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교에 빠지다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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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교에 빠지다 [구독자 전용]
  •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 승인 200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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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소비주의 교리가 우리의 영혼과 삶을 갉아먹고 있다.


나는 ‘조금 더’교(Cult of the Next Thing)에 빠져 있다. 이 교의 신도가 되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더라도 의도적으로 맞서지 않으면 저절로 같은 편이 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교는 종교 수준에 이른 소비주의다. 이 교의 신도들은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새것으로,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깔끔하게, 조금 더 화려하게라는 기도문을 읊조린다. 이 교의 전통 예배의식은 외상 구매, 신용 구매, 계약금 없음, 후불, 3개월 무이자다. 이 교도 설교자와 전도자, 선지자와 사도가 있는데, 애드맨과 피치 맨(ad men, pitchmen, 텔레비전이나 전단지 등에 등장하는 상품을 선전하는 사람/역주), 유명 광고주가 그들이다. 물론 제단과 교회와 성전과 메카도 있는데, 상점과 대형마켓과 회원제 매장이 그것이다. 신용카드와 직불카드로 성례를 집전하면서 무차별 구매와 소비를 통해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조금 더’교가 외쳐대는 중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갈망하라, 소비하라, 물신의 왕국이 여기 있다.”

사실 성숙한 신앙이란 우리가 얼마나 가졌느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교에서는 소유의 양에 따라 신앙을 판단한다. 이 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언제나 쉬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다음 주, 다음 휴가를 고대하면서 또 다른 구매와 체험을 갈망한다. ‘조금 더’ 좋은 것, ‘조금 더’ 새것을 추구하는 본능은 유전자에 이미 각인되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본능은 거의 유전적이라고 할 만큼 존재 깊숙이 파고들어 자라난다. 그것은 우리 삶의 패러다임이며, 삶의 방식이며 우리를 하나로 묶는 신화다. 이것이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윤리적, 영적, 신학적인 문제이며, 삶 속에서 직면하는 실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성전이 장사꾼의 소굴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은 몹시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예수님은 별의 별 일―귀신들린 자의 외침,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 예수님을 지도자로 떠받들려는 우둔하고 한심한 제자들―을 묵묵히 다 참아내셨다. 그러나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보시고는 격노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조금 더’교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표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하게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이다. 그러나 늘 그러하듯 아는 것만으로는 하등의 도움이 못된다. 이 교는 거대하고 강력하고 조직력이 강해 별 탈 없이 잘 굴러간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인간의 모든 충동을 지배한다. 심지어 ‘단순한 삶’까지 상품으로 포장해 이윤을 남긴다. 심지어 적도 자기 휘하에 둘 수 있고, 반대 슬로건을 지지슬로건으로 바꿀 수 있다. 최신 자동차에서 의류, CD플레이어에 이르기까지 광고는 이미 소비주의에 저항하는 조류마저 악용한다. 예컨대 4만 달러에 달하는 스포츠 SUV를 물질주의가 만들어 낸 일과 쇼핑의 세계로부터 탈출시키는 마법처럼 선전하며 팔아넘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광고에서 어떤 아이러니도 알아채지 못한다.

