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바꾸는 용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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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바꾸는 용서의 힘
  • 루이스 스미디스 | Lewis B. Smedes
  • 승인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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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포로를 풀어 주고 보니 그 포로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커다란 염려거리가 두 가지 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염려한다. 우리는 개인의 과거사를 다시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거기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다. 우리는 또한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염려한다. 우리는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하지만, 미래를 우리 마음대로 통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유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바람은 좌절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고칠 수 없고, 무시무시한 미래도 통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깊은 염려에 두 가지 해답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 과거를 재창조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또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심으로 미래를 통제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용서하셔서 과거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약속을 주셔서 미래를 보장하신다.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과거를 변화시키고 미래를 통제하는 그분의 능력에 동참할 수 있다. 우리도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만 한다. 우리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께 속한 이 두 가지 능력을 받을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답고, 자유로울 수 있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한길사 역간)의 뒷부분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인간 영혼의 이 두 가지 능력에 관심을 집중하며, 성경의 예수님처럼 행동할 때만이 우리의 음울한 예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한나 아렌트는 역사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는 바로 용서라고 말한다. 또 그 다음 장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인간 영혼의 이 두 가지 능력이 바로 인간의 삶을 유지해 주는 필수 요소라고 믿는다. 인간이 용서의 기술을 잃어버린다면, 약속의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짐승의 삶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은사들을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권리도 그만큼 상실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능력을 훈련할 수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용서라는 인간 행위를 이야기할 것이다. 단, 하나님의 용서보다는 인간의 용서를, 용서받는 것보다는 용서하는 행위를 살펴보려 한다.

아렌트는 역사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로 용서를 꼽는다. 사물의 자연적인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와 그 영향력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울 수 있지만, 그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역사를 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역사를 반복하는 불운을 타고 났을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역사는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구성 요소다. 우리를 역사의 굴레에서 해방해 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용서다.

아렌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용서라는 이 인간 잠재력을 재조명해 볼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일찍이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에 대해 단순히 생각만할 게 아니라 용서의 능력을 간구해야 할 강력한 이유를 제시하셨다. 내 안의 원망하는 마음은 애써 무시하고 싶겠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막 11:25).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용서에 관한 상투적인 표현들로부터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구별해 내야 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모든 용서 행위에는 고통, 영적 수술, 새출발 이렇게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인 고통은 용서가 필요한 조건을 만든다. 두 번째 단계에서 실제적인 용서가 이루어진다. 용서하는 사람이 기억 속에서 영적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다. 이 행위를 완료하고 나서 세 번째 단계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이 용서한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고통

본인이 상처를 받지 않는 한에는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상처 준 적도 없는 사람을 그저 용서하는 체한다면, 용서의 기적을 값싼 사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악한만 용서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간에, 당신이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용서가 아니라 다른 적절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상처에 용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연약한 인간으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무시하고 감수해야 할 상처들도 있다. 이런 일은 굳이 용서하려 애쓸 필요가 없고 약간의 영적 아량을 베풀면 될 일이다. 다음의 예들을 한번 생각해 보자.

불쾌감: 약속에 늦는 사람, 저녁식사 자리에서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 계산대에 줄 서 있는데 새치기하는 사람은 우리를 짜증나게 만든다.

패배감: 우리가 망할 때 반대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승진에서 탈락했는데 승진한 사람, 우리는 빈손인데 큰 상을 받은 사람, 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가는 듯한 사람. 설상가상, 이렇게 우리를 물 먹이는 사람들이 우리 친구들이라니.

모욕감: 우리를 좀 알아 봐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한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은 교수님은 졸업하고 2년이면 우리 이름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사님은 친목 모임에 우리를 초대하는 법이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 회사 상사는 따님 결혼식인데도 청첩장을 건네지 않는다.

이런 사건들은 모두 상처가 되지만, 굳이 용서가 필요한 일은 아니다. 조금 더 참고, 아량을 베풀고, 겸손하고 너그럽게 생각하면 될 일이지, 용서할 일은 아닌 것이다!

용서가 필요한 상처는 깊고 도덕적인 상처인 경우다. 깊은 상처는 사람들을 묶어 주는 관계라는 끈을 잘라 버린다. 도덕적인 상처란 잘못된 행위, 불공정한 행위, 견딜 수 없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상처들은 적당히 봐주거나 넘어가기가 힘들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무시할 수가 없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용서가 필요할 정도의 상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상처받은 사람 사이에 벽을 세운다.

