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어즈는 뭐라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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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어즈는 뭐라 말할까?
  • 양혜원
  • 승인 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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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L. 세어즈가 오늘의 페미니즘과 여성의 현실 본다면
 

 

 

 

여성은 인간인가?
도로시 세이어즈 지음
양혜원 옮김
IVP

「여성은 인간인가?」의 옮긴이 양혜원 박사가 이 책에 대한 해설을 기고했다. 글 가운데 ‘도로시 L. 세어즈’는 이 책의 저자로 표기되어 있는 ‘도로시 세이어즈’와 동일인이다. 이 책의 옮긴이이자 이 글의 글쓴이인 그는 ‘도로시 세어즈’ 본인이 1936년에 쓴 한 편지에서 공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도로시’와 ‘세어즈’ 사이에 ‘L’을 넣어달라고[“Dorothy L. Sayers”] 주문하면서 그 이유를 “‘L’이 빠지면 Sayers의 발음이 두 개의 음절로 분명하게 구분되어[”세이-어즈“] 듣기가 좋지 않고 본인도 그게 싫다고 밝혔다”고 설명한다(출처: Barbara Reynolds, Dorothy L. Sayers: Her Life and Soul(Hodder and Stoughton, 1993, Revised edition), 408쪽). 이 글에서는 양혜원 박사의 제안을 존중하여 ‘(도로시 L.) 세어즈’로 표기한다.―CTK

 

살다 보면 한번 씩 과거의 인물을 소환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혼란스러울 때도 그렇지만 그냥 호기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말에도 이 두 가지의 심정이 다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라는 종교적인 절대 기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은 때도 있지만, 그냥 궁금하기도 한 것이지요. 예수까지는 아니어도, 소박하게 할머니가 또는 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뭐라고 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세어즈의 글을 번역하면서 세어즈가 오늘날의 페미니즘과 여성의 현실을 보면 뭐라고 반응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세어즈는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에세이―앞에 실린 “여성은 인간인가?”는 1938년에 했던 연설이고, 뒤에 실린 “인간이 아닌 인간”은 1941년에 첫 출판되었습니다―를 쓴 그 세어즈밖에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그의 반응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편의 에세이에서 세어즈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여자도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여자도 개인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우선 여자도 인간이라는 말은, 여자도 남자들처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에서부터 가장 추한 모습까지 다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여자라고 해서 특별히 선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달리 여자는 인간으로 인식되기보다 여자라는 성별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세어즈는 두 번째 에세이에서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일찍이 지적했던 문제이고 여기까지는 세어즈도 페미니즘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지금까지 비판해온 것을 다시 스스로에게 적용해서 여자들이 여전히 특별한 여성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세어즈는 첫 번째 에세이에서 그 점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는 페미니스트 진영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지적했음에도 이 에세이들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다소 구시대의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일단 여자들이 바지를 입는 것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예부터가 그렇지요. 하지만 여성학과 종교학을 두루 공부한 저로서는 세어즈의 이 에세이들이 매우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세어즈가 여기에서 제시하는 예들이 더러 업데이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말하는 핵심은 오늘날 우리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으면서 여전히 시사성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사성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남자와 마찬가지로 일을 통해서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책임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주어진 인간으로 여자를 보지 않고 제한된 성역할에만 그들을 가두는 사회의 관습을 세어즈가 비판한 것과 더불어 그의 노동관을 살펴본 후에, 그가 지적한 페미니즘의 오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어즈는 “인간이 아닌 인간”에서 왜 남자가 무엇을 택할 때는 편리함이라든지 효율성이라든지 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관점에서 그 이유가 설명이 되고, 여자가 무엇을 택할 때는 어떻게든 여성이라는 것과 연결시켜서 설명이 되는가 하고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남성의 일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요리나 원예를 하는 남성이 과도하게 남성성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로 제시합니다. 남자도 여자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마다 이것이 나의 남성 정체성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고 늘 보여주어야 하는 압박감을 느꼈다면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지요.

