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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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가는 길에서
  • 마크 뷰캐넌 Mark Buchanan
  • 승인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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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비밀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솔직히 말해서, 21세기 북미 중산층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가 어렵다. 또 특정한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승진을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노력은 이기적 야망이나 헛된 허영일 뿐인가? 바하마로 휴가를 가도 될까? 바하마로 휴가를 가는 것이 ‘하나님만으로 부유한 자’가 되지 못한 저주스런 실패는 아닐까? 스키장 시즌권을 사도 될까? 혹시 이 시즌권은 지독한 자기 탐닉이 아닐까?

내가 만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어려워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 무슨 이유에선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들은 경계선 위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경계선의 어디엔가 둘러앉아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수군거리거나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아예 그만둬버리기도 한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쉽고 유창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르거나 그 이름을 선포할 때면 그들의 혀는 유독 꼬이거나 뻣뻣해지고 말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그저 실체 없는 말일 뿐이라고 느낀다. 마치 그들이 ‘말하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상한 종교 집단에 가입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그 엄청나고 환희에 찬 자유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왜 여전히 아시아 시장의 침체에 속이 타고, 비틀비틀대며 무모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질색하는가? 왜 나는 누군가 내게 조금만 무례하게 굴어도 화가 나고, 거리에서 하키를 하다 우리 집 나뭇가지를 부러뜨린 소년의 영혼보다 내 화단에 더 신경이 쓰이는가. 나는 마음속으로 거대한 상상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으면서 왜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30분도 버티지 못하는가?

지금껏 내가 묵상했던 가장 경이롭고 숨 막히는 진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인류와 함께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다. 나와 함께하시는 그분 말이다. 그러나 묵상 중에 파리 한 마리가 윙윙대며 창문에 붙어있기만 해도 내 마음은 어지럽게 흩어져버린다. 그뿐인가? 그 이야기의 의미를 내 삶에 적용하려고 떼어놓은 매일 아침 10분이 큰 희생처럼 느껴진다. 때론 그 시간이 그저 귀찮다.

 

목사인 나는 그리스도와 더 깊고 풍성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늘 만나고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저 빈둥대며 세월을 흘려보낸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는데 그들의 삶은 늘 지루함의 반복이다. 그들은 여전히 싫어하는 일을 하고, 상처와 실패로 얼룩진 관계 속에서 건강과 재정 상태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어떤 비밀스런 두려움이 숨어있다. 두려움의 정체는 ‘뭔가 더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나만 그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걸까?’라는 불안함이다. 더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뻗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지루함이 우리가 사는 삶의 전부가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이걸로 충분한 체하며 가증스럽게 살고 있는 거야’라고.

이제 막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걷고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눅 24:13-35).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들은 우울한 목소리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놓는다.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분이시니까요.” 그들은 여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문을 귀띔해준다. 위로가 되기보다는 문제가 될까 더 걱정스러워하며. 그러나 하나는 확실하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고 그의 시신은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말을 듣고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들이 마을에 도착하자, 동행한 이가 누구인지 여전히 알아채지 못한 두 제자는 예수님께 함께 저녁을 먹자고 청한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쪼개어 감사기도를 드리고 두 제자에게 주신다. 그때, “그들이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두 제자의 마음 상태는 참으로 이중적이다. 더디고 뜨겁다. 그것은 기이한 고통인데, 내 생각에 이런 마음 상태는 흔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더디고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들. 슬픔과 소망, 경외감과 자기 연민, 경이감과 염려, 믿음과 의심, 우리 안에 섞여있는 예와 아니오, 한편으론 끌어당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밀쳐내는 마음, 예수님은 그런 우리와 함께 걷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누구인지 모른다.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야 우리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따뜻함이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장이 불타는 것처럼 마냥 뜨겁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눈에서 비늘이 툭 떨어지며 우리는 그분을 본다. 보라, 그분이시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이 경이로운 순간 그분은 종종 사라지신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은 대체로 그와 같다. 불가사의하고, 덧없고, 그저 잠시 뵙는 것에 불과하며, 작은 복병들이 매복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최근 2년 동안, 우리 교회는 나에게 교회의 12단계 프로그램에 등록한 사람들에게 짧은 연설을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만약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시작한 여정의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면 목사인 나는 그들에게 확신을 줘야 했다. 내가 도울 수 있다고,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치료를 통해 낫게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두 번 그들을 만나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정말이지 마음이 쓰리도록 무력한 느낌이 들었다. 이들 중 몇몇은 자기 손으로 자기 몸에 지옥의 지도를 문신으로 새긴 사람들이었다. 나는 눈, 팔다리, 동료, 자기 영혼의 일부까지 잃어버린 참전 용사들 앞에서 겨우 베트남전에 관한 책 한 권을 공부하고는 그에 대해 다 아는 듯 떠벌리는 소년 같았다. 그들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들에게 엠마오 가는 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길을 걷노라면 거대한 슬픔이 우리 눈을 가려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되지만 동시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분을 볼 수 있다. 12단계든 1200만 단계든 이 여정에는 “만약 그러했더라면”과 “왜”라는 질문이, 그리고 상실의 고통이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그리움과 슬픈 노래가 끊이지 않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 여정에서 반복되는 후렴구는 “우리는…바랐노라(21절)”이다.

