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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김지찬, 김은홍  |  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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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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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저자 인터뷰 |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의 김지찬

 

 

   
 

 

 

 

 

 

 

 

 

톰새디악 감독의 2007년 영화 에반 올마이티,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2014년 영화 노아,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이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 제목이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다). 김지찬 교수는 미켈란젤로의 노아의 홍수 테마를 포함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천지창조와 함께, 이 세 편의 영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정통 구약학자인 김 교수는 왜 성경 밖의 노아 ‘해석’에 눈길을 준 것일까?

지난 4월 9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교 양지 캠퍼스에서 김지찬 교수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를 함께 이야기하는 “북 토크”를 열었다.

총신 신대원 구약학회와 CTK가 함께 마련한 이 자리에서 김 교수가 영상으로 보여준 한 편의 명화와 세 편의 영화는, ‘신학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때로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과 해석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때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였다. 물론 예술가나 영화감독 같은 이들의 ‘의도하지 않는 해석학적 기여’는 그들의 해석을 읽어내고 거기에서 통찰을 얻는 학자가 있어야 발현된다. 김지찬 교수처럼.

이날의 북 토크를 지면에 일부 올린다. (CTK 웹진에서 이 북 토크 영상도 볼 수 있다.)

   
 

김은홍 노아 홍수를 모티브로 한 영화들과 이 영화에서 남다른 통찰을 얻은 김 교수님을 보면서, 저는 시인 정지용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시 갈릴레아 바다의 일부입니다. “예전에 문제門弟들은 잠자시는 주를 깨웠도다. 주를 다만 깨움으로 그들의 신덕은 복되도다.”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 사건(마8:23-27; 막4:35-41; 묵8:22-25)을 읽고 들을 때마다 예수님의 시점에서 그 현장의 제자들을 비웃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렇게 된 데는 설교자들이 언제나 그날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꾸짖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지용 시인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의 시선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살핍니다. 그는 이 시를 읽는 저 같은 이들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었더라면 너는 달랐을까?’ 더 과격하게 말하면, ‘너는 주님을 깨우기나 했을까?’ 심장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 시를 읽고부터 저는 성경의 많은 못난 사람들을 못났다고 비웃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수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갈릴레아 바다는 복음서의 그 사건에 대한 시적 해석, 신학자와 신자들에게 해석학적 도전을 주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해석과 주해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겠지만, 김 교수님은 영화감독들의 노아 해석에는 후한 점수를 주면서, 성경의 노아 홍수 내러티브를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추어들이 성경의 전문가들조차 놀랄 참신한 상상력과 통찰력을 발휘하는 데, 성경을 늘 묵상하고 연구하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전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지찬 전문가는 (영화감독들이 아니라) 우리인데, 우리는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너무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발휘하는 그런 상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경계를 못 넘고 늘 그 안에 갇혀 있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의 본문을 통하여 이야기하시는 세밀한 음성을 잘 못 듣습니다. 늘 듣던 말씀, 편하고 위로 받고 안전한 말씀을 전하는 데 우리가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런 통찰력을 얻으려면 엄청난 시간의 사고와 그 사고의 종자를 싹 틔우는 시간이 필요한데, 아마 목회자들이 그런 점이 약한 것 같습니다.

저 같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현미경적 시각으로 본문을 해석하다 보니까 주석은 잘 할 수 있는데 위대한 사상가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을 쓴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대학자는 성경을 알레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거대한 사상을 낳지 않았습니까? 현미경의 시각으로 본문을 보고 거대한 망원경의 시각으로 전체를 보는, 이 두 개의 시각이 잘 연결되어야 하는데, 많은 목사님들과 제가 현미경의 시각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에는 능해졌지만 시대 전체의 흐름을 본다거나 시대의 요구에 반응하는 면에서는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노아를 보십시오. 이 영화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해석하면서 두발가인을 등장시킵니다. 기계를 만든 최초의 인간인 두발가인은 이 영화에서 쇠뭉치를 갖고 다니면서 사람을 죽입니다.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아르노프스키의 노아는 인간의 육식 및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게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를 보면 “땅에 포악함이 가득했다”(창6:11)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득하다’는 단어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다음에 “땅에 충만하라”하셨을 때의 그 ‘충만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포악(폭력)은 히브리어로 ‘하마스’인데 (팔레스타인의 그 무장 단체 ‘하마스’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마스’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득 차야 할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바로 이것이 홍수 심판의 가장 심각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노아 홍수 심판은 ‘예배를 안 드렸기 때문이다’라고 설교했습니다. 성경 본문 어디에도 이런 설명은 안 나오는데, ‘예배를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노아 심판이 임한 것이다. 그러니 예배 열심히 드려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본문을 현미경의 시각으로 관찰하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그 다음에 ‘폭력’(하마스)이라는 단어—실제로 ‘폭력’(하마스)이라는 단어는 딱 한 번 밖에 안 나옵니다—하나를 렌즈 삼아서, 그 안에서 거대한 세계를 보는 비전—“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보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비전—을 우리가 가져야 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상실했습니다. 본문의 모래알 속에서 세상을 보는 비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을 읽는 렌즈가 없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 갇혀서 말 잘 듣고 순종 잘 하는 교인들하고만 있다 보니까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잘 모르게 되었습니다. 광우병, 조류독감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보면서 이것이 인간의 탐욕과 폭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현미경적인 주해의 능력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상가의 거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 본문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목회자들이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한계 때문에 보지 못하는, 시대를 보는 혜안이나 삶의 근원적 지혜를 오히려 그런 문제를 늘 고민하는 영화감독 같은 사람들이 더 탁월하게 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김은홍 여기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한 가지 불만이나 문제를 제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을 세밀하게, 개역한글판으로 성경 본문을 뚫어져야 쳐다봐도 별로 나올 게 없는 것 같아요. 원어의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학을 원어로 연구하는 성경학자만큼 일반 목회자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김지찬 성경 해석의 과제는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공동체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교회사의 탁월한 교회 선생님들의 주석과, 최근의 현대 학자들의 도움과, 같이 목회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혼자서는 그 계시를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님들에게 2할 5푼만 치자고 말합니다. 설교할 때 어떻게 매번 홈런을 칩니까? 힘들면 그날은 번트 대고. 희생 플라이 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본문을 정해 놓고 깊이 들여다보는 훈련이 되면, 저는 목회자만큼 탁월한 시인, 철학자, 예술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안에, 이 성경 안에 예술, 철학, 역사, 신학, 다 들어 있으니까, 30년 그 정도 목회하다보면 탁월한 시인, 철학자,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은홍 그러니까 히브리어 별로 안 해도 된다?

