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더십 > 마크 뷰캐넌의 '말씀으로'
다니엘처럼부패한 세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요나와 에스더의 사례, 그리고 더 나은 대안을 찾아서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09.08.26  
트위터 페이스북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지자다. 우리와 섬뜩할 정도로 비슷하지 않은가? 나는 머리가 벗겨졌는데, 요나도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 넝쿨 그늘이 사라지고 따가운 햇볕이 내리쪼인다고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낼 이유가 없잖은가? 나는 체구가 아담한 편인데, 요나도 키가 작아 땅딸막하고 깐깐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못 폭탄(nail bomb: 폭탄이 터지면서 폭발물 내부의 못이 튀어나가 사람들에게 치명적 상해를 가하게 된다/역주)처럼, 까다로운 성깔이 자그마한 체구에 압축되어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요나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 방해받는 것을 몹시 싫어했는데, 그런 면도 내 성향과 아주 흡사하다. 요나는 소유욕이 강하고, 문제를 회피하며, 방어적이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게도 낯설지 않은 습성들이다.

같은 이유로, 요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선지자이기도 하다. 그를 보면 영락없는 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다니엘의 지혜와 이사야의 정의감, 에스겔의 신앙을 소유하고 싶다. 엘리야의 용기, 예레미야의 인내, 스가랴의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싶다.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고, 말보다 앞서 달리며, 가뭄과 대홍수를 호령하고, 번개처럼 저주를, 만나처럼 복을 내리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나는 그저 요나와 같아 괴로울 뿐이다.

그런데 더 큰 고민거리가 있다. 교회도 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 특히 북미의 교회가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회피하고, 스스로 선하다고 으스대며, 외인들에게는 골을 잘 낸다. 호전적이면서도 내숭을 떠는 안정주의자들은 자신의 안정을 위협하는 대상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악의를 품는다.

요나와 똑같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에스더와 같다는 것이다. 에스더는 왕후라는 신분을 내세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위장하려 했다. 현실을 직시하기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는 남들과 비슷하기를 바란다. 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이방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요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한다. 남들은 다 지옥에 가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에스더는 다른 사람들 속에 묻혀 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독특함(distinctiveness)을 기꺼이 내던진다.

사람들의 이런 두 가지 속내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인기가 없다.

바로 그래서 나는 이 두 이야기에 아주 흥미를 느끼면서, 또 염려스럽다. 요나와 그의 공동체는 아시리아에 포로로 잡혀갈 잠재적인 위험에 처해 있다. 요나는 그런 위험이 있는 나라에 선교사로 가라는 부름을 받는다. 에스더와 그의 공동체는 페르시아 제국의 포로로 노골적인 압제를 당하고 있다. 에스더는 이제 자신의 공동체를 멸망시키려 하는 이 나라에 맞서라는 부름을 받는다.

요나와 에스더, 두 이야기 모두 직접적으로 성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물론, 에스더서의 행간에는 암시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둘 다 이방 문화, 즉 전염성이 강하고 유혹적이며 강제적이고 하나님의 생각과 정반대인 문화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를 다루며, 그런 문화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나님 백성의 방식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야기 모두 우리로 하여금 성윤리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영적, 윤리적 이슈들을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요나는 정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는 자신의 문화를 위협하는 문화를 꺼린다. 그의 태도는 “우리를 그냥 좀 내버려 둬요”라는 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퍼붓는다. 그는 자신의 독특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그는 승선한 배의 선원들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말한다. 그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요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그것을 나누는 데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불러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백성에게 가라고 명령하시자 요나는,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라며, 도망친다. 그는 그런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이 억지로 등을 떠밀자, 요나는 마지못해 그곳에 가서 임박한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고는, 고소하게 생각하며 결과가 어찌 되나 지켜본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자, 요나는 언짢은 나머지 크게 화를 낸다. ‘내 진작부터 하나님이 그러실 줄 알았지’ 하면서 툴툴대다가 자기 연민에 빠진다.

이방 문화에 대한 요나의 태도는 교회가 오랫동안 취해 온 전략이다. 외부인은 피하라. 그럴 수 없다면, 대적하라. 유감스러운 상황에는 개탄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구하라. 불순종한 이들에게 닥칠 형벌을 기분 좋게 상상해 보라. 이 모든 과정을 가능한 편안하게 즐기라. 그러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실제로 임하지 않는다면? 실컷 골을 내라.

