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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목회를 하시는가?”
홍승영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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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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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가지

 

   
 

“토목 목회를 하시는가?”

어르신들을 모시고 제주도에 다녀왔다던 그 친구 목사가 놀렸다(2018년 5월호 ‘요셉의 가지’). 32년 전에 지은 교회 건물을 조금씩 수리했는데, 마치 정기적으로 공사를 벌이는 것처럼 보여 “토목 목회”라 놀린 것이다. 상담 목회, 교육 목회보다 능력 있는 것이 토목 목회라고 너스레다. 속사정을 모를 리 없는 친구가 사실은 놀리는 척 위로하는 말이었다. 공사를 시작하면 피할 수 없는 어수선함과 먼지를 누구나 불편해 하겠지만, 나는 좀 더 심한 편이다. 어릴 적 외딴 시골 마을에서 살았는데 시간 반을 걸어가야 하던 등굣길은 좁은 비포장 도로였다. 드물게 멀리서 지나가는 차가 보이면 길 가에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산비탈로 도망갔다. 누런 황토흙먼지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나인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팔년 동안 네 번의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교육관까지 하면 여섯 번이었다. 토목 목회라 해도 할 말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공사가 체질인 것은 아니었다.

스물 남짓하게 모이는 어린이들의 예배 처소가 식당을 겸하는 곳이었다. 벽에는 보육시설로 사용하느라 오래전에 그렸던 백설 공주 그림이 시커멓게 남아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아이들이 시커먼 백설 공주를 무서워했다. 식사 준비를 시작하면 선생님의 설교 소리에 냄비 부딪히는 소리가 추임새였다. 주방도 너무 작았다. 해결 방안이 필요했다. 주방을 확장하고 정비하되 소음을 줄이고 깔끔하게 개선하는 아이디어를 동네 카페에서 상담하다가 얻었다. 펼치면 벽처럼 서는 접이식 문(폴딩 도어)을 사용하면 바깥 소리가 효과적으로 차단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주방과 교육관(식사 공간)을 접이식 문으로 구분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한동안 아는 사역자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던 접이식 주방 벽이 되었다. 부임하고 첫해에 있었던 건물 2층의 공사였다. 그로부터 이년이 더 지나니 성도가 늘어 공간이 더 필요했다. 오랫동안 절반은 방치되어 있었던 3층 공간을 되살리기로 했다. 한층 전체를 터서 50평 정도의 공간을 다시 일곱 개로 구분하고 화장실을 설치했다. 두 번째 공사였다.

그리고 또 이삼년 지나니 아이들을 위한 곳과 성도들이 교제할 장소가 절실했다. 그래서 옥상을 정원으로 꾸미고 1층에 카페를 열었다. 우리 교회는 지역 네거리 모퉁이에 있는데 맞은편은 학교와 공공시설들이라서 해가 지면 네거리가 컴컴했다. 지나가는 길을 밝히는 마음으로 시작한 카페였는데 소망했던 대로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삼사십 대를 넘은 중년들이 찾는 카페가 된 것이다. 젊은이들이 가기 좋은 카페는 많으니 중년들을 배려하는 공간이 되게 하자 했다. 노안이라도 서럽지 않게 조명을 밝혔고 공간도 답답하지 않게 터놓았다. 열 사람 쯤 들어갈 세미나 룸도 두 개 만들었다. 요즘 카페의 오후엔 내 또래 되어 보이는 중년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세 번째 공사까지 진행하면서 먼지를 유난히 싫어하던 나는 먼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얻었다. 아무리 봐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는 일을 더 시키시는 것 같다. 극복할 능력을 얻을 때까지….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웠던 숙제는 지하에 있는 본당 공사였다. 32년 전 처음 교회 건축을 시작할 때 대부분의 성도가 가난했다. 이백 명 남짓한 성도들은 네 층짜리지만 작은 건물을 짓기에도 힘겨웠다. 좁은 땅에 세우는 건물이라 대지 전체 크기로 지을 수 있는 지하의 본당이 꼭 필요했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면서도 저녁밥을 먹은 후엔 건축 현장으로 와 삽으로 흙을 퍼 날라 한 삽만큼의 비용이라도 줄이려 했다. 그러다보니 본당임에도 높이가 나지막하다. 깊이 파기에는 돈도 힘도 부족했다. 오래전에 어렵게 세운 건물이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본당은 새 단장의 필요가 시급했다. 손을 보아야 할 것이 많았다.

