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브랜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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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브랜드가 아니다
  • 타일러 위그-스티븐슨 | Tyler Wigg-Stevenson
  • 승인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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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에 무릎 꿇은 복음전도의 위험성

내슈빌에서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I-40 도로에 있는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알코올중독자를 위한 회복 프로그램 광고였는데 광고판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살짝 얼어서 감칠맛 나게 보이는 찬 맥주를 쏟아 붓는 사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광고를 볼 때마다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알코올중독자가 아닌 내가 봐도 그런데 음주로 고생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저 광고를 지나칠 때마다 회복 프로그램에 등록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당장이라도 술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야겠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홍보하려는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소비자를 끈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마케팅이다.

 

 

   

피할 수 없는 딜레마

마케팅에 물든 서양 문화에서 교회가 행하는 복음전도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마케팅이란 조직의 개념을 규정하고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경쟁업체보다 더 많은 소비자를 유치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시장조사, 소비자 욕구분석, 제품 디자인, 브랜딩, 가격 책정, 홍보, 광고, 유통과 관련한 전략적 결정도 포함된다. 

예수 브랜드를 연구하면서 보니 교회가 소비자 중심주의 문화에서 증인의 역할과 복음전도라는 사명을 수행할 때 이런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와 메시지를 마케팅해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내가 말하는 복음전도용 메시지(evangelistic message)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생각해보라고 권하든 복음의 특정 부분을 강조하든 교회에 참석하라고 권고하든 우리는 복음전도의 여러 측면 중 하나를 실천하는 것이다.) 틈새마케팅이나 브랜딩 같은 마케팅 기법을 사용해도 될까? 어쩔 수 없는 대세인가? 메시지에 영향을 주지 않고도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마케팅 기법은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왜곡하는가?

교회 마케팅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오는 것이 중요한 지역교회에서 마케팅 수용 여부는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상업주의 문화에서는 사실상 모든 것이 판매 가능하다. 마케팅을 고려하지 않고 대중에게 다가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대다. 마케팅을 하려는 의도가 없다손 치더라도 일반인들은 교회의 전도 활동을 마케팅으로 간주한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한다면 마케팅도 제대로 못할 뿐더러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다.

복음전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는다면, 마케팅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한편 마케팅이 우리 시대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을 유창하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외국에 선교사로 나간다면, 그 나라 말을 배워야 하지 않는가? 마케팅은 설득이나 예시 같은 전통적인 복음전도 모델의 최신 버전일 뿐이다.

많은 주장이 존재한다. ‘처치마케팅석스닷컴’
(ChurchMarketingSucks.com)이라는 웹사이트에 조슈아 코디는 이런 글을 남겼다. “불완전한 마케팅과 노골적인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리를 내다팔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교회의 형편없는 마케팅 실력이 문제다. 믿지 않는 대중에게 교회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오히려 조금도 호감이 가지 않는 브랜드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마케팅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마케팅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마케팅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케팅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바꾸어 버린다. 모든 미디어가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케팅은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는 소비주의 사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장에 내놓으려면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잘 브랜딩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앞서 말한 ‘처치마케팅석스닷컴’의 의견을 보자. “마케팅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홍보하고 판매하고 유통하는 과정이다. 전적으로 사업 개념이지만 이와 매우 유사한 일이 교회에서 일어난다. 복음전도와 판매를 비교해보면 유사한 점이 많다.” 

유사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전도와 판매는 결코 같지 않다. 우리는 참 진리와 판매대상이 될 수 있는 진실 사이의 엄연한 차이를 무시하고 교회를 마케팅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마케팅이 주도하는 문화에서 진리 역시 또 하나의 제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대중은 시장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대하듯 진리를 소비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우리가 판촉하는 제품은 다른 제품과 전혀 다르다. 사실 제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복음을 어떻게 마케팅할 것인가? 마케팅이 불가피하다면 복음을 제품으로 대하는 일을 막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영업사원을 지난 2000년 동안 충분히 보았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사람들을 ‘구원’시키려고 노력하는 부류가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광고에 식상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적당하게 변장하고 마케터들이 접근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복음을 적절히 위장한다. 교회 십자가를 내세우는 방법은 구태의연하기 때문에 요즘에는 일대일 복음전도 모델이 교회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은 오토바이나 잔디깎기나 바비큐소스 같은 특정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의 판매기법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

그렇다고 복음전도 방식에서 교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부러 세상 속에 뛰어들기도 한다. 할리데이비슨 동호회에 가입하여 오토바이의 세계를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현대 복음전도 방법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영리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다는 말이 빠져있다.