이 대목에서 우리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일부 보수 교회의 반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데, 최근 우리 정부는 국민 대부분의 기대와는 달리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일이 있기 몇 달 전, 나는 이 문제를 위해 소집된 연합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격한 감정이 드러났다.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의 논조는 예상보다 더 심했다. 마치 요나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강경하고, 남의 불행에 기뻐하며, 자기 의에 가득 찬 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수라는 주제에 금세 흥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수를 생생한 비유로 표현해 냈다.

여기에는 영적인 문제도 있지만, 전술적인 문제도 있다. 영적으로는, 우리가 먹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피가 부족하면 심각한 가슴앓이 증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전술적인 측면에서, 이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이 아니다. 교회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마가복음 2장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신 것을 알고, 필요하다면 지붕까지 뜯어내어 병든 친구를 집안으로 들여가려 했다.

나는 동성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음,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완고하다. 성을 잘 낸다. 편협하다. 증오에 가득 차 있다. 무섭다 등등.  

물론 이것은 좀 과장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연합 기도 모임의 분위기로 봐서는, 동성애자들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곧 모든 사람들을 자비로우신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고 계신다면 어떻게 될까? 어찌어찌 해서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악의와 호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응했다. 하지만, 심판은 현실이다.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 없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이다. 

요나는 심판이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줄 몰랐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심판과 초청이 뒤엉켜 있다. 심판을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가슴 아파 한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그 인자하심이 교회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모든 종족과 언어―거기에는 니느웨도 포함된다―에서 나온 열 사람이 한 신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슥 8:23)고 말할 때 교회의 선교적 역할은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자기 원수가 회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시온의 노래를 부르면서 교회에 들어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이 요나의 교회에 와서 자기네 음악이랍시고 희한한 노래를 부르는 꼴은 절대 못 볼 사람이다. 그는 그들이 마땅히 대가를 치르고 고통 받기를 바란다. 요나가 원하는 것은 심판이다. 자비가 아니다.

내 생각에, 요나의 윤리적 독단주의는 그의 신학적인 이중성을 은폐하려는 수단이다. 독단주의는 대개 그렇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시기한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으스대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솔직하지 못하다. 요나가 보기에, 하나님은 너무 엄하시고 너무 관대하시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는 엄하시고, 원수에게는 관대하시다. 요나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이 편애가 심하신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태도를 취하는 교회들의 숨은 동기가 아닌가 싶다. 분노하며 정죄하는 자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불안감을 위장하려는 가면이 아닐까?

칼 융은 “광신은 의심의 과잉보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이와 같은 신학의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지 않은 것은 무조건 반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문제라고 지적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의심을 과잉보상했다.

요나는 세상 문화를 정죄하기 원한다. 세상 문화가 완전히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에게는 세속 문화가 돌이켜 구속받고 하나님의 선한 유산을 나누어 갖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어쨌든, 요나 본인이 아직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 못했으므로, 친구가 되었건 원수가 되었건 그들도 함께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자고 초대하는 일은 그에게 불가능하다.

문제는 또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깨닫기 이전의 에스더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에스더는 세속 문화를 대하는 문제에서 완전히 정반대의 입장으로 나아간다.

요나는 세속 문화를 피하고, 비난하고, 저주한다. 에스더는 세속 문화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격찬한다. 

다수의 초기 해석자들과 주석가들은 에스더(와 에스더서가 묘사하는 유대 공동체)를 세상과 타협한 일종의 반이교도(semi-pagan) 교회로 보았다. 현대 해석자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을 유형학적으로 읽기를 거부하지만(타당한 이유가 있다), 에스더는 적대적인 문화에 순응한 예시로 유용할 것이다.

에스더는 남들과 똑같아 보이려고 세상 문화가 정한 기준을 대부분 따른다. 당대의 왕후처럼 옷차림을 하고, 시대의 대세에 찬동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대목에서는 대다수의 주류 교회들(mainline churches, 북미 지역에서 ‘주류 교회’는 대체로 자유주의적이다/편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캐나다에서 논란이 된 동성 결혼 문제에서, 주류 교회들은 모두 시대정신을 따랐다. 그들은 이방 왕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한다. 캐나다 성공회는 심지어 이의를 제기하는 교회들을 추방하고 담당 교역자의 성직을 몰수하고 있다. 교회가 성 문제에 관한 당대 문화의 사고를 보증하는 것 이외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런 교단의 지도자들이 보기에 중세 신앙으로 후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새 천년 시대를 산다”는 것이 그들의 슬로건이다. 시대와 함께 변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요나와 바리새인이 신학적으로 동류였다면, 에스더는 사두개인과 신학 동지였다. 사두개인들은 신실함보다 정략적 이득을 더 중요시했다(두 가지를 동등시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그들이 보기에 가장 심각한 죄는 세상 문화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최신 트렌드를 신속하게 수용하여 그 수혜를 한시라도 빨리 받는 것이었다. 

