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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불공평하지만불의에 맞닥뜨려 좌절할 때 하나님은 속삭이신다. 네가 옳은 일을 한다면, 형통할 것이다.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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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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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는 동네에서 한 어린 소녀가 죽어가고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케이틀린이다. 내 딸 사라는 케이틀린과 같이 유치원에 다녔다. 내가 사라를 데리러 갈 때면 사라와 케이틀린은 함께 서로 속이 울렁거리도록 그네를 높이 밀어주거나, 모래밭에서 망가진 아크로폴리스 모형에 푸석푸석한 모래를 쌓아올리며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장난꾸러기에, 시시덕거리고, 촐랑거리며, 웃고 춤추고 울고 노래하는, 활기차고 기쁨에 넘치는 네 살짜리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케이틀린의 엄마 보니가 아이를 데리러 온 어느 날, 무언가 끔찍하게 잘못되어 있었다. 보니는 내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의 삶이 영원히 달라져 버렸음을 알게 된 날이 있으신가요? 그 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저 재빨리 지나쳐 버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그런 날 말입니다.

1997년 2월 28일, 저는 케이틀린을 데리러 유치원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는 운동장에 서서 잔디밭을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아이 친구 중 하나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케이틀린, 엄마 오셨어.” 저도 아이에게 말을 붙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저는 딸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아이의 턱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때, 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아이의 눈은 멍해 보였고, 케이틀린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즉시 유치원 선생님을 불렀습니다. 딸아이가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제 무릎 위에 뉘였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가 반응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습니다. 케이틀린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맞지 않았고,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계속 늘어져 있었지요.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저는 아이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자리에 눕히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울면서 엄마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구급요원들이 도착했을 때, 저는 아이를 안고 입 맞추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아이가 발작을 일으켰지만 좋아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몇 가지 검사를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졌지요."
 
검사 결과는 초기 진단과 같았다. 케이틀린은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케이틀린은 괜찮지 않았다. 아이는 급속도로 허약해져 갔다. 발음이 어눌해지기 시작했고, 물건을 더듬어 찾게 되었으며 자주 발부리가 걸려 비틀거렸다. 아이는 점점 더 나빠졌다. 물건을 잡을 수도 없었다. 벽이나 문기둥에 부딪혔고, 수없이 넘어졌다. 말하는 것도 점점 나빠졌다. 말을 하면 목구멍이 그르렁거리거나 목에서 걸리는 소리, 날카롭게 째지는 소리, 애처롭게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또 한 명의 네 살짜리 아이는 점점 케이틀린을 무서워했다. 어떤 아이들은 놀리기도 했다.

의사는 계속해서 여러 검사를 지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틀린의 부모는 두려움에 떨면서 예상하고 있던 소식을 들었다. 케이틀린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병은 바텐병이었다. 희귀한 선천성 신경 질환으로, 현재로서는 치료약이 없다. 아이의 근육은 굳어가고 있다. 지금은 거의 나무처럼 딱딱한데, 곧 돌처럼 굳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삼킬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질 것이다. 케이틀린의 부모와 오빠,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모와 고모, 삼촌과 사촌들, 아이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 교회 식구들, 모두 예쁘고 어린 케이틀린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케이틀린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인데, 눈물로 침대를 적셨다. 그녀는 주먹에서 피가 나도록 하늘 문을 두드리며 하나님이 문을 열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녀는 참으로 경건하게 교회에 출석하고 사람들을 돌본다. 사람들은 기도한다. 다른 교회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기도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위해 기도한다. 부모에게 힘을 주시기를, 의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케이틀린에게 위로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로 하나님이 케이틀린을 치료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아직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았다. 솔직히 그분이 치료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케이틀린 옆집에 사는 사람은 복권에 당첨되었다. 60만 달러가 넘는 액수였다. 나는 그들이 예쁜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내가 듣기로는 그 집값은 이미 다 지불을 해서 갚아야 할 융자도 없다. 그런 지 이미 오래다. 이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되기 전에도 이미 만족스럽고 풍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왜 그들이 복권을 사는지, 혹은 그들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왜 복권을 사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들이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지, 혹은 어떤 기도든 해보기는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복권에 당첨되었고, 6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옆집에서, 케이틀린은 죽어가고 있다.

