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뚫다 [구독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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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을 뚫다 [구독자 전용]
  • 마크 뷰캐넌 | Mark Buchanan
  • 승인 200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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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교회 지붕도 기꺼이 뜯어내야 한다

 

내가 만나 본 목사들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에게 조금이라도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플로센부르크 수용소 감방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이다.”

내가 아는 목사들 모두가 교회 밖 사람들을 섬기고 축복하고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며 감동적인 설교를 꽤 잘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가 때로는 아주 어렵다.

행동이 신념의 열매라면,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면,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그들이 속한 지역사회를 돌보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지역사회를 돌보지 않는 것을 두고 나는 “지붕 신드롬”(Roof-tile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말을 마가복음 2장에서 만들어냈다. 예수님이 어느 집 안에서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때,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들게 하여 그곳에 온다.

그 사람들은 중풍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무리가 문을 막다시피 늘어서서 들어갈 수가 없다. 무리를 뚫고 예수님께 갈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을 뜯어낸다.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중풍병자 친구를 아래로 내려 보낸다.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도 고쳐주신다. 그리고 물론, 이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논쟁을 벌인다.

지붕 신드롬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만 몰두하여, 교회 밖 사람들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교회 밖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통로가 아니라 장애가 된다.

지붕 신드롬은 부서진 삶을 회복하기보다는 현상유지에만 급급할 때도 나타난다. 부서진 것을 기쁨으로 수리하기보다는 부서졌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하는 것도 지붕 신드롬이다.

교회가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예수님의 용서와 치유도 잘 알지 못하게 된다. 무리 가운데 있던 종교 지도자들이나 집주인이 화를 낼까봐 겁이 나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올 생각을 애당초 하지 않는 것도 지붕 신드롬이다.

내 교회의 프로그램, 내 직분, 내 명성, 내 특권, 내 영향력, 내 안락함을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지붕 신드롬이다. 교회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지옥을 향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호숫가 전원풍의 작은 교회에 설교초청을 받았다. 예배시간보다 30분 정도 빨리 도착했는데 교회문은 아직 잠겨 있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인근 번화가로 들어갔다. 대로와 호수 사이에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지역사회가 후원하는 하프 마라톤 대회 때문이었다. 밴드가 단상에서 연주를 이미 시작했고, 커피 판매대에는 손님들이 넘쳐났다.

마라톤 주자들은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은 현장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교회로 돌아가니 문이 열려 있었다. 문 앞에서 만난 관리집사가 나를 작은 사무실로 안내했다. 기도도 하기 전에, 그는 자기가 몹시 화를 낸 사연부터 꺼냈다. 내용인즉, 금요일에 교회 주차장을 새로 포장했는데, 토요일에 누군가가(짐작컨대 마라톤 대회에 온 사람이) 그곳으로 차를 몰고 들어왔다.

차를 돌리다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바닥을 건드려 자국이 생겼다. 주일 저녁 긴급 제직회의가 소집됐고, 교회는 예비재정(은행잔고가 5만 달러가 넘었다)으로 교회 주차장 입구에 체인을 설치해 더 이상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로 결정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날 설교본문을 마가복음 2장으로 하기로 맘먹었다. 강단에 올라가 본문을 읽은 다음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이 뜯어내야 할 교회 지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교회의 지붕에 외부 사람들이 구멍을 뚫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 밖에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기꺼이 그 손실을 감수하시겠습니까?”

아무런 반응 없었다. 다들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내 설교가 장송곡처럼 들렸나보다. 나는 예배가 끝나고 그렇게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교인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밖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가하려고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

그렇지만, 나 역시 이 교훈에 관심을 기울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우리 교회로 돌아와서는 (늘 하던 대로) 우리 교회 지붕을 지키는 내 업무에 전념했다. 그것도, 우리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 이야기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우리 교회가 밤새 몽땅 부서질 수도 있다. 그리고 지역사회는 우리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이 교회는 뭣하러 염려하겠는가?

