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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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싸움
  • 마크 뷰캐넌
  • 승인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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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이 있을 때 영혼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 영적 훈련

 

   

막시무스 장군은 결박된 채 남루한 모습으로 로마에 도착한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나팔수, 번쩍이는 갑옷, 월계관 등 로마의 위대한 전쟁 영웅을 맞이해야 할 화려한 의식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영예는 어디 가 버렸는가? 막시무스는 노예가 되어 돌아왔다.

이것이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배경이다. 황제의 총애와 만인의 칭송을 한 몸에 받던 전사 막시무스는 이런저런 사건을 거치면서 멸시받는 반역자가 되었다. 그는 포로가 되었다가 노예로 전락하더니 결국에는 불패의 검투사가 된다. 검투사로 유명해진 그는 검투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당대 최고의 검투사들과 맞서게 된다.

콜로세움 검투는 카르타고 전쟁을 재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검투사들은 불운한 카르타고인 배역을 맡는다. 학살을 위한 무대가 준비된다. 이들은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 눈부신 햇빛 속으로 나아간다. 피에 굶주린 군중의 함성이 이들을 기다린다. 

지휘자 막시무스는 부하 검투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절대로 흩어지지 마라.” 막시무스는 부하들을 경기장 한가운데에 모아 원형으로 둘러 세운다. 방패를 높이 들고 창은 바깥쪽으로 향한 채 등과 등을 맞대게 한다. 막시무스는 다시 한 번 소리친다. “저 문에서 뭐가 나오든지, 절대로 흩어져서는 안 된다.”

저 문에서 날쌔고 무시무시한 것이 등장한다. 전차들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줄지어 나온다. 민첩하고 엄청나게 힘이 센 군마들이 끄는 병거에는 최고의 전사들이 타고 있다. 기수 뒤편에서 용맹한 여전사들이 창을 던지고 활을 쏜다. 막시무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대열에서 벗어난 한 검투사가 고꾸라진다. 막시무스는 또다시 외친다. “흩어지면 죽는다!” 

다들 줄행랑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막시무스는 지휘력을 발휘하고, 검투사들은 그런 충동을 억누른다. 전차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손에 든 나무 방패에 창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진다. 전차가 이들을 덮치려는 순간, 막시무스가 명령을 내린다. “공격!” 

검투사들은 전진한다. 로마인들을 죽인다. 악랄한 코모두스 황제는 경기 지휘관에게 신랄하게 말한다. “과거에 배운 로마 역사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만, 우리가 처음에는 카르타고를 이기지 않았더냐?”

“저 문에서 뭐가 나오든지, 절대로 흩어져서는 안 된다.”

이 말을 들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기도가 메아리 되어 들린다. “그들로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 17:23, 쉬운성경). 예수님은 지옥의 문이 절대로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저 문에서 뭐가 나오든지, 절대로 흩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절대로 흩어져서는 안 된다는, 하나가 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고는 매번 그것을 잊어버린다. 혼자서 줄행랑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 정도면 양반이다. 우리는 같은 편에게 무기를 들이댄다. 바울은 경고한다. “여러분이 서로 해치고 헐뜯는다면 양쪽 다 멸망할 테니 조심하십시오”(갈 5:15, 쉬운성경).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렇게 화를 잘 낼까? 15년 동안 목회 현장에서 비슷한 경우를 숱하게 보고 들었다. 주먹다짐을 한 집사님들, 교회 업무 때문에 모여서는 고성이 오가며 다투는 일, 폭력이나 진배없는 악소문 퍼뜨리기….
한때 400명에 달하는 유쾌한 교인이 출석하던 교회가 있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김리처럼 적극적이고 원기 왕성한 교인들이었다. 그런데 6개월 남짓한 기간에 교인이 점차 감소하더니 산전수전 다 겪은 몇 사람만 남게 되었다. 하나같이 변덕스럽고 심술이 고약한 것이 골룸 같았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교인들은 여전히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일부 교인들이 주일학교 프로그램을 너무 급작스럽게 강하게 밀어붙인 게 화근이었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어느 소그룹이 나머지 교인들을 모두 배신자로 보게 되었다. 무엇이 문제였나? 그 소그룹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오냐오냐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서 자녀 교육이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탄원서를 돌리고 비밀리에 모임을 소집해서 목회자들을 비난했다. 반대자는 누구든 가차 없이 괴롭혔다. 얼마 못 가 교회는 이 문제로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었고, 결국 당회와 교역자들이 일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생긴 이후로, 끊임없이 내분이 있었고, 내분의 소문이 돌았다. 만인이 기도하는 집은 서로 헐뜯고 싸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다투기를 유난히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소모적인 싸움을 선한 싸움으로 바꿀 수 있을까?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훈련, 네 가지 영적 기준이 있다.

