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교회를 훔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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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교회를 훔쳤는가
  • 고든 맥도날드 | Gordon MacDonald
  • 승인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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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랑하는 교회가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려 할 때

마치 사실 같은 고든 맥도날드의 소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교회를 훔쳐갔다고 느끼는 50-60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다.

「누가 내 교회를 훔쳤는가」(두란노 역간)에 나오는 유일한 실제 등장인물은 고든과 그의 아내 게일뿐이지만, 소설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도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때는 교회의 중심이었지만, 이제 젊은이들에 밀려 그 영향력이 다한 나이든 사람들 말이다. 아래 내용은 그 소설의 한 부분이다. 한 목사가 나이든 교인들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클래이턴 레이드에게 다음 소그룹 모임에서 시작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소리 내어 하는 기도’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미리 기도문을 작성해서 우리를 위해 읽어주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클래이턴은 잠시 주저하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화요일 밤이 되었고, 저녁 모임에 대한 바람을 간단하게 나눈 다음에 클래이턴를 쳐다보았다.

클래이턴는 윗옷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고 난 후 메모지에 적어 놓은 것을 읽기 시작했다.

두세 명은 그가 메모지를 꺼내 읽고 있다는 것과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그랬듯이, 그 사람들도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믿으며 자랐고 ‘자유주의자’나 가톨릭 신자만이 기도문을 읽으며 눈을 뜬 채 기도한다고 배웠다.

클래이턴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해야 하는 일로 지쳐있습니다. 커다란 근심이라는 짐을 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쉼을 얻고자 간구합니다.

또한 우리 목사님을 인도해주시고 목사님이 우리를 잘 이끌도록 커다란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에 열린 마음과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지금 이 탁자 주변에 둘러앉은 모든 교우들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는 클래이턴의 기도가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했다. 그 기도는 상자 바깥으로 나서는 아주 작은 발걸음이었다. 클래이턴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사람들이 지쳐있고 커다란 짐을 지고 있다고 클래이턴이 읽었을 때 그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클래이턴은 몇 해 전에 아내를 잃었다. 암이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쉼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드린 그의 기도는 아마도 자신을 두고 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클래이턴이 기도를 마치자, 나는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역사상의 거대한 변화라는 주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우리가 살아가는 변화의 시대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함께 자동차, 대중매체, 디지털 혁명에 관해 이야기했다.

분명 이 시대에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꾸려가는 새로운 방식들이 있을 터였다. 옛날 방식은 이미 한물갔고, 효과도 별로 없다.

“1990년대에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썼습니다. ‘서구 역사 전체에 걸쳐 몇 백 년마다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10년 사이에 사회는 자체적으로 그 모습을 재배치한다. 세계관, 가치관, 사회와 정치적 구조, 예술, 핵심 기관들이 바뀐다.

50년 후에는,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 조부모가 태어나서 살았던 세상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우리 시대는 그러한 변화의 기간이다. 지식 사회의 도입으로 그 신호가 오고 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드러커는 아마도 인터넷에 대해 제한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고,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회가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우리 생활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클래이턴이 말했다. “제가 일하는 업종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고객은 자기 컴퓨터로 집들을 하나씩 가상으로 살펴봅니다.

그냥 앉은 자리에서 말입니다. 오늘은 캘리포니아에 사는 부부에게 그들이 살펴본 집들에 대해서 상담해주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말이지요. 그 부부는 마치 그 집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더군요.

생각해보세요. 5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그들에게 나는 각각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만일 방을 다른 색으로 칠하면 어떨지를 보여줄 수 있었지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지점을 운영하는 루스도 말을 꺼냈다. “우리 회사는 모든 처리 과정이 전산화되어 있어요. 손님 한 명이 치즈버거 한 개를 사는 즉시 시카고에 있는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또 우리에게 식재료를 공급하는 사람은 자기 트럭에 고기 한 조각, 햄버거 빵 한 개, 피클, 케첩을 다음 날 더 실어 날라야 한다는 것을 자동으로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위성 연결로 이루어지지요.”

다른 사람들도 컴퓨터와 인터넷이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본인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어니는 카메라가 달린 컴퓨터를 통해 자기 딸과 손자들과 정기적으로 대화한다고 했다.

윈은 자신이 아까 오후에 대화한 항공권 예약 담당자가 인도 어딘가에서 상담을 해준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최근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했다.

결국 내가 이렇게 말했다. “조엘 바커라는 사람은 사업가들을 대상으로 이 급변하는 시기에 어떻게 사업이 스스로를 개조해야 하는지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했습니다. 그는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패러다임’은 ‘세계관’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것으로, 사물을 보고 조직화하는 방식입니다. 바커는 한 패러다임이 전환될 때,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메리 앤이 앞으로 몸을 좀 숙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네, 특정 시점에 최상이라고 여겨졌던 어떤 기관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일어날 때는 그 기관이 가진 장점 대부분을 잃기 쉽다는 말입니다.