용서라는 기적이 필요한 상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불성실과 배신이다. 용서가 필요한 상처 중에서 이 두 부류에 들어맞지 않는 행동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불성실한 행위는 어떤 행위를 가리키는가? 친구 혹은 가족인 누군가가 당신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불성실한 행위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신실함으로 묶여 있다. 이런 연대감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 잘 말해 준다. 인간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실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우리와 밀접한 사람이 우리를 낯선 이로 대할 때,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도랑을 파고 벽을 쌓는 셈이다. 그렇게 그는 우리의 정체성에 폭력을 가한다. “포기하다”, “버리다”, “실망시키다”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유부남이 자기 아내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다.

  대출을 해주기로 약속했던 사업 파트너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어 더 많은 수익이 예상되는 다른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승진 심사에서 당신을 추천해 주기로 약속했던 동료가 사장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약속을 어긴다.

  당신이 그렇게 원했던 큰 상을 받는 날, 아버지가 시상식에 불참하신다.

  나치 비밀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당신이 유대인인 줄 아는 이웃이 자기 집으로 피하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근다.

이런 예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특징을 보여 준다. 말로든 행동이든, 당신을 지지해 주기로 약속했던 사람들이 당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을 좀 더 압박하면, 불성실은 배신이 된다. 불성실이 잘 알던 두 사람을 남남으로 만든다면, 배신은 두 사람을 원수지간으로 만든다. 불성실한 사람은 상대방을 실망시키지만, 배신자는 상대방을 파멸로 몰아간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불성실했다. 

 예수님을 적에게 넘긴 유다는 그분을 배신했다. 

 당신을 믿고 털어놓은 내 비밀을, 그것을 악용할 만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나를 배신한 것이다. 

 당신이 내 친구임을 누누이 밝히고서 남들은 모르는 부끄러운 내 개인사를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닌다면, 당신은 나를 배신한 것이다.  

 당신이 내 형제인데 중요한 사람들 앞에서 무방비 상태인 나를 깎아내린다면, 당신은 나를 배신한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공산주의가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사실을 경찰 간부에게 고자질한 아들은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다.

이런 예들 역시 하나같이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당신 편을 들어야 마땅한 사람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적의 편에 선 것이다.

이 일들은 도덕적인 잘못, 즉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악행이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잘못이다. 이러한 일들을 겪은 사람들은 용서의 기로에 서게 된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모면하려고 용서를 쉬운 일로 격하해서는 안 된다. 당신을 옹호해야 마땅한 사람이 당신을 버리고, 당신을 위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등을 돌릴 때, 용서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영적 수술

용서의 두 번째 단계는 상처 입은 자가 상처를 준 자에게 보이는 내면의 반응과 관계가 있다. 용서하는 당사자의 머리와 가슴에서 일어나는 이 일을, 용서받는 상대방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기억 속에서 영적 수술을 감행한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잘못한 행위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저지른 가슴 아픈 행동으로부터 상대방을 분리해서, 그 사람을 재창조한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이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지만, 이후로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제 그 사람은 더 이상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당신과 멀찍이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당신에게 속한 사람이 된다. 한때는 그 사람을 악한 일에 능한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으로 본다.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러 고통스러운 과거를 안겨 준 사람을 재창조함으로 당신은 자신의 과거를 재창조한다.

당신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바꿀 수는 없다. 그가 저지른 행동은 그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의 잘못은 그에게 속해 있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 속에서 그를 재창조하면, 마음에서 행한 영적 수술로 그는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도 이렇게 일하신다. 어머니가 아이의 더러운 얼굴을 씻기듯이, 당신의 어깨에서 짐을 풀어 염소 등에 지워서 광야로 몰아내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성경의 비유들은 하나님이 기억 속에서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수술을 행하셨음을 보여 준다.

때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인 경우가 있다. 이미 죽은 사람, 우리의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기억 속에서 영적 수술을 하는 것으로 용서의 과정이 끝난다.


새출발

서로 멀어졌던 두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 비로소 용서의 기적이 완성된다. 딸과 소원했던 아버지가 딸의 손을 붙잡고 “이제 다시 애비 노릇 제대로 하고 싶구나”라고 말한다. 남편의 손을 잡은 아내는 “이제 다시 아내 노릇 제대로 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친구의 손을 잡은 사람은 “이제 다시 친구 노릇, 동료 노릇 제대로 하고 싶네. 화해하고 다시 잘 지내보세”라고 말한다.

화해는, 원래 좋은 사이였지만 멀어졌던 두 사람이 재결합하는 것이다. 화해는 함께하는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진 이상적인 장소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재결합을 시작해야 한다. 과거의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일의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도 있다. 미래도 불투명하다.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상처와 용서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의 경이로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이와 같은 용서의 기적과 우리가 이른바 용서라고 말하는 사소한 행위를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용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용서의 기적과는 아주 동떨어진 그런 행위들이 몇 가지 있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마음속에 담아두기에는 너무 사소한 일들이라서 쉽게 잊고 사는 상처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너무 끔찍해서 잊고 싶어 하는 상처도 있다. 좋지 않은 기억력과 억누르려는 충동만 있으면 잊기는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기억하고 용서할 때 진정한 기적이 일어난다.