균형을 잃은 삶
삶은 불공평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횡재를 하거나 함정에 빠지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일은 순서도 없고 공평하게 찾아오지도 않는다. 누가 아플까? 누가 부자가 될까? 누가 아름다워질까? 누가 볼썽사나운 모습이 될까? 이런 일들을 지배하는 어떤 논리 법칙이 있는가? 그리고 때로는―이런 경우 더 곤혹스럽고, 더 괴롭다―그런 불공평함이 무작위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누군가의 인생을 파괴하기 위해 고안된 위장 폭탄처럼 보인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깊고 진심어린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한 남자를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몰두하고 그 말씀을 전한다. 그는 세속적인 삶과 거리가 먼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일도 잘 되는 것 같지 않다. 그는 자영업을 하고 있다. 그는 숙달된 기술과 폭넓은 지식, 그리고 수년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열심히 일한다. 그에게 문제는 일을 얻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가 한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를 고용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거나, 그들이 합의한 것보다 훨씬 적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항상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런 세월이 몇 년 지나면, 이는 거대한 음모, 즉 선한 사람이 하나님을 저주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이 사탄과 함께 하셨던 욥의 거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거룩한 광야에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남자가 마음이 무뎌지고 결국 좌절해 세속적인 삶으로 돌아가고픈 유혹에 넘어가는지 알아보기 위한 음모 말이다.

돈 문제는 어려움의 일부일 뿐이다. 이 남자의 인생에는 재앙이 매복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주에는, 월세를 지불하지 못해서 집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24시간 내에 사용 요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가스와 전기를 끊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이 중 하나가 가슴이 무너지게 하는 일을 저지르고, 식탁 위에 올려놓을 음식은 없고, 그 와중에 차는 고장이 나고, 온수기는 터지고, 또 한 사람의 고객이 그에게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사소한 사건 사고들은 계속 일어난다. 이는 마치 출애굽의 재앙들 같다. 모기, 파리, 메뚜기, 개구리들이 연달아 떼를 지어 들끓고, 공격하고, 성가시게 굴고, 삼켜버린다.

그리고 그는 선한 사람들 중 하나다.

최근에 나는 그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형편이 좀 나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기대치를 높이지 않으려고 해요.”

삶은 불공평하다.

시편 기자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고, 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신선한 솔직함으로 그것에 대해 썼다.

"나는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시 73:2-5, 13-14)

내 친구도 이런 시를 쓸 수 있을 듯하다.

더욱더 씁쓸한 이야기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복잡하고, 더 씁쓸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로 시작한다. 그들을 형과 아우, 돌아온 탕자와 그의 형, 에서와 야곱, 가인과 아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딸이라고 하고 제인과 베키라고 부르자. 혼란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는 제인은 좋아하고 베키는 좋아하지 않는다. 제인에게는 맹목적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베키는 경멸하고 꾸짖기만 하는 것 같다. 제인이 하는 모든 일은 박수를 받고 더 큰 인정과 칭찬을 받지만, 베키가 하는 일은 어쩐지 모두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다. 제인이 만지면 금이 되고, 베키가 만지면 먼지가 되어 버린다. 이는 아버지의 소행이 아닌가?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는 고전적인 사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좀 더 잘 살펴보자. 제인과 베키 둘 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다. 둘 다 십일조를 내고, 둘 다 어떻게든 사역에 참여하여 섬긴다. 둘 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주님을 사랑한다. 사실, 당신에게 누가 더 경건하고, 신실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성실한지 판단하고, 그에 따라 사랑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베키를 선택할 것이다.

제인은…그냥, 제인이다. 그녀는 속임수를 쓰거나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할 수도 있다. 터무니없이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할 수도 있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교활하고 의뭉스러운 방법을 알고 있다. 그녀는 적당히 겸손한 척 가면을 쓰고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티내지 않고 자신과 거의 상관없는 좋은 일들에 대해 공을 취하는 법을 안다. 그녀는 (그런 일을 꾸미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대부분 자기가 일으킨 나쁜 일들에 대한 비난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제인이 나이를 먹으면서, 상황은 점점 더 좋아지기만 한다. 자녀들은 똑똑하고, 예쁘고, 인기 있다.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둘 다 자신감 있으며 어른들 사이에서는 예의바르게 행동한다. 제인의 남편은 얼마 전 또 승진을 했고, 승진과 함께 보너스도 받았다. 더구나 회사는 디즈니 월드로 가족 여행을 가는 비용을 내주기로 했다. 제인은 집을 비우는 동안 새로운 일광욕실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실은 작년에 그걸 증축하고 싶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새 차를 사고 나니까 여유가 없었지요. 그런데 남편이 승진을 하면서 (여기서 그녀의 목소리는 짐짓 음모라도 꾸미는 양 속삭이며 낮아진다) 상당한 수당을  받았어요. 그래서 올해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지요. 사실 그건 여유를 부리는 것도 아니에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 특별한 공간을 잘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식물들이 지금은 그리 잘 자라지 않는데, 일광욕실을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정말 좋은 게 뭔지 아세요? 플로리다에 가 있는 동안 공사가 전부 끝날 예정이라서, 우리는 그 먼지와 소음과 난장판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인부들이 쾅쾅거리며 드나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죠?”