 

김지찬 하면 좋죠. 하면 좋은데,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히브리어 잘 하면 설교 15퍼센트 더 잘 한다’ 저는 그렇게 말하거든요.

 

김은홍 원어 핑계 대고 대충 설교하자. 이런 핑계 안 통한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공동체의 산물인 좋은 주석, 좋은 해석 많으니까, 그런 것에 기대서 깊이 묵상하고 설교하면, 적어도 김지찬 교수만큼 설교할 수 있다?

 

김지찬 저보다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김은홍 이 책은 모두 22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딱 두 개만 뽑으라면 저는 2장 ‘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후회하고 진노하는 분이신가’(2019년 5월호 44쪽)와 14장 ‘하나님은 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기로 결심하셨는가’를 뽑을 것 같습니다. 노아 홍수 내러티브의 핵심 본문인 창세기 6:5-8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이 책 2장에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후회하고 한탄하고 근심하시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생각났습니다.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좋아하시고’ 또 그것을 ‘보시고’ ‘후회하셨다.’ 교수님은 ‘후회하셨다’보다 ‘마음을 바꾸셨다’가 더 적절하다고 이 책에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지? 이 신학적인 질문이 2장에 나오는데, 14장에도 거의 동일한 질문이 나옵니다. 1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다짐하십니다. 다짐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될 일이라면 다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짐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붙들어 맨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붙들어 매시는 하나님이나, 자기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이나, 변치 않으신 하나님의 성품과는 얼핏 보면 모순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 스스로 다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이 곧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찬 (노아 홍수를 모티브로 한 영화들에 대한 평을) 인터넷에서 보면, 노아 홍수의 하나님은 자의적이다, 변덕스럽다, 어떻게 시작도 안 했는데, 연극 무대 1막도 안 지났는데 모든 등장인물을 쓸어버릴 수 있나, 이게 가장 큰 질문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노아 홍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분노’나 ‘진노’와 관련 있는 명사나 동사가 성경 본문에 한 번도 안 쓰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한 번도 안 쓰일까?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심판의 정조, 마음의 정서는 무엇인가?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분노하시지 않고, 근심하고 마음을 바꾸시는데. 하나님은 작정decree의 영역에서는 변치 않으시지만 그 작정을 역사 가운데 풀어내는 섭리providence에 있어서는 마음을 바꾸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변치 않으시려면 우리의 반응에 따라 변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너무 심각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땅과 함께 다 멸절시키려고 하셨는데, 그 정조가 변덕 때문이 아니고, 분노가 아니고, 마음에 고통을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마음의 고통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헬무트 틸리케는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아버지의 심정이 이미 노아 홍수의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주해학자가 아니고 기독교윤리학자인데 놀랍게도 노아 홍수의 하나님을 갈보리의 하나님으로 연결시킵니다. 정말 탁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면에서 약한 것 같아요.)

핵심이 ‘하트’heart니까, 인간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항상 악할 뿐인데, 하나님은 그걸 보고 ‘마음’ 아파하시니까, 하나님의 홍수 심판은 ‘하트 투 하트’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변덕스런 자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노아 홍수가 끝난 다음에 ‘내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부분도 이유가 똑같아요. 인간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셨다가, 홍수로 인간을 심판한 다음에도 보니까 인간의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한 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대마다 물로 쓸어버려야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참기로 결정하신 것이지요. 인간의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더라도 내가 다시는 물로 쓸어버리지 않겠다고 ‘심중에 생각하세요.’ “인간의 마음이 생각하는 게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심중에 이르시되….” 여기서도 ‘하트 두 하트’의 문제인 것이지요. ‘하트’가 모두 네 번 나오는데, 인간을 물로 심판하실 때 두 번 나오고, 인간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 두 번 나와요. 사실은 성경은 정말 탁월한 의미의 언어의 대가가 기록한 그레이트 코드great code이고 최고의 예술품인 것이지요. 아주 곡진하게 인간의 근원적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슴에서 나왔지만 머리로 쓴 글이 가장 감동적인 글인데, 하나님의 ‘하트’에서 나온 구속사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예술가적인 방식으로 거의 기하학적, 산술적 정확도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도 인간의 생각이 (저를 포함해서) 어려서부터 악하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지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언약입니다. CTK 2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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