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는 여행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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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여행 [구독자 전용]
  • 마크 갤리 | Mark Galli
  • 승인 20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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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다녀왔다는 책이 쏟아져 나온다. 신학적으로 무척 혼란스런 증인들에게 온전한 복음을 전할 기회다

 

최근 미국에서도 천국 체험을 증언하는 책이 쏟아지고 베스트셀러에도 여럿 오른 터라 미국 CT도 이를 분석한 기사를 지난달 커버스토리로 실었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옮깁니다. _편집자 주


정형외과 의사 매리 닐이 쓴 「천국에 갔다 돌아오다」(To Heaven and Back)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20주 동안 올라 있다. 천국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토드 버포의 「3분」(크리스천석세스 역간)은 2년 가까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고, 2004년에 출간된 돈 파이퍼의 「기적의 90분」(말글빛냄 역간)은 지금까지 300만 부가 팔려 나갔다.

이 세 권의 책은 모두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의 작품이지만,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내놓고 있다. 지난 10월 말에는, 그 달 초에 <뉴스위크> 표지 기사를 장식했던 이벤 알렉산더의 「천국의 증거」(Proof of Heaven)가 서점가를 강타했다.

과거에도 임사체험이 대중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서너 해 간격으로 이런 책들이 출판계에 나타났다. 하지만 사후 세계를 다룬 책들이 범람하는 최근의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과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저자들은 빛의 터널만 본 것이 아니라 직접 천국을 다녀왔다고 주장한다(따라서 이 기사에서는 임사체험 대신 “천국 체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둘째, 이런 책들을 쓴 저자 중에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런 체험들을 싸잡아 의심할 필요도 없고, 더군다나 이것들은 신학에 변화를 몰고 올 새로운 계시도 아니다. 기적과 마찬가지로 임사체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계시된 것들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

봇물 쏟아지듯 출간되는 최근 책들에서 가장 어리석은 주장은 그런 경험들 때문에 이제 우리가 “천국이 진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거나 “천국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이 진짜 있다”고 믿는 이유는 네 살짜리 꼬마나 신경외과 의사의 증언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증언하셨고 자신의 증언을 입증하기 위해 무덤에서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린 도둑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의 가르침은 눈에 보이고 육체로 존재하는, 천국이라고 알려진 상태뿐 아니라, 아직 몸을 입지 않은 영광스러운 상태, 즉 중간 단계 역시 상정한다.

사도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고후 5:8)이라는 말로 이 실재를 확인해준다. 바울도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고후 12:1-4) 임사체험자다.

이 본문을 포함한 다른 성경 구절들은 우리가 죽은 후에 누릴 천국의 실재를 가리킨다. 이 구절들이 말하는 내용이 우리가 알아야 할 전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교회 밖의 유물론과 교회 안의 유물론

유독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더 이런 천국 체험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특정 장르의 책이 대박을 내는 것과 같은 복잡한 사회 현상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인과 관계를 증명하기가 꽤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추세를 분별할 수는 있다고 믿는다.

첫째, 우리는 문화계와 학계의 엘리트들이 영성을 공격하는 시대와 문화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고등학교 축구부 응원단이 응원 깃발에 성경 구절이라도 적어 넣으면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런 시대다. 그들은 정교분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소송을 제기한 많은 사례에서 보듯 많은 경우는 종교적 편견에 불과했다.

한때는 세속주의가 부분적으로나마 민주 사회를 위한 중립 지대를 만들어낸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속주의가 종교적 감성을 적대시한다는 인식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우리 문화의 지배적인 철학은 유물론인데, 오감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이런 철학에서는, 하나님이 조연을 맡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개개인의 사적인 삶에서만 가능하다.

회의론과 유물론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사람들이 뭔가를 더 바라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놀랍지 않다. 여기에 유독 증언을 좋아하는 우리 문화의 특징이 결합한다.

증언을 좋아하는 문화는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간증해야만 교인이 될 수 있었던 청교도 전통에서부터, 거듭남의 고백을 유난히 사랑했던 부흥 운동까지 긴 시간 동안 이어지며 역사적으로 축적된 결과다. 증언은 이 나라의 정신에 깊이 새겨져 있다.

