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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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것
  • 아지스 페르난도
  • 승인 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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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을 덮친 피로와 분노와 불안, 우리라고 피할 수 있을까

 

   

바로 얼마 전에 스리랑카의 최남단 지역에서 일주일 동안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돌아왔다. 이들 목회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 개척을 시작할 때에는 의미 있는 열매가 열리고 적개심이 누그러지는 데 보통 10년에서 15년 정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개척 초창기에 그들은 부당한 폭행과 비난을 받는다. 집 지붕에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도 하고, 자녀들은 학교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고서도 진정한 회심자를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개척자들이 수년 내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들은 허다한 영원의 열매를 맺는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들로 불평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 사역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아주 달랐다. 그곳에서 사역할 때는 “내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스리랑카 문화에서 다시 지도자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온갖 좌절이 나를 뒤덮었다. 서구에서 강연을 하다가 스리랑카에서 목회를 하기란 쉽지 않다. 지도자인 나는 내가 이끄는 사람들의 노예(doulos)다(고후 4:5). 이것은 내 필요보다는 그 사람들의 필요에 맞춰 내 일정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 성취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기 사명을 성취하는 것과 다르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우리는 행복하고 만족해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는 십자가도 포함된다. 십자가는 우리의 사명 성취를 정의할 때 본질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서구에서 공부하고 스리랑카로 돌아온 젊은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이 점을 두고서 고심한다. 그 젊은이들은 아주 유능하지만, 가난한 조국은 (그들이 스스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재능을 인정해줄 여력이 없다. 우리는 전문가를 온전히 쓸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 그들은 좌절 속에서 고뇌한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몇 년 후에 이 나라를 떠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단체를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은 컨설턴트가 되어서 자신의 특정 분야에서 전문적인 훈련과 조언을 제공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네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궁극적으로 조국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러한 학생들에게 그들의 좌절이 예리한 통찰을 개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나는 칼빈이나 루터 같은 사람들이 어지럽도록 다양한 책임을 감내해야 했고 그래서 피로의 안개에 뒤덮인 채로 자신의 은사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도자로서 또 여러 책의 저자로서 한 수고의 열매는 교회에 커다란 복이 되었다.

 

좌절과 성취

바울 신학은 우리가 창조세계의 구속을 기다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인내로써 좌절을 견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좌절로 탄식하고 있다고 말했다(롬 8:18-27). 내가 보기에 우리는 사명 성취를 이해하면서 이러한 좌절까지를 포함시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교회가 그들의 일꾼들에게 성취를 잘못 이해시키면 교회는 병들고 말 것이다. 이야말로 교회가 그토록 피상적이고 천박해지는 이유일 수 있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 성공을 측정했고, 완전히 다른 성경적 방식으로 성취를 이루면서 세상에 도전하는 데 실패했다.

오늘날 효율성과 측정 가능한 결과를 강조하는 풍토는 좌절을 더욱더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과거 4세기 동안 서구에서 일어난 산업과 기술의 발전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만들었다.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한때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에서도 필수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권리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헌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상은 타격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교회와 기독교 기관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족은 아주 비효율적인 기관이다. 건강한 가족이라면, 한 사람에게 커다란 필요가 생길 때 모든 것을 중단한다. 우리는 이러한 헌신을 그리스도의 몸 된 생활에까지 기꺼이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헌신과 공동체

공동체 생활에 관한 성경적 모델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근거한다. 즉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그러한 모델이다(요 15:12-13). 기독교 리더십의 모델은 선한 목자의 모델로, 그 선한 목자는 위험한 상황에서 양떼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고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을 섬기게 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섬기는 자들을 위해 와서 죽으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고 그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그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섬기고 그들이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거스를 때에라도, 당신들을 섬겨줄 다른 장소를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견 일치를 보거나 의견 차이를 서로 인정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수고한다.

사람들이 교회 프로그램이 자기한테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면 그것은 아주 치명적인 메시지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일에 헌신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복음이 아니라 주로 일에 근거해 만나고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결과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댈 수 있었던 공동체와  안정감을 잃는다. 그들은 얄팍한 개인으로 남아, 참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이 모임 저 모임을 전전한다. 프로그램에 헌신한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성경적 그리스도인을 양육하지 못한다.

사람들을 가까이하는 일은 좌절을 불러온다. 분노나 상처를 품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데 여러 시간을 쏟는 것은 그리 효율적이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런 일을 처리해줄 전문가들이 있는데, 왜 굳이 우리가 거기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해주어야 할 일을 대신해주는 상담가를 만난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상담가는 진단을 하고 어려운 경우를 다룬다. 친구들은 용납과 위로와 우정을 통한 치유가 일어나도록 함께해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대개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돕고자 하는 상처 입고 분노한 사람들도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들에게서 상처를 입은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헌신한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구를 위해 죽으라고 명하셨기에 우리는 그 고통을 참는다.