우리 교회는 우리끼리 모여 바리케이드를 친 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쁨에 빠져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뼛속 깊이 스며들고 가슴을 울리는 예수님의 용서는 알지 못했다.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라운 예수님의 치유는 더더욱 몰랐다. 우리는 성가신 일을 회피했고, 예수님의 용서와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나 자신부터 바꾸기 시작했다. 내 말과 행동을 조금씩 서서히 바꾸었다. 그러자 교인들의 말과 행실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우리 모두가 교회 밖 사람들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던 것을 회개하고 있다. 그리고 지붕을 뜯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훈련을 쌓고 있다.

훈련은 이렇다.

우리는 먼저 우리 지역사회에 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1.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 기분이 좋아질까’가 아니다.)

2. 그들이 이미 잘 하고 있어서 우리가 칭찬하고 감사할 일은 무엇일까? (그들이 잘못하고 있어서 우리가 반대하고 비판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지니, 얼핏 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던 두 그룹이 눈에 들어왔다. 저소득 가정(대부분 싱글맘)과 선주민(First Nations, 캐나다 원주민, 즉 캐나다 인디언)이 그들이다.

온갖 이유로(적어도 아직까지는 비싸지 않은 집값과 임대료, 연중 온화한 날씨, 수월한 의료 서비스 등), 우리 지역사회는 싱글맘과 저소득 가정에 무관심했다.

몇 년 전, 갑자기 슬픔을 당한 한 여인이 우리 교회에 왔다. 결혼하고 새집도 장만하고, 멋진 휴가도 즐기며 걱정 없이 살았던 그녀는 이혼을 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지하 쪽방에서 살면서 교회 올 때 기름 값이 없어서 걱정할 정도가 됐다.

그녀는 하루 종일 일했고, 딸을 집에 데려온 다음에는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쪼개 식사를 준비했고, 집안 살림도 했고, 공과금도 납부했고, 수도꼭지도 고쳤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모두 한 것이다. 그녀는 잠을 충분히 잔 적도 없고, 시간을 충분히 가진 적도 없고, 돈도 부족했다.

물론 지금은 재혼을 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둘째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힘들었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구멍 난 지붕을 고치듯 교회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지역사회를 돕고 축복하는 일을 하겠냐고 교인들에게 물었을 때, 그녀―아직 싱글맘이었을 때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혼하기 전에는 개학과 성탄절이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시기였는데, 싱글맘이 되고부터는 가장 끔찍한 때로 변했다고 말했다.

새 학기를 시작하는 딸을 위해 새 신발이나, 가방, 바지 같은 것들을 사줄 수 없었다. 성탄절 선물로 새 자전거나 인형, 옷도 사줄 수 없었다. 심지어는 머리 자를 돈도, 자동차 유지비도 없었다. 

그녀의 제안으로 우리 교회는 점프스타트(JumpStart)라고 이름 붙인 행사를 시작했다. 시기는 개학 무렵으로 정했다. 새 물건 또는 새 물건이나 다름없는 옷과 신발을 크기별로 준비해 가게를 열렸다.

교인들 가운데 기술자를 동원하고 동네 자동차 부품업체들과도 거래를 맺었다. 자녀들이 쇼핑을 하고 교회 미용사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자르는 동안에, 기술자들은 각 가정의 자동차를 손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마다 학교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가득 담은 새 가방을 메고 돌아갔다.

우리는 이 일을 3년 째 하고 있다.

재정 낭비가 아니냐며 마치 뚫린 지붕 수리비가 아깝다는 듯 불만을 터뜨리는 교인도 매번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용서와 치유를 맛보게 되었다.

지난해 우리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점프스타트’를 시작했다. 공짜 가게를 두 개 열었다. 하나는 부모를 위한 선물 가게였고, 또 하나는 자녀를 위한 선물 가게였다. 우리는 선물을 직접 포장했다. 생음악과 맛난 음식을 곁들인 점심도 대접했다.