용서는 봐주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때 그들을 면제해 준다. 남자와 여자가 날 때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 당신은 나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괴팍한 어머니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 그렇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신이 나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 사람 탓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다. 용서란 봐주고 싶지 않을 때 가능하다. 먼저 책임을 묻고 난 다음에야 용서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태를 얼버무리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태를 무마해서 출세하기도 한다. 어머니들은 우리 입을 막고, 갈등을 은폐한다. 우리 고통을 숨겨서 처음부터 용서를 원천봉쇄한다. 매니저들은 사태를 무마해서 큰돈을 챙기기도 한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도록 조정한다. 어머니와 매니저들은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고수들이다. 그들은 상처를 억제하여 용서를 사전에 방지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처를 인정하고 원한을 표출할 때에만 용서가 가능하다.

사랑이라는 창조적 폭력을 통해, 당신은 뒤바꿀 수 없는 과거에 다가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행동만을 떼어낸 다음, 마음에서 그 상처를 지워버린다. 당신이 이 것을 해낸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한 것이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이 일을 하겠다는 결정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용서는 놀라운 은혜다. 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에게 용서는 너무도 잔인하고 불공평한 처사 같다. 직설적인 도덕 감각은 죄 지은 사람은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용서는 개나 갖다 주라는 것이다. 용서는 말도 안 되는 사기라는 것이다.

시몬 비젠탈
(Simon Wiesenthal)을 예로 들어보자. 비젠탈은 당시 폴란드 렘베르크의 야노프스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독일군이 부상병들을 위해 임시로 병원으로 개조한 창고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저녁이 되자 간호사가 비젠탈의 손을 끌어 젊은 나치 친위대원에게 데리고 갔다. 누런 얼룩으로 지저분한 붕대가 얼굴을 온통 감싸고 있어서, 거즈 뒤로 두 눈만 빠끔 보일 뿐이었다.

스물한 살 정도 되었을까. 병사는 비젠탈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유대인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죽기 전에, 자신이 무기력한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용서받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비젠탈에게 자기 부대가 불을 지른 집에서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대인 가족에게 총을 겨눈 끔찍한 사건을 세세히 이야기했다.

비젠탈은 죽어가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순진했던 젊은이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 사연을 말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비젠탈은 병사의 손을 뿌리치고 아무 말 없이 헛간에서 걸어 나왔다. 용서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비젠탈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기 행동이 옳았다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기록한 「해바라기」
(The Sunflower, 뜨인돌 역간)라는 책을 마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32명의 인사―대부분 유대인이었다―가 이 쉽지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대부분은 비젠탈이 옳았다고 답변했다. 그가 친위대 병사를 용서하지 않은 게 공평하다는 것이다.

임종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어마어마한 악행을 유언으로 남기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의 말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른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그의 악행을 용서할 권리가 비젠탈에게 있는 것인가? 만약 비젠탈이 그 병사를 용서한다면, 홀로코스트가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그의 질문에 답변한 사람 중에는 “친위대 병사가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끔찍한 일은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부당하게 상처를 받으면 같은 심정을 느낀다. 때로는 증오야말로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서 남길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경멸은 우리의 유일한 무기다. 복수하려는 계획은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용서가 초인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쉽게 용서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이 제시하는 용서라는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엄격한 공평을 잣대로 잘못을 분명히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도덕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용서는 불공평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용서야말로 공평해질 수 있는 더 나은 길이라는 것이 유일한 답변이다.

첫째, 용서는 우리를 불공평한 과거에서 해방시켜 공평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한다. 사람들은 이미 우리에게 부당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과거다. 작정한다면, 얼마든지 과거에 얽매여 살 수 있다. 심지어 과거의 잘못을 부풀릴 수도 있다. 용서하지 않기로 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수단은 복수뿐이다. 하지만 복수는 우리를 과거에 고착시킬 뿐  아니라 계속해서 과거를 되풀이하게 만든다.

복수는 꼭 그만큼만 되갚아 주지 않는다. 복수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계산법으로 잘못을 셈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상처와 자기가 준 상처의 무게를 다르게 느끼므로 원수 사이에 흡족할 만한 복수란 있을 수 없다. 몇 번이나 침공하면 홀로코스트와 맞먹겠는가? 혹평과 모욕을 몇 번씩이나 주고받아야 공평할까? 알 수 없다. 이것이 모든 복수의 숙명인 것이다.

