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깊은 이들이 서로를 보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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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깊은 이들이 서로를 보듬을 때
  • 박주현
  • 승인 201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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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언니네 홍보

한국 전쟁 직후 남북 합산 약 10만의 전쟁고아가 발생했다. 남한의 전쟁고아들은 다수가 미국이나 서유럽으로 입양되었고,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동유럽으로 위탁교육 보내졌다. 폴란드로 보내진 아이들이 가장 많았다. 약 1500명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다.

폴란드에서 한 언론인이 시골 공동묘지 한 구석에서 열세 살 북한 소녀 김귀덕의 묘지를 발견한다.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라 직감한 그는 폴란드로 오게 된 북한 전쟁고아들의 이야기를 3년에 걸쳐 추적, 취재한다. 그렇게 폴란드 프와코비체에서 8년간 살았던 한국전쟁 고아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모였고, 그들의 이야기가 폴란드 공영방송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고, 또 〈천사의 날개〉라는 제목의 실화 소설로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2013년 당시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폴란드로 보내진 전쟁고아들에게 그의 어머니가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증언하면서 그 이야기가 처음 알려졌다. 자신은 그때 여섯 살이었고, 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았던 것을 기억한다고 그는 말했다.

 

첫 만남

1951년 북한에서부터 1500여명의 전쟁고아들이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약 300명은 바르샤바 근교 시비데르로 이송되었다. 북한의 동유럽 동맹 국가에 보내진 이들은 체제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 선전용 필름도 찍었다. 나머지 1270명은 처음에는 러시아로 보내졌지만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어 영양실조 등을 앓다가 다시 폴란드의 시골 마을 프와코비체로 이송되었다.

아이들을 실은 기차가 며칠에 걸쳐 프와코비체 역에 도착했다. 모두 흰색 바지와 윗도리를 입고 까만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어린아이들이 폴란드인들의 눈에는 똑같아보였다. 아이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멀고 낯선 땅을 몇 년 간 떠돌면서 얻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또한 자기들을 바라보고 있는 폴란드인들이 전쟁 중에 자기 눈앞에서 부모를 죽인 미국인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착하고 얼마간 아이들은 편안한 침대를 마다하고 어두운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다. 전쟁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던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한 본능의 몸짓이었다.

폴란드 교사들은 먼저 아이들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아픈 데를 치료해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폴란드 의료진은 아이들의 몸에서 북한과 남한에서 발견되는 기생충을 각각 절반 정도씩 발견했다. 아이들이 모두 북한에서 온 전쟁고아가 아니라, 상당수는 남한의 전쟁고아들이었던 것이다.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전쟁고아로 보이는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트럭에 태워 해외로 보냈던 것이다.

     

사랑과 회복

작은 시골 마을의 폴란드인들은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공부시켰다. 그리고 자신들을 엄마, 아빠라 부르게 하며 사랑으로 보살폈다. 어린나이에 혹독한 전쟁을 겪은 아이들이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잘 먹고 잘 교육받으면서 차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동심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폴란드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극작가 미츠키에비치의 시극 〈판 타데우시〉를 아이들에게 외우게 하고 또 연극을 하게 했다. 그 대사 하나: 내 형제여 나는 나와 한 핏줄에서 자랐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피를 흘렸구나. 내가 너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었구나.

폴란드는 세 번의 분단 경험과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견뎌 낸 역사를 갖고 있다. 그만큼 한국의 역사와 닮은 데가 많다. 그들은 아픔을 덮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연극을 통해 표현하며 상처를 극복하는 교육법을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폴란드 출신의 위대한 작곡가 쇼팽도 조국을 잃은 설움을 음악으로 승화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상처는 회복되어 갔다.

 

귀환 명령

폴란드어에 익숙해지고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며 행복을 느끼고 있던 아이들에게, 8년 이 지난 1959년 갑자기 북한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쟁 폐허 복구에 총동원령을 내린 북한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지원이 여의치 않자 주민들의 노동력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균열이 시작된 동유럽의 정세 또한 강제 송환의 이유가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또 두 번 부모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아프면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헤어지는 날 눈 위에 드러눕거나 찬물을 끼얹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희귀병에 걸려 열세 살에 생을 마감한 김귀덕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북송되었다. 갑작스런 작별은 아이들과 폴란드 선생님들 모두에게 크나 큰 고통이었다.

생존해 있는 그때의 선생님들은 그 아이들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이들은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여기 남고 싶어 했어요.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너희 나라가 너희가 필요하단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아이들이 떠난 뒤에 북한의 자강도, 평안남도, 평양 등지에서 폴란드로 편지가 날아왔다. “보고 싶어요, 저를 데려가주세요.” “선생님 하인으로 삼아도 좋으니 다시 데려가 주세요.” 간절했다. 그러나 그 편지도 끊겼다.

 

상처의 연대

아이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한 폴란드 선생님은 평화로운 통일이 한국 땅에 오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그 아이들을 만나면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었던 시간이 아이들을 돌보았던 그 8년이었다고.

폴란드 시골 기차역에 도착한 까만 머리, 검은 눈의 동양 아이들은 머나먼 타국의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년 시절의 일부였다. 대부분 전쟁고아 출신인 폴란드 선생님들은 시체더미를 밟고 등교해야 했던 처참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랬기에 먼 극동에서 온 낯선 아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보살피고 사랑할 수 있었다.

이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함께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과거를 회복했다.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는 그 상흔의 깊이만큼이나, 같은 고난의 시간을 겪은 타인을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다. 그렇게 상처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CTK 2019:1/2 
 

박주현 UC버클리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몇 편의 영화 현장에서 제작부 스태프로 일했다. 현재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초청팀장으로 영화인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문 보기: 2018 BIFF 상영작들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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