이 예를 통해서 세어즈는 남성이 남성이라는 성역할에 국한되지 않을 자유가 있다면 여성도 (그가 인간인 이상)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이처럼 남자와 동등하게 인간됨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과 노동을 통해 삶의 보람과 만족을 누릴 권리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세어즈는 보았습니다.

세어즈는 이성은 특정한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 양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뇌, 위대하고 유일하게 진실된 양성androgyne이며 남자하고든 여자하고든 무관하게 짝지을 수 있고 스스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그 차가운 뇌는 이들의 역사의 왜곡을 보고 웃습니다.”(50쪽) 그가 두 번째 에세이에서 한 말입니다. 세어즈의 이러한 관점은 그의 소설에도 반영이 되었는데 그의 탐정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피터 윔지 경과 그의 배우자가 된 해리엇 베인은 같은 옥스포드 대학 출신으로서 서로의 몸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성역할을 부여하는 사회 관습을 넘어 이성의 차원에서 서로가 온전히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세어즈는 “진실된 양성”인 이성이 성역할에 기반한 성차별을 넘어서게 해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노동에 대한 특별한 강조로 여성이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향과 실천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 에세이에서 세어즈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예로 드는데, 세어즈가 말하는 노동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정말로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하는 노동입니다. 말하자면 소명이지요. 여성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엘리자베스 A. 세이Elizabeth A. Say는 그의 Evidence on Her Own Behalf: Women’s Narrative as Theological Voice(자신을 위한 증거: 신학적 목소리로서 여성 서사)에서 세어즈의 노동관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선 일은, 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어야 한다. 누가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거기에 따라오는 지위나 수입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두 번째로, 모든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과 노동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다. 모든 인간의 일은 그 일이 제대로 된 일이라면 신의 형상을 구현할 기회이고 따라서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의 일차 임무는 그 일 자체를 섬기는 것이지 사회를 섬기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려다 보면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어즈의 이러한 노동관은 그의 에세이에서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할 권리를 강조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여자와 남자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어떤 노동을 택할 때 성별이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이 노동의 기준은 하나님의 창조 노동이기 때문에 우리의 노동도 주변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공동체를 섬긴다고 하면 언제나 공동체의 눈치를 보게 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이라면 그 일 자체를 최선으로 해내는 게 하나님의 뜻에 제대로 부합하는 게 되겠지요.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되었기 때문에 세어즈의 이러한 관점은 다소 순진한 이상주의처럼 들리는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어즈가 노동의 괴로움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일은 저주스러울 때가 있고 따라서 여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을 좋아했다면 여성은 결코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여성은 다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21쪽)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실 직업 자체 때문에 자기 직업에 열심인 사람은 아마도 천 명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일을 통한 보람도 느끼는 만큼 일에서 소외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존재이고, 가사와 육아에만 국한되지 않는 노동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을 권리가 있다는 세어즈의 이러한 주장은 페미니즘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두 가지의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세어즈는 지적합니다.

우선 페미니즘은 남자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어떤 것이 정말로 필요한 일인지는 묻지 않고 단지 여자도 남자처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계속해서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페미니즘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페미니즘은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인간됨의 절대 기준이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남자를 기준으로 해서 남자들이 누렸던 것을 같이 누리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남자들이 지금까지 나쁜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전쟁, 위계 관계, 여성 억압 등―여자들만의 다른 기준을 세우려고도 합니다. 페미니즘 입장에서 미덕은 내가 하고 싶은데 구조적 제약 때문에 못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는 독립적 자율성과 자유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남자들만큼 어리석을 수 있는 자유도 제한되어서는 안 되므로 세어즈가 지적하는 첫 번째 오류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자들이 지배한 세상이 여자들에게 억압적이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려면 여자가 기준이 되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세어즈가 지적하는 두 번째의 오류가 나타납니다.