용서하면 복수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와 두 사람 모두 계속되는 잘못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출발을 할 수 있다. 마치 상대방이 내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은 것처럼, 전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또다시 용서할 일이 생길 것이다. 정의로 향하는 출입문은 계속해서 닫힐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용서는 그 문을 다시 여는 유일한 대안으로 남는다.

둘째로, 용서는 용서한 사람에게 공평을 가져다준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가장 심각한 불공평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용서를 거부한다면, 더 심각한 불공평을 자기에게 부과할 뿐이다.

고통스러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공평일까? 케케묵은 불공평한 상처에 계속해서 쓰러지는 것이 공평일까? 복수는 당신의 영혼에 비디오테이프를 틀어 놓고, 절대로 끄지 않는다. 복수는 당신 마음속에 고통스러운 장면을 계속 되풀이해서 보여 준다. 그리고 계속해서 반복 재생을 하게끔 만든다. 그 장면을 되풀이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계속해서 느낀다. 그게 공평일까?

용서하면 고통스러운 기억의 비디오테이프를 끌 수 있다. 용서하면 해방된다. 용서는 당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공평한 고통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 용서해야 할까? 용서는 공평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불공평한 고통에 끊임없이 괴로워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 나치 친위대원이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끝없이 고통만 되풀이 될 뿐이다.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이제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기 만족을 위한 용서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할 수도 없다.” 맞다. 윌리엄스의 말대로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용서한다. 가끔은! 어설픈 아마추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용서한다. 용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세 가지 있다.

천천히 용서한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많지는 않다. 심각한 상처를 신속하게 용서해 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바라서는 안 된다.

C. S. 루이스는 어렸을 적에 괴물 같은 선생을 만났다. 그는 평생 그 사디스트 선생을 혐오했다. 그러나 죽음을 몇 달 앞두고, 루이스는 미국인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매리,…몇 주 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소. 내 유년시절을 망친 비정한 학교 선생을 결국 용서했다는 사실 말이오.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애썼는지 모른다오.” 사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지만, 결국 용서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오래 참으신다. 우리도 용서와 같은 힘겨운 기적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용서한다: 혼자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못할 것 같다. 나와 같이 상처받고, 나와 같이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용서에 이르기까지 심각하게 고민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용서란 사회화된 용서뿐이다. 혼자서도 용서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과거의 고통을 틀어 주는 비디오테이프를 끊임없이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용서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찾으라. 그들이 도와줄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한다: 근본적으로는,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받는 기분과 용서하는 기분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죄를 짓기도 하고 누군가의 죄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는 복잡한 존재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받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코리 텐 붐
(Corrie Ten Boom) 여사만큼 이 진리를 잘 보여 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코리 텐 붐은 강제수용소에서 모욕과 굴욕을 견디며 전쟁을 견뎠다. 특히, 알몸 소독을 할때 간수들이 곁눈질로 여성 죄수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경험이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코리는 이 모든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냈고, 하나님의 은혜로, 소독실을 지키던 악마 같은 사람들도 용서하게 되었다.

이후에 코리는 사람들에게, 모든 유럽 사람들에게 용서에 대해 설교했다. 네덜란드 블루멘달에서, 미국에서, 또 어느 주일에는 독일 뮌헨에서도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다. 설교를 마친 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네, 여사님, 여사님 말씀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코리는 그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그 얼굴은 소독실에서 곁눈질하던, 음란하고 조롱이 가득했던 친위대 간수의 얼굴이었다.

코리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코리는 다 용서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앞에 멀쩡히 서 있는 간수를 보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수치심과 충격 가운데서 코리는 기도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저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용서하는 사람으로 유명해진 자신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부정직한 내면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굳어있던 손이 눈 녹듯 풀어졌다. 얼음장 같던 증오가 녹아내렸다.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느꼈고, 그리고 그를 용서했다.
 
드디어 해방, 드디어 해방, 드디어 해방되었으니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돌이킬 수 없는 역사에 대한 그 유일한 치유책인 용서가 우리를 해방시켰다.

용서란 20킬로그램짜리 짐을 지고 15킬로미터 넘게 산을 오른 다음 그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란 하프 마라톤을 한 다음,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다.
용서란 포로를 풀어 주고 보니, 그 포로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용서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과거로 돌아가 기억 속에서 그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새출발을 하는 것이다.
용서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심장박동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다. 용서란 가장 강력한 사랑의 파도 꼭대기에 올라타는 것이다.

잔인하게 불공평한 역사에서 유일한 피난처는, 미래의 창조적인 가능성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은, 용서의 기적뿐이다. CTK 2009:7

 


루이스 스미디스 1977년부터 2002년 죽을 때까지 풀러신학교에서 종교철학, 신학, 윤리학을 가르쳤으며 대표작으로 「용서의 기술」(규장)과 「용서의 미학」(이레서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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