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후회하고 진노하는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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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후회하고 진노하는 분이신가?
  • 김지찬
  • 승인 20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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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홍수의 하나님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대부분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심판의 하나님을 떠올린다. 40일간 물 폭탄을 퍼부어 자신이 창조한 모든 인간을 호흡하는 모든 생물과 함께 진멸한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연히 격노한 심판주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따라서 노아 홍수의 해석사를 살펴보면 노아의 하나님은 주로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해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살아나 「흑야」Night라는 자서전을 비롯해 57권의 저술을 남겼고 1986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엘리 위젤Elie Wiesel(1928-2016)은 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1막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자 2막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종료해버린 극작가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계획하여 창조한 세상의 서막이 열리자마자 바로 종료를 선언한 감독과 같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노아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면 주로 홍수 심판을 떠올릴 뿐, 노아의 무지개 언약을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창6:5-7) 하셨다는 점을 주로 기억할 뿐,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8:21)라고 맹세한 부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노아 홍수 내러티브에는 ‘진노’와 관련된 단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과연 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세상을 멸하셨는가? 노아 홍수 스토리를 대강 읽으면 하나님이 심히 진노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노아 홍수 내러티브에는 ‘진노’란 단어는 물론 ‘진노와 관련된 어떤 단어’도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킬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명사가 ‘아프’나 ‘헤마’인데, 이 두 단어가 노아 스토리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진노의 개념을 가진 그 어떤 명사도 사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진노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가장 흔한 동사인 ‘아나프’나 ‘하라’ 동사도 사용되지 않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에서 진노에 관한 명사는 10개이고, 하나님을 주어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는 동사는 6개인데 노아 홍수 스토리에는 이런 단어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우연이 아니다. 노아 홍수 스토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감정에서 나온 심판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감정에서 일으키신 사건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 본문을 상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대강 읽은 다음에 느낀 감정이나 이전의 해석들에서 나오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충 해석해서는 안 된다. 먼저 성경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 보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나함)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나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5-8)

 

위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진노하신 것이 아니라, ‘한탄하사’라고 되어 있다. 특별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홍수 심판을 일으키실 때 하나님의 정서적 감정은 ‘진노’가 아니라 ‘한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니 대체 무슨 의미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한탄하다’는 “원통하거나 뉘우치는 일이 있을 때 한숨을 쉬며 탄식하다”로 정의되어 있다. ‘한탄하다’는 한글의 의미가 ‘원망하다’ ‘뉘우치다’ ‘한숨 쉬다’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고 원망하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최근의 한글 번역본들(새번역, 바른성경, 쉬운성경)은 모두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영어 번역본들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 ‘후회하는’regret(ESV; NIV) 아니면 ‘뉘우치는’repent(KJV) 아니면 ‘미안하게 생각하는’sorry(RSV) 등으로 번역했다.

 

노아의 하나님은 후회하고 한탄하는 분이신가? 

과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셨음을 ‘후회/한탄하고 뉘우치신’ 것인가? 이렇게 많은 성경 번역본들이 하나님이 ‘후회하신다’(한탄하신다)는 식으로 번역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원문이 ‘마음을 바꾸다’는 뜻을 일차적 의미로 가지고 있는 동사(나함)를 사용한데다가, 문맥상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한탄/후회하시는’ 하나님은 ‘진노함으로 무자비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한탄/후회하시는 하나님’이란 개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한탄하다’는 단어가 “원통하거나 뉘우치는 일이 있을 때 한숨을 쉬며 탄식하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과연 뉘우치며 한숨 쉬고 탄식하는 분이신가?

이 질문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존 월튼이 「창세기: NIV 적용주석」에서 한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알게 된다.

 

하나님이 탄식하는 모습은 분노하시는 모습보다 훨씬 바람직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상당한 난제를 제공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일부 번역본들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일을 후회했다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다(예, NKJV). 만약 우리가 어떤 일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면, 논리적으로 우리는 당연히 그 일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슬픔을 통해 우리는 문제가 되고 있는 그 행동을 결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대개 표현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거나, 반성하신다거나, 마음을 바꿔 먹었다는 식의 용어를 사용하는 본문들은 신학적인 혼란과 당황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왔다.

 

노아 홍수를 일으킨 하나님의 주요 정조는 ‘분노’나 ‘진노’가 아니라 ‘후회’와 ‘한탄’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탄하신다/후회하신다’는 표현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일부 전통적인 학자들은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시지만, 단지 하나님의 행동을 의인화해서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사용해 ‘후회하신 것’처럼 표현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접근이 그동안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에서 지금까지 주로 사용한 방식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성경 본문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록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도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하면 도대체 이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내야 한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시지만, 단지 하나님의 행동을 의인화해서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사용해 ‘후회하신 것’처럼 표현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성경의 메시지를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후회하셨다’로 번역된 원문의 단어가 과연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최선인지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한다. 원어가 후회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달리 번역해야 오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후회하시는가’란 질문에 답을 하려면 앞서 살핀 대로 한글개역성경에서 ‘한탄하다’ ‘후회하다’로 번역된 ‘나함’ 동사의 사전적 의미와 용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댈러스 신학교 교수인 로버트 치숌이 ‘나함’의 용례를 잘 연구해 놓았다.

