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믿기 위해 의심하다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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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믿기 위해 의심하다 [구독자 전용]
  •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 승인 200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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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에게는 정직한 회의주의가 필요하다

 

도마는 몹시 여위었다. 얼굴은, 팔레스타인의 풍경과도 같이, 딱딱하고 거칠다. 살집 없는 몸에는 뼈대가 앙상하다. 눈에는 기민함과 경계심과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다. 말을 아낀다. 가만히 지켜본다. 귀를 기울인다. 침묵으로, 겹겹이 층이 진 깊은 침묵으로, 도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마의 침묵에는 중국말보다도 더 심한 변화무쌍함이 숨어 있다. 

도마는 의심하는 사람이다. 아니, 의심하는 자의 대표다. 의심하는 자의 수호성자다. 뼈에 살이 붙은 것처럼, 날개에 깃털이 붙은 것처럼, 도마라는 이름 앞에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 ‘의심 많은 사람’을 뜻하는 영어 관용어/편주).

하지만, 성경은 도마를 결코 이런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는 도마가 의심하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 단 한순간이었고, 도마는 이내 의심을 극복했다. 우리는 늘 그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지만, 도마의 인간 됨됨이는, 그가 의심했던 그 순간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도마에게는 감탄할 만한 면모가 많이 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친구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제자들에게 그리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자, 일부 제자들은 반대한다. “거기서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8, 16). 상습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도마가 의심했던 그 순간은 아주 오랫동안 아주 많이 우리에게 위안과 함께 괴로움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순간은 우리 자신의 완고하고 부서지기 쉬운 신앙을, 좀처럼 말을 듣지 않고,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런 우리의 마음을 비춰준다. 그래서 우리는 도마가 의심했던 그 순간만 떠올릴 뿐이며, 도마의 다른 면모는 전혀 보지 못한다.

그 순간은, 단지 하나의 사실일 뿐인데도, 끈질기게 강조되면서 도마에 대한 신화가 되었다. 한 번의 잘못이 그 사람의 성품 전체를 규정하는 특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불행한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도마의 의심에는 의미심장함이 있다. 도마의 의심은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우리를 책망하는 의심이다. 세상의 믿음과 의심, 그 사이에 서 있는 의심이다. 바로 이런 의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정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까?’ ‘예수님은, 정복이라는 말 뜻 그대로, 정말 죽음을 정복하셨을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주장은 간절히 바라다보니 생겨난 착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슬픔으로 인해 동요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들의 순진한 신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을 꾸며낼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도 이렇게 의심하지 않는가? 바로 이렇게 의심하지 않는가?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판하는 것은 학계의 유행이며, 실질 성장 산업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래 왔다. 놀랄 일도 아니고 흥미 있는 현상도 아니다. 하지만, 학자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친애하는 스미스 부인, 꼬박꼬박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하고 신실하고 믿음이 충만하며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진 이 평신도 여성마저도 이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한기를 시시때때 느낀다.

목사인 나는 종종 죽음을 다룬다. 신자들은 죽음―다가오는 자신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비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 신자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자들은 의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도 않는다. 신자들도 슬퍼한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곧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직전에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이처럼,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진실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우리의 삶과 죽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도마의 의심은 또한 우리의 의심이요, 우리의 대적이자 동반자요, 늘 쫓아다니는 우리의 비밀이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 이 말에 핵심이 있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 이 말이 바로 도마의 믿음과 의심 사이에 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개인적 증언과 완벽한 논리와 경험적 증거를 모두 모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지 않는다면, 의심의 그림자는 존재한다. 아무것도, 곧 증인석도, 실험 보고서도, 현장 보고서도, 내가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 가져다줄 확신의 힘을 대체하지 못한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은 의심하는 자의 주문이다.

 

   

나는 성경에서 기적을 읽는다. 나는 오늘날 일어나는 기적의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 가까운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서 간증 시간에 한 여자가 일어섰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기쁨에 차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바로 직전에, 주님은 평생 동안 그녀를 괴롭힌 눈병을 완전히 치료해주셨던 것이다.