베키는 틀림없이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베키의 아이들은 특별히 똑똑하거나, 예쁘거나, 인기가 좋지 않다. 아이들은 덧니가 났다. 남편은 컴퓨터 부품 영업사원으로 일하는데, 지난 5년 동안 보잘것없는 봉급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이들의 치아를 교정해 줄 여유가 없다. 그 집 장남은 학교 식당 쓰레기통에 불을 붙여 일주일 동안 정학 처분을 받았다. 딸아이는 뚱뚱한데다 외모도 형편없어서 이제 겨우 12살인데 우울해 한다. 매일 아침, 딸에게 옷을 입혀 학교에 가게 하려는 엄마와 이를 싫어하는 딸이 서로 소리를 지르며 다툰다. 오늘 남편은 집에 돌아와 회사가 올해도 또 손실을 봐서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8명의 직원을 해고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는 말을 했다. 베키는 속이 메슥거렸다. 왠지 그중 한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때때로 베키는 자기가 무얼 잘못한 것일까, 하나님을 거역하는 무슨 일을 한 걸까, 그분을 화나게 하고, 그분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어떤 일을 한 걸까 생각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좌불안석이다. 길버트 존스가 죽기를 바랐던 7학년 때가 그때였을까? 아니면 십대 때 세 친구와 함께 분신사바를 했던 때가 그때였을까? 아니면 2년 전에 왜 그녀의 가족들이 6주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는지 목사님께 거짓말을 했을 때였을까? 그게 그거였나? 베키는 자신이 제대로 기도하지 않거나 충분히 기도하지 않고, 철저히 회개하지 않고, 온전히 선한 동기로 봉사하지 않는 것인지 염려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그런 사소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벌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화를 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제인을 생각하고 적의를 느낀다. 그러면 그녀는 또다시 제인에 대해 그런 느낌이 든 것에 죄책감이 들고, 하나님이 질투 때문에 자신을 벌하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6-7).

이 말씀은 토라진 가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퉁명스런 반응이다. 어느 모로 보나 가인은 하나님이 그가 아니라 동생 아벨을 좋아하시는 것 때문에 골이 났다. 실제로 하나님이 가족 중의 한 사람을 편애하는 성향은 성경의 주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에서보다 야곱을, 다른 형제들보다 요셉을, 다른 형제들이나 사울보다 다윗을, 탕자의 형보다 탕자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유대인을, 유대인보다 이방인을. 이는 불리한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몹시 화나는 일이다.

우리 교회의 한 남자는 그 지역의 기독교 고등학교 교사인데, 9월 초 어느 날 아침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 해 상급생 교실의 모토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다”였는데, 이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그의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가인이 대답했던 분노에 찬 반박을 뒤집은 것이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 본문을 오랫동안 읽지 않았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나는 몇 시간만 달라고 요청했다. 그동안 그 이야기를 읽고 깊게 생각한 후에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한 번 더 읽었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특별한 압박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압박을 느꼈다. 이 이야기에서 빈틈없이 말끔한 도덕적 브로마이드를 빼내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나는 깨끗하고 반짝이는 귀중한 진리와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윤리적 원칙을 캐내기 위해 긴장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가인의 분노와 우울한 표정을 더 깊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감정이 정당하고, 그의 상황이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인과 함께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남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잘 들으세요,” 내가 말했다. “제가 지금 좀 할 말이 궁색합니다. 하지만 제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삶은 불공평하다. 그걸 이해하라.’”

