 모호한 경우, 타당한 야망으로 나눈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ii) 질투

질투의 경우에는 연관된 다른 두 개념―선망, 시샘―과의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질투의 본 모습을 밝히고자 했다. 또 이런 단어들의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실제로는 질투에 대한 심리적 고찰―질투의 원인, 질투의 계기, 질투의 영향―이 질투에 대한 이해나 대처 방안의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iii) 경쟁

경쟁은 개념의 올바른 정립까지 가장 시간이 많이 소요된 사안이었다. 내 자신이 이 문제를 명확히 깨닫지 못한 것은 우선 첫째로 “경쟁”과 “경쟁의식”을 구별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전자는 객관적인 것으로 경쟁이라는 사회 제도, 현상을 의미하는 데 반해 후자는 주관적 상태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경쟁심을 의미한다. 나는 후자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전자 역시 무조건 부정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경쟁을 정죄한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끊임없이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신학교 입학이나 장학금 지급, 안수 집사 피택 등은 모두 경쟁을 통해 최후로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 공동체가 그렇다면 하물며 이 세상이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경제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은 경쟁이라는 방도/수단을 채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경쟁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방편임을 짐작케 한다.

둘째 요인은 경쟁을 섬김과 반대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 일이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희생과 섬김(막10:45)은 경쟁과 모순이 된다고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나 가르쳐 왔고,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쟁을 실행하면서 섬김의 정신으로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군림의 태도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쟁과 섬김은 개념 상으로나 실행 상으로나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

나는 경쟁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편견이나 오해 때문에 이 사안을 명료히 다를 수가 없었다. 실은 이 책을 쓰기 얼마 전에 이르러서야 명확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4] 정신의 집중

이 단계는 실상 [3] 생각의 정리와 맞물려 있다. [3]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4]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야망·질투·경쟁의 주제 가운데 영감inspiration의 도움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야망이다. 역시 전에 밝혔듯(2018년 3월호) 1980년대 초의 어느 날 신촌 로터리를 돌던 버스 안에서 야망의 삼요소가 난데없이 떠오른 일이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몰입적 사고hard thinking―어떤 주제나 사안을 놓고 이리저리 궁리하며 생각을 집중하고 심화시키는 활동―가 주효한 것은 경쟁과 연관해서였다. 경쟁을 본유적 선은 아니되 도구적 선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섭리 방안 가운데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결론은 몰입적 사고 덕에 가능한 바였다. 또 경쟁에 창출자, 참여자, 참관자의 삼자가 있다는 것도 몰입적 사고 끝에 상정할 수 있었다.

상상력imagination은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의 얼개를 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책자는 가상 인물인 김선환 목사와 그의 멘토인 지정식 교수와의 관계를 축으로 엮여 있다. “야망”은 김선환 목사의 유학 생활, “질투”는 귀국 후의 목회 사역, 그리고 “경쟁”은 지정식 교수의 유고 정리를 중심으로 설명이 진행된다. 이러한 플롯의 설계와 전개는 모두 상상력 덕분이다.


[5] 기본 실력

이번 단계는 책의 내용을 집필할 때 독립된 단계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 갖추어져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글쓰기의 작업은 큰 영향을 받는다.

야망·질투·경쟁의 주제에 있어서 나의 기본기가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이런 주제들에 대한 성경상의 자료와 가르침이었다. 비록 성구 사전과 어휘 사전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평소 성경과 친숙해 있었기 때문에 세 가지 주제를 성경적으로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기가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반면 이 주제들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들쭉날쭉했다. 야망과 질투의 경우에는 그런 성찰이 원활히―전자는 상당히 크게 후자 역시 어느 정도―이루어졌지만, 경쟁을 앞에 놓고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즉 경쟁의 경우에는 신학적 성찰의 면에서 기본 실력이 거의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쓰는 과정에서 애를 많이 먹었다.