물론, 에스더는 결국 눈을 떴다. 에스더가 간절히 편입되고자 했던 그 문화가 자신과 자기 백성을 해하려는 복병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슬아슬한 시점에 깨달은 것이다. 그제야 에스더는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여 유배지에서의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에스더도 세속 문화에 푹 빠져 살았다. 세속 문화에 맞서거나 그 혜택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에스더 역시 간섭을 원치 않지만, 요나와는 성격이 다르다. 세속 문화의 간섭을 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요나와 에스더는 교회가 오늘날의 성적 가치관에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표한다. 

회피와 비난.

수용과 격찬.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이 두 가지 태도를 모두 볼 수 있다. 최근에 나는 강단에서,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법정이 아니라 집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사회 전체의 이혼율과 막상막하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이혼율을 보여 주는 통계를 인용했다. 또 보수주의 교회 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배우자 학대를 언급했다. 많은 교인 부부들 사이에도 불화가 만연해 있다고 이야기했다. 부부 사이의 친밀감을 떨어뜨리는 인터넷 포르노가 암암리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내부 문제는 참견하지 말고,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정죄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요나다.

복음주의자들의 혼전 성관계 비율도 이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점을 언급할 때마다, 몇몇 교인들은 나를 조용히 불러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는 식으로 말을 한다. 어린애 몇 명이 침대에서 좀 어울렸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의 위기가 닥치고, 아마존의 열대림이 사라져 가며, 향유고래가 멸종 위기인 마당에 웬 호들갑인가? 최근,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어느 학부모가 십대 딸에게 피임약 복용을 종용했다. 소녀는 부모를 앉혀 놓고 자기는 결혼 전까지 반드시 순결을 지킬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그런데 부모는 딸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고, 소녀는 피임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에스더다.

대안은 없을까?
나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의 가장 훌륭한 모범으로 다니엘을 떠올려 본다. 그는 에스더와 요나, 두 극단 사이에 서 있다. 다니엘은 에스더와 마찬가지로 포로시대―바벨론,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에 살았다. 이스라엘을 지배한 민족들은 대부분 다니엘의 종교적 확신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가도 그것이 자신들에게 문제가 되면 곧바로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런 문화 속에서 다니엘은 자기 위치를 확립해야 했다. 양심에 거리낌없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니엘은 요나처럼 뿌루퉁하고 오만한 태도도, 에스더처럼 수줍어하며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딱 부러지게 단호하고 말없이 신실했다. 세속 문화, 즉 그들의 교육 제도나 정치 구조, 그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따서 피지배인의 이름을 붙이는 습관 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학교에 다니고, 그들의 정부에서 일하며, 그의 이름이 곧 그들 신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만큼은 금기였다. 바로 왕의 음식이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음식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음식은 이방 신에게 바친 음식이었다.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은 항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음식을 먹으면 그들의 신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고기나 소스, 포도주와 다과를 거부하고, 조리하지 않은 날 푸성귀로 연명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근근이 목숨만 유지할 줄 알았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오히려 몸이 좋아졌다. 함께 교육을 받은 다른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기력이 넘쳤다.

우리는 세속 문화의 가르침을 받고 더 통찰력 있는 확신을 소유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정부에서 일하며 근면과 성실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방 신의 이름을 딴 이름을 받는다고(내 이름 마크는 전쟁의 신이라는 뜻이다!) 믿음이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왕의 음식을 먹는 것만큼은 금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왕의 음식은 과연 무엇을 가리킬까? 하나님의 백성이 관여했다가는 틀림없이 망하게 되는 우리 문화의 요소는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의 성윤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문화에는 순결이 없다. 교회―특히 요나―는 이 부분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 우리는 항상 윤리를 강요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순결을 윤리라고 하는 것은 친밀함을 적당히 아는 사이라고 하거나, 사랑은 관용이라고 하거나 하나 됨은 평등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순결은 단순히 고차원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독자적인 범주다. 

나는 우리가 윤리를 설교하는 것을 그만두고 순결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 소독만 한 물, 염소 살균한 물, 요오드를 떨어뜨린 물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갈증을 일으키고 해소하는 것은 바로 순수한 물이다.

