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리지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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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리지널 리뷰
  • 송인규
  • 승인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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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C. S. 루이스 연구의 디딤돌이 되기를

 

「오리지널 에필로그」는 C. S. 루이스의 작품에 대한 루이스 번역가의 에세이집이다. 저자 홍종락은 루이스의 작품 및 연관 서적을 적어도 16권 이상 번역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나는 번역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번역의 유익만큼은 알고 있다. (번역을 엉터리로 하지 않는 한) 번역자는 원서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므로 책 읽기의 수준이 깊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같은 저자(및 연관 저자들)의 책을 16권이나 번역하다 보면 저자의 사상과 주장점, 글의 특징과 강조 사항, 나아가서는 그의 인격과 삶에 대해서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기 마련이다. 저자의 이러한 경력은 자연히 이 책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을 일으킨다. 그 저변에는 루이스 전문 번역가가 그리는 C. S. 루이스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깔려 있다.

 

서명에 대한 추정

책을 읽으면서 왜 제목이 “오리지널 에필로그”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에필로그는 보통 작가가 작품 끝에다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 등을 진술하는 종결부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번역자로서 루이스의 글을 번역해 왔는데, 그런 전반적 내용에 대한 에필로그를 구성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또 왜 에필로그 앞에 “오리지널”을 대동한 것일까?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우선, 번역은 본래 글의 성격상 오리지널이 아닌데, 이 책은 (너무도 자명한 바이지만) 번역이 아니라 저자의 직접 저술(오리지널)임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일 수 있다. 아니면, 다른 루이스 해설서와 달리 뭔가 오리지널한 면모가 있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오리지널은 오리진(기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글의 사상과 주제가 루이스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추정이 빗나갔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저자는 서평자의 엉뚱한 착상에 미소를 지으면서 “실상은 이렇습니다”라고 숨은 카드를 내보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책의 제목을 살피고 이해하는 일은 저자의 글 쓴 취지와 의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번거롭게 여겨지지만 빼놓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의 특징과 의의

이 에세이집이 나타내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 책이 루이스에 대한 해설서로서 보유하는 의의는 무엇인가? 나는 세 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오리지널 에필로그」는 한국인의 저술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루이스 관련 서적은 서양인에 의해 저술되었다. 물론 최근 몇 년 동안에 루이스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쓴 한국인도 있고 또 한국인으로서 루이스나 루이스의 작품에 대한 안내서나 해설서를 집필한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미미한 형편이다. 「오리지널 에필로그」는 그 몇 안 되는 루이스 관련서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인이 쓴 책은 내용이 쏙쏙 들어온다는 장점이 있다. 또 저자의 설명과 논점이 어느 모로든 한국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태를 맥락으로 하기 때문에 대체로 글의 효과가 번역서보다 더 생생하고 강력하다. 이것은 「오리지널 에필로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이 책은 루이스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루이스와 함께한 책이기도 하다. 꽤 많은 루이스 관련 도서들은 루이스에 대해(about Lewis) 쓰였다. 이 역시 귀한 일이다. 그런데 「오리지널 에필로그」는 루이스의 관점에서(from Lewis’s standpoint) 쓴 책이다. 물론 어떤 이의 관점에서 쓰려면 어떤 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도 어떤 이의 관점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저자의 소신을 그대로 옮기자면 “루이스의 통찰력을 빌려와 그를 안경 삼아 이런저런 주제를 다뤄 보고 싶다”(4쪽)는 것이다.

이런 취지는 기릴 만한 것이다. 여기에는 책을 삶 전체로 읽고, 핵심 아이디어나 주장점을 자신의 처지에도 대입해 보려는 문화적 적용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과연 저자의 글에는 루이스의 특징적 통찰력을 자신의 신앙과 삶에 구현해 보고자 애쓰는 모습이 엿보인다.

셋째, 저자는 될 수 있으면 평이하고 용이한 소통 방도를 구사하고 있다. 루이스의 주장이나 논점이 명료하지만 그 내용이 항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쉽다는 말은 아니다. 실은 그 반대인 경우도 꽤 많이 있다. 그것은 그가 처한 교회ㆍ시대ㆍ문화ㆍ지성의 토양이 우리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에필로그」의 저자는 독자와 소통하는 데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아예 사전에 걷어 낼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원활한 소통을 위한 몇몇 방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우선은 간명하고 평이한 설명을 기본 골조로 삼고 있다. 주안점이나 핵심 아이디어를 막히는 데 없이 전달하기 위해 적실한 예, 실생활의 에피소드, 영화의 장면이나 소설의 작중 인물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나는 저자가 2장에서 강조한 “번역”의 원칙을 스스로 실천하려고 애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런 노력과 수고가 어렵고 낯선 개념이나 사상을 이해시키는 데 좋은 디딤돌로 작용하고 있다.