바커가 말한 대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때 말이죠. 교회도 그런 기관들 중 하나입니다. 만일 그 기관이 역사적 변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그래서 적절하게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 기관은 기반을 잃고 결국 무대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저 ‘적절한 조정’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전적인 개조’가 필요할 겁니다.”

“‘전적인 개조’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라고 메리 앤이 이어서 물었다.

“사실상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해왔던 모든 일을 점검해보면서 그 일이 여전히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보고, 새로운 상황에서 더 잘 돌아가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자 케네스가 말했다. “제록스는 수년 전에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지배할 기회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록스는 그 특허들을 팔아버렸지요.

컴퓨터를 일반 대중이 얼마나 필요로 할지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회사는 지금까지 복사기 회사로 남아 있지요.”

 


진행 중인 부흥

“이런 일이 기독교 운동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잠시 유대교 성전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셨을 때, 성전의 중요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고, 아주 강력한 종교기관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예수님이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지 3년 후에, 오순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성경의 신앙을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면서 거리로 밀려나왔지요.

첫째 날 수천 명이 회심했고, 며칠 동안 수천 명이 더 회심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은 이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하고 묻는 대신에, 하던 일을 평소처럼 계속했습니다.

주후 12년에서 20년 사이 그 짧은 기간에 기독교 운동은 전 세계로 뻗어나갑니다. 멈출 수 없었지요. 로마가 성전을 파괴했을 때, 성전 패러다임은 끝났습니다.

대신 기독교적 방식이 퍼지기 시작했지요. 평범한 사람들이 진행하는 탈중심화 운동이었습니다. 몇십 년이 지나자 이 운동은 로마 제국을 전복시킬 만큼 강하게 성장했습니다. 패러다임 전환의 힘입니다.”

이번에는 존이 말했다. “목사님은 똑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교회에 말입니다.” 존이 말하는 방식을 보니 대화 내용이 그에게는 몹시 거북한 듯했다.

“네 그렇습니다. 마치 사도행전에 있는 그 변화가 성전을 사라지게 했듯이 말입니다.”

코니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한가운데 있다고 칩시다. 그 전환이 이뤄지면, 어떤 차이가 생길까요?”

“이미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부터 시작해보면 좋겠네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항들. 잠시 생각해보시고, 흠…, 1960년 이후로 세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말씀해주세요.”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여러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를 되돌아본다면, 이 나라를 휩쓴 광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발로 돌아다녔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지요. 우리 세대가 반항을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인권 운동에 탄력이 붙었지요.” 테드가 말했다. “행진과 시위, 폭동까지. 나는 마틴 루터 킹과 바비 케네디(존 F. 케네디의 동생/편주)가 암살당한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요즘은 우리가 전혀 딴 세상에서  사는 것 같아요.”

릴리안이 말했다. “그때는 여성 운동도 있었어요. 벨라 앱저그, 베티 프리단 같은 사람들이 활약했지요. 여성들이 평등권을 요구했습니다.”

존이 덧붙였다. “워터게이트를 잊을 수는 없지요. 핵심부터 우리를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닉슨이 백악관을 떠날 때 그를 태우고 갈 헬리콥터 앞에 서 있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1970년대 초에는 석유파동이 있었지요. 디트로이트는 어리석게도 큰 차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어니가 말했다. “실제로 일어난 변화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은 석유를 꿀꺽꿀꺽 마셔 대지 않는 차를 원했죠. 그런데 디트로이트는 계속해서 큰 차를 만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만 크게 이득을 보았죠.”

케네스가 말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쇠퇴한 건 어떻고요.”

이본느가 말했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덧붙일 수 있겠지요….”

이때 내가 끼어들었다. “국제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로마 제국 이래로 미국이 세상에 처음 나타난 슈퍼파워임을 기억해야겠지요.

그리고 오늘날 상황은 누군가 처음 마음속에 그렸던 것만큼 바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전 세계가 미국을 계속해서 괴롭히려고 온갖 창의적인 방법을 발견하려 애쓴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국의 권력을 시험해보려는 작은 동맹들이 여기저기서 불쑥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이런 상황에 아주 잘 대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스탠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지금 피부로 느끼는 변화를 되돌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의 변화 말입니다.

나는 가끔 이 세계가 충격에 빠진 상태라고 느낍니다.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신성모독, 성, 폭력이 폭격처럼 쏟아집니다. 가정은 산산조각 나고, 결혼 생활은 끝장났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클래이턴이 말했다. “사람들은 너무 바쁩니다. 모든 사람들이 스포츠에 몰두하고, 아이들은 이메일을 사용하지요. 모든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고, 하루 종일 서로 문자를 보냅니다.”