그는 하나님을 주어로 ‘나함’ 동사가 사용되었을 때에 그 기본 의미는 “마음을 바꾸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함 동사는 하나님이 전형적으로typically 마음을 바꾸시는 데(렘18:5-10; 욜2:13; 욘4:2) 사용되거나,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장면을 묘사하거나(출32:14; 암7:3, 6; 욘3:10), 최소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 수 있는 가능성might을 언급하는 데(렘26:3; 욜2:14; 욘3:9) 사용되고 있다(강조는 의역한 후 필자가 첨가).

 

후회한다고 번역된 동사 나함의 기본 의미가 ‘뜻을 돌이키다’ ‘마음을 바꾸다’라고 한다면, 문제의 관건은 ‘하나님은 변하시는가?’ 아니면 ‘변하지 않으시는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별 고민 없이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라고 기본적으로 전제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불변하시므로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민수기 23:19의 말씀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나함)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런데 문제는 노아 홍수 스토리에서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한탄하다’ ‘후회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나함’ 동사인데, 민수기 23:19에서도 동일한 ‘나함’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후회가 없으시다고 했는데 홍수 스토리에서는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했기에 서로 상충되고 있다. 그렇다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문제는 단지 위에서 언급된 두 본문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같은 ‘나함’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어떤 성경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 반면에, 다른 성경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실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 곳이 여럿 있다. 그 중에 한 예를 들어보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나함) 않으심이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15:29)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나함)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 3:10)

 

사무엘서 기자는 하나님은 결코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고 선언한 반면에 요나서 기자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거두어들이셨다고 말하는데, 두 본문 모두에 동일한 ‘나함’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신가? 아니면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불변하시는 분이신가?”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후회하는 분이신가?”
 

‘작정’과는 달리 ‘섭리’의 영역에서는 마음을 바꾸신다

치숌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가?”란 질문에 대해 ‘작정’decree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이 뜻을 바꾸지 않으시지만 ‘섭리’providence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은 뜻을 바꾸신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를 선포한 후에 인간의 반응에 따라 마음을 바꾸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치숌은 하나님의 ‘작정’은 무조건적 선언으로서 듣는 인간들의 반응과 상관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지 않는다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섭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조건적 의도를 전하므로 인간들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고 할 때에는 ‘작정’과 관련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또는 변덕에 의해 또는 자신의 일을 후회하면서 마음을 바꾸시는가?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이유를 살펴보면 성경 어디에서도 ‘자의적으로’ 변덕 때문에 그러신 적이 없다. 게다가 자신이 앞서 한 일을 ‘후회하시면서’ 마음을 바꾸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유일한 이유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요엘서와 요나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요엘서부터 살펴보자. 요엘 시대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의 징조로서 거대한 메뚜기 떼 재앙과 가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청하면서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마음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나함)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나함)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요엘 2:13-14)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면서 여호와께서 혹시 마음을 돌이키실지 모른다는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의 성품이었다. 하나님께서 ‘섭리’의 영역에서 마음을 돌이키시는 경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뿐이다. 하나님은 변덕스럽거나 자의적이거나 툭 하면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나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고 선언하자, 왕이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리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왕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나함)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실 수 있다는 근거에서였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3:4)는 선언은 겉으로 보기에는 작정 같지만, 실제로는 ‘회개하지 않으면’이란 조건이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왕이 회개하라고 조서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개의 반응에 뜻을 돌이키셨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나함)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요나 3:10)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이유가 무엇인가? 요나의 기도 속에 답이 들어 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나함)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요나 4:2)

요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므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이란 불변의 성품 때문이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은 요나에게 처음 주어진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애굽기 34:6-7에 이미 드러나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은 죄를 범하면 아버지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보응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선을 행하실 수 없으시다. 따라서 인간들이 악을 행하면 선을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나함).”(예레미아 18:10)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이유 

결국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도 불변이다. 따라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으시기에 백성들이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섭리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뜻을 돌이키고 마음을 바꾸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종종 자신의 뜻을 바꾸신다고 해도,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하심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탁월한 개혁주의 구약학자인 브루스 월키는 그의 Genesis: A Commentary(창세기 주석)에서 이렇게 해설한다.

 

홍수 때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는 그분의 변치 않는 성품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변덕스럽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민23:19; 삼상15:19). 하나님께서는 항상 인간의 반응에 따라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시려는 원래의 의도를 재고려하시기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거나 뜻을 돌이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 사랑과 은혜와 인자하심과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성품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한탄하셨다.’거나 ‘후회하셨다.’는 식으로 창세기 6:6을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한탄이나 후회’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말고 그냥 중립적으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월튼은 ‘나함’ 동사는 후회 등과는 아무 상관없는 상황 교정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단어를 회계 용어로 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기에서 원장부들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 즉 차변 기입액과 대변 기입액이 똑같아야 한다. 만약 그 장부들이 대차가 맞지 않다면 무언가를 조정해야 한다. 거래가 있을 때마다 거기에 맞춰 기입도 정확히 이루어져야 한다. 나함의 니팔형(수동형-필자 첨가)은 개인적 국가적 혹은 우주적 원장부들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처벌의 과정을 정하실 때, 이따금씩 대사면을 통해 처벌을 취소하시고 ‘원장부’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으심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렘26:13; 욘3:9-10). 사람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또 자신들의 악함으로 장차 도래하게 될 불균형의 결과들에 대하여 경고를 받았는데도 회개하여 원장부의 균형을 회복하기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렘8:6). 하나님은 그 원장부에 악이 적혀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와 자비로(욜2:13; 욘4:2) 혹은 처벌로(렘18:10) 그 원장부의 균형을 맞추시는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다.
 