이 행사를 할 때마다 내가 교인들에게 즐겨하는 설교가 있는데, 몇 가지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목소리요 손이요 발이요 눈이요 심장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다면, 여러분을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단순한 섬김 이상의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삶과 환경이 그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그들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오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옷이나 새 책가방이나 자동차 오일 교환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예 아무것도 주지 않느니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손으로 모든 선물을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그들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를 빼앗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그 한 가지는 존엄성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과 사랑받을 만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들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과 그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주더라도 그들에게 존귀함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입니다.”
 


내 이웃이 바로 제3세계

저소득 가정의 다수를 차지하는 또 다른 그룹은 선주민이다.

2005년 여름,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뒤흔드셨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 행동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사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배를 타면, 요나가 당했던 것처럼, 폭풍과 바다괴물을 만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하고 니느웨로 향했다.

니느웨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발견한 니느웨는 내 이웃에 있는 제3세계였다.

나는, 겸손하고 고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우리를 증오해야 마땅하지만 증오하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들의 땅을 훔쳤다(말 그대로다. 우리 지역사회 안의 모든 땅을 우리는 1862년에 원주민들에게서 빼앗았다. 보상을 약속했지만, 그들이 보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는 그들의 말과 문화를 빼앗았다. 그들의 춤과 노래와 축제와 전통 의상을 금지했다. 우리는 그들의 아이들을 빼앗았다. 강제로 아이들을 가족에게서 떼어내 기숙학교로 보냈다. 그 아이들은 기숙학교에서 성적으로, 언어적으로, 신체적으로 학대당했다. 회초리를 들고 그 아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를 증오하지 않는다.

만일 이 지역사회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선주민 이웃의 미래를 개선하는 변화라면, 그것으로도 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가 증인이 되고, 돕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며, 우리는 지금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와 (나를 강사로 초대하는) 다른 교회들에게 이렇게 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셨으니 마음을 열어 선주민들에게 사랑을 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힘을 변화를 일으키는 데 사용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기회들을 만들고 있다.

일 년이 막 지났을 무렵, 우리는 우리 지역사회의 교회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선주민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함, 두려움과 편견, 본심을 감춘 의례적인 기도나 경건한 말투에서 벗어나,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을 정말 사랑하고 섬기고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열망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지 무척 기대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는 지붕을 통째라도 기꺼이 뜯어낼 것이다.

 


기마경찰대에 감사하기

우리가 던지고 있는 두 번째 질문은 “지역사회가 잘하고 있어서 우리가 칭찬하고 감사할 일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을 하면서 우리는 역시 두 그룹을 발견했다.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대와 교사들이다. 이 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보수도 많은 편이 아니고, 맡은 일에 힘쓰고 있지만, 곤욕을 치를 때가 종종 있다. 칭찬보다는 비난을 받을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대는 빨간색 제복과 챙이 넓은 스테트슨 모자, 말에 올라탄 모습으로 유명한 캐나다 연방 경찰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기념 의상일 뿐이고, 실제 일터에서 그런 옷차림을 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기마경찰대의 아이콘은 여전히 활기차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기마경찰대의 현실은 전혀 활기차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우리 지역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원 중 한 사람이 공무 중에 실수를 하거나 죽었을 때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스캔들이나 사고가 있어야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보일 뿐, 다른 때는 무관심한 것이다.

기마경찰대 군종이 우리 교회에 다닌다. 그와 함께 기마경찰대에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감사를 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그해 여름 기마경찰 본부에서 금요일마다 바비큐 파티를 하기로 했다.

처음 파티를 열었을 때는 지친 경관들이 다가와서 버거를 집어 들고 말을 아낀 채 재빨리 먹고는 금세 자리를 떴다. 그러나 여러 차례 하다 보니 분위기가 조금씩 나아졌다. 대원들이 모두 왔다. 비번인 경관도 들러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

바비큐 파티의 분위기가 바뀌게 된 것은 우리가 그 일을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난해에 기마경찰대 부부를 함께 초청한 것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교회 재정 담당자를 불러서 이 일을 당장 시행하기 위해서는 몇 천 달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즉시 돈을 마련했고, 우리는 기마경찰대와 함께 팀을 짜서 이 행사를 구상했다.