전쟁 때문에 황폐해지고 복음전도에 적대감을 표하는 나라에서 사역하기가 힘들고 좌절스러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실제로 나는 고난을 겪었다. 몇 달 전에, 우리 간사 한 명이 끔찍한 폭행을 당한 후에 살해되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가장 심각했던 고통은 내가 지난 34년간 섬겼던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에서 받은 고통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가족 바로 다음으로 ‘십대선교회’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었다. 동양에 살든 서양에 살든,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겪을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고난이다. 우리는 관계를 끊거나 좀더 ‘성취감을 주는’ 일들로 옮겨서 고통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잃게 될 것은 무엇일까?

몇 년 전, 서구를 여행하면서 헌신에 관한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자신이나 가까운 지인이 어떤 문제 때문에 모임이나 사람과 결별했다는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셋이나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접었다. 다른 사람은 교회를, 또 다른 사람은 단체를 떠났다. 각 사람은 그런 결별 과정을 고난에서 벗어나 은혜 가운데 놓여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우에도 끝까지 남아 고난을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의 압박이냐, 자발적 섬김이냐

필요할 때마다 내가 기도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그들에게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기도 한다. 내가 그런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면, 하나님이 나를 강건하게 해주시고 내 일정 가운데 나를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하겠다는 답장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서양 친구들과 동양 친구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많은 서양 친구들로부터는, 과로로 인한 피곤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증거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외부의 압박과 불안정감으로 인한 과로로 아팠다면 그러한 판단은 잘못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우리가 사람들을 섬길 때는 피곤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고난당할 것을 분명히 밝힌다. 피곤, 스트레스, 긴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십자가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으로 인한 신체적 어려움에 관해 말했는데, 그것은 감정적 긴장(갈 4:19; 고후 11:28), 고뇌(고후 11:29), 불면증과 배고픔(고후 6:5), 심신의 고통과 혼란(고후 4:8), 진을 빼도록 일하는 수고(골 1:29)를 포함했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말하는데, 오늘날처럼 ‘몸을 돌보는’ 사회에서는 철저히 반문화적인 내용이다. 또한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1-12)라고 말한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들에 접근하면서 어떻게 이 구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묻기보다는 그저 학문적인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안타깝다.

시간의 횡포 아래 고군분투하는 서양 사람들은 휴식의 필요성에 대해 동양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다. 동양 사람들은 사람에 헌신할 때 발생하는 신체적 문제들을 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서양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다. 사역 때문에 신체적으로 고난을 겪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고난이 결실과 성취를 향한 통로로 들어서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발걸음임을 믿는 사람들보다 그 문제로부터 더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다.

십자가가 제자도의 기초적 측면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이 고통과 곤경을 예상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러한 관점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때, 고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쁨과 만족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고난과 기쁨은 열여덟 군데 다양한 신약성경 구절에서 함께 나타난다. 사실상 고난은 종종 기쁨의 원인이기도 하다(롬 5:3-5; 골 1:24; 약 1:2-3).

 

복음의 영광

건강과 외모, 편리함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곤경을 견디는 가운데 기쁘고 만족하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영광을 분명하게 드러내라고 그들을 부르고 계신다. 만족하지 못할 일들을 추구하고 나서 별 성취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삼가면서도 즐거워하고 만족해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놀랄 것이다. 이것은 쾌락주의 문화를 향하여 복음의 영광을 확증하는 새로운 방식일 것이다.

나는 교회가 많이 염려스럽다. 서양은 급속하게, 복음이 닿지 않는 지역이 되어가고 있다. 성경과 역사는 고난이야말로 복음이 닿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본질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서구교회가 고난의 신학을 상실하면서 비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을까? 동양의 교회는 성장하고 있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겪는다. 서양은 막대한 자금과 교육을 동양에 제공한다. 그러한 자금과 교육을 통해 영향도 함께 미친다. 만약 지금 고난을 겪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메시지를 서구인들이 동양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면서 십자가를 내려놓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건강하고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동서양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확고히 고난의 신학을 견지해야 한다.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는 1976년부터 스리랑카 ‘십대선교회’ 총무로 사역했다. 또한 아내와 함께, 주로 가난한 도심 1세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콜롬보 지역의 한 교회에서 섬기고 있다. 「고난과 기쁨, 그 역설의 믿음」(디모데 역간), 「예수님이 이끄시는 사역」(생명의말씀사)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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