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혁명’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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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혁명’을 일으키다
  • 박영신_연세대학교 명예교수/사회학자
  • 승인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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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 글과 말씀의 만남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세계의 주목거리가 되고 있다. 겨우 한 세기 남짓한 역사에 교회가 급성장했고 손꼽히는 대형 교회도 여럿인 데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지도층에도 만만찮게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선교 역사에서 한국처럼 성공을 거둔 나라를 찾을 수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깊이 들여다보면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됨됨이를 온통 뒤흔들어놓은 엄청난 변화의 불씨였다. 근대 교육의 터전을 다지고 축첩제도와 같은 수많은 낡은 습속을 떨쳐내고 남존여비와 신분 제도를 깨는 데 앞장선 것이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현존하는 우리 삶의 의미 세계를 질문하면서 그 삶의 내용과 방식을 바꿔놓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자 생활의 변화이다. 성경이 ‘한글’로 옮겨지면서 문자를 통한 소통의 문화에 변화가 일어났다. 한문을 소통의 문자 수단으로 삼았던 지난날의 문화 틀을 부수고 우리 글로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시대를 연 것이 성경 번역이었다.

말하자면 성경이 한글로 옮겨지면서 한문 중심의 소통 문화가 한글 중심의 소통 문화로 변화되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을 한글로 표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지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한글은 표현 문자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면서 비로소 우리 한글이 제값을 얻을 수 있었다. 성경 번역이 우리나라의 문자 생활을 바꿔놓은 힘의 원천이었다.     

 

[영화_나랏말싸미]
[영화_나랏말싸미]

 

한자의 나라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 속했다. 말은 우리말을 하면서도 글은 중국 글인 한자를 써왔다. 말과 글이 별개의 것이 되어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한자에 익숙한 지배층이 우리글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세종대왕이 말과 글의 거리를 좁혀 모두가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나라 글자를 만들어놓았음에도 지배층 중심의 문자 생활이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로지 한자만 쓰고자 하였다. 우리글은 널리 쓰이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났다. 

한자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것이었다. 중국 문화의 핵심이자 우리나라의 국가 이념으로 삶의 밑바탕을 이룬 유교라는 성스러운 종교 경전이 한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문이라는 문자는 유교의 가르침을 담은 거룩한 문자였다. 유교 경전이 한문자로 적혀 있었던 만큼 한문과 유교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까닭에 유교에 대한 숭상은 곧 한문에 대한 숭상을 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지배층이 철저하게 유교 이념을 지켜가고자 한 만큼이나 철저하게 한자 문화권 나라로 남아 있고자 한 것은 넉넉히 이해할 만하다. 이들 지배층은 유교를 공부하고 익혀 그것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 유학자이자 한문을 배워 그것으로 소통코자 한 한문학자였다. 한문이 이들 상층부 지배 세력의 지식 자산이었으며 소통의 유일한 매체였다. 한문자의 지식을 향유하며 그 지식을 독점해온 세력이 조선 사회의 지배층이었다.

그들 누구도 한문자를 소통 수단으로 삼는 것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한문을 배워 한문으로 된 글을 읽고 한문으로 글을 쓰는 것은 지배층에게는 지극히 당연했다. 심지어 하층민의 생활을 개선하여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광범위한 개혁을 열렬히 주장하고 나온 실학자들조차, 그들의 생각을 우리나라 글자에 담아 널리 펼치고자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들이 쓴 글들은 한문에 정통한 상층부 양반들을 향한 것이었고 한문 지식인들 사이에 오고간 생각 뭉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돋보이는 개혁 사상을 내놓았다고 하더라도 하층부 백성에게는 전달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일반 백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분의 담을 허물고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통의 문자 수단을 활용할 생각이 사회 개혁 사상가들의 의식 속에서도 움터 있지 않았다.

그만큼 유교의 종교 이념과 한자라는 소통 수단은 떼려야 뗄 수 없게 붙어 있었다. 유교의 울안에 파묻혀 있는 한에는 소통 수단으로서의 한자의 값어치에 깊은 물음을 던지기는 심히 어려웠다.

그러하여 상층부의 소통 문자는 여전히 중국에서 빌려와 쓰는 한문자였다.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문자에 파묻혀 양반 상층부 사람들은 오로지 한문자만을 중히 여겼을 뿐이다. 제한되어 있기는 해도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우리나라 문자를 그들은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나라 글로 쓴 문헌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조선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홍길동전」과 같은 여러 이야기책이 나타나 저변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기도 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우리 글로 쓰인 작품들이었다. 우리 글자가 분명 우리의 글자로 만들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직 저층 백성을 향한 전달 수단으로서, 그들 사이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소통 수단으로 밀려나 있었다.

