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와 함께 도망가다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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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와 함께 도망가다 [구독자 전용]
  •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 승인 200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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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여호와의 말씀이 …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 (욘1:1-3)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시오. 어느 날, 바리새인들과 율법 선생들이 예수님에게 놀라운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여, 우리를 감동시켜 보소서. 예수여, 우리를 설득해 보소서. 우리는 당신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빵과 물고기로 속임수를 보이고, 악령과 돼지 무리로 사탄을 물리치는 묘기를 보였다는 소문을 들었소. 당신이 메시야라는 소문이 자자하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믿을 수가 없소.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시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는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이 표적은 흥미롭다. 가령, 엘리야의 표적은 어떨까? 그는 진정한 선지자였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고 말보다 앞서 뛰면서 왕을 내려다 봤다. 이사야는 어떨까? 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훤칠한 장신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울퉁불퉁한 근육과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다니엘은 또 어떨까? 어리석고도 사악한 얼굴을 한 무속의 함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잔잔하면서도 빈틈없이 굳게 진리를 잡고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나라 말씀하신다. 단신의 선지자, 반항하는 선지자, 잔뜩 화가 난 선지자인 요나를 말이다.

요나의 표적은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마12:38-40). 동시에, 악한 니느웨는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으나 “요나보다 위대한 분”을 거부하는 위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이다(눅11:29-32).

하지만 이상하다. 예수님이 자신을 요나와 비교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요나는 반항적이고 소심하며 화가 나 있고, 자신의 이득과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가치관은 너무나도 비뚤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의 요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요나의 표적은 하나의 이미지다. 단순히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아니라, 단순히 듣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과 십자가에 달리심을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고,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을 나눠 가지셨고, 자신을 비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우리와 동화되시기 위해, 마구간과 십자가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자신을 나타내는 마스코트로 우리와 가장 비슷한 선지자를 택하신 것이다.

요나는 바로 우리다. 다른 선지자들은―자유롭고 강렬했던, 다른 이들을 주춤하게 만들고 주눅 들지 않았던, 굳건하며 떨지 않는―현실보다 과장된 이들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갔는지, 이 모든 이야기들은 물론 감동적이지만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그 어느 누가 그들을 능가하겠는가? 그 어느 누가 이사야처럼 이 세상을 누비겠는가? 그 어느 누가 엘리야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며 요구하고 질책하겠는가? 그 어느 누가 에스겔, 예레미야, 호세아와 같이 하나님의 권능의 팔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런 선지자들은 진작부터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 말고 다른 한 편에 요나가 있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어깨는 움츠린 채 구부러진 허리에, 비열한 웃음으로 굳어진 요나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는 날씨 불평을 늘어놓는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춥다. 너무 습하거나 너무 건조하다. 그는 정부에 대해서도 불평한다. 이웃집 대해서도 불평을 한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이 너무 시끄럽고, 설교는 건조하며, 젊은이들이 앉았던 자리는 지저분하기만 하다. 저들은 소란스럽고 부실한 존재들이다. 예배는 마냥 늘어지기만 한다. 그는 이웃집 고양이에 대해는 불평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고양이에게 독을 먹인다.

우리는 이사야와 같이 되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요나와 같다. 요나는 반신반의하는 이들의 우두머리이며, 하나님을 자신들이 정한 규정대로만 믿는 이들의 족장이다. 그는 전혀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너무도 친숙한 인물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어나 가라고 명하신다. 그는 일어나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났다.”(욘1:3, 욘1:10) 그는 단순히 할 일을 피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갔다. 우리는 요나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어떤 것, 우리 인간성에 깊게 뿌리내린 어떤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묵상집을 읽고 워크숍이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나는 책장 하나를 기도에 관한 책―기도의 목적, 성격, 목표에 대한 책―으로 가득 채웠다. 집중력과 열정을 갖고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갖가지 기법들 또한 하나씩하나씩 연구했다. 기도를 배우고 연습하면서 무엇을 내려놓고 또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이러한 책들을 읽는 것은 장인의 문하생이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내가 만약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그만큼 시간을 보냈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그저 손을 들었다가 놓기만 해도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면서도 깊은 색상과 풍부한 감성을 담아내는 바이올린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전보다 기도를 훨씬 더 잘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책들은, 그리고 나 자신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책의 저자들과, 또 이를 읽은 이들의 기본적인 신념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자세는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외치는 이사야와 닮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자세가 아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자세도 아닐 것이다. 나의 기본적인 자세는―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요나와 더욱 닮았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인 것이다.
 