만족함이 없다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는 일 년 몇 개월 전에 산 것이다. 컴퓨터는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능력 있고 쓸모 있는 기기의 하나다. 구입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산업표준에 뒤떨어지고, 최신 개발 소프트웨어는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화가 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가전제품 대형 몰에서 매주 보내오는 전단지를 보면 내 컴퓨터보다 성능도 좋고 속도도 빠르고 모니터도 크고 메모리 용량도 큰 컴퓨터들이 내가 샀던 가격보다 훨씬 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기 당한 느낌이다. 새차 값을 내고 똥차를 타는 기분이다.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나? 아니면 트레이드업(웃돈을 얹어주고 비싼 제품으로 교환하는 것/역주)을 해야 하나? 그렇지만 내 컴퓨터는 여전히 자판을 두드리거나 마우스로 클릭을 하면 잘라내기, 붙이기, 삭제하기, 복사하기, 맞춤법 교정, 그래픽 보정 등 갖가지 작업을 손쉽게 해낸다. 게다가 수십 가지 폰트와 사진파일이 저장되어 있고,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을 때는 시디롬에서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다. 글을 쓰는 동안 컴퓨터는 음악을 재생하고, 걸려온 전화에 응답을 하기도 한다. 또 뉴욕 공립도서관 자료목록에 링크할 수도 있다. 가만히 의자에 앉은 채 물건을 사고 값을 지불하고 배송 받을 수도 있다. 컴퓨터는 앞으로도 내겐 없어서는 안 되는 기계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보다 더 많이 사용하게 될 것이다. 복잡한 컴퓨터 작업을 통해 내 글을 타이핑하고 다듬으면 또 하나의 신기한 세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매주 날아오는 전단지를 볼 때마다 뭔가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역시 ‘조금 더’교에 빠져 있다고 앞서 말했다. 이 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시한다. 광고를 보라. 이 차를 사서 여행을 하라, 이 옷을 사고, 이 세제를 사용하라, 그리하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이 모두가 당신을 만족시킬 것이다. 내가 보았던 TV 광고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이 있는데 바로 쿨 에이드 광고다. 무더운 여름 한 무리의 아이들이 축 처진 채 시무룩하니 앉아있다. 지친 나머지 아무 생각도 없이 마치 깊은 절망에 빠진 모습이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하지? 그때 엄마가 물방울이 송송 맺힌 루비처럼 붉고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쿨 에이드 피처를 들고 나타난다. 아이들은 좋아 날뛰며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벌컥벌컥 마신다. 그래, 이것이 살아야 할 이유야! 광고를 통한 찰나의 감동이 오랫동안 내 안에 충만하다. 쿨 에이드가 구세주와 같은 이미지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애들도 쿨 에이드를 좋아한다. 광고 속 아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단순한 삶
지난 여름 나는 헛간을 하나 지었다. 삽, 쇠스랑, 비료 살포기, 잔디 깎는 기계, 호스, 스프링클러 등 정원 용품을 벽에 그냥 세워놓았더니 너무 빨리 낡고 녹이 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계속 가스 캔을 훔쳐갔다. 결국 헛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내로 가서 건축자재상에 들렀다. 조립품으로는 가장 싼 것이 500달러였다. (가장 싼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내겐 너무 비쌌다. 가게에 들러보다가 목재더미를 발견했다. 가로-세로 4인치-2인치짜리 판자가 600피트에 50달러였다. 그것을 사가지고 와서 헛간을 짓기 시작했다. 수주에 걸쳐 골격을 완성했다. 한 친구가 지붕 외장을 시팅보드로 덮으라고 권했다. 그 친구는 일 년 전 싹쓸이 세일 때 나무를 왕창 구입했다. 시팅보드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나무가 썩더라는 것이다. 신축건물 주변을 차를 몰고 가다가 건물 옆 공터에 안 쓴 지붕용 널판과 둘둘 감긴 타르페아퍼를 발견했다. 주인을 수소문해서 흥정을 했다. 덕분에 반값에 살 수 있었다. 교회 크롤 스페이스(천장이나 마루 밑의 배선―배관 등을 위한 좁은 공간/역주)에서 낡은 문짝과 널빤지 몇 개를 발견했다.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수소문하고, 구매하고, 흥정하고, 그냥 가져오기도 하고, 임시변통도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결국 나는 커다란 헛간을 갖게 되었다. 300달러쯤 들었다. 그런데 나는 얼마전 카탈로그에서 1800달러짜리 비슷한 헛간을 보았다. 
 
제정신으로는 못할 일을 해낸 것이다. 시간도 더 많이 걸렸고(보통 많이 걸린 것이 아니다) 그냥 부품을 사서 조립을 했다면 하루 안에 끝났을 것이다. 때때로 검소하고 단순한 것을 추구하다가 더 복잡한 과정을 겪게 된다. 마땅히 치러야 할 값이기도 하다. 내가 헛간을 지을 때처럼 시간도 아주 많이 걸린다. 그러나 계획보다 진행 과정이 훨씬 더 스릴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좋은 대화도 나누었다. “여보, 믿을 수 있겠어? 드디어 헛간을 완성했다구. 마무리에 온 힘을 쏟아 부었지.” 내가 아이들처럼 기뻐하자 아내와 아이들도 덩달아 즐거운 모양이었다.
 