우리 글자는 기껏해야 사회 저변의 평민과 여성들을 겨냥한 소설의 문자 매체였을 뿐이다. 그것으로는 거룩한 유교의 가르침을 담아내지 못할 상스런 문자로 낮은 자리로 저만큼 떨어져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 글자가 상하 신분의 구별을 넘어 모두가 쓰는 표현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져 일반화되지 못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만 있었다. 소통 수단으로서의 문자가 신분에 따라 분리된 이중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문자 상황이었다.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년)_대한성서공회]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년)_대한성서공회]

 

성경 번역

이러한 상황에 기독교가 들어왔고 성경이 우리 글로 옮겨졌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성경은 미국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에 앞서 그 일부가 벌써 우리 글로 옮겨져 나왔다. 흔히 한국 개신교의 원년으로 삼는 1884년보다 8년이 앞서는 1876년에 이응찬 등 만주를 드나들던 상인들이 한국 선교를 계획하던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사 로스(John Ross)를 만난 것이 성경 번역의 계기였다.

이들 상인은 좁은 세상에 붙박여 꽉 막혀 있던 동시대인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넓은 세상을 보고는 눈을 터 넓은 안목을 기른 사람들이었고 서양 선교사에게 우리 말글을 가르칠 수 있는 일정한 식견도 갖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앞서 한문 성경을 읽은 바 있었고 나아가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싶다고도 한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로스와 그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에게 우리 말글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도와 신약성경을 한글로 옮겼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철저한 신앙 검정을 받은 다음 1879년에 이르러서는 세례도 받았다. 선교가 공식으로 허락되지 않던 한국 땅 그 경계 밖 만주에서였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만주를 오간 우리나라 상인들이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게 우리말글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에도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우리나라의 첫 개신교도들이었고 성경을 처음으로 우리글로 옮기는 일에 동참한 번역의 협력자들이었다. 어두움에 갇혀 있던 이 땅의 영혼을 밝혀줄 하나님의 말씀이 섭리의 손길을 받아 그렇게 나라 바깥 낯선 북녘 땅에서 우리글로 옮겨졌다.   

1882년에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가 한글로 옮겨졌고 1883년에는 교정을 거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나왔으며, 1884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그다음 해인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옮겨져 나왔다. <신약성경>이 모두 옮겨져 나온 것은 1887년이었다. 이 복음이 만주에서 인쇄되어 우리 땅에 들어왔다.

이와 함께 외교 사절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개화파 이수정도 성경 번역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해줄 것을 미국 교회에 간청한 인물로서, 1883년 4월 동경에서 세례를 받고 이내 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885년에 <마가복음>을 우리글로 옮겨놓았다. 그해 봄 일본을 거쳐 한국 땅에 들어온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선교사는 이수정이 옮긴 <마가복음>을 들고 들어왔다.

성경 번역은 선교 활동과 뗄 수 없는 일이다. 서울에 온 선교사들도 곧 성경을 우리글로 번역코자 하였다. 이 일을 위해 위원회도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앞서 만주와 일본에서 찍어 나온 성경을 고치고 다듬어나갔다.

그들은 중국 성경뿐만 아니라 헬라어 성경과 영어 성경을 바탕으로 삼아 우리글로 옮겼다. 신약의 일부분이 시험본으로 나왔다가 드디어 1900년에는 한 권으로 된 신약성경이, 이어 1904년에는 그 개정본이, 1906년에는 공인된 <신약전서>가 나왔다. 곧바로 구약 번역도 시작하여 1910년에는 구약 모두가 우리글로 옮겨졌다.      

성경 번역은 우리나라의 소통 문화에서 기억해야 할 일대 역사의 사건이며 쾌거이다. 오랫동안 존중받지 못하고 짓밟혀온 우리나라 글이 마침내 높이 들림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멸시 받으며 짓밟혀온 그 한글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소통의 문자 매체로 올라서게 되었다.