부족한 듯한 우리 교회 본당을 볼 때마다 나는 누구나 열 달을 살아야 하는 어머니의 집이 생각났다. 우리 교회 본당은 모태와 같은 곳이다. 중학생 때에 남녀의 몸에 대해 배우면서 선생님은 오른 주먹을 배꼽 아래에 대어 보라고 했다. 그 만큼이 자궁이며 그렇게 작은 곳에서 아기집이 시작된다는 말에 경이감을 느꼈다. 우리 교회 본당은 어머니의 태처럼 낮고 작다. 그 작은 곳에 기둥이 네 개나 줄지어 있어서 시야를 많이 가린다. 하지만 성도들이 흘린 눈물의 사랑과 헌신이 깃든 곳이다. 그 피곤한 밤에 땅을 파며 흘린 눈물은 고통이 아니라 감격으로 흘린 것이었다. 울며 씨를 뿌리듯 땅을 파며 기도했다. 그 본당에 들어앉은 아이며 어른들에게 종종 말했다. “사랑과 헌신이 있는 곳에서 예배하는 것은 영광이며 은총”이라고,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있는 모태와 같은 예배당”이라고! 그 헌신의 아름다움이 느껴져 마음에 은총이 피어날 때는 벽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교회를 개척하려 하는데 돈이 없어서 못 한다는 후배 이야기를 듣고 꿀밤을 주었던 적이 있다. 그 때는 나도 개척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비슷한 형편끼리 나눈 대화였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주먹이 올라갔다. ‘기도가 부족하고 준비가 부족하여 개척하지 못하는 거겠지!’ 기도를 하더라도 재정은 필요하다는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다른 것은 다 준비 되었는데 딱 한 가지 돈만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개척 준비가 다 되었고 시작만 하면 좋은 교회를 이룰 준비가 완벽한데도 재정이 없어 개척을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믿는 신앙이 틀린 것이겠다. 울며 씨를 뿌렸는데 열매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나의 하나님께서…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빌립보서 4:19) 이 말씀을 그분의 교회에서부터 허언으로 만드신 셈이니 말이다. 정말 완벽히 준비된 사람인데 돈 때문에 더는 공부를 못한다거나 일을 시작하지 못한다는 말에 나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아직 더 준비할 내용이 있고 일을 더 배울 수도 있지 않은가? 더 성경을 읽고 더 전도를 할 수 있지 않은가? 45년 전의 우리 교회는 그렇게 몇 사람이 시작해서 가난한 중에 교회를 짓는다는 감격으로 모였고 지금도 예배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이제 중년이 된 예배당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새 단장을 해야 했지만 공사 기간 동안 예배드릴 처소가 마땅치 않은 것이 문제였다. 어떤 식으로든 장소를 찾아볼 수야 있겠지만 우리는 좀 더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년 가까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일을 주셨다. 후배 목사 한 분이 몇 년 전부터 우리 교회 근처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한 강당을 임대해서 예배하고 있었다. 우연히 우리 교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는 공사를 하는 동안 함께 예배하자고 제안해 주었다. 창립한 지 50년이 되어가는 교회가 네 살 된 교회에 얹혀 예배하는 일이 미안했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구했다. 아름다운 믿음은 성도들의 것이었고 목회자들은 걱정이 앞섰다. 두 교회의 성도들은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이면 참 좋은 연합이겠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다른 교회 성도들끼리 여러 주 동안 만나면 싸움이 난다”거나 “그렇게 하면 헌금 관리가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등의 실제적인 측면을 말했다. 심지어 “교인 뺏긴다”는 경고를 농담에 섞어 내놓았다. 성도를 빼앗는 것은 마귀일 텐데 교회가 연합하면 마귀가 쳐들어오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에게 마귀가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주적 교회의 연합이 목사들에게는 책 속의 신조였을까? 우리는 성도의 아름다운 믿음을 기뻐하며 연합예배를 시작했다. 우리는 두 교회의 동역을 “아름다운 동행”이라 불렀다.

