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있는가? [구독자 전용]
상태바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있는가? [구독자 전용]
  • J. 토드 빌링스 | J. Todd Billings
  • 승인 2019.02.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항의하는 법을 보여 준다.

 

5년 전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나는 시편을 다시 펼쳤다. 먼저, 전에는 단순히 읽기만 하거나 아예 건너뛰었던 시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독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을 때 한 신학생이 말하기를, 나를 위해 시편 102편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5-6).

 

이 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계속 읽어나가면서 나는 이 시가 불평과 탄원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불평하고 그렇게 탄원하고 싶었지만 표현 방법을 몰랐었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23–24).

 

제발 주님, 제 아이들은 이제 겨우 한 살, 세 살입니다. 주님을 위해 “중년에” 내 인생을 중단시키지 마옵소서, 오 하나님, 하나님의 날은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당신에게는 무궁하게 많은 날이 있지 않습니까?

 

복음주의의 모순

이 경험을 통해 나의 복음주의적 신앙 배경에 내재된 모순에 직면했다. 우리는 성경 중심 교회의 일원으로, 시편 구절을 외우고 최신 찬양곡들과 더불어 시편 찬송을 불렀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 주목하기 시작했다시피, 우리는 정서情緖에 관해 도량이 좁았다. 찬양과 감사? 좋아.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다고? 좋아. 하나님께 고백? 좋지. 하지만 시편을 읽다 보니 이 틀에 들어맞지 않는 시가 많았다(대부분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 듯한, 하나님께 화를 내고 두려움을 표현하는 듯한 시는 어떤가? 나는 시편이 우리 나름의 기도를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배워 왔다.

그런데 가장 광범위한 유형의 시편(전체 시편의 약 40퍼센트)이 애통의 시편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시편의 멜로디가 단조短調일 경우, 심지어 불협화음일 경우 나는 그냥 함께 부르기를 포기했다.

애통의 시편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암 진단 이후 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대화를 나누며 의견을 들었는데, 이들의 반응은 공통적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대학생이든 수십 년 동안 장로로 교회를 섬겨온 65세의 회계사든, 이들의 상투어는 똑같았다. 찬양, 고백, 감사라는 틀에 들어맞지 않는 시편으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을 아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사실상 시편은 세심하게 골라서 읽었다. 좋아하는 구절만 골라서 읽고 까다로운 부분은 건너뛰는 나처럼 말이다. 이들은 이것이 사실 성경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가 전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기도는 시편만큼 폭이 넓고 깊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에서 우리의 대답은 ‘아니요’이지만, 나는 우리가 대부분 ‘예’로 대답하고 싶어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길을 가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핵심 사항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우리가 회피하고 있는 부정적 정서를 하나님 앞에 털어 놓는 게 과연 용인될 만한 일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화를 내는 게 허용될 만한 일이냐는 것이다.

 

전인적 삶이라는 근육

최근, 등 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있어서 물리치료 센터를 찾아갔다. 검진 후 치료사는 벽에 붙어 있는 근육 해부도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이쪽 등 근육이 무리를 하고 있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나 물건을 들어 올릴 때 똑같은 근육만 계속 쓰시는 거죠. 근육이 굳어 있고 피곤한 상태인데, 통증은 근육이 약해서가 아니라 혹사당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근육의 긴장을 풀 수 있는지, 이 통증의 전조가 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쪽 다른 근육을 강화시켜야 해요.” 치료사는 말했다. 일부 근육만 지나치게 쓰면 다른 근육이 약해지고, 그 결과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강한 근육마저도 아프고 굳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해부학상의 다른 중요 근육이 이 근육을 지탱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시편은, 그 물리치료 센터 벽에 걸린 그림처럼 우리에게 해부학적 교훈을 준다. 시편을 소개하면서 장 칼뱅은 시편이 “영혼의 다른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도”라고 말한다.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감정치고 마치 거울에 비치듯 시편에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없기” 때문이다.