요나는 왜 그렇게 했을까?
요나에게는 니느웨에 가는 것을 거부할 만한 충분한 역사적, 개인적 이유가 있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 사람들은 피에 굶주렸고, 변덕스러우면서도 계산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그들의 위협은 북 이스라엘 왕국에까지 번져왔다. 그리고 요나의 사역 70년 후, 이스라엘은 끝내 그들에게 항복한다. 그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분에게 상처주고 배신하고 잡아먹을 듯 위협하는 사람을 머릿속에 생각해보라. 할 수만 있다면 충분한 증오할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가 바로 앗수르인이다. 요나는 그런 사람들의 수도로 보내진 것이다.

요나의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의심들을 재확인시킨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하기 싫은 일을 우리에게 명하시고, 우리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우리를 가라 명하신다. 내가 시골구석이나 인디아로 가기 싫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내가 보스니아인이나 르완다의 작은 부족민들, 또는 캐나다 사람들이 싫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신학적으로 정리해보자. 하나님은 지독한 감독관 같다. 그분은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시고,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추수하신다. 내면 깊은 곳에서 태풍이나 외눈박이 괴물을 무서워하듯, 호랑이나 독재자를 무서워하듯,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이 두려움은 지혜를 얻게 해주는 두려움이 아니라 어린아이마냥 소스라치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런 두려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땅 끝까지 쫓아올 태세이다. 지옥에나 걸맞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내기로 작정하셨다. 우리가 도망이라도 친다면 풍랑과 지옥에서 뛰쳐나온 바다 괴물로 우리를 삼키게 하실 판이다. 요구 사항이 많은 보스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

몇 년 전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조용기 목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담임 목사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점에서 하나님께 말했다. “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세상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일본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미움으로 일본인들을 싫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군인들이 한국인과 자신의 가족에게 했던 짓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니느웨 사람은 바로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일본 땅에 말씀 선포의 소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정말 지독한 분이시다.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시니 말이다. 조용기 목사는 일본으로 향했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일본에서의 첫 집회는 1000여 명의 일본인 목사들이 모인 집회였다. 그는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난 여러분이 싫습니다. 싫습니다. 싫습니다”였다.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오열하기 시작했다. 증오는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그의 마음을 황무지처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때, 한 명, 두 명, 마침내 1000여 명의 목사들이 전부 일어났다. 그들은 조용기 목사에게 다가가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일본인이 한국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조용기 목사를 변화시키셨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과 입술에 하나의 말씀만 주셨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하나님은 외양을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가끔은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믿고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사역으로 부르신다. 조 목사님, 그리스도의 보혈이 정말 능력이 있지요? 평화의 복음과 화해의 사역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증오심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유대인이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람’과 당신이 화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까요?

아마도 이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너무 엄하셔서 유감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의심은 정확히 반대였다. 하나님이 너무 너그러우셨던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그들이 바로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면, 저 추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고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떤 멍청하고 정신 나간 신이 그 같은 일을 하겠는가? 신이라면 유순하든지 강하든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요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주 강하기도 하시고 아주 유순하시기도 하다. 그분은 우리에게는 너무 지독하게 하시고 우리의 적들에게는 너무나 큰 관용을 베푸신다. 그분은 나쁜사람들을 꾸짖으시고, 또 나쁜 사람들을 먹이신다. 그분은 탕자에게 살찐 송아지를 주시고 직무에 충실했던 아들에게는 염소 한 마리도 주시지 않는다.

12년 동안 내가 주일학교에서 단 1년도 쉬지 않고 섬겨왔다고 가정해 보자. 다른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느꼈을 때는 겨우 내가 너무나 몸이 아파 나를 대신 해 줄 선생님에게 전화를 못했을 때였다. 예의바르지만 쌀쌀맞은 주일학교 부장은 내가 그보다는 나은 사람인줄 알았다고 말한다. 다음 주일, 교회 전체가 들썩인다. 아주 고약한 부동산 중계사가 회심을 하고 세례 받고 감동이 넘치는 간증도 했다. 온 교회가 그를 위해 케이크를 준비하고 마치 그를 아들처럼 포옹한다.

이런 일을 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이런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순종하라. 나는 요나서의 중심적 교훈―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통해 꼭 얻어야 하는 진리―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의 중요성이라 믿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불순종은 요나에게 큰 손해를 가져왔다. 풍랑이 일었고, 익사할 뻔 했고, 물고기 배 속에 갇혔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꺾이지 않았던 명령, “가라!”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었다. 우선, 하나님은 요나의 불순종을 정말 효과적으로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그토록 명령을 거부했던 선지자가 우연스럽게도 전도자가 된 것이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선원들과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승선한다. 요나는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갑판 밑으로 내려가 잠을 청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풍랑을 일으키신다. 유능한 선원들은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으려고 모든 시도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요나를 깨워 기도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는다. 당연히 결과는 요나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고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가끔은 이런 이교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밝힐 필요가 있다.) 요나는 자부심이라도 있는 듯 대답한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요.”(욘1:9)