 

글의 구성과 내용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구성 내력을 밝힌다. 그것에 의하면 이 책은 처음부터 저자가 하나의 단행본을 출간할 요량으로 집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정기 간행물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집대성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에세이들이 향방 없이 산개되어 있다거나 체계를 잃은 채 방치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에세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세 개의 축은 각각 1부 “당신의 벗, 루이스,” 2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3부 “순례자의 귀향”이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다. 1부(1-6장) “당신의 벗, 루이스”에서는 루이스가 어떤 인물이고 어떤 작품을 썼으며 그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순전한 그리스도인, C. S. 루이스

•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번역이 필요하다

• 루이스의 글이 내 생각과 다를 때

• 루이스의 스승들

• 독서가로서의 루이스

• 편지 속 루이스의 인간적인 민낯

 

루이스에 대한 입문을 돕고자 한다면 1부의 여섯 장은 필독 내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부(7-12장)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이 땅에서의 신앙적 몸부림/분투에 해당하는 여섯 가지 주제—사랑, 성화, 성숙, 허무, 믿음, 변환transposition—를 다루고 있다. 주제 하나하나가 흥미롭고 중요하지만 특히 서평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제11장과 제12장의 내용이었다. 제11장은 “찾아오는 의심 앞에서”란 제하에 세 종류의 믿음(예시될 믿음의 명칭은 논평자가 임의로 만든 것이다)을 논하고 있다. 하나는 “합리적 믿음”(reasonable faith)으로서 기독교가 과연 진리인지 알기 위해 증거를 따져 보고 받아들일 때 작동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필요한 믿음이다. 우선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기독교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에는 “신념적 믿음”(habitual faith)이 요구된다. 이것은 지속적 경건 훈련 등에 의해 믿음의 습관을 배양함으로써 신앙 위협적 감정 상태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투지적 믿음”(obstinate faith)이다. 이것은 기독교에 반대되는 새로운 이유들이 등장할 때 그러한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다.

제12장의 “변환”(transposition) 역시 참으로 의미심장한 주제이다. 언젠가 루이스의 설명을 처음 읽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던—흡사 엘리사의 사환이 처음으로 불말과 불병거를 인식했던 것(열왕기하 6:17)처럼—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그런 감격과 놀라움이 다시금 솟구쳤다.

3부(13장∼19장) “순례자의 귀향”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을 여러 대상과 여러 맥락에서 논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내게 최상의 배움과 자극을 준 부분은 13장 “〈실락원〉과 〈페렐란드라〉”이다. 우선 내게 배움의 기회가 된 까닭은 내가 단테의 〈실락원〉이나 루이스의 〈실락원 서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고, 또 루이스의 〈페렐란드라〉도 부분적으로만 뒤적거렸을 뿐 작품 전체를 완상하며 살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상기 내용은 문학 작품으로서 인간의 타락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신학적 진술의 형식에만 익숙한 나로서 신선한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든 내용 가운데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하와를 버렸다면, 인류는 낙원에서 아담과 함께 영원히 살았을까요?”(172쪽)라는 질문에 대한 밀턴, 루이스, 그리고 저자의 답변이다. 특히 저자의 답변은 흥미롭고 그럴싸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하와에 대한 아담의 반응 조치와 인류 후손의 운명 사이를 연결 짓는 일이, 한편으로는 타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최대 논점을 빗겨 가는 것이기도 하다. 하와가 계속해서 아담의 아내로 남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이슈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그녀에게 신체적 죽음을 시행하시고 나서 (하나님이 뜻하신다면) 얼마든지 다른 아내를 창조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후손과 관련하여 훨씬 더 중요한 이슈는 아담이 행위 언약의 머리로서 범죄를 저지르느냐 저지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하와는 행위 언약의 머리가 아니므로 범죄를 저질러도 그 대가가 자신의 죽음에만 한정되지만, 아담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아담이 범죄할 경우 그 대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 후손에게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사실상 그렇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사안은 아담과 하와가 “설령 유혹을 이겨냈다 해도 언젠가 다시 유혹이 찾아와서 결국에는 무너지지 않았을까”(174쪽) 하는 질문에 반영되어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더불어 행위 언약을 맺지 않으셨다면, 이 질문은 입지가 서고 매우 중요한 이슈로 부각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단 행위 언약의 조건으로 선악과의 열매 따 먹는 일을 정하시고부터는, 그들의 “시험”에 “일정 기간”이라는 한도가 부여된다. (무한정한 시험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악의의 표출에 불과하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아담의 시험이 일정 기간만 지속될 것이라고 나와 있단 말인가? 직접 언급된 곳은 없다. 그러나 언약 신학자들은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이 33년 정도에 걸쳐 시행되었던 것처럼―“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브리서 5:8-9)―첫째 아담이 겪은 시험의 경우에도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일정 기간”에 국한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또 이것이 “시험”의 성격에도 맞는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유혹의 기간과 관련하여 루이스의 힌트(175-176쪽)와 자신의 결론(176쪽)을 소개한다. 이런 논의는 결코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오리지널 에필로그」를 디딤돌로 하여

한 사람의 사상과 삶의 자세를 깊숙이 탐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루이스처럼 다각도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리지널 에필로그」의 출간과 홍종락 저자의 수고를 흔쾌히 축하하는 바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는 것으로 족할 수는 없다. 「오리지널 에필로그」를 디딤돌로 삼아 더 의미 있고 더 영향력 끼치는 루이스 관련 작품들이 다음 세대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오기를 희망해 본다. (사실은, 너무 욕심인지 모르지만 C. S. 루이스에 버금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출중한 그리스도인 지성인이 한국에서도 나오기를 바란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왜 부록에다가 “루이스 저작을 읽기 위한 가이드”(260-267쪽)를 제시했겠는가? CTK 20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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