헛간을 지으면서 나름대로 교훈을 얻었다. 생활 속에서 단순함을 실천하다보니 작은 일에 더욱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앞마당에 꽃밭도 만들었다. 헛간을 지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가장자리를 두를 화강암, 흙, 나무, 꽃을 모았다. 단순한 삶을 실천한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꽃들을 바라보니 기뻤다. 이 꽃 저 꽃으로 날아다니는 벌을 바라보면서 깊은 충족감에 빠지기도 했다. 벌을 보면서 하나님도 내가 한 일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꽃밭을 만드느라 애를 쓰긴 했지만 벌까지 날아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따금 단순한 삶이란 정원을 벗어나 광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 예로 느헤미야를 들 수 있다. 느헤미야는 사치와 풍요가 넘치는 페르시아궁의 화려함에서 벗어나기 원했다. 대신 곧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는 붕괴된 하수시설과 벽돌더미가 널려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살고자 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마음에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느 2:21)
 
그러나 느헤미야의 이러한 바람은 합리주의라는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굳이 내핍과 고독과 불안한 삶을 택할 필요가 있느냐는 내면의 소리 또는 이 모두가 영웅중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로 모든 계획이 무산될 수도 있다. ‘조금 더’교에 맞서는 것이 허망할 때도 있다. 가족들에게 일 년 동안 TV 금식을 강요했던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며, 그의 가족들은 지금도 그 일로 그를 원망하고 있다고 했다.
 
단순한 삶이란 단지 어떤 것을 금하고 의지력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한 차원 위다. 단순한 삶이란 무엇을 포기하거나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단순한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넣어주신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로 작정했다면 그 삶에 만족해야 한다. 단순한 삶이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맘몬은 순종적이고 상냥하고 다재다능한 썩 괜찮은 하인이다. 그 어떤 일을 위해서도 몸을 던질 자세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슬럼도 마다 않고, 때로는 유력자와 친분을 쌓아 이익을 챙긴다. 부도덕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태국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실크를 사고, 코끼리를 타고, 화려한 물고기 떼 사이를 누비며 스노클링도 했다.  변기용 왁스 링을 사기도 했다. 맘몬은 늘 싹싹하고 다소곳했다.

 

 

 

   

그러나 맘몬은 요구사항이 많고, 변덕스럽고, 타협을 종용하는 가짜 신이다. 오만하고 잔혹하며, 우리가 두 발 뻗고 긴 시간 단잠 자는 것을 방해한다. 관대한 듯 하지만 변덕이 심하고, 능숙한 솜씨로 우리에게 던져 준 선물로 인해 누리는 기쁨을 순식간에 빼앗아간다. 대신 아쉬움과 갈증을 안겨주어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탐욕을 심어준다. 이것이 바로 ‘조금 더’교가 가진 최악의 두 얼굴이다. 다시 말해, 이 교는 우리로 하여금 무가치한 것에 집착하고, 가치 있는 것은 내동댕이치도록 길들인다.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즐기라고 부추긴다. 그래야만 ‘조금 더’ 좋은 것을 갈구하는 우리의 목마름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맘몬은 큰 소리로 떠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한다. 맘몬이 우리 안에서 으르렁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넣어주시는 말씀을 듣기가 힘이 든다. 나는 밴쿠버 아일랜드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사이에 있는 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침 일찍,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해변을 타고 숙소로 돌아온다. 푸른 바다와 발밑에서 자갈과 조개껍질이 밟히는 소리, 자연의 조각품 같은 갖가지 유목(流木) 등, 거대한 갤러리가 내 앞에 있다. 바다를 향해 경사를 이룬 사암 한 모퉁이에 앉았다. 물살 때문에 구멍이 나고 울퉁불퉁해진 사암은 거대한 도마뱀을 닮았다. 사방이 마냥 고요하다. 바람과 흙과 물이 어우러져 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초저녁 무렵 숙소를 향해 걸어오면서 갖가지 소리를 들었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들, 부드럽게 밀려오는 파도와 저 멀리 수면 위를 소리없이 스쳐가는 왜가리, 광대한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소리들을 들었다.

단순한 삶은 침묵과 같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은 침묵하지 않고서는 절대 들을 수 없다.

감사합니다
침묵 가운데 들려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마디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들려주신 그 음성, 그 한마디는 “감사합니다”였다.
 