나는 이런 기적 기사들을 믿고 싶다. 그런데도, 그러면서도,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 내 안에는 여전히 주저하는 어떤 것이 있다. 어떤 심중 유보, 괴로운 망설임이 있다. 믿음이 있고, 그리고 의심이 있다. 내가 보지 않고는,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도마가 믿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라(요 20:25/편주). “다른 제자들”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 말이다. 도마는 이 제자들이 너무나 마음이 잘 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겪어 알고 있었다. 베드로?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급함과 발 빠르게 도망치는 비겁함을 가진 불안정한 사람이다. 어떤 일에 돌진해서 뛰어들었다가는 제풀에 나자빠진다. 베드로가 ‘예’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행동으로는 ‘아니요’라는 뜻이다. 야고보와 요한? 성급하고 화를 잘 내는 무모한 성품―불운한 사마리아 마을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려고 했던―의 소유자들이다. 천국에서 누가 예수님 옆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 말다툼을 벌였던 속 좁은 라이벌이다. 말은 더듬거리고 당황해서 뒤죽박죽이 된 설익은 증언을 숨도 쉬지 않고 쏟아 놓은 이들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오, 정말?

우리는 회의의 시대가 아니라 경신(輕信)의 시대에 살고 있다. 경신의 시대를 대표하는 표지였던 과학주의 열풍은 식어가고, 신비주의, 비합리주의, 신앙주의―무조건 믿기만 하라―라는 새롭고 기이한 행태가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교회 안에도 퍼져있다. 최근 들어 나는 교회 예배 중에 은니가 금니로 바뀌었다거나, 살갗에 금가루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여러 번 들었다. 그들은 이런 사건들을 기적,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의문을 갖고 있다. 의심한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때로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의 표현이다. 때로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이 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달려 있고 지탱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금니나 금가루를 만들어낸다는 기사에는 향수가 작용하고 있다. 저 옛날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시던 시대에 대한, 마술사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말이다. 도마는 그것을 막는 보루로 서 있다. 이러한 일들이 진짜로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조사하고, 규명하고, 검증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씹어보고 구리인지 진짜 금인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 할지라도, 신학적^성경적으로 명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은 대부분―아마도 전부 다―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쇠도끼가 떠오른 것이나(왕하 6:1-7/편주)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은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는 것만큼 인간적 견지에서 유익한   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분명하게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금니, 증발해버리는 금가루는?

성경적 믿음은 감상적이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모호하지 않다. 그것은 포용하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배제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1999년 6월 14일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복음의 경축”(The Gospel of Jesus Christ: An Evangelical Celebration)에서, 글쓴이들은 하나같이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부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적 믿음은 ‘예’와 ‘아니요’, 멈추어야 할 것과 계속 나아가야 할 것, 믿어야 할 것과 의심해야 할 것의 반복적 리듬을 통해 전진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가진 유산 중에 “비록 아직 보지 못했지만 믿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대표한다. 그러나 도마는 그 반대편, 동일하게 우리 유산의 일부인 “내가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부분을 대표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복음적인 믿음은 그 유산의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에서 이끌어내야만 한다.

 

   

회의주의는 재미있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 철저히 조사하는 것,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자세하게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교회에는 회의주의가 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필요하다.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성경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제가 회의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성경을 믿지 않아요.” 이것은 회의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반(反)회의주의다. 탐구하고 면밀히 조사하고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책임 회피에 대한 변명이나 게으름에 대한 알리바이가 아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회의주의자라면 슬며시 증거에 접근하고, 매복하고, 단서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강바닥을 준설하고, 전화선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덫을 놓는, 사냥꾼이자 탐정이다. 회의주의자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 열정적이다. 진정한 회의주의자는 믿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소원이 일으킬 수도 있는 최면에 빠지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한다. 그래서 그들은 테스트를 한다.

