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 자가 부정한 자를 만질 때 [구독자 전용]
상태바
정한 자가 부정한 자를 만질 때 [구독자 전용]
  •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 승인 2013.0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수의 혁명적 전환이 변화를 가능케 한다

최근 한 젊은 부부가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부부는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몇 년 전 캐나다 동부 쪽에서 결혼한 이 부부는 얼마 전 서부 지역으로 이사 왔다. 이들은 정착할 교회를 찾아 여러 교회를 방문하다 우리 교회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둘 다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이 예배하고 섬기며 성장할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있었다. 또한 딸들을 ‘주 안에서 양육하고 훈계’할 수 있는, 사랑이 넘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공동체를 찾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여자다. 린다와 리타는 레즈비언이다. 이 두 사람에게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은 “대체 왜 우리 교회로 결정하셨습니까?”였다. 이 지역에는 동성결혼을 성경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몇몇 교회가 있다. 그 교회들은 동성부부의 결혼식을 거행하고 이를 축하하며 동성부부들을 환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교회가 아니다. 복음주의 전통에 단단히 뿌리내린 우리 교회는 성경과 개인의 거룩함, 복음전도와 실천을 매우 강조한다. 물론 동성애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이 있다.

사실 린다와 리타는 우리 교회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교회에서 자랐다. 이 부부는 그 경험이 우리 교회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나는 이 부부의 두 번째 이유가 매우 흥미로웠다. 두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생명과 기쁨을 보았고, 그들도 이 교회 안에서 생명과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부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20년 목회생활 중 이렇게 잠을 설친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자라온 전통에 따르면 이 부부를 받아들이지 말아야했다. 내가 공부한 신학은 이들의 삶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삶이라고 했다. 하지만 성령님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내 마음을 뒤흔들며 나의 전통이나 신학과 아주 다른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두 사람을 우리 교회로 데려오셨다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선 린다와 리타의 삶에 개입하고 계셨고, 우리 교회가 그 일에 동참하게 하셨다.

 


긴장 상태에 놓인 성경적 가치

우리 교회는 두 가지 가치를 똑같이 중요하게 여긴다. 문제는 이 두 가치가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가치는 성경이 진리인 것과 그 성경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실한 침례교인인 우리는 성경이 우리 삶과 거룩함을 위한 단 하나의 진정한 지침서라고 가르치고 이를 믿는다. 또한 그렇게 살아내려 애쓴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때로 말씀에 불순종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아래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할 권리가 없다. 단지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후 성경이 특별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아무리 그 진리의 내용이 불편하고 인기가 없더라도 우리는 그 진리에 빚진 자임을 알아야한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가치다.

두 번째 가치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환영하셨으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그분을 대신해 이 일을 계속하길 원하신다.

모두 알겠지만 당시 예수님은 평판이 나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관계를 맺으셨다(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당시 종교 공동체는 큰 충격을 받았고 격렬히 분노했다). 예수님은 평판이 나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들을 찾아다니셨고, 그들을 환영하셨다. 그들 집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드시기도 했다. 예수님은 간통이나 도둑질 같은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들도 거의 꾸짖지 않으셨으며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해주셨다.

하나님은 삭개오와 막달라 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간통죄로 잡힌 여인, 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의 삶을 깊게 만지셨다. 이 모든 ‘죄인들과 세리들’에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으며 그들을 찾으셨다. 

이 두 번째 가치가 린다와 리타 문제로 고민하던 내 맘을 흔들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대로 린다와 리타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때론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흥미진진하면서도 은혜가 넘치는 이 길을 걸으며 우리는 늘 감격한다. 우리 교회의 목사인 셰인은 리타와 갈등을 겪고 있는 린다를 상담한 적이 있다. 린다는 리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 셰인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도 여자랑 결혼하셨으니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아실 거예요.” 상담을 마친 며칠 후 셰인 목사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신학교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명확한 신념

린다와 리타를 받아들인 것은 우리 교회가 지금껏 지켜온 신념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앞서 나는 그중 두 가지를 이미 나눴다. 성경이 우리 삶과 거룩함을 위한 단 하나의 진정한 지침서라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예수님도 죄인들을 환영하셨으며 우리도 그분과 같이 죄인들을 받아주길 바라신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 교회의 다른 신념 몇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여러분의 교회가 ‘죄인과 세리’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면 우리의 이 신념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분 또한 주위 사람들의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심오한 사역에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가 동참하기를 바랄 것이라 생각한다.