 

애통하는 마음

아무리 숭고한 목적을 지닌 전쟁이라고 해도, 좀스럽고 저급한 원한으로 돌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의로운 분노도 순식간에 시시한 복수극으로 전락하기 쉽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과 빚은 갈등 때문에 화를 낼 때가 있다. 간혹 다른 뺨을 댈 때가 있을지 몰라도, 대개는 이를 악물고 갖다 댄다. 멍들고 피가 날까봐 걱정한다.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들 때도 있고, 정신없이 싸움에 달려들 때도 있다. 우유부단하다가 갑자기 무모하고 야비한 사람으로 돌변할 때도 있었다.

유일한 해독제는 스스로를 진정한 슬픔에 노출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을 맛보아야만 한다. 자녀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에 아파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아담과 사라와 니콜라, 세 아이의 아빠다. 아이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대놓고도 은근히도, 어느 한 아이 편만 드는 경우는 절대 없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 곧 서로 무례한 것은 성령을 근심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는 일에 나도 함께 아파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몇 해 전, 우리 교회는 새 건물을 구입하여 이사했다. 오랫동안 기도하고 희생하면서 열심히 준비해 온 일이었다. 마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넌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무성한 소문이 끊이지 않으면서 목회자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축제 분위기는 삽시간에 냉소적인 분위기로 돌변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파벌이 생기면서 하나 됨이 깨졌다.

나는 낙담하고 방어적으로 변했다. 그런 태도는 내 설교에도 슬그머니 영향을 미쳤다. 목소리는 날카로워졌고, 혼자서 거룩한 양 잔소리가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월요일마다 머릿속으로 사직서를 썼다. 그 사직서는 상처받은 자존심의 걸작이요, 마치 순교자의 마지막 유언 같았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한 자매를 통해 당신의 찢어지는 마음을 어렴풋이 보여 주셨다. 그 자매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 자매가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서, 내가 질문을 던졌다. “자매님께 기쁨을 주는 것이 뭐가 있나요?” 그 자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육신적으로 정서적으로 관계적으로 얼마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기뻐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주셨다. 큰아들의 입술에는 원망과 비난과 힐책이 가득하다. 그의 입에는 오랜 세월 쌓아온 증오의 재가 가득하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어떤가? 아버지는 아들에게 간청한다. “죽었다고 생각한 동생이 살아오지 않았느냐?” 여기서 모든 문제는 한 가지에 달렸다. 과연 큰아들은 잃어버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슬픔을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아버지와 더불어 기뻐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큰아들은 먼저 아비의 아픈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화해를 이루는 사람이 되려면 우선, 우리를 보고 애통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애통해야 한다.

 


기뻐하는 마음

그런데, 우리에게는 기쁨도 필요하다. 특히, 갈등 가운데서 말이다.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가 기쁨이라는 것,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나는 바닷가에 살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해변을 걸으면서 개펄 웅덩이들을 둘러보곤 한다. 개펄 웅덩이에는 허둥지둥 달아나는 게와 살금살금 움직이는 달팽이, 가시투성이 고슴도치, 날렵하게 헤엄치는 넙치 같은 수많은 생명체가 서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예쁘고 이국적인 생물체는 바로 말미잘(sea anemone, ‘바다의 아네모네’/편주)이다. 두껍고 하얀 줄기 꼭대기에 촉수가 화관처럼 둘러싸서 꽃모양 돌기를 이루고 있다. 말미잘은 눈으로 보기만 해야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딱딱한 것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촉수를 강장 속으로 거둬들인다.

기쁨도 말미잘 같은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수그러든다. 시끄러운 교회에는 기쁨이 없다.

바울은 교회를 이끄는 두 여성이 서로 화해하도록 도와주라고 한 다음에 바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빌 4:2-4, 쉬운성경).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쁨이 있어야 한다.

바울의 조언은 다소 가벼워 보인다. 엄격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갑작스레 농담을 던지면 얼마나 약이 오르겠는가. 그럴 때는 웃음도 거슬린다. 기쁨이 진지한 상황을 가볍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어쩌면 상황 자체가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서로 갈등하는 이 사람들은 사소한 오해를 교회 전체가 연루된 언쟁으로 부풀려 놓았다. 증오는 몸짓이나 어조, 말 한 마디처럼 별 것 아닌 것을 과장해서 심각한 피해처럼 보이게 만든다. 증오는 소문과 직감을 퍼뜨린다. 사소한 문제에는 심각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한바탕 크게 웃어넘기고 말 일이다.

크든 작든, 모든 갈등 상황에는 바울이 언급한 특별한 기쁨, 곧 주님 안에서 기쁨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대개 믿음대로 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살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떼면 우리는 죄와 혼란에 쉬 휘둘려서, 낙담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현실 요법(reality therapy, 사람들이 스스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고 좀 더 효율적인 행동선택을 하도록 도와주는 상담 치료 방법/편주)이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면 “일시적인 가벼운 환난”을 염려하느라 충격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 앞에 놓인 “영원하고 한량없이 큰 영광”을 기억할 수 있다(고후 4:17).