나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지만 우리는 좀처럼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분을 알아보는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그 순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그 순간은 무슨 엄청난 행동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하고 소박한 일들, 손에 난 못 자국이나 감사로 떡을 떼는 모습들이 그분의 모습에 한 줄기 빛을 비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갑자기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분은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 더딘 마음과 뜨거운 마음이 우리 내면에 엇갈려 있기에.

우리 문화에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는 신화는 만족의 신화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과 내가 깊게 갈망하는 모든 것이 이 땅에서 충족될 것이라는 약속, 이 약속은 단순히 할리우드만의 신화가 아니다. 기독교의 신화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기독교만의 신화일 수도 있다.  

나는 만족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고, 많이 부족하고, 게다가 중요한 경험이나 통찰도 부족한 사람이다. 만약 내가 성령 안에서 죽거나, 결혼 세미나에 참여하거나, 선교여행을 가거나 진정한 교회 공동체에서 속한다면, 혹은 기도를 더 한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다. 이 신화는 은밀하게 나를 유혹하고 밀어붙인다.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약사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내게 이 신화를 나눠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한다. 

문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 이쪽 편에서 만족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발견한 약속은 기쁨과 평화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혼을 찌르는 고통에 대한 약속도 있다. 그리고 우리를 응원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고…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사람들은…약속된 것을 받지 못한 것”(히 11:36-39)이다.

신실한 사람을 묘사할 때 만족한 사람으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정의하는 것―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우리 모두를 정의하는 것―은 소망이다. 그들은 더디고 뜨거운 마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들은 실패, 슬픔, 고독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그 이상의 것, 다른 어떤 것, 더 나은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들은 고뇌에 사로잡힌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고 있는 그리스도를 언젠가는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이라는, 무너질 것 같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확신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길 위에 서있는 당장은, 그들의 더딘 심장이 불타고 있다.

우리는 그 길 위에 있는 두 제자들에 대해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계속 읽다 보면 누가는 그들이 열한 제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달려갔고, 이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고 전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심을 가라앉히고,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에게 세계 선교의 사명을 주시고,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눅 24:36-53)

하지만 이 두 제자는 군중 속에 묻혀버린다. 글로바는 누구인가? 그는 이 이야기로 슬며시 날아왔다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 혹은 그녀는 익명이라는 두꺼운 장막 뒤에 영원히 숨어있다. 겁이 많은, 성급한, 그러고 나서야 불굴의 용기로 선명하게 도장을 찍은 베드로, 완고한 의심과 확고한 믿음으로 독특성을 드러낸 도마, 퉁명스러움과 다정함, 영민함과 정직, 성마른 성품과 오래 참음으로 혼동할 염려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바울, 이들과는 달리 이 길 위의 두 사람은 그저 윤곽만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모호하게 알 뿐이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그들은 더디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들은 그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일이 있은 후에 만족했을까? 더 이상 배우자와 다투지 않았을까? 더 이상 아이들에게 소리치지 않았을까? 더 이상 내면의 공허함이나 버거움을 느끼지 않고 살았을까?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졸졸 흘러들어오는 돈이 고지서의 급류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든 말든 더 이상 안달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마음속에서 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들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만족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최선의 대답은 ‘그것은 잘못된 질문이다’라는 것이다. 바울은 만족했는가? 베드로는? 요한은? 그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만족은 천국에 속한 일이다. 바울, 베드로, 요한, 글로바, 그리고 나머지 한 제자는 그들의 소망―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구속하실 바로 그 한 분이시라는 소망―이 확실한 소망임을 알았다. 그들의 갈망은 이룰 수 없는 공허한 동경이나 어둠 속의 휘파람이 아니다. 그 갈망은 실은 마음속에 내장된 자동 유도 장치이다. 걸어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았건 상관없이, “날이 이미 기울었을지라도”(29절), 그들의 마음이 의심으로 무뎌지고 슬픔으로 무너지더라도, 이 갈망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끌고 있다. 그럴 때조차도―사실 그럴 때일수록―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뜨겁게 타고 있다. 그들은 이 여정이 ‘그 어딘가’로 그들을 인도하는 멋진 여정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은 결코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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