첫 번째 신념: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공공연하게 밝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실질적인 무신론자는 아주 많다. 바로 하나님의 ‘실재’thereness를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부류 사람들을 ‘무관심유신론자’apatheist라고 부른다. ‘유신론자’theist와 ‘무관심’apathy을 합성한 단어다. 무관심유신론자는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하나님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심을 강조하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지하는 감각을 키우기 위한 영적 훈련의 키워드는 호기심이다. 나는 사람의 계획이나 사탄의 계략보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더 호기심을 가지려 애쓴다. 물론 사탄의 음모를 모른 채 넘어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사역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뜻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고 깊게 확신한다.

리타와 린다가 방문한 직후 교회의 사역자들과 장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 모임에서 우리는 동성애자 친구들을 대하는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을 함께 고민했다. 나는 첫 질문을 이렇게 던졌다. “만약 동성애자들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길 원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일까요 아니면 사탄이 하는 일일까요?”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하나님”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신다. 이 신념은 우리의 다음 신념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신념: 누군가 빛으로 나아온다면 이는 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빛이라고 하셨다. 빛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은 진리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장소로 온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저주한 셈이다.

남자든 여자든 빛으로 나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낼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자. 두 사람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길이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다. 바리새인은 당시 도덕적으로 세간의 모범이었다. 도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고,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은 세련된 언어로 유창하게 기도했지만, 기도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으로 일관했다.

세리는 당시 악인과 불량배의 대명사였다. 소위 ‘선량한’ 사람이 그를 쳐다보면서 “하나님, 제가 세리와 같지 않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던 부류의 사람이다. 세리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세리의 기도는 짧고 투박하지만 간절하다. 그의 기도는 죄 고백이며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간청이다. 그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죄인이다.

이 두 사람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판단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23:12]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높이고 낮추는 것은 빛과 어두움과 관계가 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부분만 빛으로 가져왔다. 즉 자신의 미덕, 신실함, 관대함 등만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 대부분은 그대로 어둠 속에 남아있다. 반면 세리는 탄식하며 추악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빛으로 나아갔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비참한 타락상과 어리석음, 깨어짐과 악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세리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비를 베푸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으로 나아오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살피고 깨끗해지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우리를 빛으로 초대한 이유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다. 어둠 속에서는 엉망진창인 모습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더 더러워질 뿐이다. 이는 우리의 세 번째 신념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 신념:  누군가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빛으로 나아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그 상황을 헤쳐 나가지 않는다면 그는 깨끗해지지 않는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내용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성숙한 사람의 역할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거나 우월감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한 통속이 되거나 그 잘못에 책임을 져주는 것도 아니다. 성숙한 사람의 역할은 ‘그 사람을 부드럽게 회복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한 헬라어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복시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르티제테’로 ‘조율하다’라는 뜻이다. 그리움을 자아내는 아름답고 낭랑한 음색을 지닌 악기가 조율이 되지 않은 채 앞에 놓여있다고 상상해보자. 음을 맞추려 악기를 앞뒤로 거칠게 흔들어도 보고 두드려도 보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악기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악기는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 바이올린이기 때문이다. 단지 조율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로 사랑을 연주하는 악기다. 깽깽거리거나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악기가 아닌 것이다. 이 악기에 담긴 진정한 가능성을 회복하려면 각 현을 부드럽게 조이고 풀면서 원래의 음을 맞춰주는 조율사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 일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헝클어진 삶을 정리하는 것을 돕는 사람들은 때로 다른 이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한다. 엉망진창인 그 모습을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 전 다른 교회의 목사님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 관한 여러 소문을 들었다며 우리 교회가 걱정이 된다고 했다. 내가 어떤 소문을 들었냐고 묻자 그는 세 가지 소문을 이야기했다. 우리 교인 중 한 커플이 혼전 동거를 하고 있으며, 다른 커플은 혼외정사를 벌이고 있고, 동성애자가 우리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모두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엉망진창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회복’을 위해 함께 그 상황을 헤쳐 나가던 중이었다. 나는 그 목사님에게 현재 우리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는 더더욱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 같으면 벌써 오래전에 교회에서 내쫓아 버렸을 겁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그런 죄를 용인할 수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나는 어떻게 그런 죄를 피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우리 교회는 ‘코이찬 밸리’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얻겠다는 야심찬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그곳 사람들의 마음은 깨져있었고, 괴로움과 혼란으로 가득 차있었다. 상처 자국이 깊게 패인 건강하지 않은 마음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마음을 조율하는 법을 알려주시리라 믿었다. 상처 입은 마음에서 찬양이 흘러나올 수 있게 말이다.  이는 우리의 다음 신념으로 이어진다.