7년 전쯤 나는 우간다의 작은 마을 와이라카에 있었다. 매주일 저녁 인근에서 백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옥수수밭 한편에 비스듬히 양철지붕을 얹은 곳에서 모였다. 바닥은 온통 흙투성이였고, 그들이 앉아있는 의자는 표면이 거친 나무의자였다. 악기는 낡았고, 기타 줄도 음이 맞지 않아 엉망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예배가 가능할까? 헐레벌떡 달려온 터라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우리 일행이던 청년 한 사람만 말끔한 셔츠로 제대로 옷을 챙겨 입었다. 모양새가 제법 근엄하고 거룩했다. 그런데 그 청년마저 갑자기 겅중겅중 뛰며 박수를 치고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주일 저녁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목사님이 물었다. 키가 크고, 가냘픈 여인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평범해 보이나 아름다웠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예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해요.”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자세히 좀 이야기 해봐요!”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먼저 할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면 돼요! 자매님! 계속 말해 봐요!”

 “저, 예수님은 제게 너무 좋으신 분이에요.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저는 늘 그분을 찬양한답니다. 저는 신발을 달라고 석 달 동안 주님께 기도했어요. 그런데, 보세요!”

그러더니 여인은 한 발을 들어 올려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아주 평범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분이 제게 신발을 주셨어요. 할렐루야! 예수님은 아주 고마우신 분이에요.”

그러자 그 우간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나만 멍하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내 평생 신발을 달라고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신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중에 차분한 마음으로 성경에 감사에 관한 구절들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았다. 감사드리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감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임재와 각종 은혜와 임재를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을 다시 읽어보았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어 에베소서 5장 20절도 읽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심오한 교리는 성육신, 속죄설, 또는 신정론 같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전천년설이 어떻고 예정론이 어떻고, 천년왕국이나 천계니 하는 것이 모두 감사 앞에 무색해진다. 감사만큼 심오한 신학적 교리가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곧 무한히 선하시고, 철저히 정의로우시며, 그 능력이 완전하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들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감사야말로 ‘조금 더’ 교를 무찌를 수 있는 무기다.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족하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맨 처음 심어준 생각이 “부족하다”였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아니 명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 뱀의 속임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풍요로움과 보호하심의 은혜를 결핍과 박탈감과 인색함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뱀의 거짓말에 우리가 속아 넘어간 것이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애정과 친구가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것들이 점점 줄어들어 부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조금 더’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인도 우화 하나를 소개한다.

인도 수도승에게 한 제자가 있었는데 스승과 같은 영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애썼다. 제자는 흙으로 지은 작은 움집서 검소하게 살았다. 매일 아침 수도를 마치면 적삼을 빨아 말렸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와 보니 쥐가 옷을 갉아 먹었다. 그는 마을로 가서 옷을 구걸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옷을 주었다. 그런데 쥐가 또 옷을 갉아먹었다. 제자는 고양이를 구했다. 고양이가 쥐를 잡자 이번에는 고양이에게 먹일 우유를 구걸해야 했다. “이 방법으로는 안 되겠는걸. 소를 구해야겠어.” 소를 구하고 나니 소에게 먹일 풀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움막 주변의 땅을 일궈 곡식을 심었다. 농사를 짓느라 명상을 할 시간이 없자, 일꾼을 구했다. 그러나 일꾼들을 돌보는 것에 진력이 나서 이번에는 자기를 도와줄 아내를 얻었다. 제자는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그곳을 지나던 스승이 멈춰 섰다. 흙으로 만든 소박한 움막이 있던 자리에 궁궐 같은 집이 떡 버티고 있는데다가, 주변엔 넓은 논밭이 있고,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제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제자에게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믿지 못하실 것입니다만 제 겉옷을 지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자가 말했다.

제자가 걸린 덫의 의미를 나는 안다. 앞서 단순한 삶을 내세우며 헛간을 지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왜 그것을 지었을까? 내 쇠스랑과 삽과 잔디 깎는 기계와 가스 캔을 지킬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족할 줄 안다는 말은 헛소리일 뿐 단순한 삶이라는 사고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것이 존재한다. 하나는 반이성적 합리주의의 늪이고, 또 하나는 이성의 모래늪이다. 과연 족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족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족하다고 부르는 것이 이 세상 많은 이들에게는 엄청난 사치일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 어느 가난한 마을 여인이 토론토에 있는 한 가정을 방문했다. 다음날 아침 부엌 창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저 집에는 누가 살지요?” 여인이 물었다.