홍수는 ‘진노’가 아닌 하나님의 ‘근심’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 학자의 주장에 상당한 일리가 있음을 볼 수 있지만, ‘나함’이란 동사에 슬픔이나 유감 같은 감정이나 정서가 내포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하나님이 근심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함 동사가 단순히 어떤 감정도 없이 단지 ‘마음을 바꾸다’ 혹은 ‘뜻을 돌이키다’란 기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치숌은 구약 성경에서 ‘나함’이 사용된 최소 아홉 구절(창6:6-7; 출13:17; 삿21:6, 15; 삼상15:11; 욥42:6; 렘31:19)에서는 “정서적인 고통이나 약함을 경험하다”란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통을 느끼고 마음을 바꾸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치숌은 창세기 6:6의 ‘나함’이 이런 용례로 쓰인 것으로 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함에 대하여 ‘진노’의 감정보다는 ‘고통’의 감정을 더 많이 느끼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홍수로 멸하신 것은 분노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 가운데 심각한 통증을 경험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 후회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구약 성경 기자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 아니라 근심하셨다고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에 고통을 느끼신 것이다.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통증을 느끼신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이 지적한 대로, 노아 홍수 이야기는 그저 무지비한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마음과 마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마음’이란 용어인 ‘레브’가 한 번은 ‘인간 편의 마음의 악’을 가리킬 때, 한 번은 ‘하나님 편의 마음의 근심’을 가리킬 때 사용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레브)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그의] 마음(레브)에 근심하시고.”(창세기 6:5-6)

인간의 ‘마음’(레브)과 하나님의 ‘마음’(레브)이 부딪힌 것이다.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 생긴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통증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할 만큼 마음이 아프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모든 피조물을 진멸하기로 결정하실 정도로 마음에 큰 고통을 느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정의 주조는 ‘진노와 분노’가 아니라 ‘근심과 고통’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창6:7) 쓸어버리겠다고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의 통증은 그 주요 정서가 분노나 진노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느끼시는 마음의 통증은 ‘근심’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후회하시는 분도, 진노로 세상을 진멸하는 분도 아니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닌가! 노아 홍수 스토리를 깊이 살펴보기 전에는 필자도 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심판주’라고 주로 생각했다. 그러나 노아의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근심하시는 분이셨다. 하나님의 주요 정조는 분노가 아니라 근심이었다. 노아의 하나님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한탄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사악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근심하시는 분이셨다.

한마디로 악행에 처벌로 기계적으로 보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레브)에 ‘마음’(레브)으로 응답하는 분이셨다. 우리는 노아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 진노하심으로 진멸하는 무지막지한 심판주가 아니라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독일의 탁월한 기독교 윤리학자이자 설교자인 헬무트 틸리케의 설교를 들으면 가슴이 울린다.

 

후회하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며 또한 그의 파산지경에 이른 작품(역사)을 단지 없애버리려 대홍수를 일으켜 그것들을 거기에 던져버린 하나님은 도대체 어떠한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에 그 나름대로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무죄한 나무들과 꽃들, 동물들을 멸절시켰으니 이게 웬 말인가요? 우리는 여기에서 골고다, 즉 하나님께서 고통당하시고 무기력하고 ‘신과 같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골고다에서의 이상한 파멸에 대한 서곡을 보지 않습니까?

 

헬무트 틸리케는 노아 홍수에서 “갈보리 산상에서 절정에 달했던 하나님의 고난의 시작”을 본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노아의 하나님이 갈보리의 하나님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풍요와 에너지와 지식을 가지고 인간들이 남용하고 악용하며 오용하는 것을 보고는 고통하지 않으실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아의 하나님에서 갈보리 언덕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복음은 구약과 신약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메시지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노아 홍수의 가장 큰 신학적 메시지가 아닌가! 그 어떤 대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다면 희망이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선포해야 할 새로운 소식, 복음이 되어야 한다. 노아의 하나님은 무자비한 복수의 심판주가 아니라, 우리로 인해 마음에 고통당하시며 끝내 자신의 분노를 이겨내시고 근심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 CTK 2019:5

김지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데칼로그」(생명의말씀사, 2016)‧「룻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생명의말씀사, 2018) 등의 저자. 이 글의 그의 신간 「너와 네 하나님은 방주로 들어가라: 노아 언약의 신학적 이해」(생명의말씀사, 2019)의 2장 “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후회하고 진노하는 분이신가?”의 일부를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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