다니엘은 순수한 방식을 취한다. 그는 다른 신에게 바친 음식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다니엘의 이야기에 분명히 나타난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세속 왕의 마음을 얻는 유일한 방법. 다니엘이 가는 곳마다, 왕은 하나님 한 분만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윤리가 아니라 순결을 강조해야 한다. 그들에게 다니엘처럼 살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시들지 않고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에스더와 비슷한 한 교회의 초청을 받아 예배라는 주제로 일일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초청을 받고는 깜짝 놀랐다. 그 교회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를 초청한 목사님은 그 교회 목사님들이 대부분 나를 경계하는 눈치라고 말해 주셨다. 대놓고 싫어하는 분도 계시다고 했다. 그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나를 비난한 목사님도 있었단다. 그분은 복음주의자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이 사람이 우리와 무슨 공통점이 있나요?”라고 물었단다.

나를 초대한 목사님은 “직접 오셔서 한번 보시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의 남녀 예배 인도자와 댄서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방문했다. 세미나에 등록한 교인은 그 수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 교회에서 가장 작은 장소를 잡았는데도, 사람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었다. 나는 나를 싫어한다는 그분을 예의 주시했다. 처음 보는 분이었지만, 그분이 세미나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해충 싹쓸이라도 나선 듯한 보무였다. 떡하니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찬양을 시작하면서 청중에게 함께 일어나 찬양하자고 했지만, 그는 앉은 자리에서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OHP 화면에 뜨는 가사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점심식사 후에 선택식 강좌가 있었다. 댄서들은 기본 동작을 가르쳤고, 반주자들은 기초 작곡법을 강연했다. 나는 예배의 기초 신학을 가르쳤다. 그분은 내 강연에 들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싸움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1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그분이 폭발했다. 한 자매님이 주류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손상했는지 이야기하자, 이 여성분과 논쟁을 시작했다. 그 목사님은 복음주의가 인류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논란이 가열되자, 사회를 보시던 목사님이 중재에 나섰다. 

목사님은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내셨다. “음, 저는 자유주의 전통이 교회학의 측면에서는 다소 편협하고, 그 신학에서는 대체적으로 관용적이라고 봅니다. 복음주의 전통은 신학은 엄격하게 편협한 반면, 교회학에서는 느슨한 편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늘 참석하신 분 중에 목사님이 계신가요?” 하고 내가 물었다. 잔뜩 성이 난 그분을 포함해서, 몇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오늘 제가 데려온 젊은이들이 마음에 드시나요?”

성난 목사님을 비롯해 다들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러분이 목회하시는 교회에도 이런 청년들이 많습니까? 열정적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교회와 교회의 선교에 헌신한 젊은이들 말입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여러분 교회의 젊은이들도 이렇게 되면 좋겠지요?”

다들 동의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여러분의 교회에서 이런 청년들을 볼 수 없는 까닭은 여러분의 관대한 신학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신학은 청년 집단의 1/3을 내치는 데 일조했습니다. 또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관대한 신학이 지지하는 성윤리는 이 젊은이들에게서 친밀감과 희망을 앗아갔습니다. 이 신학이 교회에서 청년들을 몰아냈습니다.”

“좋은 방도가 없냐고요? 여러분이 진심으로 이런 청년들,그저 자리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 갈 청년들을 교회에서 보고 싶으시다면, 조금은 덜 관대해지는 편을 고려해 보셔야 할 겁니다.”

계속해서 나는 청년들에게 윤리를 가르치지 말고 순결을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을 다니엘로 성장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그 차이점은 여러분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나를 싫어한다던 그분을 슬쩍 쳐다보았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사람이 내게 넌덜머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중에 집에 가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마지막 강의까지 자리를 지켰다.

감사하게도, 찬양할 때 그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를 맞듯이 팔을 펴고 찬양을 부르기까지 했다.
 
그분은 신나게 찬양을 했다. “오, 신실하신 주”라고 고백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분이 진심으로 그렇게 고백했다고 믿는다.

다니엘은 사람들에게 그런 영향을 미친다. CTK 2009:8

마크 뷰캐넌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밴드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68길 98 5층  |  대표전화 : 080-586-7726  |  팩스 : 02-6919-1095
발행인 : 오정현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은홍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홍  |  사업자등록번호 : 214-88-27116  |  통신판매업신고 : 제01-2602호
Copyright © 2018 Christianity Today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