그 남자는 내게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인은 계속해서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는 곳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그림자를 드리우고, 생각을 맴돌았다.

주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를 기쁘게 바라보시고, 가인과 그의 제사는 기쁘게 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매우 화가 났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 만하다. 주님의 이 편애는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변덕스러움, 임의성, 불가해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히브리서는 이 사건을 비틀어 해석한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믿음이 없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아마 어떤 다른 자료를 보고 그 사실을 알았던 듯하다. 그 이야기만으로는 그렇게 해석하기 어렵다. 가인이 옳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거부하셨다는 암시를 빼면,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런 선택을 하신 분명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이는 세부 내용을 살펴봐도 분명하고, 전체 이야기에서도 명백하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으며, 둘 다 자기가 일해서 얻은 것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전부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좋아하셨다. 그리고 아벨을 좋아했다. 하나님은 가인도, 그의 제사도 좋아하지 않으셨다. 

죄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내주지 말라
내가 이 이야기에 깊이 빠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정확히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국 고아원에서 평생 자기를 희생하는 사역을 하다가 은퇴 이후에 평온한 삶을 살기 위해 돌아온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일지도 모르겠다. 고국에 돌아온 그분은 암에 걸렸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한 목사님의 사고가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40년 동안 신실하게,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과 그 백성을 섬겼다. 그러나 은퇴를 1년 남겨놓은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목사님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에 부딪혔고 심한 내출혈을 일으켜 돌아가셨다. 아니면 아마 케이틀린이 계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달음은 선명했다. 그 깨달음은 가인과 아벨의 경험이―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호의를 베푼 반면 다른 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삶에서 가장 심원한 현실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이는 세상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이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나는 저주를 당하거나 축복을 받는다. 나는 선택받거나 거부당한다. 나는 호의를 누리거나 멸시당한다. 우리는 전 우주에서 통용되는 윤리적 방식에―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좋은 사람은 좋은 열매를 거둔다는―삶이 들어맞는 견고한 느낌을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방식을 발견할 수 없어 난감하다.

하나님은 전혀 위로도 되지 않고, 동정심도 없다. 게다가 너무 퉁명스럽고 차가운 한마디로 이 모든 상황에 끼어드신다. 이 한마디는 가인을 씁씁하게 했던 편애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준다. “옳은 일을 해라. 죄가 곧 너를 넘어뜨릴 것이다. 부루퉁하거나 화를 내지 말라. 자기연민을 멈추어라. 올바르고 공정하게 행하고, 죄에게 조금의 틈도 내주지 말라.” 우리는 부드러운 공감과 마음을 달래고 끌어당기는 치유를 기대하지만, 대신 이렇게 무뚝뚝하고, 가혹하며, 훈련 교관 같은 고함을 듣는다.

당신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가인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샐쭉하니 화를 내다가 샘이 나서 못마땅해 하고, 앙심을 품으며, 분노한다. 그 후 가인은 자신의 곡식이 자라는 바로 그 들에서, 하나님께 거절당한 제물을 거두었던 바로 그 들에서 동생을 죽인다. 그는 선명하고 뜨거운 아벨의 피를 그 땅에 뿌린다. 하나님이 내 땅의 열매를 원치 않으신다면, 그분이 내 열매를 받으시기 위해 입을 벌리지 않으신다면, 그 땅이 아벨의 피를 받기 위해 입을 벌리게 하리라(11절을 보라). 그리고 가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은 가인을 벌하신다. 그를 쫓아내고, 방랑자로 만들고, 법의 보호를 못 받는 추방자가 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보호를 약속하시고 표를 주셔서 죽임을 면하게 하신다. 가인은 에덴의 동쪽을 향해 간다. 가인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오명을 지닌 동시에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표지를 지닌 사람이다. 그는 저주받은 사람이며 축복받은 사람이다. 가인은 거절당하고, 내쫓기고, 추방되지만 동시에 그는 세심한 보호와 돌봄을 받는다.

어찌 됐든 이제까지 수년간의 목회 경험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이라면,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가 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 만큼이나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하신 것이 아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왜 가인이 완전히 무너지는 고통을 당하게 하지 않으시는가? 왜 그를 그렇게 가볍게 벌하시는가? 그는 고의적인 일급 살인자이며 냉혈한이다. 여기에서 진정한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사형도 없으며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법칙도 없다. 징역도 없고. 심지어 보석금도 없다. 그저 영원한 추방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가인에 대해서 어떤 사적인 보복이나 서부 개척시대식의 정의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해 주신다. 살인자는 자유를 얻고 풀려난다. 그는 당신의 이웃이 될 수도 있다. 그의 아이들이 당신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고, 아벨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씁쓸한 소식이다.