“어느 집 말인가요?”

“저기, 저 집이요.”

“아, 저 집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저건 자동차를 위한 집이거든요.”

방글라데시 여인은 크게 놀라면서 중얼거렸다. “자동차를 위한 집? 자동차를 위한 집이라….”

그 여인이 우리 집 부엌 창으로 정원을 내다봤다면 또 한 번 놀랐을 것이다. “삽을 위한 집? 잔디 깎는 기계를 위한 집이라고?”
 
우리는 무엇이든 넘쳐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옷 한 벌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축적하고 있다. 이런 삶의 방식을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삶의 방식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다. 족하다는 것에 대한 체스터튼(G. K. Chesterton)의 삶의 방식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한 가지에 몰입하여 그것을 계속 쌓아두면 정작 필요한 다른 것에는 소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겐 믿음과 만족과 감사에 집중하는 영적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자기 합리화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이것만으로도 족해. 집도 이 정도 크기가 딱이야. 내 차도 이 정도면 새 차야. 내 재산도 이 정도면 많은 거지. 이만하면 충분히 먹었어. 충분히 가졌어. 뭐가 더 필요하겠어,” 이렇게 말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모든 것이 족하게 보일 것이다.

 

   

아닌 것은 아니다
늘 자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한 여인을 알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헬렌이다. 내가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한다. 헬렌은 내가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내 생각에는 그녀야말로 ‘조금 더’ 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이 교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헬렌의 삶은 극도로 가난해서 넉넉하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을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헬렌은 독일태생이나 그의 가족과 함께 러시아에서 자라면서 기근을 해결해보겠다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십대 초반이었을 때 헬렌은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 다섯 명과 독일로 도망갔다. 언 땅과 진흙 밭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얽혀 있는 가시철망을 뚫고 탈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헬렌의 가족은 그곳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두 아이가 병으로 죽었다. 극심한 기아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바싹 마른 피부에 앙상한 뼈가 튀어나왔다. 나약하고 슬프고 겁에 질린 눈망울, 주위엔 그들의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사진이다.

헬렌의 가족도 헬렌의 뒤를 이어 그곳을 탈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헬렌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냄새나는 가축 운반차에 빼곡하게 실려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됐다. 부모님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헬렌은 독일에서 한 여인의 집에서 일을 했는데, 그 여인은 행여 헬렌이 달아날 궁리를 하면 총으로 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헬렌은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히틀러 정권은 그녀가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전쟁 동안 도랑을 파는 작업장에 그녀를 투입했다. 앙상한 몸에 시골소녀들이 흔히 입는 옷을 걸친 헬렌이 다른 여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그 옆에는 시뻘건 습토 더미가 보인다. 사진 속의 여인들은 모두 삽을 들고 있다. 사진 뒤편엔 경비병들이 서 있다. 여인들은 웃고 있지만 경비병들은 웃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헬렌은 캐나다로 왔다. 캐나다 매니토바에 사는 사촌은 잘나가는 부동산 중계업자였고, 장로였다. 사촌 부부가 헬렌을 데려와서 하녀로 삼았다. 헬렌은 자기의 슬픔은 이제 끝났다고 믿었다. 다만 과거의 기억들을 망각과 용서로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사촌은 그녀에게 강간을 일삼았다. 헬렌이 캐나다까지 오는 비용 모두 사촌 부부가 지불했다. 게다가 헬렌은 아직 영어를 할 줄 몰랐다. 외롭고 두려운 헬렌은 사촌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헬렌은 임신을 했다. 그러자 교회와 사촌가족들은 헬렌과 아기를 내쫓았다.

헬렌은 서부로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해 단란하게 살았다. 몇 년 전 남편이 작은 펜션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그녀에겐 분노를 안고 있을 이유들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헬렌은 감사하다는 말과 충분하다는 말과 생각으로 그것들을 몰아냈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가 즐겨 하는 말로, 새롭게 빚어졌다. 감사의 삶이 그녀의 내면은 물론 외양까지 바꾸어 놓은 것이다.

교회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던 어느 날 혹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헬렌이 벌떡 일어났다. “마크 목사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헬렌, 이야기 해보세요.”