교회가 빠진 우리의 신학 때문에 복음전도에는 판매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교회 없는 복음전도는 소비자중심주의 구원론을 조장한다. 이런 식이다. 당신(소비자)은 ‘그(제품)를 마음에 초청하여’(브랜드 수용) ‘구원받는다’(소비자 만족). 분명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일해 오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세상 문화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예수를 수많은 광고에 등장하는 브랜드로 만들어 버렸다. 

광고에 등장하는 브랜드들은 자사 제품이 자존감과 성적매력과 자신감과 쿨함을 준다고 약속하지만 사실 제품에는 아무 능력도 없다. 소비자들이 제품에 그런 능력을 부여했을 뿐이다. 즉 소비자중심주의는 약속을 지킬 능력을 상실했으며 우리 역시 속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소비자중심주의 마케팅은 결국 실존하지 않는 것을 주겠다고 말만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볼 때 그럴듯한 홍보문구를 내세운 구원에는 실제로 아무 능력이 없다. 새 나이키 운동화를 사고서 운동선수라도 된 양 행동하듯이 소비주의 구원은 잠깐 거룩하다는 느낌을 줄 뿐 내실은 전혀 없다. 종교 브랜드를 잠시 바꿨을 뿐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와 구원을 분리한 채 복음을 전한다면 이는 반쪽짜리 구원이다. 구원의 공동체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마 16:18).

예수의 복음에는 참된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다. 에베소서에 명시된 것처럼 구원 계획은 교회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엡 2:19, 표준새번역). 복음에는 교회에 속하고 회개하며 공동체에 속하여 죄를 용서받으라는 초대가 들어있다. 파멸과 죽음의 넓은 길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로 걸어가라는 초청이다.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새 신자가 힘들고 어려운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신앙 공동체와 함께 걸어가는 길이다. 신자들이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룬 신실한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몸소 실천하는 증거가 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세례를 통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기반으로 복음을 전한다. 많은 교회가 구도자들에게 교회생활에 동참하도록 격려한다. 교회위원회나 특별 행사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여 특정 신앙 공동체에서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해왔던(은혜로 해왔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일대일 전도방법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이 방법은 사람들을 제자로 이끄는 데 충분히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개인 복음전도 방식은 소비자중심주의 구원론에 빠질 수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판매 방식의 복음전도가 지닌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신학에 있다. 방법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자신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중고차 영업사원처럼 느껴진다면 해결책은 교회를 강조하는 것이다. 강력한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삶에서 하신 일을 단순하게 열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말을 지지해줄 공동체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이 세상의 방식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서 대부분 복음전도는 판매 활동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제품이 아닌 복음의 특성상 교회 중심 사고방식과 시장 중심 사고방식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소비자중심주의의 특성과 가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방식을 개발한다면 예수를 브랜드로 만든 제단에 무심코 절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구입하느냐가 곧 당신을 규정한다. 당신의 소비패턴이 당신의 정체성, 사회적 위치, 자기 이미지를 결정한다. 인종, 민족, 종교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소비자중심주의적 마케팅을 이해하려면 이미지로 표현된 브랜드를 살펴보면 된다. “Mac vs PC” 라는 광고를 보면 각 브랜드를 의인화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멋쟁이로, 퍼스널컴퓨터는 촌스러운 비호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광고를 보면 일반 컴퓨터보다 뛰어난 매킨토시만의 기술과 기능을 다루기도 하지만 기술적 측면은 부수적이고, 경쟁 브랜드보다 앞선 스타일과 개성을 내세운다. 그 개성은 소비자에게까지 확대된다. (이에 맞서 마이크로소프트는 “I’m a PC!”(나는 피씨다!)라는 광고를 내보냈다.)

이런 광고가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소비자들이 마케팅 언어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Mac vs PC” 광고를 수세기 전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매킨토시가 훌륭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형편없다는 광고의 메시지를 알아듣겠는가? 맥과 피씨로 대변된 옷과 헤어스타일과 신체와 말하는 방식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마케팅은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제품이 무엇이든 마케팅은 우리를 소비자로서 반응하게 한다. 마케팅을 보면 브랜드가 눈에 들어온다. 나이키, 메르세데스, 기독교, 던킨 도너츠, 쥬시 꾸뛰르, 선불교, 디월트, 할리데이비슨, 이슬람, 카하트, 존 디어 등 브랜드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쿠어스라이트 맥주를 광고하든 내슈빌바이블 교회를 광고하든 보이는 건 브랜드다.

 


삶에 부딪히는 충돌

교회의 마케팅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또 하나의 선택의 대상이다. 이는 명백한 신성모독이다. 우리가 말하는 대상은 브랜드 로고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로고스다.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세워지는 제자도 또한 문제다. 소비자중심주의는 사회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이다. 이것에서 파생되는 습관과 질서는 기독교와 충돌한다.