그들은 끝까지 온 힘을 다한다. 용기를 내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배와 자신과 요나를 구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효과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요나의 요청대로 그를 바다에 던진다. 앞서 그들은 그네들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했다(욘1:5).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배와 그들의 얼굴과 서서히 가라앉는 요나의 몸을 감싸는 물보라를 본다. 그들은 요나의 하나님, 여호와, 하늘의 하나님, 바다와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한다. 하나님은 세상이 다 아는 요나의 불순종을(1:10) 우상 숭배하던 선원들에게 자신을 보이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불순종까지도 사용하신다. 순종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순종만으로는 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요나는 엄청난 압력에 떠밀려 끝내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니느웨까지 투덜거리며 가서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선포한다. 그는 순종했다. 하지만 그는 불순종 할 때보다도 더 괴로워한다. 그가 바다 깊숙이 있었을 때, 물고기 뱃속에 있었을 때, 자신의 불순종 속에서 그는 죽음이 두려워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욘2:7). 하지만 시들어버린 박 넝쿨 아래서, 니느웨가 구원을 얻었음을 알고, 자신의 순종 속에서 그는 오히려 죽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빠르고 고통 없는 죽음을 달라고 기도한다(욘4:3).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오직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이 곡은 요나가 작사한 것이 아니다. 요나는 이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다. 아니, 요나는 이 노래를 매우 싫어한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순종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일까? 아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무엇인가가 있다. 사실 순종은 불순종보다 우리를 더욱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말이 의심이 간다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과 아우를 비교해 보자.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종교적 지도자들을 세리와 창녀들에게 비교해 보자. 아니, 요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순종 그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고 비통하며 속이 텅 빈 껍질같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상하게도, 그리고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은 관심이다. 우리의 관심의 목표, 관심의 깊이, 관심의 올바름과 관심의 권리에 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하지만 이 표적은 악인들과 스스로 만족하는 이를 향한, 니느웨 사람들은 물론 요나와 같은 이들을 위한, 창녀들은 물론이고 바리새인들을 위한, 나의 적은 물론이고 나를 위한 하나님의 높고 끊임없는 관심의 표적이 아닐까?

나는 요나서를 신실하게 강해하던 설교자의 주요 과제가 강퍅하고 과학으로 길들여진 교인들에게 사람을 통째로 삼킬 만한 물고기가 실존하고, 그 안에서 사람이 사흘을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던 때를 기억한다. 요나서의 주요 해석은 신학이 아니라 선학―물고기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나의 비밀 이론을 여기서 고백하자. 물고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요나서의 진정한 퍼즐―지속되는 불가사의와 의심의 원천―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은 니느웨 뿐만이 아니라 요나에게도 깊은 관심이 있으셨을까? 이처럼 반항적이고 소심하며 화가 나 있는, 자신의 이득과 자신만을 챙기는 이 난장이에게 왜 관심을 가지셨을까? 왜 하나님은 요나를 세상 끝까지, 바다 깊은 곳까지, 니느웨 외곽까지 좇아가셨을까?

2년 전 나는 철쭉 묘목을 구입했다. 때마침 나무를 심는 시기가 지났고, 철쭉의 이파리는 거무칙칙하고 바싹 마르고 딱딱한 날이 섰기에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집 주변이 비옥한 땅이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잘 자라리라 생각했다. 내 생각은 정확했다. 나는 철쭉을 집 앞 마당에 심었고 철쭉은 장관을 이루었다. 여름에 심은 터라 잎은 짙은 초록색으로 변했고, 이듬해 봄에는 불타는 듯 밝은 붉은 빛 꽃을 피웠다. 마치 불타는 가시덤불처럼.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집 앞에서는 길거리 하키를 하기에 적격이다. 편편하고 고르고 차도 많이 다니지 않는다. 여름날 저녁이면 동네 십대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시끄럽고 위험스러운 하키 게임에 빠진다. 여느 날처럼 하키 게임이 있었던 다음날 아침, 나는 철쭉에 물을 주려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나는 허리 숙여 철쭉을 살펴보다가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거친 모서리만 남은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사무소에 연락 할까? 하키를 아주 못하게 막아버릴까? 아이들이 다시 모였을 때 나가서 혼쭐을 내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내 머리를 스쳤다.

그때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듯 했다. “마크, 네가 화를 낼 자격이 있느냐?”

“네, 물론이죠!”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나무는 네가 창조하지도 않았고 또 돌보지도 않았던 그저 값싸게 산 나무지 않니. 너는 고작 심기만 했지. 그래도 나무는 자라기 시작했지.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내 피조물이야. 내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란다. 내가 그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하나님은 니느웨나 뉴욕, 던컨이라는 도시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잘난 척 하는 소심한 선지자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철쭉나무가 망가져 화를 내는 중년의 목회자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실까?

곱씹어 생각하면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점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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