“마음이 즐거우면 신체가 건강하다”고 잠언(17:22)은 말한다. 기쁨은 원기를 회복시킨다. 기쁨은 사소한 말다툼을 그치고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건강을 준다.

 


굳건한 마음

예수님은 십자가―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적^우주적 전투―를 앞두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눅 9:51). 갈등 상황에서도 이처럼 굳건한 의지와 강인함이 필요하다.

나는 야구에는 젬병이다. 어렸을 적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내가 투수를 맡고, 우리 형이 타자였는데, 형이 친 공이 그만 내 입 쪽으로 날아오는 바람에 부러진 앞니를 영구 기념품으로 보존하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는, 아무리 천천히 날아오는 공이라 해도 공중에서 날아오는 공만 보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인다.

이런 식으로 갈등에 대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를 가나 잔뜩 움츠러들어 갈등을 피하려고만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식의 회피를 통해 어렵게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피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싸우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화해를 도모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굳게 결심하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는 항상 놀라웠다. 처음에는 다들 망설이지만, 누가 도와주기를 바란다. 겉모습과 달리 마음속으로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나는 “굳건한 마음”이 우리 교회를 여러 차례 분열에서 건져 주었다고 믿는다. 얼마 전에, 사업을 하는 우리 교인들 사이에서 의견차가 심해져 교회 재정까지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 방에 나 혼자 들어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서 시편 127편―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을 읽은 다음, 애들처럼 유치한 행동은 그만두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행동하라고 권면했다.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나는 꿈쩍도 않았다. 계속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세히 말했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회개했다.

우리는 더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며 서로 헌신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다정한 친구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잃지 않는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서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망설일 일은 없다.

내가 유순하게만 나갔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진다.

 


겸손한 마음

누군가―나와 싸우는 사람 또는 마귀―가 내 단점을 지적하는 바람에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

사실이 그렇다. 내 주변 사람들만 입이 거친 것이 아니라, 나도 입이 거칠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깨끗하게 인정한다. 사실, 갈등만큼 나를 정화하고 연단해 주는 것은 없다. 갈등의 시기는 멋대로 자라난 가지를 쳐주고 죽은 가지를 제거해 준다. 나는 다윗이 드린 기도의 힘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나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런 자질을 발견한다. 아마도 바울에게 가장 큰 근심을 안겨 준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자격과 은사와 외모를 문제 삼고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바울이 제대로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고, 언변이 좋거나 정직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고린도에 보낸 서신들, 특히 첫 번째 편지는 바울이 자기 자신과 사역을 변호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변호하는 내용이 좀 특이하다. 바울은 십자가를 이야기한다. 호통이나 비난을 퍼붓지 않는다. 고린도 교인들의 고발에 조목조목 맞서기보다,  대부분 받아들인다. 사실, 바울의 언변은 그리 화려하지 못하다. 몸이 허약한 것도 사실이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그는 현명하지 못하다. 거드름을 피우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과 비교해 볼 때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는 연약함 중에 말씀을 선포한다. 그는 상한 마음으로 사역한다. 그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이 말은 사전에 계산된 미사여구가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이 말은 사도 바울의 반대자들을 무장해제했다. 공격 대상이 반격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공격할 맛이 나지 않는 법이다.

최근, 같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캐롤이 내게 조언을 구했다. 자기가 한 리더의 문제를 계속 지적했는데, 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캐롤 목사의 단점을 언급하면서 책망한다는 것이었다.

“음, 그 사람도 일리가 있어요. 그 문제는 캐롤 목사님이 계속해서 싸워야 할 부분이죠. 다음번에는 그분께 솔직하게 지적해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그 부분을 고치기 위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할 거라고 말씀해 주세요. 목사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기 위해 계속해서 힘쓰세요. 하지만 그분 역시 본인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야 한다고 지적해 주세요.”

솔로몬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유순함은 겸손의 열매다.

1년 전쯤, 나는 15년 목회 생활에서 가장 큰 칭찬을 받았다. 그보다 8개월 전, 어떤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려고 중간에서 애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내가 주제넘게 개입해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며,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나를 피해 다니다가, 어쩔 수 없이 마주칠 때면 핵심을 피해 딴소리를 늘어놓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 주일, 그 사람이 교회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 보더니 그가 말했다. “목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저기…감사합니다. 작년에 목사님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 일로 목사님께 화가 났지요. 하지만 목사님이 왜 그러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목사님은 제가 잘 되기를 바라셨던 거죠.”

“목사님이 우리 교회 목사님이셔서 참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애통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굳건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런 귀한 경험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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