도마는 진정한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불신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건한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의심했다. 그는 의심했고, 그래서 그의 믿음은 소문이나 희망적인 생각 이상의 어떤 것에 기초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의심에는 한계가 있다. 의심은 믿음의 강장제, 정화시키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은 쉽게 상하거나 독성을 갖게 되고, 그래서 건강한 조직을 태워버리거나 변이시킬 수 있다. 의심은 하나님을 붙잡고서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내가 보지 않고는, 내가 만지지 않고는, 내가 경험하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무익하고 헛된 순환으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너무 오래 그것에 탐닉하다보면, 의심은 그저 사교장의 게임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지는 장관을 보았으면서도 믿음을 갖게 되거나 믿음이 충만해지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성경이 이것을 확인해 준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에서 가장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목격했고, 믿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상당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결코 그 기적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지만,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자기네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시작했다(요 11:45-49).

필립 얀시는 기적, 특히 구약에 나오는 기적들은 거의 항상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감보다는 거리감을 낳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그분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지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마이클 오브라이언(Michael O’Brien)의 설득력 있는 소설 「엘리야 신부: 묵시록」(Father Elijah: An Apocalypse, Ignatius Press, 1996)에서, 주인공 엘리야 신부는 자신의 믿음과 의심이라는 미스터리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생각한다. 그의 믿음은 철저한 자기부정과 위험을 감수하는 자기희생의 행위로 그를 이끌어갔다. 그의 믿음은 기적들을 통해 점점 더 강건해졌다.  

하지만 그의 믿음이 강하고 견고한 것만큼이나 그는 또한 절망과 의심의 맹렬한 폭풍에 사로잡힌다. 그의 믿음이 밝고 광대하고 전도유망한 만큼이나 그의 의심은 크고 어둡고 위험하다. 어쩌면 이것은 일반적 원리일 것이다. 의심의 깊이는 대략 믿음의 깊이에 상응한다.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동일하게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이 원리는 그 반대로도 입증된다. 진부하고 얄팍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진부하고 얄팍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깊은 믿음과 깊은 의심을 가진 엘리야 신부의 경우, 그의 의심에는 하나의 깨달음이 따랐다. 그가 자기 영혼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깨달음. 그는 모든 것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활동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그가 받은 위로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아직도 그 옛날 아담의 상처는 또다시 냉혹하게 그를 끌어당겨 이제는 확실성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설명을 집요하게  원했다.

만일 설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곧 그보다 더 큰 것을 찾게 될 것이고, 결국 어떤 설명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의심의 심연을 채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의심의 기본적인 결함은 이것이다. 의심은 실제로 결코 만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증거도 완전히, 결정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의심은 언제나 요구만하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의심은 끊임없이 시끄럽게 대답을 요구하고, 주어지는 어떤 대답도 듣지 않는다. 의심은 증거를 요구하지만, 정작 증거가 주어지면 그것을 의심한다. 그러고 나면 의심은 불량한 욕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 욕망은 채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커진다. 그리스도께서 도마에게 하신 결론적인 말씀은 ‘순전한 믿음’을 추천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축복받는 길이 아니라는 경고였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러면 보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예수님은 도마에게 당신을 보여주신 후에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당연하게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요청받는 것이다. 보는 것으로 믿음의 필요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는다. 보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다.

존 업다이크(John Updike)의 「로저 버전」(Roger’s Version, Knopf, 1986)에서 로저 램버트는 지칠 대로 지치고 타락한 신학 교수다. 로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에 열심인 키가 호리호리하게 크고 진지한 젊은 복음주의자, 데일 콜러와 논쟁을 벌인다. 데일은 과학주의의 허세에 맞서기 위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면 사탄을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저는 데일에게 사탄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데일은 대답한다. “사탄은 의심입니다.”

이 말에 대한 로저의 반응은 상당히 영리하고 동시에 불온하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최근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 시대의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들이나 히틀러를 보면서 정반대로 말하곤 했네. 사탄은 의심의 부재이지.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 폭탄을 감행하게 하고 죽음의 수용소를 세우게 하는 바로 그런 존재라네. 의심은 자네의 저녁 식탁에 웃음을 더해주기도 하겠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만드는 믿음이기도 하지.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사탄이란 의심과 의심의 부재, 둘 다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의심하는 자 로저, 확신하는 자 데일, 두 사람 모두 끔찍하고 불경한 행위를 저지른다. 간음, 근친상간, 낙태.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꿈쩍도 하지 않는 교만을 가지고 있다.

