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성 베네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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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성 베네딕트
  • 정지영
  • 승인 20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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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정지영의 너 잘 만났다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자기 낙태’ 및 ‘동의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형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란 법 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만 즉시 효력을 상실시킬 경우 자칫 생길 수 있는 사회적 혼란 때문에 법 개정에 시한을 두는 조치다. 이에 국회는 내년까지 낙태죄 관련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우리 사회도 이제 낙태 합법화 시대에 진입했다.

헌재의 이 같은 판결을 두고 어떤 이들은 환호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어쩌다 우리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나!”하며 한탄할 것이다. 이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으나 우리 교회 대부분은 여전히 프로 라이프Pro-Life를 지지하는 후자에 속한다.

이들에게 헌재의 결정을 비롯해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 운동, 이 나라의 사회와 문화, 정치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미 의식의 증가와 반공 정신의 쇠퇴 같은 일련의 흐름은 우리 사회에 상당 기간 진행되어 온 세속화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비춰질 것이다. 실제로 대표적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을 비롯해 주요 교단은 이와 관련해 대사회적 시위를 포함해 어떤 식으로든 이런 흐름에 저항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성장을 한 이 나라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에 출간된 「베네딕트 옵션」은 이런 상황에 처한 한국 교회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줄 책이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이자 미국 내 주요 오피니언 리더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 책을 두고 “지난 10년 동안 나온 책 중 가장 논쟁적이고도 중요한 종교 서적”이라고 평했고, 책은 출간되자마자 정치계, 종교계를 막론하고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종교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뉴욕 타임스〉와 아마존에서 단숨에 그러면서도 상당 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저자는 “기독교 신앙이 서구 문명 속에서 죽어 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이 위기 상황을 노아 홍수에 비유한다. 물론 이 비극은 우리 시대에 갑자기 도래한 것이 아니다. 2천년 서구 지성사를 자세히 살펴본 그는 이 위기가 지난 7백 년에 걸친 결과라고 평가한다. 14세기, 하나님과 우주 만물을 연결하던 기독교 신앙의 상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인한 종교적 통일성과 종교적 권위의 붕괴, 18세기, 종교의 위치와 권위를 이성으로 대체시키며 기독교를 사적 영역으로 축소시킨 계몽주의, 18세기 중엽과 19세기 초 일어난 산업혁명,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성장한 자본주의, 20세기 중반 이후 일어나 지금까지 이어지는 성혁명이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기독교의 위기를 가져왔고, 기독교 진보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비극은 기독교 좌파의 정치적 참여나 기독교 우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해소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믿는다. 이는 증상을 치료하는 것일 뿐 병의 근본적 문제에 대한 치료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이 비극을 극복할 시나리오, 질병을 치료할 궁극적 치유책은 오직 ‘수도원 영성’에 있다. 우리는 이 성경적, 기독교적 영성의 모델을 6세기 베네딕투스와 그가 일으킨 수도원 운동에서 얻을 수 있다. 질서, 기도, 노동, 금욕, 안정, 공동체, 환대, 균형을 강조하고 실천한 베네딕투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고 이를 우리 가정과 교회, 지역 사회에 적용하는 것만이 기독교와 세상이 살 길임을 확신하며 저자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저자의 이런 신령한 결론은 그저 깊은 기도나 성경 읽기 같은 신앙적 통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A. 맥킨타이어의 덕 윤리라는 사상과 여러 사회학자들의 문화 비평 작업에 근거한 것이다. 비슷한 주장을 하는 빤한 책들과 비교불가하단 얘기다.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교회 역사에 여러 기독교적 문화관이 있어 왔음을 말하며 이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 유형에 따르면, 로드 드레허의 「베네딕트 옵션」은 기독교는 세상 문화와 배타적 관계에 있다는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과 기독교는 이 세상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유형 사이 어디엔가 위치하는 듯하다. 또는 재세례파와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론, 제임스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 기획의 변형인 듯하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카이퍼, 쉐퍼로 대표되며 문화의 성화를 말해온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 유형이 복음주의권에서 상당 기간 주류를 형성해왔던 상황에서 교회의 교회됨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은 많은 진보주의와 복음주의,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도발적이면서도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는 것이다.

“재기발랄하고 예언자적이며 현명하다.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여기엔 들어야 할 경고와 실천해야 할 습관이 담겨 있다”는 새로운 칼빈주의 운동의 중요 리더 러셀 무어의 말마따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는 이 화제작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낙태가 합법화되고 있고 동성혼도 곧 법적으로 합법화될 우리 상황에서 교회는 더 이상 광장이나 국회 앞에 나가 목청을 높여 피켓을 들 것이 아니라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 무릎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상기시켜 줄 것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IVP가 최근 출간한 카일 베이비드 베넷의 「사랑 연습」은 비슷한 맥락에서 수도원 전통이 강조해왔던 공동체 중심, 기도와 노동이 통합된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발견한다. 책에서 저자는 창조 세계에서 예수님이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이 한 뼘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확신을 삶으로 영위하는 법을 보여 준다. 저자는 영성 훈련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삶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연습으로 이해한다. 그동안 개인 경건 및 영성을 함양하는 것 중심이었던 우리의 영성에 대한 관심은 개인주의에 함몰된 잘못된 신앙에 토대를 둔 것으로 시급하게 시정되어야 할 분야다. 기독교 영성 훈련은 일상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특별한 연습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대안적 방식으로 성부를 영화롭게 하고 성자에게서 배우며 성령을 따르는 경건 연습이다.

「사랑 연습」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 그레고리우스 같은 교부들, 아브라함 카이퍼와 쇠얀 키르케고어,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마우 등 신앙과 신학적으로 상충할 것 같은 이들의 영성과 경건을 유기적으로 통합해 성령 안에서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세상에서 나와 수도원 영성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변혁시키라는 「베네딕트 옵션」의 전략과, 경건 훈련은 개인의 신앙 성숙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사랑 연습임을 보여 주는 「사랑 연습」을 우리는 로버트 웨버가 말해 왔던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의 실천 편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CTK 2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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