(주일학교 교사였던) 이본느가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성경을 몰라요. 성경 구절을 외우지도 않지요. 성경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한바탕 불평이 쏟아지고 여러 관찰이 뒤따랐다.

테드의 말이다. “더 이상 누가 기도를 하나요? 기도 모임 참석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어니가 말했다. “선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예요. 고국을 방문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러 나오는 사람을 찾기 어려워요.”

결국 내가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하고 여러분이 지금까지 말한 것에 귀 기울여봅시다. 여러분 모두는 매우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변화의 일부를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기억하세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렇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면, 모든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결국에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 단어들을 반복해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좌절감을 느끼는 이 모든 일들이, 사실 일부는 좋은 소식이고 일부는 나쁜 소식입니다.”

코니가 말했다. “우리에게 그 일부 좋은 소식을 들려주세요.”

“좋습니다. 미국 전역에 걸쳐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놀랄 것입니다.”

“부흥이라고요?” 여러 명이 놀란 기색으로 동시에 말했다.

“네, 가장 커다란 의미에서 부흥입니다. 사람들은 영성이나 악, 권세들과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좀 더 쉬워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30년 전에는 예의 바른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쉽게 들을 수 있지요.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영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천사, 기적 이야기를 특집으로 삼는 TV쇼를 생각해보세요. 심지어 마녀나 초능력 같은 뉴 에이지 관련 주제를 특집으로 삼는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부흥이 있긴 하지만, 그중 여럿이 기독교적이지 않긴 하지요. 그러나 영적 문제들에 대해 새롭게 문이 열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코니가 의견을 말했다. “나는 그런 현상이 부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과 관련한 대부분이 제정신이 아니에요. 끔찍한 혼동만을 만들어내지요.”

내가 말했다. “코니 잘 말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 너머에 있는 실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한 약속에 환멸을 느끼고, 과학과 기술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다고 느끼지요.

한때 의존할 만했던 기관이나 제도가 점점 더 무력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를 보호하지도 못하고 좋은 삶을 보장하지도 못하지요.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성경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니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성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볼 수 있는 것보다 좀 더 실제적일 거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권세와 마술을 정말로 믿었습니다. 바로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처럼) 볼 수 있는 것들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없는 일들, 공중의 권세들과 우리보다 더 큰 체제와의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강한 영의 권능을 힘입지 않는다면 악한 의도를 지닌 영적 영향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이 주장이었지요.

우리 문명은 비그리스도인들 대다수가 영적인 실제를 거부했던 약 250년을 통과했습니다. ‘영리한’ 사람들 대부분은 종교는 과학 이전 시대의 잔유물이라고 말했지요.

이제 우리는 그 시대를 ‘모더니티’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관념을 거부했고, 각 개인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했던 때였습니다.

모든 문제는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말했지요. 시간과 연구가 충분하다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오만한 견해였지요. 그리고 이 기간은 기독교 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어니가 물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여러분은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모더니티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어휘는 예수와 ‘우리’보다는 예수와 ‘나’와 연관되는 경향이 있었지요.

심지어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때도 우리가 성경의 모든 세세한 신비를 다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각기 다른 여러 신학 체계들이 마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던 어떤 거대한 실제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고 섬기기를 원하시지, 아주 작은 일 하나까지 이해하려고 덤비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루스가 말했다. “개인주의가 잘못이라는 이야기인가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루스. 그러나 개인주의는 더 큰 실제의 일부일 뿐입니다. 당신은 전적으로 일개 개인이 아닙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구성하는 커다란 부분은 당신의 공동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알든 모르든 항상 당신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당신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요. 우리는 그저 개인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그 이상입니다.

그리고 개인주의의 결과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표시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떤 집단이나 갱단으로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스타벅스처럼 대화를 나눌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연결되려고 갖은 방법을 찾습니다. 오토바이나 스포츠와 같은 것에 몰두하는 다양한 동호회가  수천 개나 됩니다.”


딱딱한 진리, 부드러운 대답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에 익숙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모더니즘의 붕괴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을 설명할 때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지요.”

학교 선생님인 릴리안이 말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학교 안팎에서 이리저리 논의되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학자처럼 설명하는 것이라면 자신은 없습니다만 그 주제를 다룬 아주 좋은 책 몇 권의 제목을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들이 안개를 말끔히 거둬줄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 정도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정된, 홀로 서 있는 진리는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진리가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그렇게 믿듯이―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관점으로 보거나 경험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비슷한 방식으로 보거나 경험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진리가 된다고 하지요.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신봉하는 사람은 진리가 무엇이든, 그것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진리는 계시되거나, 정해지거나, 보편적인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소 두려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세계 가운데, 성경의 저자들과 진리를 구현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다수가 소위 모던 시대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 당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충분히 그리고 분명하게 설명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버리고 우리가 전한 것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이론이 인정되는 때였습니다.