의심과 믿음, 어느 쪽이든 교만과 섞이면, 그 혼합물은 독성을 갖는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자신의 의심을 자랑한다. 둘 다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도마, 그는 참된 의심의 수호 성자다. 도마의 믿음과 의심은 겸손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마의 의심과 그리스도의 대답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도마가 보고 만지고 싶어 했던 것은 결국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부활의 증거로 도마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상처였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로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긴 승리를 증명하신다. 힘을 과시함으로가 아니라, 더 많은 장엄한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서. 못 자국 난 구멍, 창에 찔린 자국으로. 보라,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우리 문화가 상처에 대해서 거북해하면 할수록―죽음을 부정하고, 질병을 감추고, 노인과 약자를 숨기며―우리가 점점 더 부활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상처를 피하면, 의심이 번식한다. 그 반대도 진실이다. 상처를 보고, 상처를 만지면 의심이 사라질 때도 있다.

상처를, 진짜 피와 살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것을 예수님의 상처로 보는 소명을 가졌던 테레사 수녀는 결코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1985년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성서비평 연구 모임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위 여부를 색구슬 투표로 결정했다/편주)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먼저 이래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교의의 역사적 진실성의 진위 여부를 두고 투표하기 전에 먼저 빈민가나 난민 캠프나 무료 급식소에서 적어도 1년은 보내야 할 것이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정직한 의심은, 어떤 것이 진실하고 실제적인 것인지 우리가 그에 대해 지적인 동의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를 믿고 의탁할 수 있는 것이 무언인지 탐색하게 만든다. 도마의 의심은 이러한 자리로 이끌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도마에게 보여주시며 보고 만지라고 말씀하셨다. 도마는 보았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도마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것이 도마가 젠체하는 사람이나 단순히 학문적인 유행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는 실제적인 표지다. 도마는 보았고, 그래서 믿게 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게 되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필립 위브(Philip Wiebe) 박사와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위브는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교의 철학 교수인데, 토리노의 수의를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위브는 토리노 수의가 진짜로 예수님이 입으셨던 수의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주는 고유한 증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아주 세밀하고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그 점을 주장하며, 그의 입장에는 어떤 빈틈이나 편견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수많은 논쟁이 붙은 그 수의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고 한들 어쨌다는 것인가? 그 수의를 실제로 예수님의 수의로 입증할 수 있다고 한들, 섬유에 남은 미세한 그을린 자국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특별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여윈 형상이 찍힌 흔적이라고 해서 어쨌다는 것인가? 다시 말해, 믿음이 증거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종종 해온 것처럼, 믿음을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지 않은 자의적인 감상으로 축소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부활은 단지 새로운 삶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음식 사진을 보여주고 배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단순한 경험주의, 곧 하나의 입증 절차로 격하시키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간다. 거기서 부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나사로를 죽음에서 소생시켜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경고하러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한다(눅 16:30-31).

위브는 내게 예수님의 부활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문을 쓴 어떤 학자 얘기를 했다. 그 논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그때 의식에 어떤 변화가 있던 상태였고, 그래서, 실제로 그들이 본 것은 환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위브는 이 학자와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논쟁이 붙은 것이다.

나는 위브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학자가 증거만 제시되면 믿음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더 나아가, 그가 예배하게 되고, 경외심과 부끄러움과 기쁨에 차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 거라고 기대하십니까?”

위브는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학자의 의심은 정직한 의심이 아니다. 정직한 의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지적인 도그마, 순전히 이론적인 불가지론, 편협한 이데올로기, 학자들의 트리비얼 퍼슈트(Trivial Pursuit, 대중적인 지식이 승패를 판가름하는 보드 게임의 일종/편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두 눈으로 보더라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의심이 아니라면, 나는 언제든 도마와 도마의 의심을 받아들일 것이다. CTK 2009:4

 


마크 뷰캐넌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뉴라이프커뮤니티교회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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