온갖 감정을 다 지닌 피조물은 그 감정만큼 폭이 넓은 기도 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시편이라는 기도 책은 분노와 절망을 드러내는 탄식을 비롯해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에서 아주 다루기 힘든 다른 모든 부분들을 포괄하고 있다.

“행복에 찬” 시편을 위해 “부정적” 시편은 건너뛴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놓치게 된다. 칼뱅이 일깨우다시피, 시편에서 “성령께서는 비탄ㆍ슬픔ㆍ두려움ㆍ의심ㆍ소망ㆍ염려ㆍ혼란 등 간단히 말해 우리가 결코 들쑤시고 싶지 않은 모든 심란한 감정을 여기 우리의 삶에 다 끌어다 놓으셨”으니 말이다.

내가 보니 여러 기독교 라디오에서 “힘이 되는 성경 구절”을 간간이 섞어 “긍정적인 기독교의 명언”을 방송한다. 마찬가지로, 많은 교회들에서도 시편 기자의 레퍼토리 전체가 아니라 한정된 영역의 몇 가지 감정에만 호응한다. 기쁨과 격려는 멋지다. 하지만 시편에서 볼 수 있는 다른 감정들, 절망, 분노, 혼란, 고독은 어떤가?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6:6-7)라고 시편기자는 말한다.

그는 “긍정적이고 힘이 되는” 말에 관한 메모를 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색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시는 자기 연약함이 다 드러나는 절망을 표현하는 한편 지극히 인간적인 이 감정을 여호와 앞에 아뢰고 있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해부학적 구조에 있는 그 근육을 잘 사용하려면 다른 근육을 움직여서, 실망·고통·비탄 같은 반응을 언약의 주님 앞에 기도로 내놓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비교적 “부정적인” 정서를 제쳐 놓으면 기쁨과 감사가 소진될 수 있고 심지어 냉소적 태도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절망과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느낀 탓에 신앙에 아예 등을 돌려 버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분노와 신실하지 않은 분노

복음주의 진영 사람들이 애통해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은 것은 한 가지 깊은 염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는 게 과연 용인될 만한 일인가, 더 나아가 이것이 과연 신실한 행동인가 라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처럼 나도 하나님께 뭔가 이의를 제기하는 시편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기를 애써 기피하는 행동을 암묵적으로 배웠다. 짐작컨대, 기도의 본보기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전체 시편의 1/3 정도는 건너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여러 교파 목사들이 하나님께 화를 내는 건 죄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는 말도 들었다.

예를 들어, 존 파이퍼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 털어놓는 것은 신실한 행동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은 언제나 “죄 된 감정”이라고 말한다. 이유가 뭔가? 분노는 언제나 죄 있는, 잘못을 저지르는 자만을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내는 화는 언제나 강한 비난의 의미를 함축한다. 당신이 나에게 화를 낸다면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뭔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완전하다. 설령 욥의 경우처럼 사탄이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 해도 말이다.

이와 같이 파이퍼는 하나님께 화를 내는 건 결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일을 못마땅해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파이퍼의 주장은 반만 맞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분노는 두 가지의 주요 궤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분노는 하나의 출구로 이어진다. 곧,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고 다른 신을 섬기는 길로 나가게 된다.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는 긴 여정에서 여러 번 “불평을 터뜨린” 사례를 보여 준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인 이들에게 하신 약속에 등을 돌렸다. 이들은 조급해 하고 화를 내면서 모세를 심히 꾸짖고 심지어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예배하기까지 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자기 연민에 빠져들거나 여호와 아닌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식으로 하나님께 화를 낸다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 파이퍼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주요한 궤적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은 불평과 분노와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항의를 신실하게 표출하는 하나의 길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이 접근법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의 주님께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향해 나간다. 실제로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표현할 때마다 시편기자는 기도로, 여호와와 교제하면서 그렇게 한다. 비록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에 못마땅함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말이다.