삶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한 삶의 한가운데서 떼를 지어 버글거리며 살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흔히 진부한 문구처럼 보이는 아주 단순한 것으로 좁혀진다. 옳은 일을 하라. 바른 자세를 견지하라.

이는 씁쓸한 소식이다. 그리고 이 씁쓸함은 불공평한 세상에서 주된 위험 요소다. 그 위험은 우리가 씁쓸한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과 그것이 정당하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거기서 파생하는 행동들이 정당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위험은 우리가, 도덕적 견지에서, 옳은 일을 하기를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옳은 일을 하신 적이 있냐고 따진다. 하나님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시는 가혹한 분이 아니신가?

당신은 형통할 것이다
나는 교회 치리에 관여하면서 일이 순탄하게 잘 끝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일이 모두 끝나고 마무리될 때면,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그 일로 마음이 상하는 것 같다. 치리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해와 가혹한 대접을 받았으며, 교회가 은혜나 사랑이 없이 행했다고 느꼈다. 잘못을 범한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교회가 잘못을 한 사람에게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미온적으로 반응했고, 응석을 받아주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느꼈다. 방관자적 입장에서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는 데 너무 온건했다거나 은혜를 무시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가혹하게, 혹은 너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우리는 율법적이었거나, 죄와 거룩함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심각하게 다루지 못했다. 우리는 오만하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완고한 바리새인이거나 거만하고 너무 수용적인 교활한 사두개인이다. 우리는 십자군이거나 비굴한 아부꾼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결과를 보고 화를 낸다. 어떤 이들은 화가 나서 봉사를 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헌금 내는 것을 그만둔다. 아예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아직까지 치리를 하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게 교회를 이끌어 가지 못하고 있다.

수년 동안 나는 이것을 나 자신의 부족함으로 돌렸다. 내 연소함으로 인한 미숙함과 얄팍한 경험, 때로는 누더기처럼 이어붙인 성경 지식이나 임시변통식의 해석, 어설픈 원어 실력, 설익은 지혜, 잘 모아지지 않는 용기와 잘 감추어지지 않는 좌절감, 내 초라한 능력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나는 그 문제가 이런 것들에 달려 있다고, 즉 나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문제는 삶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삶에는 불공평함이 유전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서 때로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하고, 살인자는 보호를 받는다.

그러면 무엇이 옳은 것인가? “옳은 일을 행하라”가 가인에게 주어진 준엄한 명령이라면 무엇이 옳은 것인가? 어린 소녀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독재자가 호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 고되게 일하는 사람들이 파산을 하고 사기꾼은 계속해서 사기를 치는 세상에서? 빈민가의 욕심쟁이 집주인이나 군벌들이 전리품으로 부를 쌓고, 선한 사람들은 쓰레기더미나 뒤지고 있는 세상에서? 온통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들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 일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가인과 아벨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그 두 사람의 차이가 한 가지 사실로 걸러진다고 말한다. 믿음. 아벨은 믿음이 있었고, 가인은 믿음이 없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경고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예를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다. 이 목록에 삶이 불공평하다는 예리한 인식을 소유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궁금해졌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다…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6-39).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믿음이 옳은 일이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해 보인다. 물론 감사, 친절, 온유, 믿음처럼 가장 간단한 것을 그대로 살아내기가 가장 어렵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우리의 부, 첫 열매, 자녀들 그리고 우리 가정을 그분께 의탁하는 것―은, 글쎄, 이미 그렇게 했는데 다중 경화증으로 고통을 받거나, 파산을 했거나, 강도를 당했거나, 혹은 아이가 빗나가거나, 혹은 불이 나서 집을 잃었다면 어떻겠는가? 삶이 불공평하다면 어떻겠는가?

옳은 일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믿음이다.