성경 번역은 우리의 소통 구조를 뒤엎어놓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은 상층부 특권층에 의하여 버려졌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변혁의 바람을 불러온 셈이었다. 한글은 이제 더 이상 시시하고 누추한 문자가 아니었다. 한글은 성경이라는 거룩한 말씀을 전달하는 귀하고 소중한 글자로 우리의 문자 문화에 머릿돌이 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우리나라 글인 한글로 성경을 옮기고자 하는 데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선교지의 토박이 글로 성경을 옮기는 것은 선교 활동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한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 사람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성경을 옮겨놓아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선교사들이 성경을 쉬운 한글로 옮기고자 한 것은 그들에게 한문자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벌써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성경을 토박이 한글로 옮기겠다고 한 뜻은 서양 선교사들의 언어 학습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로스, 언더우드, 헐버트(H. B. Hulbert), 게일(J. S. Gale)은 우리 말글을 연구하여 기념비가 될 그 방면의 탁월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토박이 글로 성경을 옮기겠다고 한 뜻은 그들의 언어 능력과는 무관하였으며 차라리 그들이 지켜온 신앙 전통의 밑뿌리에서 비롯되었다.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한 세기나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천주교 교리서 일부만이 우리글로 번역되었을 뿐이다. 천주교에서는 성경을 우리글로 옮기는 일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토박이 글로 옮겨진 ‘말씀’과의 만남보다 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 미사의 의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은 선교지 사람들이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일반인의 언어로 쉽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를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고전어로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그 개혁 사상의 줄기에 이어져 있었다. 성경 이외에는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이들 선교사들이 모든 것에 앞서 성경을 토박이 한글로 옮겨놓고자 하였다.

번역 그 자체가 지식층의 마음에도 들도록 문체가 다듬어져야 했지만 무엇보다 아주 무식한 사람들까지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이 간결하고 깔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번역자들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성경을 우리글로 옮겼다. 한글을 성경 번역의 매체로 삼은 그 뜻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잇대어 있었다. 

 

[구약전서(1911년)_대한성서공회]
[구약전서(1911년)_대한성서공회]

 

한글의 나라

성경 번역은 그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한글을 문자 매체로 삼아 펼쳐내야 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성경 번역과 함께 찬송가도 엮어내야 했고, 여러 정기 간행물도 박아내야 했다.

1897년에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그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을 펴내었고, 1900년에는 <신학월보>라는 잡지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여러 간행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 간행물은 분명 기독교의 신앙을 알리고 펼치는 데 겨냥되어 있었지만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널리 소개하고 전하는 데도 관심을 쏟았다. 이 모두가 겨레 사랑과 개화에 크게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신문>의 간행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서재필이 천신만고 끝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거기서 교육을 받은 다음 다시 돌아와 1986년부터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이다. 그해 4월 7일에 나온 첫째 호에서 이 신문은 신분과 재산과 성별에 관계없이 다 쉽게 읽을 수 있게 ‘국문’으로 쓴다고 밝혔다.

이어, 자기 나라 글자는 배우지 않고 한문만 공부하기 때문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는 것을 개탄한 다음, 국문이 배우기 쉽고 좋은 글이라고 주장했다. 국문을 쓰면 상하귀천이 모두 보고 알아보기가 쉬울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한문자만 써버릇하여 국문을 “폐한 까닭에” 국문만 쓰는 것을 “조선 인민이 도리어 잘 알아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어찌 한심치 아니 하리요” 하고 탄식하였다. 한문을 잘 아는데 세상 물정과 학문에 어두운 사람보다 국문만 잘 알고도 세상 물정과 학문에 밝은 사람이 더 유식하다는 생각도 적어두었다. 

이제 한글은 광범위한 소통의 수단으로 번지고 있었다. 복음서가 처음으로 우리 글자로 옮겨져 나온 다음 15년이 되면서, 우리의 글자는 강력한 소통의 문자 매체로 그 힘을 뻗혀나가기 시작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결코 순탄한 길일 수 없었다.

세기를 거듭하여 굳어진 한문 중심의 의식 세계를 부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이 나온 직후 전래하는 관행에 젖어 있던 보수 세력은 ‘존귀한 한자를 버리고’ 국문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창하고 나오기도 했다.

국문을 쓰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을 ‘동물로 만드는 것’이라고까지 독설을 퍼부었다. 한글 쓰기를 주창하는 세력은 이에 맞서 싸워나가야 했다. ‘국문이란 것은 조선 글이요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것’으로서 ‘한문보다 백배 낫고 편리’하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그러나 단순히 한글이 더욱 편리하다는 주장만으로 한문 중심의 의식 세계에서 한글 중심의 의식 세계로 옮겨지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한글 쓰기의 뜻과 그 값어치가 달리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때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그러하였다. 사람을 신분과 성별과 재산에 따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삶의 세계를 귀히 여긴다면 마땅히 이들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한글 쓰기를 귀히 여길 수밖에 없다. 한글을 높이는 까닭이 근본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가 하는 의식의 세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한글을 귀히 여기는 사람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잇닿아 있었다.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 매체를 선호하는 것은 ‘말씀’이란 인간이 만든 모든 구획을 관통하여 전해야 한다는 믿음과 뗄 수 없게 이어져 있었다.