시편기자는 언약에 근거한 교제의 공간을 떠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라고 불평할 때도 하나님을 악의 있는 분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시편은 연인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가버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아뢴다. 신이라면 당연히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행동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우리 나름의 관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우리가 여호와에게서 받은 언약적 결혼 약속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늘 기억할 것이며 그 백성에게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신다. 하지만 시편기자가 겪고 있는 불행 속에서는 그 약속이 결실을 맺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기자와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 다시 일깨워 드리라는 권유를 받는다. 하나님은 당신께 부르짖는 이들을 도우시지 않는가? 믿음으로 살다 보면 이 점에 의문이 생기는 것 같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88:13–14).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깊은 믿음 때문이다.

이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배우자나 친한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배우자나 친구에게 화가 날 때 밖에 나가 다른 친구에게 그 감정을 발산해야 하는가?

배우자나 친구와의 관계가 건강하다면, 바라건대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 직접, 터놓고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깊고 튼튼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언약적 사귐의 관계에서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우리가 당신께 화가 날 때 밖으로 나가버리지 않고, 약속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으며, 당신께 불평하기를, 심지어 항변하기를 바라신다. 이는 배짱이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 곧 신뢰가 요구되는 일이다.

 

신실한 불평

최근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분노를 드러내는 게 “근거가 있는” 행동이라는 이유로 이를 옹호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는 소셜 미디어나 기타 여론이 모이는 곳에서 하나의 미덕으로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 “근거 있는” 불평이라는 게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내어 놓는 행위가 아니라 단순히 감정 발산을 말하는 듯할 때가 많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 분노를 표현하거나 하나님께 뭔가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것을 늘 신실치 못함의 증표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

어느 쪽도 완전히 성경적인 길은 아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시편기자와 한 목소리로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기도 가운데 예리한 질문을 하신 것이지만, 이는 깊은 신뢰의 행위이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이 항의 질문이 하나님의 엄위를 훼손하리라는 두려움에 지배되지 않으셨다. 또한 예수께서 이런 표현을 쓴 것은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배출”해서 없애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참 파트너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기도를 친히 하신 것이다. 신뢰하며 하나님을 바라는, 외롭고 참담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기도를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도 거리낌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기분이 들 때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 약속하신 분을 향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지금도 부르짖을 수 있고, 마땅히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는 홀로 기도하지 않고, 성부의 양자養子로서 성령으로써 “속으로 탄식”한다(롬8:23). 우리가 성부께 부르짖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이르기를 소망하고 기도하며 간절히 바라신다.

건강 검진을 위해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간 부모가 아이 몸의 1/3은 무시해도 된다고 의사에게 주장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아이 몸의 1/3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능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아이의 건강을 위한, 성숙한 몸으로 자라게 하기 위한 처방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과 관련해, 우리의 정서 생활과 관련해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이 땅에서 일하실 때의 예수와 달리 많은 이들이 시편의 1/3은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신실한 기도를 정당하게 표현하고 있는 상당 수 시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자로서의 삶이 성장 부진 상태에 있는데도 이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더 좋은 길이, 우리가 받아야 할 좋은 처방이 있다. 우리 언약의 주님께서는 고백과 감사와 찬양에 더하여 절망과 분노와 두려움과 원한까지 다 당신 앞에 가져와 털어 놓으라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사랑의 주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붙들고 씨름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신뢰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시편기자와 함께 기뻐하고, 애통해 하고, 무수한 방식으로 주님께 울부짖을 필요가 있다. CT

 


J. 토드 빌링스 웨스턴 신학교 고든 지로드Gordon H. Girod 개혁신학 연구 교수. 최신 저서로 Remembrance, Communion, and Hope: Rediscovering the Gospel at the Lord’s Table (기억, 성찬, 그리고 소망: 주님의 만찬에서 복음 을 재발견하기, Eerdmans)이 있다.

J. Todd Billings, “Can Anger at God Be Righteous” CT 2019:1/2; CTK 2019: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