우리는 지역 목회자들도 모두 파티에 초대하여 함께 봉사했다. 바비큐 파티가 다 끝난 뒤에는 우리끼리 프라임 립과 크림 포테이토와 맛있는 애플파이를 먹으며 또 다른 파티를 벌였다.

우리 교회에는 드라마 팀이 있는데, 기마경찰대의 역사를 압축하여 재미있게 보여주었다. 기마경찰대의 어느 부부 인터뷰도 녹화해서 보여주었다.

이혼 경력(경찰의 이혼율은 매우 높다)이 있지만 상대방에 대한 신뢰로 결혼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는 이야기였다. 기마경찰대원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 쇼도 보여주었다.

내가 하고 싶은 설교가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하면서 파티를 마무리했다. 내가 그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방법은 주후 1세기의 경찰이라 할 수 있는 로마 군인들과 그들을 비교하여 설교한 것이었다.

“예수님도 그분을 찾아오는 종교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면 시장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만나 식사를 하신 예수님도 백부장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로마 시대 백부장에 해당하는 여러분이 이렇게 저희를 만나주시니 감사합니다.”

설교를 마치고는 그들의 양해를 구한 뒤에 전 대원을 대신하여 군종을 앞으로 나오게 해서 함께 기도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계의 빛을 띠고 연신 미심쩍어하던 대원들도 기쁨을 누리고 자신들의 소명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다음 날 군종이 증언하기를, 경찰대원들이 하루 종일 바비큐 파티와 교회 이야기만 했다고 했다.

 


교사들에게도

그 다음에는 우리 지역 공립학교 교사들을 위해서도 동일한 행사를 계획했다. 지역사회에서 경찰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또 다른 그룹이 바로 교사들이다. 그러나 갈수록 교사에게 감사하는 사람보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교사 부부를 위해 파티를 여는 한편으로 우리는 매주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돕고 감사하는 습관을 갖도록 학부모들을 독려했다.

파티를 열면서 보여준 열성과 정성 때문에, 우리 교회는 물론 학교에 대한 신임도 깊어졌다. 최근 나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강사”로 지역 내 두 개 학교에 강사로 초빙을 받았다. 이 지역 전체 교사들에게 직업 연수 강의를 할 기회도 얻을 것 같다. 강의를 할 때, 나는 그들에게 내 깊은 신앙을 숨기지도 않을 것이나 그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축복하고 신뢰하는 데 주력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눅 10:5-7 참조) 복음이 뿌리 내리고 잘 자랄 것이다.

최근 나는 요나서 1장과 사도행전 27장과 28장을 비교하며 함께 읽었다. 두 이야기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이방인들과 함께 배를 탄 장면이 등장한다. 또 두 사람 모두 큰 폭풍을 만난다. 선원들 모두가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기 위해 짐을 배 밖으로 던진다. 두 이야기의 유사점은 여기까지다. 요나가 배에 타고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방인 선원들 앞에서, 요나는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면서 그들을 경멸한다. 결국, 이방인들이 폭풍 속에서 살아날 유일한 길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 사람을 배 밖으로 던져버렸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다르다. 사도 바울이 배에 타고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손종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죄수지만 천상의 천사다. 선원들이 두려움에 질려 있을 때 바울은 지혜롭고 겸손하게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결국, 이방인들은 폭풍 속에서 살아날 유일한 길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우리는, 폭풍을 만나 파선 직전에 있는 우리 지역사회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할수록―그리고 우리가 허세를 부리지 않을수록, 그들을 비난하지 않을수록, 우리가 그들을 더 축복하고 섬길수록―그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배를 운항하도록 맡긴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우리는 요즘, 매주 싱글맘과 그들의 자녀들, 선주민과 그들의 가족들, 기마경찰대와 그들의 가족들, 공립학교 교사와 그들의 가족들이 점점 더 많이 우리 교회의 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본다.

교회 지붕이 망가지더라도 모두 받아들이고 싶은 이들 아닌가. CTK 2009:5

 


마크 뷰캐넌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뉴라이프커뮤니티교회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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