세어즈는 옥스퍼드가 마침내 여성에게 학위를 수여하기로 한 1920년에 처음 학위를 받은 여성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보다 전에 옥스퍼드에서 수학했지만 그 당시에는 학위를 수여받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여자와 대학 교육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여기던 그 시대에 듣곤 했던, 여자가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를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는 핀잔에 대해서 세어즈는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알고 싶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게 사실이고, 상당히 많은 남자 학부생들도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하얘지지만, 독특한 개인인 나,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것이고, 내 모습이든 몸의 기능이든 그 어느 것도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막을 게 하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12-13쪽) 여기에서 세어즈는 여자라는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으로서 세어즈라는 사람이 원하는 바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개인에 대한 강조는 그의 첫 번째 에세이에 특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어즈와 페미니스트들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은 한편으로는 개인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의제를 위해서 여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세어즈가 비판하는 “여성의 관점”에 대한 요구는 오늘날 페미니즘에서 아주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내용상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억압이라고 하는 공통된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집단 정체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이 정체성은 페미니스트 정치 운동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인 동시에 이 정체성이 있어야 페미니스트 정치 운동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공통된 억압의 경험으로 인한 공통된 정체성과 페미니스트 정치 운동은 상호구성의 관계에 있고, 이 두 가지가 페미니즘의 근간입니다. 하지만 세어즈는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공통된 정체성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합니다:“제 가정부 아주머니와 저는 버나드 쇼와 비교할 때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예술과 문학에 대해 토론을 할 때는 아마도 쇼와 저의 근본적 관심사가 제 가정부 아주머니보다는 더 비슷할 것입니다.”(31-32쪽) 가정부 아주머니와 세어즈는 둘 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분류되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남성들과는 분명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동은 완전히 성격이 다릅니다. 노동의 특성으로 볼 때 세어즈는 가정부 아주머니보다는 버나드 쇼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가정부 아주머니와 세어즈의 공통점이 세어즈와 버나드 쇼의 공통점보다 확실히 더 크고 근본적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은 여성은 주체 의식의 없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여성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세어즈는 그렇게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오히려 오류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여성들에게는 단결심이 없다는 말을 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에 강력하게 페미니스트적인 ‘관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그 반대의 오류를 범하지 맙시다.”(35쪽) 여성들이 역사 속에서 한때 집단적 운동을 통해서 참정권을 얻고 교육의 권리를 얻어냈다면 이제는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자신의 일을 찾아 개인으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면 되는 것이지 계속해서 여성의 “관점”을 찾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이제는 각 여성의―그리고 각 남성의―개인적 필요를 더 강하게 강조해야 하는 때”라고 주장합니다.

집단에 기반한 정체성의 위험을 그가 얼마나 민감하게 느꼈던지 그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 육체 노동자와 지식 노동자,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여자와 남자 등 하나의 그룹을 또 하나의 그룹과 계속해서 대치시키면 국가의 기반이 분리됩니다. 그리고 그 틈이 너무 깊어지면 물리력과 독재 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보존하고 싶다면, 계급과 범주에 기반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한 범주의 일원으로서만 생각하거나 행동해야 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룹이 아닌, 톰, 딕, 해리 개인에 그리고 잭과 질 개인에, 여러분과 나 개인에 기반해야 합니다.”(35-36쪽)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정체성의 정치로 깊이 분열된 현상을 볼 때 세어즈의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요즘 저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은연중에 상대를 검열하는 움직임을 자주 감지합니다. 제가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길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 이후로 이 사람이 무슨 이상한 근본주의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페미니스트의 적은 아닌지, 저를 호시탐탐 살핍니다. 그래서 세어즈의 글이 더 많이 와 닿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자를 끝내 인간으로 보지 않으려는 사회를 향해 부활하신 그분을 의지하여 항변하면서도,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뿐이라는 기독교의 오랜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세어즈의 글은, “맨스플레인”과 “우먼스플레인” 사이에서 대화의 길이 막힌 우리 사회와 교회를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됨의 공통 기반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줍니다. CTK 20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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