만일 야망·질투·경쟁에 대한 기본 실력을 일반 학문적 입장에서 평가하면 어떻게 될까? 돌이켜보건대 이 방면 역시 내게는 기본 실력이 별로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평가가 된다. “야망”에 대해서는 들뢰즈(Giles Deleuze, 1925-1995) 같은 철학자의 사상을, “질투”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적 연구 결과를, 그리고 “경쟁”에 대해서는 경제학 이론과 협동collaboration 이론 등을 알고 있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6] 글쓰기

이 단계는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책을 집필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 쓰는 이는 한 자리에 앉아 한 권 분량의 책을 집필하지 않으므로, 결국 이때의 작업은 “짧은 분량의 글쓰기”를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책이 7장의 분량이라면, 이 책의 집필은 7회에 걸친 짧은 분량의 글쓰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책의 집필이 짧은 분량의 글쓰기와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은 한 권의 책을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눌지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의 내용을 나누는 데는 대개 두 가지 방안이 있다. 첫째, ‘부’part와 ‘장’chapter을 함께 도입하는 방식이다. 둘째, ‘부’의 구분 없이 그저 ‘장’으로만 처리하는 방식이다. 아무래도 책의 분량이 많으면 전자의 방안을 채택하는 수가 많다.

나 역시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는 전자의 방안을 좇아 세 개의 부와 열두 개의 장을 설정했다. 이것이 그대로 책의 목차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 3부와 총 12장의 구성은 멋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세 개의 ‘부’는 세 마리 여우이기 때문에 정해진 것이고, 각 주제는 네 개의 장이 준비되어야만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모두 12장이 된 것이다. 또 각 부의 제목과 각 장의 제목 역시 동등성parity과 독자성distinction을 함께 보유할 수 있도록 세심히 꾸며졌다.

실제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몇 번씩 가필과 정정을 하는 일이나 글의 내용 가운데 산문, 대화체, 도표 등을 포함시켜 적절한 배합을 꾀하는 일은 짧은 기사 글쓰기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므로, 같은 설명을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7] 편집자와의 대화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를 집필하면서 아직까지도 나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추억이 바로 [7]의 단계이다. 내 책의 편집을 맡은 젊은 편집자의 수고와 투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내가 전에도 주장했듯이(2018년 3월) 저자는 편집자를 자신의 수종으로서가 아니라 독자적 권한을 지닌 협력자로 여겨야 한다. 편집자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 위치하여 저자의 글 가운데―형식상이든 내용상이든―수정이나 보완(및 재편)이 필요한 부분을 지적하고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비록 편집자의 이러한 권한 행사가 저자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심지어 언짢기까지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책의 질을 높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나와 연락을 주고받은 IVP 편집자는 참으로 자신의 본분을 성실히 감당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싶다. 그는 내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보충적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어떤 부분의 삭제와 새로운 내용의 보완을 주문했다. 물론 이 모든 요구와 건의 사항을 내가 기계적으

로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나의 반응 패턴은 승복, 타협, 고집으로 대별할 수 있을 터인데, 승복은 편집자의 제안과 주장에 따라 내용에 상당히 큰 변화를 주는 일이요, 타협은 원래의 내용을 작은 범위와 정도에서 수정하는 일이며, 고집은 오히려 내 편에서 편집자를 설득하여 나의 원래 진술/논점/표현/묘사 등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일이다.
지금 내 기억을 또렷이 장식하는 것은 “승복”의 항목이었다. 몇 번의 논의와 주장과 반박이 오고간 후에 나는 결국 그의 제안이 타당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현재 기억하는 바로는 “경쟁”에 관한 장들 가운데 어느 한 장은 삭제와 보완 끝에 내용을 크게 다듬었고, 심지어 제9장 “경쟁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전에 없던 내용을 아예 새로 쓰는 식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그렇게 승복하고서도 다소 떨떠름하게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내용을 적지 않은 정도로 손본 것이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를 집필하는 데 총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었는지는 정확히 산정할 수 없다. 그러나 2003년과 2004년에 걸쳐 쓴 것은 확실하다. 책을 집필하느라 [0]〜[7] 단계의 과정을 겪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한 권의 책이 탄생되었음을 생각할 때 그 보람과 기쁨은 이를 데 없이 크다. 그것도 그냥 책이 아니고 세 마리 여우를 길들이는 법에 대한 책임에랴! CTK 2018:12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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