“그날도 화창한 날이었지요. 세차를 하고 있다가 깜빡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지 뭐에요?” 보험일자가 3일 전에 만료된 거예요. 그래서 즉시 시내로 가서 보험을 갱신했답니다. 친구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만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 참 운 좋다.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 경찰에게 걸려 벌금 300달러를 낸 적이 있거든.’”

나는 헬렌의 감사 이야기가 경찰에게 걸리지 않은 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헬렌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제게 300달러를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 생각해 보았답니다. ‘주님, 이 300달러로 뭘 할까요? 그랬더니 ‘교회에 드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300달러를 가져왔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교회에서 제직회를 연 어느 날이었다. 청소년부 전담 목사 청빙 건이 그날 저녁 주요 안건이었다. 교회 재정이 그리 여유롭지 못해서 청소년부 목사가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례를 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헬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헬렌은 73세였고 중년의 딸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촌의 아이였다. 헬렌에게는 손자도 네 명 있었는데, 다들 다른 도시에 살고 있었다. 의붓딸도 둘 있었고 다들 아이가 있었지만 다른 곳에 살고 있어서 우리 교회 청소년부에 나올 상황은 아니었다.

 

   

헬렌이 말했다. “러시아에서 살았을 때 피아노가 너무 갖고 싶었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답니다. 그렇지만 형편이 안 됐습니다. 결혼하고 피아노를 갖게 됐지만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지요. 지난 달에 한 달에 60달러씩 내고 피아노를 배우기로 작정했답니다. 소녀 시절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셈이지요. 레슨 등록을 했습니다.” 말을 잠시 멈추었다.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천천히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 저는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보다 청소년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청소년들이 예수님을 알기 원합니다. 피아노 레슨비를 청소년부 목사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상황이 돌변했다. 교회는 만장일치로 청소년부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듯 늘 족한 것을 알고, 감사가 끊이지 않는 사람은 ‘조금 더’교에 빠지지 않는다.

하나님 대 돼지신
돈은 돈일 뿐 자유를 줄 수 없다. 자유는 돈과는 상반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곧, 자유는 돈을 사랑하기를 거부할 때 얻을 수 있다. 숭배할만한 가치가 없는 ‘조금 더’교에 애착을 갖는 한 자유는 없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 산다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앞서 나는 맘몬에 맞서, 그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덧붙일 것이 있다. 맘몬을 물리치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조금 더’의 유혹을 물리친 다음에는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답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풍성하고 기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소비주의의 가장 큰 악영향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벗어나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를 항상 악한 곳으로 안내한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산과 바다를 만드신 분, 죽은 자를 일으키신 분, 모태에 있을 때부터 우리를 빚으신 분, 우리의 생명을 계수하시는 분, 우리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분, 그 하나님이 “내가 가진 것 모두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구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부엌을 개량하며, 좋은 차를 사면, 유럽여행을 가면 행복할까? 이 모든 것을 한다고 해서 과연 행복할까? 행복이란 것이 그런 식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그런데도 ‘조금 더’교는 행복을 보장하겠다고 떠들어 댄다.

하나님은 스스로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만약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사 22;13; 고전 15:32). 과연 하나님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면서 즐기기만 하는 분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쭙잖은 가짜 신들 특히 인간을 등쳐먹고 뒤통수치기 일쑤인 맘몬과 돼지신과 무엇이 다를까? 결국은 자기 원망으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형편없는 신으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는 「난 쓴 걸 좋아하니까, 그리고 이건 내 심장이니까」(Because It is Bitter, and Because It is My Heart)라는 소설을 썼다. 이 제목은 스티븐 크레인(Stephen Crane)의 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시에서 자기 심장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괴수에게 한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괴수는 “난 쓴 걸 좋아하니까, 그리고 이건 내 심장이니까”라고 대답한다.

오츠는 1950년대 미국 중부 지역에 사는 흑인 소년과 백인 소녀 이야기를 한다. 둘은 사랑에 빠졌는데, 주위의 반응은 모두 적대적이고, 아무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택할 길이라곤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이었다. 또 그 단절 상태에서의 자유라면 자기원한, 자기단절이며, 자기비하, 자기방어, 자기징벌 속을 허우적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조금 더’교가 우리에게 베푸는 유일한 자유도 자기파괴다. 왜냐하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나 자신이요, 고통의 뿌리는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맘몬은 우리를 일부러 해칠 필요가 없다. 맘몬을 숭배하는 사람은 알아서 자신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실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참으로 감사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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