이 믿음에 서 있을 때 비로소 한문의 의식 세계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한글의 의식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 없이 한글 쓰기의 뜻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갑자기 많아지기 시작하던 18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독립신문>이 펴나오면서 이내 발행부수를 3000부까지 늘려 찍어내었고,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서로 돌려가면서 읽게 된 것은, 그 바탕에 한글을 귀히 여기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진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였다.

한글은 성경 번역의 문자 매체가 되어 기독교의 전파와 성장을 촉진했으며, 나아가 한글로 된 모든 간행물의 수용과 그 확장에도 기여하였다. 기독교가 번지면서 문자 매체로서의 한글에 대한 긍정의 마음가짐도 북돋우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한문의 세계를 더 이상 절대화하지 않고 그 특권의 지위와 한계를 질문하는 한편, 한글을 적극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한 보기를 젊을 때 쓴 이승만의 짧은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다음 귀국하여 잠시 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던 1912년이었다. 그는 양반 집안의 남아답게 여섯 살 때 “뜻도 모르며 외워서 천자문을 떼었다.” 그는 십 리도 넘게 언덕길을 걸어서 서당에 가서 그 ‘중국 나라의 글’을 배워야 했다.

배우고 싶지 않아도 배워야 했다. 배우지 않겠다고 하면 종아리를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아, 얼마나 내가 여자였으면 하고 바랐던가!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그 알길 없는 글자들을 배워야 하는 의무도 없다.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남자 아이들과 따로 떨어져 집안에 머물러 집안일을 돕고, 배우기 쉬운 언문, 암글을 배우면 된다.”   

성경 번역으로 시작하여 한글로 된 여러 간행물이 나오면서 한글 쓰기는 더욱 힘을 받아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한글 나라로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 세찬 강물과도 같이 한글의 물결은 어떤 차별의 방파제도 허물었다. 상층부의 양반과 하층의 상민 사이의 칸막이도 부수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담벼락도 무너뜨렸다.

지금껏 상스럽다고 여긴 ‘언문’이, 집안에 갇힌 여자들이나 배워 쓸 그 ‘암글’이 모두의 글로 받아들여졌다. 이 한글의 힘으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의 힘으로 칙칙한 한문의 소통 나라를 벗어나 기어코 밝은 한글의 소통 나라로 동터 올랐던 것이다.

 

[국민일보]
[국민일보]

 

근원의 변화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는 변화를 이끄는 힘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변화되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 말씀만이 변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말씀에 힘입어 우리 역사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소통의 문화를 바꿔버린 것도 그 말씀의 힘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나라 글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글은 소통의 문자 수단으로 널리 쓰이지 않았다. 언문이라 하여 업신여기고 암글이라 하여 우리 글자를 무시하기만 했다. 그러던 글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소통의 문자 수단으로 들림을 받았다. 오늘날 한글이 소통의 문자 수단으로 당당하게 올라선 것은 성경을 한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한글 그 하나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사회 신분에 따라 소통의 문자 수단이 갈라져 있던 것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마땅히 성경을 읽어야 했기에 모두 한글을 깨쳐야 했다. 교회는 한글 깨치기의 교육 기관이 되어야 했으며 그렇게 한글을 깨친 자들의 신앙 공동체가 교회였다. 이것을 뒷받침한 것이 기독교 계통의 출판사였고 대한성서공회였으며 거기서 일한 사람들의 수고였다.

따돌림 받고 업신여김을 당한 신분층을 보듬어 안는 문자 매체를 채택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성경 번역의 정신에 들어 있었다. 그 정신이 한문 중심의 낡은 소통 문화를 엎어버리고 한글 중심의 새로운 소통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문자만의 변화가 아니라 그 문자에 담겨진 의식 세계를 송두리째 뒤엎은 근원의 변화를 뜻하였다. 한글을 소통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증표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한글 중심의 삶을 모범으로 살아가고자 하였다. 이 모든 것이 한 세기 남짓한 지난 역사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실로 조용한, 그러나 기억해야 할 소통의 혁명이었다. CTK 

【박영신, "'소통의 혁명'을 일으키다" CTK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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