네 번째 신념: 마음을 조율하는 사역을 위해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구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로 오셨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요1:14, 16-18)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드러내셨는지 명확하게 설명한다. 바로 은혜와 진리를 통해서다. 요한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 방법과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낸 방법을 비교한다. 모세의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기준을 명확히 천명한 것이다. 율법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명령과 금기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단호하고 냉엄하다.

그때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오셨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거룩함의 기준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다. 모세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하는 기준을 돌판에 드러냈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동치는 마음을 자신의 육신에 새기신 것이다. 그것이 은혜와 진리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씀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셨다. 그분의 거룩한 본능은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언제 어디서나 완전한 은혜와 완전한 진리로 행하시고 말씀하셨다. 선택을 위해 고민하지 않으셨다. 하나를 하면서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혼란스러워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늘 진리와 은혜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과 장로들이 모여 동성애자 친구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함께 이야기 하던 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요한복음 1장을 읽으며 보냈다. 내가 물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리에 가득 차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솔직히 이 질문의 답은 침례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즉 죄는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물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은혜에 가득 차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린다와 리타, 아니 그 누구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승리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그들 모두가 마음속으로 느끼게끔,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종의 격언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은혜에 흠뻑 젖어야 하며, 우리가 은혜를 보여줄 때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진리가 가득 해야만 한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의 가장 놀랍고 가장 강력한 신념이라 볼 수 있는 다음 신념으로 이어진다. 

다섯 번째 신념: 예수님께서는 깨끗한 사람과 깨끗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던 영향력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율법을 가르치던 선생들은 예수님을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고발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하신 일은 그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바로 방향을 바꾸신 것이다. 율법은 도덕적·영적 부패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험하게 하려 오셨다. 예수님은 엉망진창인 사람들을 도덕적·영적으로 깨끗하게 회복시키는 대리인으로 우리를 세우셨다. 어떤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성령님이 그들 안에 가득하다면 지옥문 앞에 갈 수 있다. 그 존재의 무게에 눌려 지옥문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8:1-4]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왔다.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그에게 절하면서 말하였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그의 나병이 나았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 하셨다.”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레위기의 율법을 완전히 어기는 행위였다. 나병 환자라면 꼭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다. “악성 피부병(나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한다. 또한 그는 자기 코밑 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한다. 병에 걸려있는 한,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있게 되므로,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한다.”[레13:45-46]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새로운 능력이 이 세상에 왔음을 알았다. 새로운 능력을 향한 소망은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에게 달려가 그 발아래 엎드려 담대히 간청하게 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의 방향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정한 자가 정한 자를 불결하게 하는 대신, 이제 정한 자가 부정한 자를 만지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이다!

영향력의 방향이 뒤바뀐 것은 율법이 단번에 새로 쓰였음을 의미하며, 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혁명이다. 하지만 이는 교회가 수많은 장소에서 수차례나 실행하지 못한 채 뒤로 미뤄놓은 혁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로 이 혁명을 이해조차 못하고 이를 실행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나는 가끔 우리가 영향력의 방향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우리 교회는 이제 이 사실을 믿기 시작했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시작하신 그 혁명을 따르려 애쓰고 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물론 실수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 걸어간다면 우리 옆에서 함께 걸으시는 그분을 만날 것이다.

조율이 되지 않아 제멋대로 소리를 내는 마음을, 찬양이 흘러나오는 마음으로 조율할 준비를 한 채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걷는다면 우리는 부정한 것을 만질 수 있고, 그에 오염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LJ
 


마크 뷰캐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던컨에 있는 뉴라이프커뮤니티교회의 목사다.

Mark Buchanan, "When Clean and Unclean Touch" Leadership Journal 2012 여름, CTK 2013: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