“옳은 일을 한다면, 네가 형통하지 않겠느냐?” (한글개정개역에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역주) 이는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네가 형통하지 않겠느냐”라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 하나님은 가인이 옳은 일을 한다면 건강하고, 재정도 넉넉하고, 관계에서나, 지적인 추구나 육체적 성취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시는가? 아니다. 아벨은 옳은 일을 했지만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은 아벨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아벨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아벨에게 호의를 베푸셨다. 하지만 그 호의는 오직 아벨의 선물을 받으시는 것으로만 표현되었다. 그분은 입을 벌려 아벨의 선물을 받으셨다. 이는 보호하심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은 아벨을 보호하신 것보다 가인을 더 많이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무법자와 복수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가인에게 표를 주신다. 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아벨에게 표를 주셔서 친형의 손에 죽지 않도록 하지 않으셨는가?

삶은 불공평하다.

“옳은 일을 한다면, 네가 형통할 것이다.” 무엇이 형통할 것인가? 나는 이것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죽음, 질병, 사고와 부상과 질병의 손을 막아주셔서, 언제나, 어디에서나, 달콤하고 좋은 결과로 끝나게 해주시겠다는 의미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에녹처럼 천국으로 데려가시겠다는 의미였으면 좋겠다. 나는 그것이 강간범과 연쇄 살인범과 대량학살을 자행한 독재자들이 신속하고 확실하게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였으면 좋겠다. 나는 그것이 케이틀린이 오래도록 건강한 삶을 살면서, 23살에 결혼을 하고, 세 자녀를 낳고, 부모님이 장수하고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내드리고,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조각을 하거나 유전자 연구를 하는 생산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다가 은퇴를 하고, 아직은 움직일 수 있는 90대 초반쯤에 자는 듯이 죽어서,  자녀들과 손자들과 증손자들이 모여 그녀를 추모하고 그녀를 기리며 찬송가를 불러주는 그런 삶을 산다는 의미였으면 좋겠다.  

“네가 형통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형통함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편안하고 괴로움이 없는 삶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네가 형통하느냐 아니냐에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형통함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특이하고, 독특하고, 이상하기까지 하다. 안녕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건강이나, 재정이나, 직업 안정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깨어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와 위험으로부터 확실하게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평한 삶이 아니다.

이는 받아들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것으로,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그것은 불시에 찾아오는, 혹은 대처하기 곤란한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번째 죽음”, 다리를 놓을 수도 없는 분리의 죽음, 차가움과 뜨거움, 망각과 격심한 고통, 이를 갈며 몸부림치는 군중과 끝없는 고독의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두 번째 죽음에서 구해 주시는 것에 관한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노력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 은혜는 늘 아무 노력 없이 받는다. 우리가 옳은 일을 행한다면, 형통할 것이다. 그 옳은 일은 믿음이다. 삶의 불공평함을 언제나 해결해 주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나은 일을 하시는 그분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불공평함, 그 깨어짐, 질병과 죽음을 구속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메뚜기가 삼켜버린 것을 모두 일곱 배나 되돌려 주신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하는 도적들에게, 잘 믿는 아벨들에게, 죽어가는 어린 소녀들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궁극적으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오실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린다. 하지만 그 사이에, 우리는 그림자의 나라에서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 사이에’를 뜻하는 'meanwhile’은 모호한 단어다. 그것은 the mean place(비열한 곳), the between place(둘 중간에 낀 곳), the unfair place(불공평한 곳)을 의미할 수 있다.) 그 사이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이 더 쉬워지는 경우는 없음을 발견한다. 대개는 더 힘들어진다. 안전? 누가 하나님은 안전이시라고 말했는가? 누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말했는가?

거룩한 광야도 광야다. 하지만 그곳을 걸으면서 의식을 잃지 않는다면, 당신은 욥이 발견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다. 당신은 어중간한 경계선에서 우리를 달래고, 거짓 위로로 우리를 미혹하고, 실제로 보호해 주지도 못하는 고치를 우리 주변에 자아내는 우둔하고 안전한 신보다 우리와 함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를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이 무한히 좋은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케이틀린의 어머니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이 어린 소녀를 통해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왜 이 아이가 그런 질병으로 고생해야 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아이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빛난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11:4).

삶은 불공평하다. 하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아벨과 아브라함, 케이틀린과 보니의 삶은 만족스럽다. 그들의 영혼은 평온하다. CT
 


이 글은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확실하다: 당신이 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이를 회복하기」(Multnomah Publishers Inc)에서 발췌하였고 Multnomah Publishers Inc.의 허가를 받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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