여러 부분에서 갈등이 일어나는데, 네 가지만 살펴보겠다.

“나=내가 구입한 제품” 대 그리스도의 주되심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서 나의 정체성은 내가 소비한 대상으로부터 온다. 이 사회의 초점은 나에게 맞춰져있다. 자립과 책임이라는 미국의 이상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거리고 있다.

경영학계의 대부인 톰 피터스는 “브랜드 유”
(Brand You: 당신을 브랜드화하라)와 “나 주식회사”(Me, Inc.)를 포장하고 알리고 판매하는 방법을 다룬 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이러한 현상은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 우리의 광고 문화는 소비를 통해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잡지를 보라. 광고들은 하나같이 자사 브랜드는 내가 누구인지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외쳐댄다.

상업 브랜드는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뒤엎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에 깊이 의존한다. 우리는 특정 브랜드로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소비한다. 브랜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감 때문이다. 브랜드 업체는 우리가 소비한 돈으로 행복을 얻는다.

따라서 종교에서도 소비자들은 교회를 브랜드 대하듯 자아도취적 태도로 대한다. 예수라는 브랜드를 구입하면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 기독교는 내 비전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까?

소비자들의 행태를 신학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했다. 나는 내가 만든 프로젝트이자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제품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 경의를 돌리지 않겠다는 거부 행위다. 심리적 수준이나 영적 수준에서 봐도 개인주의는 끝없는 사춘기를 형성한다. 십대 시절이나 중년의 위기에 형성된 자신의 정체성만 믿고 그 안에 갇혀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복음을 자아성찰의 수단으로 왜곡할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유익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와 복음전도는 값비싼 자동차나 비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강조하는 상업광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 중심의 삶과 이웃에게 시선을 맞춘 삶을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상상을 초월한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 유익에만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유익이 점점 더 멀어진다.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할 때 비로소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예수라는 브랜드를 통해 만족감과 더 나은 삶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교회에 온 사람들은 두 가지 다 얻지 못한다.
영적 소비자들을 위한 비복음
(non-gospel)을 전하고 싶은 유혹을 거부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자기창조(self-creation)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시킬 수 있는가? 

소비자중심주의의 자기창조는 의미를 찾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복음은 천국으로 가는 티켓 정도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불만족 대 그리스도의 충만함

소비자중심주의는 개인의 성취를 약속하지만 경제 사이클은 끝없는 불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비자중심주의에서 새 자동차를 구입하는 행위는 새로운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마케터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늘 다음 상품이 대기하도록 계획한다.

이런 구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일단 낭비가 심하다. 자기도취라는 우리의 엔진을 돌리려면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다
(storyofstuff.com 참조). 우리는 재활용하고 수리하는 습관보다 쓰고 버리기에 훨씬 익숙하다.

소비자의 불만에는 두 가지 영적 함정이 있다. 첫째, 안정과 행복을 위해 물건을 사들이는 우리의 욕구는 결코 만족을 모른다. 새로운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하고 느끼는 기쁨은 잠시 지속될 뿐이다. 기쁨이 사라지면 또 다른 신상품을 고대한다.

둘째, 우리는 불편을 감수할 줄 모른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새 제품을 원한다. 쇼핑중독은 심각할 정도로 퇴보한 현대 문화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고통 없는 삶을 원하는 사치조차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필요가 항상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제자가 기대해야 하는 것과 정반대다. 바울은 영적으로 성숙하면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1-13, 표준새번역). 

바울의 요점은 우리의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는 말이 아니라 굳이 뭔가가 없어도 만족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소비자중심주의에서는 색다른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거기에 만족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제자의 삶은 내게 힘을 주시는 주 여호와 한 분으로 만족한다.

 


브랜드 상대주의 대 그리스도의 우월함

마케터들은 특정 브랜드에 강한 유대감을 느끼거나 다른 브랜드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특정 브랜드에 충성하는 집단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포드사 로고에 오줌을 누는 만화캐릭터 캘빈의 스티커를 범퍼에 붙이고 다니는 시보레 자동차 운전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키로 빼입은 남자, 맥을 피씨로 바꾸느니 차라리 타자기를 선택하겠다는 친구.

겉으로만 보면 이러한 열정은 특정 브랜드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브랜드를 향한 이런 열정은 소비자중심주의에 내재된 상대주의 때문이다.

사실 시보레가 포드보다 무조건 낫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어떤 로고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을 수는 있다. 경쟁사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러 브랜드 중에서 특정 브랜드가 우월하다는 주장은 보스턴 사람이 시카고 사람보다 훌륭하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브랜드는 각자 다른 것을 전달한다. 메르세데스가 고급을 추구한다면 혼다는 신뢰를 말한다. 두 브랜드 모두 각자가 전달하려는 의도에 충실할 뿐이다. 어느 브랜드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소비자의 취향과 의견에 달렸다.