연합예배가 결정되자 설계할 회사와 시공할 회사가 순식간에 정해졌다. 당시에도 수백억 원 규모의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회사가 리모델링 수준의 작은 공사를 흔쾌히 맡아준 것이다. 시공회사는 면밀히 준비하고 집중해서 공사 기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교회가 필요한 부분을 적절하게 반영하여 아담하고 유용한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딱 맞는 성구도 준비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또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십년을 안식년도 없이 열대의 선교지에서 뜨겁게 사역해 온 73세의 파송 선교사님도 때마침 귀국해서 건축 실무를 총괄했다. 이렇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는 선한 목적지를 향해 예술적으로 구성되는 법이다.

공사 초기에 정서적인 고통이 찾아왔다. 낡은 의자와 성구들이 내던져지고 내장재들이 뜯겨 나가는 것을 보는 일이 힘들었다. 새롭게 꾸미려면 이전 것을 부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아찔했다. 저것들은 모두 어려운 때에 바친 눈물의 헌신으로 꾸민 것들이 아닌가? 이렇게 버려지는 것은 낭비 같았다. 소중한 사랑을 이용해 먹고 버리는 속물 같아 괴로웠다. 두 주가 지나고 침침한 콘크리트 맨살을 드러낸 지하층에는 지금까지 예배드리던 일체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합판 뒤에 가려져 있던 지하 계단 벽에도 또 하나의 백설 공주 그림이 시커멓게 남아 있었다. 인부들이 돌아간 후에 먼지 쌓인 지하에 서서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슴이 먹먹하니 안쓰러웠다. 하지만 교회의 어르신들은 담대했다.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그동안의 역사를 이루어온 분들이었다. 모든 헌신들도 지나가는 법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잘 쓰임 받았고 이제는 소망을 보아야 한다고 목사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정말 그랬다. 그 껍질 벗은 예배당은 번제물로 태워지기 위해 벗겨진 짐승 마냥 드렸고 쓰임 받은 결과물이었다.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에 기대하지도 못했던 예술 작품들이 걸렸을 때,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던 어떤 이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했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그런 예술품을 이해도 못할 텐데 거기 두는 것은 아까운 낭비라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별로 역정 내시는 일이 없던 홍정길 목사님은 그 말에는 크게 화를 내셨다. “우리 아이들도 아름다운 것을 잘 압니다. 이십년 동안 예술품 망가트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정말 그랬다. 오히려 책상까지 쌓아 놓고 한 사람의 인생 같은 작품을 훼손했던 사람은 비장애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작품도 낭비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그 곳에서 작품과 함께 살아갈 뿐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작품들은 학교를 보고 감동 받은 작가들이 기증한 것들이었다. 홍 목사님은 연이어 말씀하셨다. “낭비는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그렇게 귀한 주님의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야 말로 말도 안 되는 낭비입니다. 낭비는 주님이 하셨습니다.”

낭비와 헌신을 구분하는 것은 ‘유용성’이 아니라 ‘사랑의 크기’다. 예술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사람이 작품을 훼손했던 것은 자신에게 유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이다. 아벨이 믿음의 예물을 드린 것, 노아가 자기 식구들에게 과도하게 큰 방주를 준비한 것, 다윗이 구경조차 못할 성전 건축을 준비한 것,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트린 것, 모두 유용성을 따지지 않은 사랑으로 한 일이었다. 성경은 그 사랑을 믿음이라 불렀다. 결과적으로는 가장 유용한 일이 되었다. 다윗의 성전은 흔적조차 없고 여인의 향유는 하늘에 흩어졌지만 모두 예수님의 사역으로 완성된 현재의 구원이 되었다. 우리 교회에 과거의 건축이 없었다면 현재의 예배도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성도의 헌신된 삶은 흩어지는 낭비가 아니라 태워진 제물이다.

두 달 동안 가까운 두 교회를 오가며 동행한 연합예배는 이제 끝이 났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두 교회 성도의 사랑은 깊었다. 새신자도 늘었다. 그 기간 동안 소그룹 인도자들이 집중교육을 받았고, 몇 사람은 세례를 받았다. 또한 교회를 다녀본 적도 없는 프로 골퍼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주님만 바라보는 연합에 마귀는 오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더 좋은 열매를 기대하고 있다. 새로 단장된 예배당이나 그로 인해 생긴 몇 가지 좋은 일들과 비교할 수 없는 헌신의 열매, 하나님을 사랑한 일의 결과를 생각하며 들뜬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CTK 2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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