우리는 더 큰 세상을 향해 ‘우리는 진리를 얻었지만, 당신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당신이 더 빨리 들을수록 당신의 삶이 더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모더니티의 후반기에 우리는 사영리 같은 설득력 있는 판매 방식으로 ‘진리’를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법칙으로 사람들을 끌 수 있었고, 사영리의 제4단계를 마칠 때면 사람들이 “아, 이 법칙은 정말로 말이 되네요. 제 인생 전체를 그리스도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리라 예상할 수 있었죠.

게다가 이 일은 약 15분 내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잠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실제로 사람들이 몇 분 동안 그들의 전 생애를 되돌아보고, 15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인생의 방향을 재조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믿기 힘든 일로 보이지만, 역사의 한 기간만큼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세대에 그랬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요? 그렇군요. 잘됐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 뭔가 대단한 것에 합류했군요’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당신 자신! 들으셨나요? 당신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불교도가 되었습니다, 아세요? 나는 당신만큼이나 행복하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아직 당신이 경험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누군가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적 신앙에 가깝게 들리지만 힌두교와 뉴 에이지 개념을 접목한 한 꾸러미의 생각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전적으로, 예수님에서 비롯한 신앙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서 비롯된 신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느니 신이라느니 하는 용어를 유사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신을 말하는 걸까요?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당신이 바로 신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용자 친화적으로 조정된 ‘신앙’을 갖습니다. 그리고 각 개인의 신앙 형태는 다른 사람의 것만큼이나 타당하다고 여겨질 겁니다.”

그때 릴리안이 끼어들었다(사실 잘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말을 너무 길게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의견을 학교에서 매일 듣습니다. 선생님들에게도 듣고, 학생들에게도 듣습니다.

나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사람들을 매우 빨리 흡수한다는 것과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는 내가 보았던 것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걸 그만두고 그저 각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찾게 하는 편이 쉽다는 걸 알았습니다.”

두어 사람이 릴리안에게 동의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만이 그런 식으로 느끼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말했다. “신앙이나 믿음에 대해 아무도 논쟁하거나 토론하고 싶어 하지 않고 그저 좋게만 이야기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복음전도(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설득하는 것)가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하고, 가능한 한(특히 공적인 자리에서)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당신의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내 것을 가지고 있고요. 그러니 이제는 우리나라의 의료 제도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를 이야기해봅시다.’”

케네스가 물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케네스 씨.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사실, 우리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알아차린 적이 있나요? 이런 상황은 우리가 사람들을 옛 방식으로 회심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효과가 없는 방식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용서에 관해 듣는 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용서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테드가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복음전도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새로운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한물 간 옛 방식은 이제 효과가 없지요.”

메리 앤이 말했다. “참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일이네요.”

내가 말했다. “만일 당신이 바울과 같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했을 때를, 그리고 이방인과 이교도 위주의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고자 했을 때를 떠올려봅시다.

바울은 예수가 누구셨고 왜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정리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줄 새롭고 신선한 방식들을 발견했지요.”

스탠이 말했다. “우리 교회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제가 맞나요?”

내가 말했다. “진리 말인가요? 그렇지요, 우리는 진리를 아주 잘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제게도 책임이 있지요.”

모임을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마지막 몇 분 동안의 논의가 매우 진지하게 이루어진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전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하게 오늘 이야기한 문제에 관해 생각했고, 자신들의 가장 깊은 반응들을 정리해보려고 애썼다. 다른 사람들 역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존 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몸짓으로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내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기도하고, 자리를 정돈한 후에 건물을 떠났다. 클래이턴은 내 차로 같이 걸어가면서 말했다. “오늘밤에 제게 기도를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해본 일이었습니다. 짧은 기도이기는 했지만요. 나는 어니가 말하는 그런 좋은 말들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조용히 기도를 적어보는 일은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집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오늘 모임에서 지나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나는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에 일어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지난밤에 새로운 발견을 위한 소모임을 가졌다.

나는 사람들이 미처 들을 준비가 안 된 주제를 말한 듯하다. 릴리안은 열심히 참여했다.

그녀는 날마다 세상 가운데 있고, 그 점은 그녀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생각하게끔 압력을 주었던 것 같다. 반면에 존은 마음을 좀 닫는 것처럼 보였다. 어니는 내가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 궁금했나보다.

왜 젊은이들이 교회를 새로 시작하는 걸 선호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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