공허한 유물론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우리의 열망과 “천국이 진짜로 있다”는 일인칭 증언을 결합해보라. 출판 시장에서 엄청난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교회 안의 유물론이다. 유물론에 매료된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데 특별히 기독교 학계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흐름은 신약성경 학자 오스카 쿨만의 1956년작 「영혼의 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Immor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에서 출발한다. 쿨만은 영혼 불멸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개념’이지만,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성경이 아니라 ‘헬라의 개념’에 의해 형성된 교리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신약 성경이 영혼의 영생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분명히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특히 우리가 근본주의 시대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점점 더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1947년 칼 헨리의 저서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한국IVP 역간)으로 몸을 지닌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칼 헨리가 오늘날의 세속적·사회적 악을 해결하려는 새로운 열정을 일으켰다면, 쿨만의 논지는 영혼의 불멸을 전면 불신하는 신학자들 사이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 이후로 기독교 신학은 경성화되어갔다. 이렇게 되자, 사후 세계를 파고드는 영적 독서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깊어졌다.

N. T. 라이트는 사후 세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후 세계 이후의 세계’에 관심 있다고 했다. 사후 세계 이후의 세계란, 새 땅에서 몸을 입고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계 21장). 이런 신학 주제에 열렬한 관심이 쏟아지자 혼과 영에 대한 대화는 저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일종의 기독교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이 땅에 임하는 새로운 하늘에 대해 열띠게 이야기한다. 그때에는 정의가 전 세계를 다스리고, 우리는 구속받은 상태에서 몸을 입고 살아갈 것이다.

이 모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몸의 부활은 종말에 인간의 궁극적 상태를 이야기하는 최고이자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는 복음주의 학자들이 이 점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히 언급한 데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목회자들은 어려움에 봉착한다. 대개, ‘사후 세계 이후 세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 미래 상태를 이야기할 때 포괄적 표현과 추상적 이미지를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정의가 다스리고 악이 패한다”고 열을 올린다. ‘역사의 종말’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포괄적으로 언급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런 흥분되는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심장마비로 남편을 잃은 과부에게 늘 와 닿지는 않는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열 살짜리 아이에게 위로가 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라는 질문으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내용은 아니다.

우리 중 일부(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는 ‘사후 세계 이후의 세계’에 가장 관심이 있을 수 있지만, 대다수 교인들은 사후 세계, 즉 죽음 직후의 상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실존적 최우선순위는 정의가 충만한 세상이 아니라, “죽은 다음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좋은 소식을 듣는 것이다.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야

이런 천국 체험이 가진 큰 매력(이자 우리가 가진 종말의 소망에서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그들의 묘사가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사랑스럽다는 점이다. 천국 체험은 두 가지 면에서 개인적이다.

수평적으로는, 이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그들과 재회한다. 토드 버포는 유산되어 죽은 여동생과 할아버지를 만난다. 매리 닐은 친척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기가 “영원히” 아는 사람 같았다고 말한다. “저는 그들의 일부였어요.” 천국 체험에는 그런 만남들이 가득하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들은 어머니의 태에 싸여 있는 갓난아이처럼 깊은 사랑 속에 잠겨 있다. 특히 이벤 알렉산더의 체험에서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그에게 끊임없이 들린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계질서가 될 것이다. 그 질서가 역사를 영광스러운 결론에 다다르게 할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그 소망은 희미하고 멀리 있는 것만 같다. 많은 이들에게 이는 단지 흥미로운 뉴스에 불과하다. 그들이(특히 자신이나 가족이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무엇보다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좋은 싫든, 그것이 최근 서점가를 강타한 천국 체험 도서들이 가르치는 복음이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나를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회할 수 있을까? 내가 무한한 기쁨을 알 수 있을까?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할까? 이렇듯 대다수의 사람들이 던지는 쏟아지는 질문에 천국 체험 이야기들은 강한 긍정으로 답한다. “물론이다, 물론이다, 물론이다, 물론이다, 물론이다.”

확실히, 이런 이야기들이 복음의 핵심적 측면을 전달하기는 하나,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구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지적하는 내용이 부족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오직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때문에 이들이 이토록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이야기들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시, 세상의 소망이 중심에 있는 온전한 복음을 제공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이 경험한 것은 임사체험이나 천국 체험이 아니라, 어느 친구가 지적했듯, 하나님 체험이다.

우리가 믿고 받아들인 성경적 전제들과 거리가 먼 그들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즉 무조건적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전율과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체험을 하나님의 온전한 의도와 목적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마크 갤리(Mark Galli)는 CT 편집장이며, 「터프가이 예수」(예수전전도단 역간), 「하나님이 이긴다」(포이에마 역간)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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