교회의 마케팅을 받아들이는 소비자는 예수를 하나의 브랜드로 선택한다. 예수 브랜드에 대한 열정이 신앙의 열심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진정한 신앙의 열심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것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브랜드에 대한 열성은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브랜드에 대한 우월함이 브랜드에 대한 헌신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브랜드에 대한 열성적 지지에는 선택의 임의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선택은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보레에 싫증난 소비자가 포드로 바꾼다면 시보레의 패배이자 포드의 승리다. 그러나 다른 신이 좋아서 그리스도를 떠난다 해도 그리스도의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브랜드의 우월함은 소비자가 머릿속에서 만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신성함과 가치는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우리가 어떤 범퍼스티커를 붙이고 어떤 티셔츠를 입든 하나님과는 상관없다. 스티커나 티셔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보다는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를 고르는 소비자들에게는 기독교도 수많은 선택의 기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교회의 삶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고,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고, 뿌리 깊은 증오를 해결하고, 슬픔 중에도 기뻐하고, 역경 속에 인내하며, 자기를 희생하고 섬기며, 소비와 처분 대신 세례와 가르침을 선택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우월함을 드러낼 수 있다.

 


세분화 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성공적인 마케팅의 열쇠는 적절한 세분화다. 세분화란 소비자의 기호에 근거하여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집단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를 인구통계학적으로 분석하여 마케터는 소비자의 월별 영수증이나 우편번호만 가지고도 소비자를 파악한다.

세분화를 통해 마케터들은 홍보대상을 좁혀나간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기호에 잘 들어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동네에 모여 살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같은 교회에 다니고,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를 소비하고, 비슷한 사람들과 쇼핑을 한다. 점차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는 살아가기를 꺼리게 된다.

물론 교회가 이렇다면 큰 문제다.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최고의 성경적 가치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며 빌립보 교인들에게 했던 바울의 권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모두 서로가 필요하고 모두가 귀하다던 비유를 생각해보자.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연합은 민족, 계급, 성별 같은 로마 사회를 구분 짓던 관습들을 능가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표시도 필요 없다.

우리는 교회에까지 침투한 시장 세분화를 경계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소비자 중심의 집단으로 대표되는 동질의 교회, 대형 교회 안에 존재하는 끼리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 둘은 인종, 경제, 연령, 성별 같은 것들로 사람들을 분리한다. 우리가 피해야 하는 이 세대의 방법인 것이다(롬 12:2).

이런 구분은 소비자중심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비밀당원주의
(crypto-tribalism)는 기독교에도 만연하다. 개신교계 주민과 가톨릭계 주민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북아일랜드를 생각해 보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세분화를 인정하는 것이 해결의 첫걸음이다. 세상 문화가 어떠하든 교회에 세분화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편애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사고 전환

소비자중심주의는 분명히 존재한다. 앞서 말한 자기창조, 불만족, 상대주의, 세분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압도적으로 우세할 것이다. 세계화된 경제와 국가 간 무역방식은 소비주의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황에 무릎 꿇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먼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본질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 시대에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정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지칭할 때 가족, 나라, 섬김의 조직, 구조선, 이웃, 비즈니스 등 다양한 비유를 사용한다.

그러나 홍보가 필요한 브랜드를 지닌 사업체처럼 교회를 대하거나 일부 특성만 강조한다면 교회를 정의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교회에는 사업과 다른 부분이 많은데도 일반 기업이 사용하는 도구들을 사용한다. 투자자수익, 공급망, CEO, 시장점유율 등을 중시하는 <포츈>지 500대 기업이나 추구할 법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끌기도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제품처럼 대하면서,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고 어떻게 불신자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비자중심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교회를 소비자 관점에서 정의할 수밖에 없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마케팅으로 받아들여진다. 교회의 광고는 브랜딩으로, 전도는 판매로 간주된다. 이런 시각을 바꾸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영적 소비자들은 영적으로 자신의 기호에 맞는 종교를 찾아 기독교를 선택할 뿐이다. 그들은 소비를 유일한 구원으로 알고 살아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들이기에 은혜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왔던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우리 앞을 기웃거릴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미치광이요 교사이며 치유자이고 선지자며 혁명가였고 나중에는 시체가 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오늘날 그들이 찾는 것은 영적 브랜드다.

예수님 시대에는 살아계신 메시아와 주 여호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껏 찾아본 적도 없는 하나님을 만났다. 과연 이 시대의 구도자들은 성령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꾸는 주님의 몸을 발견할 것인가. 신상품을 원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감탄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앞에는 중대한 질문이 놓여있다. CTK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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